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색녀열전] - 답습된 구도의 여성주의 만화?

 

 

 

 

[색녀열전] - 답습된 구도의 여성주의 만화?

                                                              그림자춤

 

 

 

이프에 연재된 <색녀열전>을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알고 싶다는 호기심에 못 이겨 이프를 샀다. 성지식에 무지했던 나는 <색녀열전>을 보면서 꽤나 당황해서, '이런 걸 모르다니 내가 뒤쳐진 것인가' 라는 질문을 연발하며 책을 덮었다. 몇 년이 지나 그 이야기가 책으로 묶여 나왔고 다시 읽은 나는 당황 대신 지루함을 느꼈다.

 


<색녀열전>는 '밝히는' 색녀들의 에피소드가 담긴 만화다. 첫날밤을 치르는 세 자매의 사연, 부인의 엉덩이가 다른 남정네에게 보이는 것에 화를 냈다가 혼나는 남편, 시아버지에게 치마를 걷고 엉덩이를 내밀어 인사하는 며느리 이야기 등등. 이 모든 이야기들이 전국에서 모은 '민담'이라고 하니, 이때까지 손에 잡힌 '옛날이야기' 류가 출판업자들의 입맛에 맞게 골라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성을 주도하는 주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뀐 이야기가 그 옛날에도 있었다니, 이프에서 <색녀열전>을 통해 '우리 할머니들은 당당하게 성을 즐겼고 자기 주장을 해왔으니 우리도 당당해지자' 라는 소리를 꺼낼 만 하다.

 

만일 여성도 포르노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페미니즘적 만화라고 생각한다면, 이프의 기획대로 <색녀열전>은 O.K.다. 그러나 매우 진부한 비판이지만, 기존의 구도를 그대로 답습하는 텍스트가 주체의 성별을 바꾼다고 해서, 여성주의적인 텍스트로 변신할 수는 없다. 시아버지 앞에서 성기를 내보이는 며느리의 모습은 과연 누구의 상상인가. 그 며느리가 칭찬을 받았다는 교훈을 첨가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다.

 

포르노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은 그것이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시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남근중심적인 성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 남성의 환상에 기반한 전형적인 구도에 따를 뿐 주체들의 경험이 거세되었다는 점등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세계사 만화 같은 장차현실씨의 무난한 전개와 동글동글한 그림체 대신 양영순 같은 만화가의 스타일로 <색녀열전>이 그려졌다면, 그리고 에피소드 맨 뒤에 등장하는 교훈적인 가르침이 빠졌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애초에 '민담'의 발견을 통한 페미니즘적 성적 주체의 발굴은 짝짝이 양말과도 같은 어색한 만남이었다. 신고 다닐 수는 있지만 드러내 놓고 칭찬 받을 수 없는 것.


이렇게 쓴 것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색녀열전>을 꽤나 재미없게 읽었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뒤바뀌고, 그 같은 상황을 무마하는 어르신의 교훈이 첨가된 '그림+이야기'의 만화가 재미있을 리 없다. 전형적인 음담패설에서 한치의 구도도 벗어나지 않은 이야기에서 성별이 바뀌면 그것은 '도발적'인 것이지 '페미니즘적'인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적이기 위해서는 단순한 치환 이상으로 그 맥락과 여성 주체의 경험이 풍부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또 한가지 재미없었던 이유는 에피소드 마지막에 따라나오는 결론 때문이었다. '남성과 여성이 건강하고 당당하게 성생활을 즐겨야 한다, 그러니 부인을 존중해라'로 끝을 맺는 어르신의 교훈은 마치 한겨레21 등지에서 연재되는 '당당한 성'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나중에 전국에서 수집된 민담을 바탕으로 장차현실씨가 그린 것을 알고 안심했다.(장차현실의 '현실을 봐'(하니 리포터)는 그녀의 전개방식과 그림체가 돋보이는 '괜찮은' 만화다.) <색녀열전>은 장차현실 개인의 만화라고 하기보다는 이프의 색깔에 맞추어 기획된 만화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프가 표방하는 '여성의 쾌락'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여성집단의 정치성을 일정정도 죽이면서 개개인의 자유주의적 쾌락을 강조하다보면 더 많은 남성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느새 균형을 잃어버린다. <색녀열전>의 뒷면에는 '처음에는 여성주의적 만화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라는 어느 남자 만화가의 평이 찍혀있을 정도이니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정말로 여성주의적 만화가 아니라, 그냥 남녀노소 웃을 수 있는 '시간때우기' 용 만화를 기획한 것이며, 이프의 페미니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다행이겠으나 그렇게 따져서 생각할 사람은 별로 없을 듯 싶다.

 

 

 


 ▶ 기사:  그림자춤
 ▶ 조회: 12017 | 등록: 2002/11/16 
멋져요! 깡통 2003/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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