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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퍼플하트'/강경옥 - 강경옥, 90년대의 프로토 하-트를 제공하다
여성만화프로젝트 - NO.02 04/05/08 07:20 두고보자

[퍼플하트](미완) / 강경옥
연재 : 미르(월간), 케이크(격주간) 2002
단행본 : 시공사(1-2) 1992-??  



80년대의 순정만화작가군의 흐름을 일련의 스펙트럼에 놓고 바라본다면, 8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대하순정 계열의 작가들의(황미나, 김혜린) 데뷔가 눈에 뜨인다. 이어서 85년 전후에는 대하물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지만 실제 역사 보다는 SF/환타지 등의 변형을 가미하는 작가들이 등장한다. 김진과 강경옥, 신일숙이 그러하다. 86년에는 명백히 차세대라고 할 만한 이미라와 원수연이 등장하는데, 대하물보다는 사건이 끊임없이 일러나는 로맨스 중심으로서, 명확하게 80년대 중반에 결성되기 시작한 순정만화 창작 동호회 작가들로서의 흐름을 보여준다.

80년대 작가들이 보여주는 흐름의 변화와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를 90년대와 구별짓는 점은 아마도 외부의 사건이 캐릭터를 지배하느냐, 캐릭터의 심리상태가 외부의 사건을 규정하고 재단하느냐일 것이다. 80년대는 전자의 흐름이 두드러진다는 뜻이다. 대하물(혹은 대하순정물)의 정서적인 핵심은 "시대 속에서 개인은 어쩔 수 없었노라"라는 미학일 것이다. 이미라와 원수연의 경우에는 이러한 거대한 서사 속에 캐릭터를 위치지우지는 않지만,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캐릭터는 그 사건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다. 여전히 이러한 로맨스의 형태는 [캔디캔디]의 구조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이 시기 작가군 중에서 강경옥의 특이점은,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 사건은 (작가 혹은 독자와 동일시된) 주인공 캐릭터의 내면의 필터를 통해서 독자에게 전달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사건들이 나를 가만두질 않는다"라는 감각이 아니라, "나의 범위 내에서 내가 저 사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감각을 가졌다는 점이다. 사건들이 작가/캐릭터의 내면으로 코팅되어 있다고 할까. 이러한 "내면의 필터"를 거쳐서 사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강경옥은 동시대 작가인 김진과 유대점을 가지는데, 둘 사이의 차이는, 김진의 경우 "나"의 범위가 국가([바람의 나라])나 의식 상에 존재하는 모든 세계([라그나로크]) 등으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반면 강경옥의 1인칭 내면은 대체로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 내의 일상을 해석하는 범주를 넘지 않는다. 외부세계는 필터로 걸러져서 구형의 내면 안쪽으로 삼투한다. 내면 역시 자신이 해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외부의 사건들을 인정하고 소화한다. 그리하여 외부와의 소통을 거부하지도 않지만 결코 외부에 자신의 내면면을 양도하지도 않는다. 이 과정에서의 끊임없는 갈등이 강경옥 작품의 의지를 구성하는 핵이 된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자기 자신과의, 혹은 타인과의 "대화로 정리하는 것"이다.

내면의 필터를 통해 독자에게 사건에 대한 상념과 해석을 전달하고 이것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요한 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강경옥은 90년대에 등장하는 이강주, 나예리, 박희정, 유시진, 이진경 등 소위 '뉴웨이브'(?) 작가군들과 공유점을 가진다. 이들 모두 자신('나')의 마음에 더할 나위 없이 집중한다. 이런 점에서 강경옥을 80년대 작가로서 90년대 이후 등장한 작가들과 공유점을 가지는, 일종의 프로토타입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없는 해석이리라 본다.(주1)

1991년 초기부터 월간 [미르]에 연재되었던 강경옥의 [퍼플하트]는 마녀와 공주가 등장하는 동화풍 환타지이며 마음에 대한 우화이다. 이 작품은 그보다 조금 더 앞섰던 [라비헴폴리스](1989- )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없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도 느끼지 못한다"라는 무통(無痛)증후군의 캐릭터를 다루고 있다. 이런 점에서 [라비햄폴리스]의 주인공 하이아와 [퍼플 하트]의 시릴 공주는 일종의 자매형이다. 다만, [라비햄 폴리스]의 경우 주인공의 증상이 어디에서 기인했는가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간에 발생하는 마음의 문제에 극단적으로 둔감한 하이아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라는 것이 신선한 발견이 될 수 있도록 백지로 비워진 캐릭터이다. 어린아이가 사랑을 발견하듯이 그렇게.

단순화하자면 [라비햄폴리스]가 긍정형의 질문이라면 [퍼플하트]는 부정형의 질문이다. [퍼플 하트]의 경우에도 역시 주인공은 마음의 백지로 시작하지만, 그 백지에는 피가 묻어 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렇게 잔혹함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작가가 자신의 체험을 파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는 것이 진짜 강경옥의 매력일 것이다) 그것은 저주로 인한 것이다. [퍼플하트]는 마음이 없는 이유, 마음이 없기를 바라는 이유, 마음을 찾아나서는 이유, 마음을 회의하는 이유에 대한 우화가 된다.

주인공 시릴 공주는 마녀의 저주로 인해 심장을 빼앗기고 감정을 알 수 없게 살아간다. 사랑이나 수치심, 두려움 등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시릴 공주는, 왜 다른 사람들이 저렇게 울고 불고 하는지를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릴 공주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며 타인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 대해서 슬픔 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시릴 공주는 자신에게 무엇이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고 그것을 찾아나선다. 그녀는 여행의 초입에 역시 마녀의 저주로 인해 "목소리의 사랑스러움"을 빼앗긴 왕자를 만나게 된다. 저주로 인해 왕자의 목소리는 흉측하게 변하였고 왕자는 타인 앞에서 말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공주와 왕자는 둘 다 소통장애를 구현하고 있는 캐릭터이다. 소통장애는 공주의 경우에는 '마음이 없다'는 방향으로, 왕자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 의해 혐오당하는 목소리"로 표현되는 것이다. "말을 하면 이해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차라리 마음이 없고야 말겠다".


(좌)난 심장이 왜 필요한지도 모르고 있어. 난 살아있지 않은가?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 [퍼플하트](1), p.56
(우)그 사랑스러움이라는 것이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 평생 벙어리로 살기도 싫었지만 그걸 위해 마녀를 찾아나선거요.

정신적/육체적 무통증후군의 캐릭터는 강경옥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다. "마음이 없다/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라는 주인공들은 만화 속에서 꽤나 존재해왔다. 예를 들어 사이보그라는 형태로 우회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여기 이 [퍼플하트]의 여주인공처럼 마법의 저주에 걸린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마음의 부정, 혹은 무통증후군은 일종의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마음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설정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주인공들은 너나할 것이 없이 일련의 자폐증을 독자와 은밀하게 공유한다. 자폐는 잔혹이라는 문제와 연관이 있다. 자신을 닫아 버리는 것은 세상에 대한 복수심이기 때문이다. 소통장애는 잔혹함에 의한 것이며 또한 잔혹한 행동을 하는 이유가 된다. 강경옥에게 있어서 소통이라는 문제는 세상에서 가장 잔혹하게 사람을 상처입히는 것이며, 동시에 가장 희망적인 울림을 낳는 절실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혹은 그리하여 강경옥의 만화는, 혹은 강경옥의 딸들은 대화하고, 생각하고, 대화하고, 생각하고, 대화하고 생각한다. 그것은 필터의 활용법이다. 필터에 대한 강경옥의 감각은 집요하고 고집스러운 데가 있어서 결코 이것을 닫아버리지도, 열어버리지도 않는다. 이 작가가 신뢰를 얻는 부분이 있다면 이런 점에서일 것이다.

강경옥의 작품에서 주인공이 무통증후군을 앓고 있는 경우에는, [현재진행형]이나 [17세의 나레이션]과 같은 1인칭 내면의 나레이션이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내면에 독자가 동일시할 만한 상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두 작품 [퍼플하트]와 [라비햄폴리스]는 작가가 행하는 일종의 거리두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외부의 사건들의 위상은 크지 않지만 적어도 캐릭터와 사건들은 작가의 내면화에 쉽사리 잠식되지 않은 않은 채로 움직인다. 여기에서 1인칭의 '마음'은 캐릭터들을 들여다보고는 있지만 개입하지도, 발언하지도, 존재를 드러나지도 않는다. 마음은 독자를 마주보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옛날 옛적에 공주와 왕자가 살았습니다. 공주는 마녀의 저주로 인해 마음을 잃어 버린 공주였습니다."

[퍼플하트]는 강경옥의 작품목록에서 가장 전성기의 역량을 자랑하며 최상의 작화 퀄리티와 장식미를 구현하고 있다. 김혜린으로 치면 [비천무]랄까. 덧붙여, 강경옥의 작품은 [펜탈+샌달] 정도를 제외하면 환타지형 SF와 현실세계의 사이에서 그려져왔는데, [퍼플하트]는 '동화풍 환타지'라는 이색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배경설정이 현실물과는 다른, 정제된 사건과 대사를 가능하게 하였다는 점도 이 작품이 두드러지는 이유가 될 것이다. 요컨데 상당히 고급스러운 작품으로 완결될 가능성이 많았던 것이다. 그녀의 팬들이 한탄하는 바와 같이 미완으로 끝났다는 것이 더욱 아쉬워지는 대목이다. ([퍼플하트]는 2002년에 다시 '케이크'에 연재가 재개되어 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나 또 중단되고 말았다)

(여성만화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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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참고사항

* 주1) 이러한 90년대 순정작가군들과 강경옥이 공유하는 스타일의 심리적인 특징은, 주인공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외부적 사건의 연쇄와 인간군상의 감정이 빚어내는 부대낌을 표현하기 보다는 자신의 마음의 통제 하에 들어와 있는 문제들을 다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강경옥의 SF '대하물'인 [별빛속에](1987- )의 경우에도, 주인공의 "마음의 결정"에 따라서 종국에 사건의 성격은 변화하고 결정된다. 마치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이 결말짓는 것과 같은 그러한 방식이, 암묵적으로 개인주의적인 작품군이 숨기고 있는 개인주의적인(혹은 '이기적인') 특징이다.

○ 작품목록

[이카드입니까] 3-완, 시공사, 1986- [별빛속에] 21-완, 추성사(Prince Comics), 1986-2000 [라비헴 폴리스] 3-완 , 시공사, 1989- [거울나라의 수수께끼] 2-완, 시공사, 1991 [현재진행형 ing] 4-완, 시공사, 1991- [17세의 나레이션] 2-완, 시공사, 1991- [퍼플하트] 2-미완, 시공사, 1992- / 2-미완, 시공사, 2001-2002 [펜탈+샌달] 3-완, 시공사, 1992- [스타가 되고 싶어?] 2-완, 시공사, 1992 [노말시티] 15-완. 서울문화사, 1993 [두 사람이다] 4-완, 시공사, 1999

○ 작품목록

강경옥 팬사이트 이미지 퍼즐 (http://www.imagepuzzle.net/) : 작품목록 정보의 파악에 의존하였음.
: http://dugoboza.net/tt/rserver.php?mode=tb&sl=76 (co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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