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과 신경숙을 비교한다면: 만화에 기대할
수 있는 것
1. 만화는 다른 예술장르와 비교해서 어떤 수준?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만화에 있어서의 걸작이라는 것은 다른 예술장르에 있어서의 어느 정도 수준일까.
나는 항상, 이상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단지 화면이 멋지고 연출이 세련되었다고 해서 걸작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 것은 세련된 엔터테인먼트라고 한다. 그런데 만화에서 화면이 멋지고 연출이 세련된 것은 '걸작'이라고 한다. 이런 것은 그나마 기준이 있는 편에 속한다. 대부분은 그냥 자신이 감동했는가 아닌가가 기준이다. 이러한 기준의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열혈강호>가 왜 걸작이야? / 재미있잖아.../ 재미없는데? / 무슨 소리야, 그건 걸작이라니까!
걸작들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걸작이라고 꼽히는 것들 중에 과연 심각하게 생각해서 '걸작'이라고 불릴 만한 기준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위에서 말했듯이 지금의 '걸작'이라는 기준은 "이거 재미있어~!"라는 정도에 속한다. 영화 <조폭 마누라>가 관객이 많이 든다고 해서 그걸 걸작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열혈강호>는 왜 걸작이지? 상업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은 얼마든지 인정하겠지만.
그나마, 소위 '비평가'에 의해 선정된다고 할 수 있는, 일간지에 소개되는 '걸작만화'라는 것도 "재미있으면서 건강성을 잃지 않는" 정도를 이야기한다. 참 애매하고 초라한 절충주의다.

만화를 '좀 보는 편'인, 나조차도 만화를 보는 기준은 다른 예술장르를 보는 기준과 완전히 다르다. 영화를 볼 때의 마음가짐하고 만화를 볼 때의 마음가짐은 다른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 만화는 '시간 죽이기 용 자극재'다. 만화비평이니 하는 것을 가끔 쓰는 나는, 그래도 만화를 보는 시각을 고쳐나가려고 애를 쓰는 편이다. 그러나 만화의 사회적 위상은 만화를 볼 때 사용하는 유일한 기준, "재미!"와 깊이 결합되어 잇는 것 같다.
그러나 소위 '만화계'는 만화가 어떠한 예술장르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별다른 자각은 없는 것 같다. 이것을 두고 논쟁하는 것이 한 번도 없었을 뿐더러, 아무리 보아도 만화는 '수공업적인 상품'에 불과한 것 같다. 지금 잡지에 나오고 있는 만화들의 태반을, 과연 '예술'이라는 말까지 붙여가면서, 그 중에서'걸작'을 가려내려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내가 원하는 것은 만화라는 예술장르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제9의 예술"이라든가 "만화가 가진 무한한 상상력과 가능성" 따위의 상투적인 수사를 때려치우고 말이다. 이를 위해서 단순한 비교를 좀 해 보자. 만화에 있어서의 걸작이라는 것은 다른 예술장르에 있어서의 어느 정도 수준일까?
2. 김진과 신경숙을 비교한다면?
우리는 소위 '걸작'이라고 누누히 일컬어진 만화들을 알고 있다.
나는 그냥, 축축한 독백체 문장이 서로 비교될만 하다는 편의적인 이유로, 김진과 신경숙을 비교해본다. 당신도 머리 속에 당신 나름대로의 비교대상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현세와 이문열도 좋고, 유시진과 은희경도 좋다. 해 보라. (참고로, 이를 위해서는 만화만의 표현방법인 연출이라든가 작화라든가 하는 부분을 점수에 포함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소설의 경우도 문체 같은 것을 포함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신경숙, <외딴 방>, 문학동네, 1999, 9500원
김진, <바람의 나라17>, 시공사, 2001, 3500원 (빌려보면 300원)
자, 비교하면, 당신은 어느 쪽의 손을 들겠는가? 당신에 여기에서 어느 쪽의 손을 들던지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참고로, 나는 김진의 손을 들었다)
중요한 것은 이 둘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상당히 깊이 고민을 해서 김진이 종종 사회적 문제의식으로까지 자신의 내면을 확장시키곤 했다는 점을 꼽았다. 그러나 신경숙 역시 그렇게 무지몽매한 작가가 아니고, 사실 출판된 문학작품치고 그렇게 수준낮은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김진의 작품 수준이 작품에 다라 상당히 기복이 심하다는 점을 제외하지 않았다면 상당히 힘든 싸움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김진이 분명 순정만화라는 장르 내에서 뿐 아니라 한국만화사에서도 나름로 강력한 위상을 가진 작가라는 점이다. A급을 넘어서 S급으로 평가되고 있는 만화계 내에서는 '대가'급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신경숙은 비록 90년대에 들어와서 상당히 인정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90년대의 그 전대의 작가들에 비해서 무게감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경숙의 소설 정도의 내용을 가진 만화가 있다면 그 만화는 별 무리없이 '걸작'이 되었을 것 같다. 그러나 김진의 만화가 소설로 바꾸어져 나온다면 그 소설을 문학사의 반열에 들고, 김진은 '대가'가 되었을까?
당신이 김진의 팬이거나 신경숙의 팬이라면 나는 매우 미안한 일을 한 셈인데, 방금의 이 비교는 좀 억지스러운 점이 있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비교는 유익한 면이 있다. 강경옥의 <별빛 속에>든 뭐든 이제 이 저울에 올려놓아보자. 반대쪽에는 문학이나 영화의 걸작 중 하나를 올려놓고 말이다. 과연 몇 개의 만화가 자신있게 저울을 기울도록 할 수 있을까?
그냥 화끈하게 지금 당장 만화라는 대중예술장르가 사멸한다치자. 그럼 뭐가 남을까? 과연 역사의 유물로 남을 만한 만화는? 내 머릿 속에 순식간에 몇 개의 만화가 꼽힌다. 솔직히 말하면 열 손가락이 다 안 된다. 아마 이것들이 내가 인정하는 '걸작'일 것이다.
실제로 만화에 대한 폄하 중에는 만화에 대한 완벽한 몰이해로 비롯된 것도 많다. 그러나 그런 점을 피해가더라도, 단순한 몰이해로 비롯되지 않은, 열등한 현실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만화에 있어서의 '걸작'이란 다른 예술장르에 있어서의 '수작'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마 거의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그리고 만화팬들이 가진 기준이란, 사랑이 현실을 가려 버리는 것이고, 만화라는 예술장르의 발전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다고 잘라 말하고 싶다. 단순히 "내가 감동했으니까 걸작이다"라는 식의 기준은 버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김진과 신경숙 비교에서 더 많은 것을 뽑아낼 수 있다. 신경숙은 별로 좋은 비평을 받아본 일이 없다. 있다고 해도 5:5 정도의 비율이라고 할까. 문학에서 좋은 비평을 받는다는 것은 실제로 공신력 있는 일이다. 신경숙은 '섬세한 신파'니, "잘쓴 여고생 산문"이라는 요지의 비평도 종종 받았다. 그러나 지금 대가라고 칭해지는 만화가들에게 바쳐지는 것은 비평이 아니라 하나같이 찬사와 애정표시다. ("샌님, 너무 좋아요", "그림이 넘 멋있어요.." 기타 등등)
김진의 만화들은 '걸작'이라는 칭호를 받기 위해 어떤 토론과 비평작업을 거쳤을까? (내가 지금 김진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님을 유의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현재 만화의 '걸작'이라는 칭호들은 그냥 어린아이가 자신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빼앗기기 싫어서 붙들고 있는 것과 비슷한 애정표현이 아닐까? 만화의 평가기준이라는 것은 존재해 본 적은 있는 것일까? 만화사적인 걸작이라는 것도 그냥 "한 때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었던 만화"라는 것 이외는 아니잖는가?
이런 모든 것들이 만화에 대한 열등감을 형성한다. 그러나 만화가들이, 만화팬들이, 이러한 열등감에 어울리는 모습들을 보여온 것 역시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만화가, 만화팬들은 왠지 칭찬에 굶주린 모습이다. 신경숙에게 행해졌던 식의 비평을 어떤 만화에 행한다면 어떨까? 아니면 김진이 아니라 다른 만화가 누구에게라도.
사실 가장 많이 듣는 반응은 "그런 식으로 만화를 보면 재미있나요? 만화를 순수하게 보지 못하시는군요" 그럴 때면 나는 "순수하게 본다는 것은 멍하니 본다는 뜻인가?"하고 반문하고 싶어지지만 꿀꺽 참는다. 나도 평소에 잘난 체 하는 인간을 보면 못 참으니까.
어쨌든. 그 독자가 말한 '순수', 순수하게 본다는 뜻은 그냥 즐기기 위해서 만화를 본다는 뜻이다. 이게 나쁜 것은 절대 아니다. 나도 대부분의 경우, 복잡한 생각을 턱, 하니 놓아 버리고 즐 기기 위해서 만화를 본다.
그렇다면 애당초 만화의 위상에 대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말아야 한다. 넘쳐 흐르는 엔터테인먼트 중의 하나가 만화라면, 만화에 대해서 특별하게 애착을 가져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만화는 게임이나 애니메이션과 비교해서 그렇게 특별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지도 않는다. 이런 정도라면 만화사랑이란 그냥 HOT 팬클럽 정도의 수준을 넘을 리가 없고, 그렇다면 사회적 위상 따위를 주장할 근거가 없다.
3. 만화의 현주소, 냉정해지기
만화라는 매체의 위상이 낮은 것은 단순히 만화에 대한 몰이해만은 아니다. 만화 자체가 사회와 인간에 대해서 몰이해했던 탓이 크며, 실제로 작가도 독자도 만화라는 매체에 대해서 기대치가 높지 않다. 독자들은 만화에 대해서 쓸만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해주기를 바라고, 그 위에 약간의 감동을 '쥐어짜' 주기를 바란다.
누군가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를 '정서적 포르노'라고 비판했다는데, 정도의 내용을 담은 만화가 나왔다고 치자. 아마도 걸작이라고 추앙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만화를 "정서적 포르노"라고 한마디 했다면, "어딜 감히...", "야, 이 씹새끼야!" 등등의 욕설이 난무했을 것이 틀림없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만화의 위상에 대해서 한탄하기 이전에 만화가 정말로 높은 위상을 가질 만한 예술장르인가, 그럴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입증해 왔는가, 그럴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냉정하게 살펴보자는 것이다.
이런 식의 냉정한 비교와 평가는 항상 대부분의 만화팬의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실제로 비교하기 전부터 답은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어쩌면 연령층이 낮아서인지도 모르지만 만화팬들은 따지기를 싫어한다. 만화 내에서 약간이라도 사회적 발언을 하는 것 같으면 의식있는 만화라고 떠받을어주는 정도인데, 이것은 결코 양식있는 행동이 아니다.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떠받들기 이전에 토론되어야 하고 긴 호흡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나는 실제로 현재 만화는 그 정신성에 있어서 많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한다.
만화는 상상력이 강점인 예술장르라고 한다. 실제로 만화의 자유분방한 표현방식 그 자체가 열등한 것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고, 다른 예술장르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직도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때나서, 지금 만화의 상상력은 상투적인 것에 매달려 있으며, (잡지를 한 동안 안 보다가 펼쳐들면 만화끼리 서로 분간이 안 갈 정도다, 내용이건 화풍이건) 그 상상력의 방향은 오직 자극적인 것으로 행한다. 몇몇 예외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단지 예외일 뿐이고 그 예외들이 만화계에 하나의 활력을 제공하는 흐름으로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 상상력을 표현해야 한다. 사회 속을 살아내는 인간에 대한 상상력을 표현해야 한다. 만화가 어떠한 예술장르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상상을 스스로 실현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만화는 여전히 엔터테인먼트일 것이다. 위에서 문학 어쩌구 했지만 많은 소설들은 여전히 하이틴 로맨스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엔터테인먼트이면서 동시에 예술이고 사회적 발언이고자 하는 흐름을 보존해 왔듯이 만화도 그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이후에야, 비로소 만화의 사회적 위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감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만화의 위상이 높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오만이며 편견이고, 책임없이 권리만 누리겠다는 심보라고 생각된다. 만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현 상태를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주의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동시에 공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4. '만화가'이기 이전에 '작가'로서 : 위상은 공짜로 먹을 수 없는 법이다.
아주 당연하게도 만화가는 '만화가'가 아니라 '작가'로 이해되어야 하고 평가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이 만화의 고유성을 무시하자는 말은 아니다. "만화라는 장르가 놓인 척박한 현실과 부재한 전통" 같은 것을 방패삼아 안주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만화라는 것을 감안하면 나름대로 메시지가 있는 작품이다"류의 인식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인정을 받고자 한다면 만화라는 예술장르를 통해 다른 예술장르와 맞대결을 벌일 자신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엔터테이너로서의 만화가라면 출판사나 독자들에게 자신들이 정당한 노동의 몫을 분을 받을 수 있도록 투쟁할 수 있다. 노동자가 밀린 임금을 받아내야 하듯이, 그들도 자신의 몫을 받아내야 한다. 현재의 만화계 구조가 만화가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구조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만약 그렇다면 "생계유지를 위해서 막노동을 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만화를 그리란 말이냐"라는 말은 완전히 정당한 말이다. 엔터테이너는 자기 노동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하며, 좋은 환경을 조성되면 응분의 산물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만화가'라면 구조 문제를 탓하며 좋은 만화를 그리지 못함을 이야기할 수 없다. 우리는 상업적 환경이 받 아들여주지 않은 탓에 사장되어버린 수많은 소설과 영화들을 당연히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반 고흐는 팔리지도 않는 그림들을 평생동안 그리다가 비참하게 살다 죽었다. 당신이 만화가라면 엔터테이너인지 예술가인지 명확히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명확히 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된다. 내 눈에 지금의 만화가들은 실제로 엔터테이너이지만 예술가의 자부심을 가지고 싶어한다고 생각한다.
만화가나 만화팬들은 만화의 사회적 위상이 낮음을 개탄하면서도 내적으로 만화의 현재 수준에 대해서 자성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만화가 천대받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기를 좋아한다. 오만하다.
나는, 엔터테인먼트를 결코 싫어하지 않는다. 사실은 나는 이미 고루한 주제에 잘난 체하는 문학 따위에 희망은 없다고 생각하고, 차라리 환타지 소설이 더 나을 수 있다고 여긴다. 무슨 <쌔크리파이스>인지 뭔지 하는 영화는 졸려서 못 보겠다. 위상이 높은 것은 우리를 부담스럽게 한다. 사실이다. 그 러나 삶 그 자체는 그보다 더 부담스럽지 않던가. 예술이 삶보다 가벼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소수의 독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식의 만화라면, 독자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만화사랑이란 초라할 뿐이다. 300원 밖에 지불하지 않겠다는 독자에 대해서 3000원을 낼 것을 요구하는 것. 그건 독자에게 사랑을 요구한다기 보다는 "왜 쇼를 보고 돈을 안 내는 겁니까?"라는 소리다. 그건 정당한 말일 수는 있지만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호소할 것은 아니다. "우리 사이가 그 정도밖에 안 되었단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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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보자 토막상식 : 반 대여점 운동 : 만화가들과 만화독자 몇몇이 모여서 일으킨 운동으로서 대여점에서 만화를 빌려보지 말자는 운동. 한국만화의 창작-유통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대여점 중심구조를 꼽았다. 요약하면 대여점에서 20명이 보느니, 1명이 사보는 것이 작가에게 정당한 몫이 돌아가는 방법이라는 것. 그리하여 만화를 사랑하거든 만화를 사서보라는 지극히 당연한 발언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 이 글은 반 대여점 운동진영에 대한 발언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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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가 자신의 그림을 회화상점 주인들이 아예 가져다놓지도 않는다면서 그 시대 대중들의 '회화사랑'에 호소 하는 풍경을 생각해보라.

, 1888, Vincent Van Gog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