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콤 쌉싸름한 요리만화-미각만화라고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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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만화광 아이가 '미스터 초밥왕' 이라는 제목도  해괴한 한 만화책을 교실로 가져와서 읽는다. 낯설기도 하고 유치찬란하기도 한 그  제목을 보며 친구들은 하나같이  박장대소했지만 종국에는 모두 이 만화에 빠져, 만날 때마다 '초밥  한 번 먹어보는 게 소원이다..' 내지는  '초밥 먹기 계를 만들어서 한 달에 한번씩 초밥을 먹으러 가자'  는 류의 궁상이 철철 흘러 넘치는(초밥이 그리도 비쌌단 말인가!) 이야기나 하는 것이 근 한 달이 갔고, 그것은  처음 만나는 요리만화가 아이들에게 끼친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다. 그만큼 '먹는 것' 을 가지고 이리 뒤집고 저리 헤집어 음식을 더 이상 예사롭게 바라볼 수 없게 하고, 나아가 음식에 대한 동경까지 갖게 한 것이 바로 이 요리만화였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인간의 오감은 다섯 가지지만 본질적으로 만화가 만족시킬 수 있는 감각은 시각밖에는 없다. 그래서 만화는 다양한 효과들로 나머지 청각, 촉각 등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내려고 애썼는데, 요리만화는 만화 상에서 미각, 후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내려는 일련의 노력들이 요리라는 흥미로운 소재와 배합되어  인기 장르화된 재미있는 경우다. 바야흐로 요리 만화는 만화라는 매체 속에 세상  만물을 담고파 하는 생산자의 끝모를  표현욕과도 맞닿아있다고 해야할까.

'맛의 달인' 이나 '소림사 주방장', '맛있는 관계', '라면왕',  '아빠는 요리사', '맛 일번지'  외에 셀 수 없는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요리 만화는 유독 일본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자동차 만화, 갬블러 만화 등 전문적 만화 장르가 활성화되어 있고, 미식(美食)이 한량들의 배부른 도락이 아니라 전국민적인 관심사인 일본의 상황을 감안해보면 왜 요리 만화가 이토록  강세인지는 대충 이해는 간다. '요리' 와 '음식' 은 전국민의, 아니 모든 인간의 관심사 아닌가. 수용자층이 일정하게 갈리는 여타의 전문 만화들과는 달리 요리 만화는 '식욕' 이라는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에 소구하기에 가장 거대한 수용자층을 지닌 전문 만화다.

요리는 음식이라는 대상이 가지는 친화성과('사람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같이 밥을 먹어야 한다' 는 명언은 참으로 진실이다.) 따뜻함, 요리라는 행위가 지니는  이타적 성격( '요리' 하면 순간 떠오르는 것이 나를 위해 음식을 해 주는 어머니 내지는 아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자고로 요리는 남을 위해 해 줄 때가 나 혼자 해 먹을 때보다 더 신명나는 법이다), 친밀감을  갖는 독특하고 다감한 문화 활동이다. 그러나 최근 요리 만화의 경향을 보면 딱히 그러한 요리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할 때도 있다. 처음으로 접한 요리 만화로 충격과 재미를 동시에 안겨준 '미스터 초밥왕' 이 드래곤볼을 방불케 하는 열혈 대결구도로  간 것을 위시해서 속속들이 나오는 요리 만화가 제목부터 무술 만화와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요리 천하', '소림사 주방장', '천하 제일 요리왕', '중화 제일권'.. '미스터 초밥왕' 도 해적판 제목은 '맛의 황제' 였다!) 피끓는 남자들의 뜨거운 한판 승부! 식으로 나오는 것에는  물론 개개의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적어도 나로서는 조금 아쉬운 느낌이다. 역시  남자 최고, 궁극의 목표는 어떻게든 승부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단 말인가? 더없이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행위인 요리가 '사각의 링' 풍의 토너먼트 각개전투가 된 사실은 승부 구조만이 줄 수 있는 매콤한 짜릿함마저도 씁쓸하게 느껴지게 할 만큼 섭섭하다.

또 지고한 장인정신이라는 아이템도 요리 만화의 기본 조미료다. 지극히 본능적이고 일상적인 행위인 요리가 스토리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정말 요리라는 사소한 것에  목숨거는 사람들이 있지 않고서야 어려운 법. 초밥왕, 요리왕, 맛의 달인, 라면왕에 이르기까지 요리를 만드는 각각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작품' 에 목숨을 걸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알짜배기 장인들이다. 미각의 극한으로 치닫는 극히 미세한 맛의 차이를  위해 목숨을 걸고, 완벽한 요리를  만들기 위한 결벽증은 요리장인을 괴팍스런 기인으로 보이게도 한다. 이들에게 있어 요리는 삶의 목적이기 이전에 삶 그 자체다. 또 요리 만화의 전통적인 승부구조는  승패를 판단해 줄 '손님' 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장인의 존재는 이를 알아보는 이에 의해 알려지는 법, 요리의 진수를 아는 '고수' 들은 맛의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고 작품'의 가치를 가차없이 재단한다. '맛의 고수' 내지 손님은 장인정신과 더불어 요리 만화의 소금과 설탕 같은 존재.   

그러나 완벽한 요리를 향한 고고한 장인정신과 결벽증은 '맛' 의 세계에서도 일류와 삼류, 고수와 하수가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방증한다. '진짜 장인이 만든 고귀한 맛'과 '인스턴트 음식의 형편없는 맛'을 구별치 못하는 이를 경멸스레 바라보는  요리 만화의 시선에는 미각의 세계에도 귀족과 천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맛의 진수를 알지 못하는 자 진정한  요리를 맛볼 자격이 없을 지어다, 최고의 장인이 만든 최고의 요리는 최고의 손님만이 알아볼  수 있다>고 근엄하게 꾸짖는 듯한 장인 정신의 무게는 종종 가시뼈처럼 목에 부담스레  걸린다. 과유불급이라고, 지나치게 과장된 장인정신과 결벽증은 맛의 행복을 창조하는 것을 넘어서 미각의 심오한 세계에 무지한 범인들을 종종 풀죽게 한다.

그런데 요리만화에서 보여지는 장인정신에 대한 일본  만화의 지극한 애정이 드디어 술에까지 시선을 옮기기에 이르렀다. 하기사 인간의 미각, 맛으로부터 얻어지는 쾌락을 소재로  한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하는 요리  만화의 등장 속에서 '술'  이라는 더없이 매력적인 소재가 이제사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새삼스러운 일인지도. 하지만 '술' 은 어디까지나 요리의 재료일 뿐, 아키라 오제의 '명가의 술'은 요리만화가 아니다. 그러나 '먹거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련의 만화들을 한 카테고리 안에 둘 수 있다면 이 '명가의 술' 과 다른 만화들을 더불어 미각만화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가의 술' 은 소재가 술이라는 이유로 섣불리 요리 만화들과 더불어 미각만화의 범주 안에 넣을 수 있을지 사뭇  망설여질 정도로 종래 미각 만화들의 정석과는 얼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술이라는 소재를 인간사의 온갖 다양한 스펙트럼이 통과하는 흥미로운 프리즘으로 담아내기보다는 진정한 술의 순수함과  잊혀져버린 전통을 가꿔내고자 하는 장인들의 이야기로 풀어나간 것. 술이라는 단어의 선정성에 혹했던 독자들은 일찌감치 책을 덮을 수 밖에 없다.

도쿄의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나츠코는, 일본주를 제조하는  양조장의 가업을 잇는 오빠가 병사하자 낙향하여 일본주 제조에  몸담게 된다. 오빠의 평생  꿈이었던 최고의 음양주를 만들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딛고 다츠니시키라는 쌀을 직접 재배하기 시작하지만, 농업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이제는 거의 사라져 버린 까다로운 쌀을 재배하고, 대형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술 대신 적은 양이나마 최고의 음양주를 만들겠노라는 그녀에게 격려와 찬사보다  냉소와 질시가 더 따라다닐 것은 불문가지. 그러나 나츠코는 '최고의 술'  을 만들겠다는 집념과 강인함으로 계획을 실천해 나간다. 

'명가의 술'이 강조하는 것은 술  자체라기보다는 우리 먹거리가 창조되는 근본인  자연과 농경에 대한 외경심이다. 작가는 순수한 술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사라져 가는 시대를 농경에 대한 경건심이 사라져 가는 농촌의 모습과  병치시킨다. 알코올과 화학약품을 섞어  대량 제조되는 술과  농약을 잔뜩 사용하는 농사는 먹거리, 나아가  인간의 건강을 위협하는 경제  논리의 산물이다. 이에 나츠코는 자신들의 농촌에 농약을 뿌리는 것을  거부하며 유기 농법을 권장하고, 최고의 쌀로 가장 훌륭한 음양주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이 음양주가 순수하지 못한 쌀겨로 만들거나 알콜이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알짜배기 술인 것은 당연지사. <명가의 술>은 나츠코의 양조 공장이 있는 농촌 마을의 농경생활과 더불어 쌀, 나아가 땅과 자연에 대한 애정까지 면면히 훑어 내려가는 진지함을 보이고 있다. 또  농사를 성스러운 과정으로 생각하는 괴짜 농부 고다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보통  농부들의 입장에 이르기까지, 농경 생활의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하는 것도 작품의 또 다른 장점.   

전통적인 미각만화의 호들갑스런 대결/승부구조의 에피소드들 대신 최고의 술을 만들기 위한 지난한 과정과 순수하게 술을 사랑하는  장인들의 끈질긴 노력을 지리하리만치  성실하게 보여주는 것도 <명가의 술>의 특징이다. 주인공 나츠코와 공장장 할아버지, 인부 쿠사카베 등은 모두 술에 미쳐 사는 술 장인들로, 이들이 만들고자 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정도의 술이 아니다. 술 감정에 있어서는 이미 보통 사람의 경지를 뛰어 넘은 나츠코가 만족할 수 있는 맛은 오직 그녀 외에는 알아볼 수 없는 것이라면, 미각의 극한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도 싶다.

그러나 소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들만의 술' 이 갈 곳은 정말 부유한 소비자들의 술 콜렉션 사이이지 부담 없는 가격의 술로 삶의 애환을 달래는 돈없는 서민들의 식탁 위는 아닐 것이다.  '자기도 안 마셔봐서 향도 모르면서 물건만 파는 술집주인, 급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것도 모르고 간바이만 찾는 손님, 순미주가 뭔지도 모르는 가게...믿을 수가 없어.  일본주의 명맥이 그런 사람들에 의해 유지된다는 게.'  고 한탄하는 나츠코의 모습은 귀한(그리고 대개는 부유한) 소수를 위해 존재하게 된 고고한 장인 정신과 대량 생산 시대의 소비자들 사이의 깊은 골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결국 그녀가 그 장인정신으로 만들어 내는 그 술은 돈 없는 서민들이 가까이 하기엔 참이나 먼 너무나 귀한 당신 아니겠는가. 진정한 술의 세계와명품의 경지에 다다른 술을 찬미하는 작가의 결벽스런 태도를 비난까지 하기는 어렵겠지만, 만화 속에서 누차 강조되는 '값만 싸고 질은 형편없는 천박한 술과 그 술을마시는 무지한 소비자들' 에 대한 경멸은 영 낯설게 들리지 않는다. <맛의 진수를 알지 못하는 자 진정한  요리를 맛볼 자격이 없을 지어다, 최고의 장인이 만든 최고의 요리는 최고의 손님만이 알아볼수 있고, 최고의 손님만이 먹어야 한다>고 꾸짖는듯한 요리 만화 특유의 근엄함. 결국 <명가의 술>도 그 외피는 나름대로 다르되 앞에서 언급한 다른 요리 만화들과 상당부분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 명품을 몰라뵈고 한낱 패스트 푸드와 값싼 술로만 배를 채우는 범인들은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이어야 하는 것인지. 미각만화의 접근소재는 기실 상당히 다양한 듯 보이면서도 또 결국 이런 장인정신의 과잉 등의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듯 싶다.

<명가의 술>은 술 제조 과정을 일일이 세세하게 설명하는 탓인지, 전통적 가치와 장인정신을 웅변하는 완고한 목소리 탓인지, 미각 만화 특유의 승부구조를 대신할 수 있는 극적 재미는 상당히 부족한 편이다. 그러나 술이라는 소재로까지 자국 특유의  전통과 향취를 새겨 넣고자 하는 일본 만화의 힘은 부러움을 넘어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음양주는 일본 전통술이고, 만화 속 숱한 대작(對酌) 장면에서 맥주나 양주는 절대 등장하지 않는다).  일본과는 달리 우리 나라에서의 미각만화는 거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나라간의 차이가 있기도 하겠지만, 장인  정신에 대한 추앙이나 요리라는 대상에 온갖 미사여구를 빗대는  모습이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호들갑스럽게만 비쳐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러나 우리 나라의 요리는 까다로운  일본 사람들도 공히 인정한 화끈한 맛 인데, 보기에는 예쁘게 꾸며졌으나 먹기에는 좀 감질나는  일본 음식과는 달리 우리 나라의 요리에는 풍요함과 넉넉함이 가득하다. 이쯤 되면 저절로  식욕을 자극하는 우리 나라 토종 요리에 대한 요리 만화가 하나쯤은 있어도 좋을 듯 싶은데. 


미스터 초밥왕 - 테라사와 다이스케

맛의 달인 - 카리야 테쯔 / 하나사키 아키라

 맛있는 관계 - 아오치 쇼우

철냄비 짱(소림사 주방장) - 사이조 신지

아빠는 요리사 - 우에야마 토우치

라면요리왕 - 카와이 탄 / 쿠베 로쿠로

맛 일번지 - 쿠라타 요시미 / 아베 젠타

명가의 술 - 오제 아키라

짜장면 - 박하 / 허영만,김재연

헤븐 - 사사키 노리코

 후라이팬 - 니시 유지 / 시미즈 미키오

꿈의 궁전 피콜로 - 나카지 유키

쉐프 - 츠루기나 마이 / 가토 타다시

 신장개업 - 츠지야마 시게루


 ▶ 기사:  bluewter
 ▶ 조회: 2906 | 등록: 2002/03/19  
토종 요리 만화라고 하면, 아니 정확히 이야기해서 요리가 만화에 소재로서 등장한 만화는 `짜장면` 정도가 있을것 같은데요, 요리 만화라기 보다는 결국은 짜장면 드라마가 되어 버린것 같죠. 김선태 2003/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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