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sycomic-Na] BECK - 록에 대한 교과서적인, 그러나 충실한 묘사



누구라도 자기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소재가 만화에 등장한다면 보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묘사되는 방식이나 내용에 뭔가 문제는 없는가를 꼼꼼히 살펴보고,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 장면은 뭔가 오해를 불러들일 소지가 큰데, 등등 따져보기 시작한다.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밴드를 한 경험 때문에 만화에 록이나 음악에 대한 소재가 등장하면 유심히 들여다보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평가의 핵심적인 기준은 - 리얼리티다.


내가 무슨 록 지상주의자여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예를 들어 록밴드의 멤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면 "멋있게 때문에 록밴드의 멤버다", "록밴드의 멤버니까 멋있는 사람이지"라는 식의 순환적인 편견이 가득가득 들어차는 것이 불만족스럽다. 전설이나 신화에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근접한 사람, 일상에서는 차가우면서도 무대에서는 열정적인 냉미남, 관중들의 환호를 받기 위해 태어난 기린아, 한마디로 요약하면 패셔너블한 반항아의 박제인 캐릭터들. 물론 어차피 욕망을 소비하고, 소비를 욕망하는 시대다. "만화에서 리얼리티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이 다루는 소재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정당한 것일 터다. 일본만화 [TOY](아츠시 카미조)나 [Kissxxxx](쿠즈모토 마키)를 볼 때도 느꼈던 점을 말하자면, 이 작품들은 특별히 록에 대해 충실한 서술을 하려는 강박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 특히 [Kissxxxx]에서 록은 데카탕한 연애 이야기의 데카탕한 배경일 뿐이지만 - 일본의 인디록 클럽과 록문화를 둘러싼 10대들의 문화가 캐릭터와 대사, 배경에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그것은 이 작가들이 실제로 그 문화에 대해 이미지만 따오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동반한 이해를 동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어야 환상도 설득력을 가지고 오래 갈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NANA](아이 야자와)의 경우, 굉장한 패션센스가 그 인기의 주동력이고 '록커'라는 꺄아악 카리스마 이미지를 다분히 의도적으로 우려먹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밴드가 결성되고, 클럽에서 공연하고, 해체되고, 인물들이 갈등하는 이야기들은 그 디테일에서 현실성을 띄고 있다. 그것은 록밴드라는 것은 단지 취향을 반영한 환상이고 그것이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서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이들에 의해서 불려지는가는 만화와 아무 상관없다는 태도로 그려진 작품들은 아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간다면 본격적인 록에 대한 만화가 나오면 어떨까, - 역시 나 자신이 애착을 가진 소재이기 때문에 하는 소리지만 - [슬램덩크]의 경우처럼 좀 과장이 있더라도 실제 그것을 경험해본 사람이 정성을 다해 충실히 묘사하듯 그려낸 작품이 있으면 어떨까. 혹은 록 자체를 주제로 삼는 그런 만화는 어떨까, 하고 바라게 되는 것이다.


해롤드 사쿠이시의 [BECK](현재 한국에 10권까지 발간)은 이런 점에서 최근작 중에서는 주목해서 들여다볼만하다. 이 작품은 록에 대한 매우 충실한 텍스트이다. 이 '충실하다'는 단어가 이 작품이 록을 다루어내는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가 될 수 있을 듯 하다. [BECK]은 록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충실한, 다분히 교과서적인(도식적인!) 경애를 바치고 있다. 이를테면 비틀즈, 레드 제플린, 존 레논, 제프 벡.. 뭐 이렇게 록의 전설적 인물들을 주욱 나열하는 식이다. 그리고 "록이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이제 막 록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하는 록음악 애호가가 옆자리 친구에게 줄줄이 늘어놓듯이. 나로서는 이런 교과서적인 충실함 조차도 반가워서 굳이 단점으로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만화는 그 록음악을 대하는 철학이나 마인드에서 독자적인 면모를 담고 있지는 못하다.  좋게 표현하면 '입문서 같다'라고 할까. 그런데 사실 입문서 같다는 것은 대중만화로서 강점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만화는 록 애호가들을 위한 것은 아니니까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집어치우고 좀 심도있는 이야기를 하자"는 식의 태도는 방해일 수도 있는 것이다.


[BECK]은 록에 입문하고 밴드의 멤버가 되어 점차 인정받으며 성장해나가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충실히' 묘사하는데 있어서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왕따를 당하며 괴롭힘을 받던 한 소년 유키오는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록음악 애호가라는 우연한 계기로 록에 빠져들게 된다. 빌린 기타로 어느새 기타연주를 연습하게 된다. 괴롭힘을 당해도 싫다는 소리 한 마디 제대로 못 하는 성격의 유키오는 무엇에 홀린 듯이 기타에 매달리게 되고 주변 사람들에 의해 잠재적인 재능을 인정받는다. 그는 'BECK'이라는 밴드의 세컨드 기타 겸 세컨드 보컬이 되고 힘든 연습과 공연들을 통해 주인공의 재능은 자신도 모르게 성장해나간다. 이와 함께 밴드 'BECK'도 음악적으로 성숙하고 창작곡들도 물이 오르지만 주류 음반산업의 큰 손에게 밉보이게 되어 기획사를 얻는 데 좌절만을 맛본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본의 국제적인 록 페스티벌에 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는데.....(10권까지의 내용)


[박해와 차별 → 우연한 계기로 인한 각성 → 수행과 고난 → 극적인 계기와 도전 → 성공] 으로 이어지는 신화나 대중문화의 전형적인 플롯이긴 하지만 어떻게 서술하느냐에 따라서 보편성이라는 강점을 가질 수도 있다. 여기에서 이 작품이 보편적인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주인공의 주변 상황과 그에 따른 심리변화를 "설명하려" 하기 보다는 성실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초대한 파티에 갔다가 문전에서 따돌려진 유키오가 집으로 돌아와서 말 없이 기타를 치는 장면 등의 군더더기 없는 연출은, 왜 주인공이 고교생활과 힘겨운 아르바이트를 감내하면서 밴드활동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유키오는 "이대로 가면 나는 정말 평생 마찬가지의 별볼일 없는 인간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안고 있다. 때문에 주변에 의해 소외될 때마다 웃는 얼굴로 헤헤거리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기타를 품에 안는다. 울거나 화를 내는 대신에 기타를 연습한다. "굉장해, 텔레케스터(기타제품명)는 나의 어떤 기분이든 다 표현해줘"


'소외된 자의 절실한 자기표현', 이것은 록을 둘러싼 진실이고, 동시에 날조된 도식적인 신화이기도 하다. 확실히 록은 소외된 자아의 자기표현이지만 동시에 록은 부유한 자의 취향일 수도 있다. 정해진 진실은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작품은 도식적이라는 비판을 들을 수 있는데, 비록 록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할 때는 다분히 교과서적이지만, 캐릭터들에 대해서는 구구절절이 설명하려 하지 않고 주인공이 처한 상황들을 충실히 보여주면서 감정이입을 차근차근 이끌어내는 것이 이 작품의 미덕이기도 하다. 이러한 미덕이 교과서적 전형성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되살려내는 힘이 된다. 주인공 유키오가 자기과시적이지 않고 내성적인 캐릭터로 항상 "난 너무 부족해. 좀 더 잘 하고 싶다"라고 끊임없이 되뇌이고 있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동일시의 효과이기도 하고. 비록 그 녀석이 누구나 듣기만하면 감동해버리는 대단한 목소리의 소유자라는 설정이기는 하지만, 이것도 현실성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주인공 유키오보다는 그가 소속된 밴드(미국 록밴드 Red Hot Chili Peppers를 모델로 한 듯한)가 어떻게 활동하고 발전하고 갈등하는지에 줄거리를 할애한다. 


사실 이 작품에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부분은 "재능이 있으므로 당연히 성공한다"라는 식의 단편적인 서술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대부분의 만화가 주인공들이 재능을 발휘하기만 관객들은 환호성을 지른다는 식으로 공연을 묘사한다. 그러나 이 만화에서는 밴드 멤버들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대부분 냉담하게 반응하는 것이 그려져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BECK]에는 이것들이 담겨있고, 그것이 내가 록 팬의 한명으로서 이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다. 관객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재능 이외에 많은 훈련과 다듬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도 끝내 관객의 이해를 받지 못할 수도 있고, 언더에서 나름의 팬을 거느린다고 해도 끝내 시장진입에 실패할 수도 있다. 밴드를 하는 것은 힘이 들고, 영광은 거의 없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겨우 지켜낼 수 있을 뿐이다. 그것조차 지켜낼 수 없으면 그만두는 것이고. 


밴드 BECK이 하루종일 아르바이트를 해서 연습실 사용비와 녹음비을 대고, 전단지를 뿌려가며 점점 팬들을 늘려가는 과정, 창작곡을 만들고 밥을 새워 연습을 하며 더 나은 연주를 하기 위해 애를 쓰는 과정이 묘사된다. 처음에 F코드 잡기를 어려워하고 손가락 끝에 물집이 잡히는 것이라든가, 무대에 선 유키오가 "제발 이번에는 (기타줄) 끊어지지 마라"하고 속으로 되뇌이며 연주를 하는 장면, 기타를 사러 악기점에 갔더니 점원이 기를 죽이려고 위압적인 테크닉의 연주를 해보이고는 "자 세팅 완료했어요, 쳐보시죠"하고 바라보는 장면 같은 것은 기타를 배우고 자기 기타를 가지고 연주를 하게 되는 과정에서 꼭 으례 겪는 일들이다.


[BECK]은 일본의 강담사 만화상의 2002년 소년만화부문을 수상했다. ('소년매거진' 등의 잡지를 거느리고 있는 강담사에서 주최하는 상) 독자들은 이 만화에서 대리적으로 현실 속의 록을 접할 수 있다. 단 주의할 것은 이 만화 속에서 묘사되는 전통을 자랑하는 비교적 큰 규모의 록클럽 같은 것들은 한국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한국에 비해 언더의 록문화가 활성화되어 있다. 언더음악계가 거대음반산업 시스템에 짖눌리는 것은 그 쪽도 마찬가지지만 언더의 록밴드가 주류시장에 진출, 대박을 터트리며 성공하는 사례도 없지 않은 편. 요컨데 자기 동네 록밴드, 그리고 그 록밴드의 팬이 된 소년소녀집단, 그들을 받아주는 문화적 기지국으로서의 클럽들. 일본은 록밴드 이야기를 할 때 작가가 그 문화를 실제로 겪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국은? 조선펑크의 발원지라고 떠받들어지는 'DRUG"에 가봐도 처음 드는 생각은 작고 초라하다는 인상일 뿐이다. 그리고 어차피 몇 개 되지도 않는 홍대의 록클럽은 손님이 부족해서 '망하는 중'이다. 권위도 없고 밥도 없다. 한국에 록-문화는 서울이나 부산 등의 골목골목, 몇몇 특수지역을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는다. 엄청난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가도를 달리는 록 뮤지션 따위는 한국에 없다. 한국의 어떤 록밴드가 공연을 한다고 해도 댄스그룹의 관객동원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한국에서 록이 만화에 소재로 쓰일 때 해외 록 뮤지션의 이미지를 따다가 허구만으로 그려낸다고 해도, 그럴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의 마음 속의 진실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현실과는 괴리가 너무 큰 진실일 것이다.




 ▶ 기사:  깜악귀
 ▶ 조회: 4632 | 등록: 2002/08/29 
EZBoard by EZN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