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험생들이여 신화가 되어라-수험생 만화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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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3월이다. 대학 신입생들이 교정 안으로 보무도 눈부시게 밀려들어 올  것을 생각하면 이제 졸업식을 앞둔 나는 마냥 우울해진다. 그렇다, 군내 풀풀 나는 고 3의 굴레를 이제 막 벗어난 대학신입생들은 얼마나 마냥 희망에 들떠 있을 것이며,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긴장에 가득 찼던 마지막 터널을 지나 새로운 햇빛을 보게 되었을 때의 환희를 내가 다시 기억이나 할 수 있을까.

새삼스레 지난 겨울, 연례행사처럼 스쳐 지나가는 입시 관련 보도들을 이제는 그 태풍의 핵에서 비껴난 선배의 입장에서 느긋하게 지켜 보았던 때가 떠오른다. 사실 대학 입시라는 것은 의례 그 핵 안에 있는 사람에게나 신경줄이 터질 듯한 긴장과 피말림의 연속이지, 보는 사람들에게야 더없이 흥미진진한 볼거리 아닌가?  입시상황 보도라는 이름으로 주기적으로 브라운관을 현란하게 장식하는 그 광경들. 입시철만 되면 매년 반복되는 수십만 수험생들의 치열한 눈치작전, 원서를 들고 막 닫히려는 접수처 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수험생들과 합격자 발표 날 마음을 졸이며 명단을 살피다 환호하는 학생들과 부모님들의 감격적인 모습. 그리고 그 뒤로 등을 보이는 낙오자들의 쓸쓸한 모습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긴장감 넘치며, 그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초대형(자고로 대선 다음으로 이렇게 온 국민이 이렇게 열렬히 참여하고 주목 받는 행사는 없었다..아니 대선보다 더한가?) 스릴러 서스펜스 스펙터클을 또 어디에서 달리 찾을까.

또 입시라는 행사의 성격 자체가 본래 점수에 따른 적자생존,약육강식의 패턴을 적절히 따르고 있는 만큼 여러 매체들 속에서 비치는 이 행사의 주역들은 입시의 먹이피라미드 아래보다는 윗 꼭지점을 차지하고 앉은 부류들이기 마련인데, 입시 보도라는 것 자체도 명문대 위주인 것도 그렇거니와, 환한 얼굴로 합격을 기뻐하는 합격생들의 환희와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축하하는 사람들, 이어지는 즐거운 대학 생활 등등 입시하면 의례 떠오르는 이미지 속에 입시의 명(明)은 있을지언정 암(暗)은 낯선 단어다. 실패자는 곧 잊혀지고, 기억되지 않는다. 그러면 입시의 장 가운데에 있는 수험생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소위 수험생 만화들에서도 이런 법칙은 유효한 것일까?

단순히 학생들이 등장하는 학원물이 아닌, 입시를 중심으로 한 수험생들의 일상과 이야기를 파고 드는 수험생 만화로는 하라 히데노리의 '겨울 이야기', 에가와 테츠야의 '동경대 이야기', 고지 시나사카의 '수험의 제왕' 정도를 손에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만화들의 등장 인물들은 대개 다 대입에 물먹은 재수생이라는 참패감과 피해의식,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끼리의 남다른 동류의식, 동지감, 대학생 또래에 대한 은근한 열등감 등을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평범한 일생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일탈되어 버렸다는 강박관념과 짜릿한 긴장감이 춤추는 이 불안한 청춘들의 이야기는 '입시'라는 하나의 장에서 철저하게 소외(탈락)되어 버린 이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에서 비롯되기에 다른 장르에 비해 더욱 사랑 받을 여지가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군내나는 지긋지긋함이나 학창 시절에 대한 향수 등등 입시에 대한 애증을 품고 살지 않았던 사람이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자고로 진한 애증의 대상일수록 좋든 싫든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볼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었던가.

에가와 테츠야의 '동경대 이야기'(국내에서는 '캠퍼스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 '성민'은 공부에서 운동, 외모까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완벽한 모범생. '수희' 라는 상냥하고 예쁘지만 지극히 백치스럽고 단순한 여자친구도 있다. 그러나 누구도 의심치 않았던 동경대 입시에서 수희는 법대에 합격하고 성민은 불합격, 성민은 다른 학교에 임시로 붙어놓은 채 다시 입시공부를 하는 이른바 가면 재수생 생활을 시작하고, 학업과는 별 상관없는 여러 천신만고 끝에 동경대 법대에 합격한다.

'동경대 이야기'에서 성민의 수험 생활은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설정으로 가득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작품의 미덕은 한 남자에 대한 비할 데 없이 치밀하고 세세한 심리 묘사에 있다. 성민은 대학 입시에서 떨어진 열패감, 여자친구에 대한 집착, 열등감, 삶에 대한 사소한 회의, 불안정한 자아, 유치하고 무책임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 등과 끊임없이 씨름한다. 동경의 대상이었던 엘리트 미소년의 내면에는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자신을 추스리지 못하는 대책없이 불안한 자아가 있었을 따름. 작가는 이 불안정한 한 인간의 심리를 징그러우리만치 세세하게 보여주는데, 장면 장면 하나 가득 채워지는 성민의 독백을 일일히 따라가기가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성민이 대학에 진학하고 난 후 '동경대 이야기'는 갈팡 질팡하며 제 갈길을 찾지 못하는 듯 보이더니 끝내 더이상의 신보를 만날 수 없게 되었는데, 진정한 자신을 찾지 못한 채 끊임없이 회의만 하는 이 안스럽고 한편으로는 답답한 청춘의 일대기가 미완으로 끝나게 된 건 안타까운 일이다.

한편 시나사카 고지의 '수험의 제왕'은 아예 입시에 대한 한편의 우스운 농담에 가깝다. 대입 문제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은 물론이고 문제를 풀 때의 모든 테크닉과 요령, 각 대입 학원 교사들의 특징과 출제 경향, 인간 관계 등 점수를 올리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통달한 9수생 '수험의 제왕'을 만난 재수생 케이지의 좌충우돌 코믹 일대기인 '수험의 제왕' 에서 수험은 기쁨과 슬픔, 한숨과 눈물이 뒤섞인 애증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한바탕 농담을 위한 희화의 대상이다.

대입 대리시험을 치뤄 주며 돈을 벌기도 하고, 케이지를 희망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기도 하는 희화적 캐릭터 '수험의 제왕', 수험의 제왕을 스승 삼다가 삼수에 이르는 주인공 케이지, 비슷한 레벨의 친구들을 탈락시키기 위해 일부러 그들을 놀게 만들고 몰래 공부하는 여학생, 수험생들을 포기 시키는 이른바 전문 '수험생 포기 전문가' 등등 이 만화는 허무 맹랑하기 짝이 없고 지극히 과장되고 코믹한 인물들의 연속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수험의 제왕'은 희화화된 외피 사이사이로 대입 수험 학원의 인기 강사 만들기 작전, 작은 일에도 쉬이 동요할 수 밖에 없는 수험생들의 불안한 집단심리 등 숨겨진 입시 세계의 생리들을  언뜻언뜻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 수험생 만화의 백미라 불리는 하라 히데노리의 '겨울 이야기'를 보자. 시원찮은 성적과 개성 없는 성격, 매사 무기력하고 우유 부단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 히카루는 현실적인 인물의 전형에 사뭇 근접해 있는 평범한 인물이다. 윤기 없는 일상, 비전 없는 재수 생활, 뭔가 잘해 보려는 의도조차도 있는 둥 마는 둥 흐릿한 인물에게 의지 박약은 필수, 또래를 향한 연모의 감정조차도 지독한 열등감과 미련한 우유 부단함에 희석되어 모멸감까지 불러 일으킨다. 삼수 끝에 간신히 대학에 들어가지만 그것도 사회에서 인정하는 성공된 수험생의 잣대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2류대 입학일 뿐. 과장된, 혹은 조금이라도 일탈된 행동을 해 줬으면 하는 바램까지 갖게 하는 이 암담한 주인공의 이야기가 사랑 받는 이유가 불가사의할 지경이다.

그러나 '겨울 이야기'의 미덕은 바로 이런 뭐 하나 극적일 것 같지 않은 별 볼일 없는 주인공들과, 또 역시 크게 다르지 않는 주변 인물들의 일상을 정감어린 눈길로바라보고 감싸 안는 작가의 시선에 있다. 온갖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인생사가 소용돌이치는 만화 속 현실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성공을 한 번 정도 마땅히 선사해야 할 주인공은 언제나 미적미적 주저 앉으며 도망치기 일쑤고, 주인공의 연속되는 실패와 좌절은 결코 화려하게 눈부신 결말을 보장하는 도구가 되어주지 않는다.

시련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까지만 해도 독자들의 공감을 타고 가며 함께 하던 주인공들이 지극히 만화적인 비상과 함께 눈부신 환상의 피안으로 날아가 대리만족의 메신저로 탈바꿈하는 다른 만화들과 달리 '겨울 이야기'의 히카루는 끝까지 독자들의 현실을 떠나지 않으면서 남루한 일상의 궤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누구 말마따나 '시련은 있지만 실패는 없는' 인물이 아니라, 시련은 있되 눈부신 성공도 없는 이 부박한 일상의 법칙에 충실한 캐릭터들이 역시 별반 극적일 것 없는 독자들의 현실과 함께 하기에 '겨울 이야기'는 특이한 매력을 지닌다.

'겨울 이야기'가 '동경대 이야기'와 다른 점도 여기에 있다. '동경대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최고의 엘리트 코스라는 동경대를 배경으로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물론 등장 인물들 중 공연한 엘리티즘에 경도된 속물들은 흔치 않고, 성민은 '동경대생'이라는 위치가 자신에게 걸맞은 것인지 회의하며 끊임없이 자신에게 뿌리박힌 엘리티즘과 선민의식을 증오한다. 그러나 시험과 공부에 있어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며 그 외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성민의 일상은 점수 몇 점에 일희일비하는 부박한수험생들의 현실과는 애초부터 다른 차원의 현실이다. 제목 그대로 '동경대 이야기'는 동경대라는 대상을 기반으로 한, 성공의 열쇠는 당연스레 가지고 있되 성공의 의미에 대해 회의하는 한 엘리트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러나 입시 학원의 귀한 자식이자 명문대를 목표로 하는 양지의 재수생이 아닌, 지극히 평범하기에 잊혀진 이들의 모습과 심리를 섬세하게 묘파해 내는 이 '겨울 이야기'는 취업 재수생의 일대기를 그린 '섬데이' 등과 더불어 하라 히데노리 특유의 감각선상의 정점에 있다. 현기증 나는 성공 신화의 뒤안에 가리워진 소박한 인물들과 일상에 대한 진한 애정. 입시의 광경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로 있던 인물들은 하라 히데노리의 만화 속에서 비로소 그 존재를 인정받는다.   

애증의 농도가 짙을수록 감정의 프리즘은 많은 빛을 걸러낸다. 입시라는 대상에 대해 누구보다도 다양한 얘깃거리를 풀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작품이 아닌 우리 나라 작품 중에서 딱히 수험생 만화라고 불릴 만한 만화를 본 기억이 없는 건 어쩐 일일까. 해마다 계속되는 이 연중 행사 속에서 출렁이는 수많은 사연들, 이야기들이 만화로 이야기된 적이 없다는 건 좀 섭섭한 일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겨울이야기
- 하라 히데노리

동경대학물어
- 에가와 타츠야

섬데이 - 하라 히데노리

메종일각
- 타카하시 루미코

5년생 - 키오 시모쿠

러브히나 - 아카마츠 켄

파이트
- 아즈키 유

굿모닝 티처
- 서영웅

수험의 제왕
- 시나사카 코지

닥터 노구찌
- 토시유키 무쯔

그와 그녀의 사정
- 츠다 마사미


 ▶ 기사:  bluewter
 ▶ 조회: 2854 | 등록: 2002/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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