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a4/Halim] 교훈과 설교는 어떻게 오락성을 획득하는가 -

- 교훈과 설교는 어떻게 오락성을 획득하는가 -

(서영웅의 방식에 관하여)

글: halim

90년대 한국소년만화의 흐름은 70년대 이전부터 이어져온 명랑만화 혹은 아동만화의 전통을 단기간에 대체해버린 일본소년만화의 문법에 적응하고, 나름대로 ‘몸에 맞는 옷’을 찾아내기 위한 암중모색의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이는 어떤 한 측면에 대한 것으로, 실제의 변수는 더 많겠지만). 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유입 10년 만에 변화의 동력으로 작용해 왔던 일본만화 자체가 질적 양적인 면에서 모두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지금까지도 ‘한국소년만화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론(異論)이 분분할 뿐이다.

필자가 그런 혼란스러움에 한 삽 더 얹는 셈으로 한국소년만화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꺼내드는 카드는 일단 서영웅이다. 그런데 그는 떳떳하냐고? 글쎄 ... 무슨 상관인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정체성은 한국적 전통의 계승 같은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우선 짚어두어야겠다. 필자는 단지 ‘지금’ 한국의 소년만화가 어떤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가, 만화판의 한 부분을 차지할 만한 존립근거를 가지고 있는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그 뿌리에 일본만화의 영향이 있고 없고는 사실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서영웅에게 돌아가자. 전통적인 문하생 시스템 대신 만화동호회(해오름) 활동을 거쳐서 데뷔했고, 100만부 클럽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의 인기를 확보하기도 했던 그이지만, 아마 전통적인 도제시스템에서 라면 데뷔기회를 갖지 못했거나 혹은 애초에 작가의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일본소년만화흐름의 유입으로 혜택을 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그것은 시스템차원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형식과 내용, 그것이 창작, 소비되는 문화적 맥락에 이르기까지 일본만화의 영향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명백한 영향관계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화자들이 지난 10년 간의 한국소년만화가 내놓은 ‘고유의 무엇’을 추려내려고 할 때 서영웅을 언급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서영웅이라는 특정작가에 국한되는 특징으로서 진한 계몽성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내용적인 면에서 과거의 아동만화와 90년대 이후의 소년만화를 가르는 특성 중 하나는 작품을 통해 어린 독자에게 어떤 교훈을 주려 하는가 혹은 그것에 관심이 없느냐(결과가 아니라 의도의 측면에서)의 문제이다. 교육론적 관점에서 최소한의 자기합리화를 하지 않고는 사회적 질시를 버텨낼 수 없었던 상황적 측면에 기인한 특성이긴 하지만.

서영웅은 90년대의 작가이면서도 80년대의 기준으로도 과하다 느낄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전달하고 있는데, 그 노골성은 비단 소년만화 뿐 아니라 90년대 한국만화 전체를 통해서도 그 외에 다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이다. 굳이 찾아보자면 박무직과 이원복이 있을 것인데,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서영웅은 이 둘과 혹은 기존의 다른 ‘건전한’ 작가들과 비교할 때 교훈의 전달기작(metabolic pathway?)에서 전혀 다르다. 여하튼 데뷔단편 「수호천사 마니또」부터 첫 연재작인 「못 말리는 수호천사」, 작가를 지명도 있는 대중작가의 위치에 올려놓은 대표작 「굿모닝 티처」, 최근작인 로봇물 「레이븐(RAVEN)」에 이르기까지 소재와 형식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서영웅류의 계몽성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작품세계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다.

계몽성의 부분을 제외하면 서영웅의 작품은 전형적인 오락성 중시의 상업만화이며, 소년만화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 한계점 또한 여전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작가가 제시하는 메시지가 올바른가를 물어볼 이유는 없을 것이다(지면도 없다;;;). 메시지의 방향성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시도가 과연 성공했느냐 일 것인데, 놀랍게도, 서영웅의 설교는 - 경파물만 즐길 것 같은 - 10대 독자들에게도 별 문제가 안 되는 듯 하다.

굿모닝 티쳐의 만만치 않은 대중적 성공이 증명하듯 그의 독자들은 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쉴새 없이 설파하는 교훈들을 작품의 다른 오락적인 부분들과 함께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오락적인 부분 위에 ‘효과적으로’ 교훈성을 실어보내고 있다는 - 이원복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학습, 실용만화가 그렇듯이 - 의미는 아니다.

서영웅의 경우 완전히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는데, 작가가 대사와 나레이션을 통해 제시하는 자신의 인생과 진로에 대한 고민, 옳고 그름에 대한 통찰, 현명한 선배의 충고들은 그 자체로 재미 혹은 흥미진진함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누가 더 현명한가를 겨루는 지적유희에 가깝다. 이 시점에서 작용하는 것은 독자를 감화시키는 교훈의 힘이 아니라, 명백히 남성향 오락만화의 핵심적인 흥미유발 코드인 ‘승부를 겨룸‘의 메커니즘이다.

「굿모닝 티처」의 독자들은 고등학생(맞는가 싶을 만큼 성숙한 사고와 현명함을 갖춘) 최치선과 선생님(맞는가 싶을 만큼 발랄하고, 사려 깊으며 학생들을 애정으로 이끄는) 정경희의 승부(?)를 보며 손에 땀을 쥔다(사실 작품 전체에 걸쳐 최치선과 정경희는 쉽게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양대 고수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오가는 게 주먹이 아니다 뿐이지 지속적인 레벨업과 또다른 고수의 등장으로 요약되는 격투액션물의 패턴과 다를 바 없으며, 그 점에서 서영웅은 정통(?)소년만화의 노선을 성실히 고수하는 작가이다.

서영웅은 소년만화 고유의 대결물 구도를 나름의 방식으로 전화(轉化)시켜, 학원물이 학원폭력물로 승화하지 않고 그냥 학원물로 남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작품을 구성하는 다른 재미요소 위에 원래 의도했던 메시지를 실어보내는 대신 메시지 전달 자체를 흥미거리화 하고 있다. 일본만화를 특징짓는 개인의 대오각성에 의한 문제해결 패턴을 넘어 한 반, 혹은 학교 혹은 더 큰 규모(「레이븐(RAVEN)」과 「굿모닝 티처」를 비교해 보라)에서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의 관계를 다루는 작업-기실 이 부분은 서영웅과 한국소년만화의 층위를 넘어서 한국만화와 일본만화 전체를 비교하고자 할 때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잣대인데, 이에 관한 추가의 고찰은 이 글의 범위를, 내용과 분량 모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통해 그 자신 어쩔 수 없는 ‘한국작가’임을 입증하고 있기도 하다.

정체성이란 딱 집어서 이거(한국작가?), 이거(100만부 클럽?), 저거(한국적 소재?) ... 의 조건을 충족시킨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서영웅이 그러했듯이 작가자신의 개성과 한국현실의 특성을 반영하여 조금씩 바꿔나가는 것. 그런 시도들이 조금씩 누적되는 것. 이런 과정들이 알게 모르게 반복되고, 누군가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 이렇게 자연스레 되어지는 것이다.

서영웅은 「레이븐」을 6권까지 내고 연재를 중단한 채 입대했다(업보와 같은 한국의 현실이여 → 실은 이 또한 고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토양이기는 하다). 2년 2개월의 규격화된 시간이 작가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으나, 필자는 일단 기다려 볼 생각이다. 기대라는 건 기본적으로 좋은 쪽을 염두에 두는 법이니까. [h]



 ▶ 기사:  halim
 ▶ 조회: 3570 | 등록: 2002/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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