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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드래곤볼' 이후, 소년만화는 어떤 길을 택했는가 (2)
만화는 흐른다 05/03/27 04:25 깜악귀
- 2화 : 소년만화, 드라마의 폐기와 복원



1. 소년만화의 '열혈'과 '투지'를 폐기한 [드래곤볼]

(전편에 이어) [드래곤볼]의 후반부는 사실 괴물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만화는 일본 소년만화의 핵심요소였던 '열혈'과 '투지'와 같은 정서를 폐물 취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째서 그런가? 손오공은 매우 투쟁적으로 싸우지 않는가?

아니다. [드래곤볼]의 캐릭터들은 매우 '뜨겁게' 싸우는 듯 하지만 겉폼에 불과하다. "적이 나보다 강하면 충분히 수련한 다음에 싸워야지"라는, 기존의 학원 격투물 캐릭터가 본다면 비겁하다고 매도할 만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셈이다. 한 두 캐릭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손오공부터 베지터까지 '우리는 오직 이기는 싸움만 한다'라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막상 싸움이 붙으면 투지 따위는 중요치 않다. 전투력이 센 놈이 이긴다. 그러면, 그 둘 사이에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은 있나? 없다. 그냥 적에 대한 설정은 "사이보그이며, 지구를 파괴하려 한다"라는 정도에 불과하다. 결국은 "싸울 이유가 있는 강한 적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사상적인/정서적인 차원에서 [드래곤볼]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밀도가 없다. 이러한 증세가 만화의 초반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투력이 상승할수록 그 증상은 심화, 투지도 사상도, 힘의 개성도 없는 앙상한 만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드래곤볼]은 열혈과 투지에서 나오는 '드라마'를 폐기했다. 동시에 그 자리에 전투력과 전투 그 자체를 즐기고 감상하는 감각을 비대화했다. 물론 이는 소년만화의 특성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강화한 결과이다. 그리고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는 것 자체가 기존 소년만화의 드라마가 수행했던 기능을 대체하느 것이다. 전편에서 이야기한 바, 스카우터'는 여기에 전투력에 대해 손에 잡힐 듯이 강력한 개연성을 부여했다. 이제 독자들은 손 안에 놓인 카드의 수치를 비교하듯이 캐릭터들을 비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이후의 소년만화들은 전투력 수치가 기입된 카드를 서로 내밀어서 이긴 쪽이 진 쪽의 카드를 가져가는 소년들의 카드배틀과 성격이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전투의 비대화와 전투력의 수량화가 결국 전투력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말았다는 것 역시 전편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오직 전투력의 상승만이 드라마틱했기 때문에 그것에 의존하게 되었고 결국 전투를 빼고 나면 모든 것이 앙상해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말하면, [드래곤볼]은 '전투력의 증가와 전투'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소년만화는 재미있다는 것을 증명한 만화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해내면서 그 부동의 공식을 제시한 것이다.

'드라마'와 '전투', 이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이후 만화들의 과제가 된다.


2. 학원 격투물과의 비교

[드래곤볼] 이전부터 존재했던 소년만화의 장르를 살펴보자. 현재에도 여전히 소년만화의 핵심부를 이루는 '학원 격투물'이라는 장르를 발견할 수 있다. 학원 격투물은 캐릭터 하나하나와 그 캐릭터를 둘러싼 드라마를 중요시하는 속성이 있다.

어떠한 장르에서든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키기 위해서는, 주인공 일행에게(독자에게) 그 힘을 데몬스트레이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인공 일행을(독자를) 긴장상태로 몰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나름의 갈등과 수행이 있고, 전투에 승리하여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는 것이 기본적인 플롯인 것이다.

[드래곤볼] 같으면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다.

-   으흐흐, 나의 파워는 120000이다.

-   (주인공 일동) 오오옷!


극단적으로 말해서, 두 컷이면 끝이다. 그러나 학원 격투물의 경우, 이것만으로도 잡지 연재분 한 두 회는 소비한다. 새로 등장한 적을 선보이는데 있어서 주인공이 이전에 매우 힘겹게 이겼던 캐릭터를 밑거름으로 쓰곤 한다.

비록 전편에서 주인공에게 패하긴 했지만 주인공과 동급의 능력을 지녔음이 확실한 적이 있다. 새로 등장한 적이 그 '동급의 적'을 가볍게 해치우는 장면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상대의 힘과 잔인성은 명백하게 주인공 이상! 쿠쿵.

학원 격투물은 여기에서 또 그냥 전투에 돌입하진 않는다. 강한 적이 나타났고 주인공은 자신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방황하는 주인공. 그러나 결국 자신이 싸울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혹은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싸움에 임한다.

싸울 때는 그냥 싸우는가? 그렇지 않다. [짱]이든 [캠퍼스 블루스(로쿠데나시 블루스)]든 펼쳐보라. 싸우면서 끊임없이 쫑알댄다. 맞으면서 때리면서, 돌려차기를 하면서, 상대를 백드롭 하면서, 백드롭 당하면서 대화한다. 자신이 왜 이겨야만 하는지, 왜 내가 너를 때려야 하는지, 왜 내가 져서는 안 되는지 헉헉거리면서 설명한다. 말 좀 안 하고 싸우면 한 대라도 더 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결국 이겨야 할 이유가 보다 절실한 자가 이기게 된다. 즉, 이 경우에 힘이란 존재감이며, 싸움은 그 커뮤니케이션이다. 싸움에서 승리한 자는 커뮤니케이션에서도 승리한 셈이다.

싸움이 끝나면? 패배한 상대라도 멋있게 떠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언제라도 다시 등장할 수 있다. 이미 충분히 멋있게 등장해서 강한 인상을 남긴 캐릭터이고 그 캐릭터를 둘러싼 드라마도 독자들의 심금을 남긴 이후이다. 그러니 우리의 주인공도 맑은 눈빛으로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더 강한 적의 등장에 데몬스트레이션 샌드백으로 쓰일 것이다.)

드라마, 격투, 진한 감동.

이렇게 쓰고 보니 '학원 격투물'은 [드래곤볼]에서 빠진 요소를 모두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다시 이 쪽으로 돌아가면 되겠군! 실제로 명백히 [드래곤볼]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유유백서]가 초반부에 학원 격투물의 외양을 띠고 있었다는 것은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그것은 나름대로 이유 있는 차별화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캐릭터 하나하나를 너무 중시하므로 다양한 전투를 전개해보이는데 장애가 되곤 한다. 새로운 적 캐릭터를 하나 등장시키는 것도 용이하지가 않다. 따라서 비약적인 전투력 상승을 자주 선보이기도 어렵다. 즉, 다양한 캐릭터를 압축해서 제시하고 긴급하게 전투로 몰고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드래곤볼] 이후 소년만화는 전투를 개시하는데 보다 간편한 구실을 요하는 방향으로 이미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의 소년 만화에서 전투는 '카드 게임 배틀'과 같은 간편한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그것이 가장 압축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천하제일 무도회'로 대표되는 일련의 무술대회 형식의 빈번한 등장일 터다. 어쨌거나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재미있으므로.

그러나 아무래도 투지, 드라마가 빠진 빈자리는 매우 뼈아프다. 더구나 전투력을 보이는 것만으로는 [드래곤볼]의 선례 그대로다. 아니, 따라하는 것이므로 그보다 월등 못하다.

따라서 몇 가지 장치가 마련되었다. 일단, 힘의 수량화 까지는 아니지만 측정 혹은 평가 가능한 '등급제'를 채택했다는 것을 전편에서 언급했다. 결국 힘의 비교는 충분하게, 그러나 절대적이진 않게 측량되고 제시된다. 여기에서 핵심은,현재 주인공 일행이 그 세계 속에서 어느 정도의 파워수준인지 독자로 하여금 언제나 알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힘의 측정'이 나 '등급'이 그,자체가 작품에서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더라도 이것만은 대체로 지켜지고 있는 원칙이라 할 것이다.

[원피스]에서는 '현상금'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이것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 현상금은 해적들의 등급을 나누는 기준이고 동시에 '명성'의 역할을 한다. 주인공 일행의 현상금이 오르는 것은 주인공 일행이 그 세계 속에서 어느 만큼의 위치인지를 말해주는데 굉장히 강력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공 일행이 고난을 겪으면서도 계속 나아가야 하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유를 이미 그 안에 제시하고 있다.

[블리치]의 경우 '백화'라든가 '순홍'이라든가 하는 '힘의 단계'를 정해놓고 있다. 즉, 일종의 '깨닫음'을 얻어야만 이후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방식이다. 역동적인 전투 중간에 정적인 깨닫음을 배치하는 이 방식은, 정적이면서 긴장감 있는, '순간'을 잡아내는 작품의 액션연출에 상당히 효과적으로 부합한다. [블리치]는 보조적으로 '대장급', '부대장급'과 같은 적의 등급을 사용한다.

[나루토]의 경우, '상급닌자', '중급닌자'와 같은 개념이 사용되었다. [헌터x헌터]와 같은 만화도 끊임없이 그 세계 속에서 주인공 일행이 어느 정도의 '강함'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결국 이 '힘의 측정' 장치를 무엇으로 두느냐 하나만 보아도 드라마와 전투에서 작품이 목표로 하는 재미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드러나는 셈이다. '스카우터'의 유산인 힘의 측정 장치는 이제 작품 내의 드라마를 강화하는 장치로서의 역할도 맡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공적인 장치 외에 이후의 소년만화가 '드라마'와 '전투의 중시'라는 상충하는 두 방향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취한 절충안은 대체로 아래와 같은 방향이라고 생각된다.

1. 전투 그 자체에는 드라마를 비교적 개입시키지 않는다. 드라마가 있더라도 심플하고 알기 쉬운 것.

2. 세계의 설정 그 자체에 상상력과 특이성을 풍부하게 도입한다. 일련의 전투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전후 맥락에 공을 많이 들인다.



3. [원피스] - 드라마의 복원, 다양한 서브 플롯의 활용

'드라마의 재도입' 현상은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일단 가장 특이한 사례는 [바람의 검심]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등장할 때부터 최강이다. 단, 그는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역날검'(칼날과 칼등이 뒤집어진 검)을 사용한다. 스스로 힘을 제약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전투에 극적인 드라마를 부여했다. 전투할 때마다 독자들은 발도제(히무라 켄신)이 최강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항상 수세에 몰리는 이유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더이상 죽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투에 특이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고 갖가지 사연이 엉켜든다. 더구나 이 작품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역사는 그 자체로 드라마가 넘치는 시기다. 신선조를 등장시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등장시킬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만화는 드라마의 재도입의 사례로는 예외적인데, '이미 너무 많이 싸워서 더이상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 주인공이라는 설정은 소년적이라기 보다는 성인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면모가 가장 잘, 성공적으로 드러난 것은 그의 유신지사로서의 과거가 드러나는 '추억편'일 것이다.

그러니 '힘의 측정' 같은 것도 굳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갖가지 필살기의 등장이나 적 캐릭터의 등장, 그리고 주인공의 제자인 '야히'의 존재 등이 이 만화를 겨우 소년만화의 틀 안에 묶어 놓았던 것이다.

예외적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인기는 소년만화에서 드라마의 중요성을 증명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은 드라마와 함께 전투의 배경설정의 특이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각인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힘에 대한 감동'에 새로운 차원을 부과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 전투는 내적으로 심플하게, 전투의 외적 맥락은 흥미롭고 드라마틱한 것이 절충적인 밸런스가 된다. 그래서 구호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의 큰 드라마, 많은 전투.

그래그래, [드래곤볼], 나메크 성 전투처럼 말이다. 이 부문에서 하나의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은 [원피스]일 것이다. 아마도 '포스트 드래곤볼' 시기의 드라마적 요소에서 가장 탁월하게 성공한 사례일 것이다. [나루토]와 함께 [원피스]는 소년만화의 '뜨거운 드라마'라는 요소를 복원한다. 바로 '열혈', '모험', '투지', '우정' 같은 구닥다리들 말이다.

이 두 만화 모두에서 '전투'는 '싸워야 하는 이유'로서 지탱되고 있다. 서로 대립하는 이유를 가진 두 집단, 개인이 서로의 올바름을 증명하기 위해 격돌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원피스]에 한정해서 다루자면 [원피스]의 가장 큰 장점은 이러한 드라마가 작품의 세계관과 완전한 합일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 만화를 '일본소년만화판 걸리버 여행기'라고 부르곤 하는데 [원피스]의 세계는 그만큼이나 큰 스케일의 환상성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은 환상의 요소로 가득찬 이 세계에서 '최고의 해적'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수한 모험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의 중심이 되는 갈등이다. 이러한 '중심 갈등' 혹은 '상위 플롯' 아래에 '서브 플롯'이 무한하게 가지를 치며 배치되어 있다.

주인공이 도착하는 섬 하나 하나가 서로 완전히 차별화된 논리의 세계에 가깝다. 자칫하면 서로 하나의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개연성이 없을 지경이다. 1주일 전에는 거인 바이킹이 사는 섬에 있었는데 그 다음주에는 하늘에 섬이 있다는 말을 듣고 하늘섬 탐험에 나선다. 하늘섬에는 날개가 달린 천사들이 살고 있고, '신'의 억압적인 지배 하에 억눌려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만화의 놀라움은 이러한 광대한 세계의 설정을 배경으로 작품 전체에 걸쳐 뿌리를 뻗고 있는 서브 플롯 하나하나의 호흡이다. 예를 들어 캐릭터 중 우솝은 27권에서 어떤 그림자가 고장난 배를 고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기절한다. 그 그림자가 누구였는지가 캐릭터들 사이에서 잠깐 논의되지만 곧 다른 이야기에 치여서 사라진다. 이것이 누구였는가에 대해서 밝혀지는 것은 무려 37권이다. 10권의 격차를 두고 복잡한 가지의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것은 매우 용감한 시도이다.

[원피스]에서는 이런 식으로 해결되지 않은 플롯이 여전히 잔뜩 제시되어 있다. 예를 들어 루피의 형인 에이스가 쫏고 있는 '검은 수염'은 아직 누구인지도 제대로 제시되지 않은 상태이다. 우리는 그가 루피를 쫏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의 가운데 이름글자는 'D'로서 루피나 루피의 형과 같다. 그런데 독자들은 아직도 그 가운데 이름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도와준 건 좋은데 넌 누구냐고

아니면 11권에서 루피의 탈출을 도와준 '드래곤'이라는 캐릭터는 이후 누군가의 회상 장면에서 '혁명가'라는 정보가 잠시 언급되며 스쳐지나갈 뿐이다. 독자는 아직도 그가 누구인지 모른 채로 단서만을 접했을 뿐이다.

이러한 종류의 복잡다기함은 다른 만화에서라면 만화를 자칫 산만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 더구나 몇 년에 걸쳐 연재되는 만화가 아닌가. 앞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독자가 많지 않을 것이다.

[원피스]는 이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가? 그것은 '중심 모험' 그 자체는 매우 명확하고 흔들릴 우려가 없도록 확고히 심플하게 제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심플하고 확고하냐면 주인공들의 항해의 목적이 되고 있는 '원피스' 그 자체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닐 정도다. 그것은 일종의 '로망'일 뿐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독자들은 '원피스의 정체'가 일종의 미스터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작품 캐릭터 중 누구도 그것의 정체에 대해 궁굼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 그보다는 마치 히치콕의 '맥거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제시되는 것만으로도 플롯이 진행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별로 없는 것이다.

- 그것을 얻는다는 것은 최고의 해적이 된다는 뜻이래.

- 그럼 되어야지!

단순 명쾌한 정서다. 비교하자면 [블리치]와 같이 "친구를 구하려 하는데 친구는 구해지길 원치 않는 것 같다"는, 이미 그 안에 복잡한 모순을 내재한 것이라면 중심 갈등 자체에 집중해서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블리치]에서 "누가 루키아를 죽이려 하는가"는 명백한 미스터리이다. 이런 구조에서 하위적인 이야기를 지나치게 풍부하게 하려고 하면 자멸하고 만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는 복잡해도 결국 미스터리 하나로 수렴된다. 하나가 풀리면 나머지도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심갈등이 확고하지만 풍부하진 않은 것이라면 하위적인 것을 풍부하게 전개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주인공의 목표는 명확하고 세계는 무한하며 - 비밀에 가득 차 있다. 10권 전에 제시된 수수께끼가 지금에서야 풀려도, 앞에 잔뜩 나왔던 존재감 가득한 캐릭터가 누구인지 몇 년을 구독하고 있는 독자로서도 예측 불가일 정도로 - 주인공 일행이 항해하는 '위대한 항로'는 광대한 것이다.

[원피스]는 '드라마의 성공적인 귀환'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니 동시에 이는 매우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다. 10권에 걸쳐야 제시되는 종류의 하위 플롯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은, 결국 독자로 하여금 흥미를 잃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은 '작가 자신도 정확하게 모르는' 무책임한 설정을 흘려대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무책임하게 제시된 플롯이 아니라면, 그리고 작품 자체의 동력이 매력적이라면 성공할 수 있는, 멋진 시도이기도 하다. 즉 이 만화는 세계 속의 무수한 이야기들이 이미 짜여져 있고 독자는 그 중에 일부를 보고 있는 셈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주인공은 걸리버이지만 실질적인 주인공은 걸리버가 여행하는 세계일 것이다. [원피스]에서도 비슷한 맥락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주인공들이 항해는 '위대한 항로'의 7개 항로 중 하나를 선택한 것에 불과하다.

[원피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무한한 바다'를 탐험해 간다는 기분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가 복잡다기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세계를 하나로 묶어주는 여러가지 장치들에 있기도 하다. '현상금'은 거의 어디에서나 통하고 다른 해적들과의 갈등도 어디에서나 제시된다. 현상금이 높아지면 다른 해적과의 긴장감도 높아지기 때문에 갈등이 상승한다. 그리고 그에 개입하는 해군 본부와 세계정부가 기본 세력구도로 유지된다. 따라서 하위 플롯이 상당히 많이 제시되더라도 이러한 기본적인 맥락은 강하게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더하여 독자는 다양한 플롯을 접하며 이 만화에 제시된 이 세계를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 잡히게 되는데, 이것은 주인공 및 그 일행의 심리와 정확하게 일치하게 된다. 이러한 일체감도 작품을 일관성 있게 고정해주는 '누름돌'의 역할을 해준다.

물론 또 하나 중요한 '누름돌'은 '악마의 열매'를 먹은 다양한 능력자의 등장이다. 주인공이 한 세계에서 영 딴판인 다른 세계로 돌입하더라도, 이를테면 '하늘나라'로 가더라도 이러한 능력자의 출현은 변하지 않는다. 독자는 궁굼하다. '악마의 열매' 능력자는 얼마나 더 있는 걸까? 아마 무한히 더 있을 것이다. 이 세계는 "우리는 아직 이 세계의 절반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기분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다. 독자들은 작가의 상상력과 기분 좋은 승부를 하고 있다.


4. 소년만화는 진화한다.

이 만화를 필자가 '일본 소년만화 버전의 걸리버 여행기'라고 언급했는데 [드래곤볼]이 '일본 소년만화 버전의 서유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이러한 '환상 세계 속 유랑'은 꽤나 정통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주인공은 '몽키 D. 루피'이며 즉 원숭이를 연상케 하는데 손오공은 이미 원숭이다. (사실 [나루토]와 [헌터x헌터]의 주인공도 일단 원숭이과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루피가 고무인간이고 그의 팔이 굉장한 길이로 늘어난다는 설정은 어떤가. 그러니까 그는 손오공의 무기인 '늘어나는 여의봉' 대신 늘어나는 팔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 연출의 측면에서도 우리는 팔이 늘어나는 장면에서 '에너르기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좌 : 원피스 | 우 : 드래곤볼)

[원피스]에 등장하는 신기한 세계라는 개념은 '과잉된 스케일의 현실감'을 훌륭히 제시하는 연출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즉, 대단히 큰 인간을 제시하는 연출이나 굉장히 큰 물고기를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서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설득력과도 관계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기한 세계의 개념은 거대한 공룡과 물건을 초소형으로 보관하는 호이포이 캡슐이 공존하는 [드래곤볼] 초기 세계관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좌 : 원피스 | 우 : 드래곤볼)

결국 [원피스]는 [드래곤볼]의 초기를 '뜨거운 드라마'를 도입하여 변형하고 확장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단순한 변용이 아닌 뚜렷하게 독립된 작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역량이라도 해도 좋을 것이다. 소년만화는 맨날 쌈박질만 하는 것 같아도 어쨌거나 진화하고 있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도 상당한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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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뭐하는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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