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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이라는 것을 처음 접한 지 25년쯤 된 듯 하다. 만화로만 꽉
채워진 만화잡지가 나온다고 두근거리던 가슴을 진정시키던 때로부터도
20년이 지났다. 공포의 외인구단이 한국만화의 저변을 확장하고, 만화광장을
읽으면서 만화의 질적인 수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갑작스럽게 등장하여
한국만화시장을 휩쓸어버린 드래곤볼의 파도에 허우적대던 시간들을
다 흘려보내고, 조금 머리가 커지면서 만화를 재미있게 읽던 것에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뭔가 해보려고 찝쩍거리던 시기에 내가 발견한
- 그다지 반갑지 않았던 - 사실 중 하나는 전세계 180개 국가 중에서
나름대로 만화계랄 만한 것을 형성하고 만화를 그럭저럭 활발하게 향유한다고
말할 수 있는 국가는 대략 10여 개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10개도 꽤 후하게 계산한 것일지 모른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만화는 독자적인 만화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세 개 국가와 그 주변부
몇 몇 국가만의 지역적인 문화일 뿐이다. 그나마 이 세 지역의 만화는
장르 내적으로 또 산업적으로 서로간에 거의 접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국제화되어 있지도 않으며 서로간에 교류도 없이 몇 개의 국가가 폐쇄적으로
영위하고 있는 마이너한 장르, 마이너한 산업. 영화에서 이러한 편중성을
생각할 수 있는가? 만화는 국제성과 대중적 저변에서 애니메이션 보다
못하며 게임보다 저위에 있다. 대중음악, 소설 ... 혹은 축구와 같은
정말로 메이저 한 것들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고. 그러고
보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살고 있는 나라가 그 10여 개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불행한 일이지만 안 그래도 비좁던 만화장르 혹은 만화산업의 대중적인
저변은 그나마 날이 갈수록 축소되고 있다. 한국에서 만화장르가 가장
대중적인 저변을 넓혔던 시기는 - 굳이 특정하자면 - 공포의 외인구단이
인기를 모으기 시작한 83년 이후의 몇 년 정도이겠는데, 그 이후 십
수년간 우리(!)는 지금 기나긴 내리막길을 내려오고 있는 참이다. 다만
위안이 되는 것은 우리만 내리막길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정도일까.
미국만화는 한국만화 이상으로 격심한 시장의 축소를 경험하고 있으며,
일본만화시장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아~ 정말 다행한 일이야
... 퍼억~)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비한 다면 대여점 문제 같은 것은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여행자들에게 당신들 지금 내리막길에 있어요 라고 굳이 재확인함으로서
짜증을 유발하는 정도의 소소한 말다툼에 불과한 것이다. 대여점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질질 끄는 진정한 이유는 이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
힘써 해결할 가치가 없는 -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여점이 6천 개가
아니라 6만개이며 대여점이 형성하는 대여시장 규모가 6조원쯤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 문제는 해결된다. 그것도 6조원의 시장을 죽이지 않는
방향으로 ... 정말 가치 있는 시장이라면 누군가는 나서서 해결하려
하기 마련이다. 정부가 나서지 않는다면 대여점에 뱀을 넣거나 불을
지르는 사람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대여점 때문에 만화시장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상황은 단순하다. 만화의 대중적인 저변이 축소되고
있는 것뿐이다. 80년대에는 100명 중 50명이 만화를 보았다면 지금은
100명 중 10명이 만화를 보고 있는 상황이다(그럼에도 여전히 열 개
이상의 만화전문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놀랍지만). 정말 뼈아픈 것은
50명이 10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지, 그나마 읽고 있는 10명 중 몇
명이 빌려보고 몇 명이 사보고 ... 이런 것은 아니지 않는가.
대여점 뿐일까. 만화에서 뭔가 즐기기만 하고 끝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찾으려 한 이후 알게된 사실들 중 긍정적인 것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시장의 지속적인 위축, 사회적 위상의 저감, 만화관련 단체들의 놀라운(!)
활동상, 허공에 대고 삽질하는 느낌을 주는 각종 행사들. 왜 나는 이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걸까.
음 ... 만화독자로서 나의 동기부여는 간단하다. "10년 후에도
여전히 내가 읽을만한 만화가 나올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자" ... 근거가 박약하다고? 그럴지도 ... 안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 이런 자신만의 이해관계에 얽혀 이런 저런 일에
끼어들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린 듯 싶고,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할 때도 있다. 여하튼 ...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옆 사람까지
같이 끌고 들어가려는 심사인지도 모르지만. 1기의 활동을 정리하는
시점에서 개인적인 희망이랄지 편견이랄지 혹은 그저 의견이랄지 ...
아니면 앞으로의 비전이랄지 두서 없이 몇 가지 적어본다면 ...
우선 표현언어로서 만화의 영역 확대가 있다. 80년대 후반 이후 일관된
만화시장의 위축 혹은 장르만화의 위축과 무관하게 혹은 그와 반비례하여
만화적 표현언어의 사용영역은 날로 확장되고 있다. 카툰화법, 카툰화법을
채용한 컨텐츠의 증가(캐릭터, 애니메이션, 게임, 디자인), 실용만화의
비중 확대 등. 그 중 실용만화의 비중 확대에 관해서는 좀 더 부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2001년 최고의 베스트셀러로서 외면당하던
시장의 재발견을 가져온 '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성공은 이 책이
만화언어를 채용한 실용서일 뿐 장르로서의 만화는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할 때만이 그 의미를 제대로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그리스 로마 신화~'류의 실용만화와 변병준의 작품 사이에 놓인
거리는 수학정석과 은희경의 소설간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멀어져야 한다. 요컨대 실용만화는 실용서 이어야지 만화이어서는
안 된다. 실용만화 다른 말로 만화언어를 채용한 실용서가 더 확장되지
못하는 것은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일정수준 이상의 만화언어
구사력을 겸비한 필자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토마스
불핀치 원작, 홍은영 그림'의 포맷에 머무르고 마는 것이다.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만화가들이 전문적인 식견을 쌓기보다는 여타
분야의 필자들이 좀 더 쉽게 만화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쪽이 빠를 것이다. 좀 더 낮은 수준의 작화밀도, 쉽게 조합해서 쓸 수
있는 정형화된 - 타이핑이 가능할 정도의 - 만화코드, 작업을 도와주는
효과적인 툴 - 만화판 한글 2006정도가 나와주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 에 이르기까지.
그냥(!) 만화 내지 순만화의 정립은 만화에서 표현언어로서의 만화를
따로 떼어 놓으므로서 좀 더 용이해진다. 순만화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성격을 상정해 볼 수 있겠는데 하나는 그림 혹은 연출상의 시도들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만화언어 자체를 확장하려는 시도들이고
또 하나는 코드와 연출을 관습화 문자화하고 철저하게 이를 도구로 이용함으로서
최종적인 결과물의 메시지성, 내러티브성-문학성이라고 하면 오해의
여지가 많겠지만 어쨌든 ...- 강화하려는 시도가 되겠다. 물론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만화창작 시스템은 작가가 작품에 투여할 수 있는 기회비용의 대부분을
'그림기술 연마', '높은 작화밀도', '화려한 배경' 같은 것에 투자하도록
강제한다는 측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이러한 제한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업작가의 숫자를 줄이든지
- 작가의 숫자를 줄이라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 혹은 작화밀도에
대한 요구수위를 크게 낮추던지 ... 그러므로서 작가들은 텍스트보다
텍스트에 담기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된다. 24시간 원고에 매달리는
상황의 개선은 간접적으로 개별 작가가 상업만화시스템에 종속되는 정도를
완화해주는 효과를 낳는다. 지금의 한국만화는 어떤가? 장르만화가 만화의
거의 전부(!)인 상황이 이상하지 않은가? 환타지, 추리, 무협, 로맨스,
야오이, SF가 문학시장의 99%를 차지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라. **장르로
규정되지 않는 '그냥'만화가 다양하게 존재해야 한다. 순문학에 대응하는
의미로 순만화 or 순만화계의 성립이 필요하다는 말은 그래서 나오는
것이고.
유통과 소비의 측면에서는 만화와 만화산업의 제 분야를 포괄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억세스 할 수 있는 온라인 archive(데이터베이스, 실물자료모음,
리소스/디렉토리서비스 등)와 출판사-총판-서점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유통정보서비스(제작정보, 출판정보, 유통정보, 재고정보, 판매정보
등)망의 구축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 만화출판이 직면하고 있는 1차적인
문제점은 현재의 오프라인 유통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종 수의
만화책이 유통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 해 7천 종의 신간을 효과적으로
진열할 수 있는 서점이 있을 리가 없고, 한 해 1천여 종을 출간하면서
각각의 작품에 대해 마케팅을 전개할 수 있는 영업력을 보유한 출판사도
없다. 이 작품을 일일이 체크하면서 볼만한 만화를 건져내는 독자 또한
기대난. 이러한 상황은 볼만한 만화작품이 사장되면서 전체적인 유통주기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몇 가지 돌파구가 있겠지만, 우선적으로는
진열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온라인 유통망 - 오프라인에서는 사전에
선별된 소수 작품을 위한 별도의 진열공간 확보를 병행할 수 있을 것이다
- 의 구축과 함께, 효과적인 작품 선택을 돕는 가이드의 활성화와 같은
일차 목표를 정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갈수록 열악해지는 - 특히 장르만화에서
- 시장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절박한 요구이기도 하고 ...
척박하긴 한데 그건 그 만큼 할 것이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한다.
게다가 만화게에는 여전히 멋진 작품으로 나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작가들이 많다 ... TONO, 조원, 최인선, つげ義春, つだみきよ, なかはら桃太,
岡野史佳, 키타사로 센쥬, 高橋留美子, 권현수, 吉住涉, 김진태, 문계주,
박연, 박흥용, 山內直實, 山田南平, 서문다미, 박은아, Babpig &
Fanta, 조윤, 서영웅, 호시사토 모치루, 신지상, Bill Watterson, Obayashi
Miyuki, 小林瑞代, 松本大洋, 송채성, Raymond Briggs, 변병준, 岩明均,
Quino, 陽氣婢, 오경아, 이소, 윤승기, Tarazed, 오가와 코오신, 이강주,
이진경, 문흥미, 이충호, 이향우, 고우영, 우에시바 리치, 츠지 요시미,
정경아, 富所和子, 아시나노 히토시 ... 그 외 다수 ... 이 웬수(...)들
덕분에 늪에 빠진 발을 빼기는 여전히 어려울 것 같고 ...
어차피 버린 몸 ... 계속 버려보는 거지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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