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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F] 급진적인 남성의 시선? 『화이트 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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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성이 주도하는 폭력만화:
최근 출간된 샤린 & 루스칼의 『화이트 소냐』(현실문화연구)는 의외적인 면모로 주목받는 만화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럽권 만화가 번역 출간되는 예가 거의 없었던 데다가 대담한 데생이나 격렬한 색채의 야성성도 낯설고, '여성 느와르' 만화라는 장르 구분 역시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다. 특히 시선을 집중시키는 독특한 장르 규정은 아마도 주인공 소냐에게 현실이란 곧 범죄, 파멸, 암울한 이미지라는 느와르의 법칙을 생산해 내는 거대한 폭력 그 자체를 의미하는 데서 비롯된 듯 하다. 『화이트 소냐』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다른 표면적인 의미들보다 소냐에 대한, 혹은 소냐가 행사하는 폭력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전직 창녀 출신인 백인여성 소냐는 살인죄로 복역했던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그녀를 성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에게 또다시 시달리고 생명까지 위협받게 된다. 소냐는 그녀의 미모가 축복이라기보다는 여전한 성적 억압과 착취를 제공하는 원인으로 작용했을 뿐이었던 만큼 관습적인 여성성부터 부정한다. 레즈비언으로 자신을 규정하고 남장을 하며, 무장강도 행각과 살인 등을 일삼으며 그녀에 대한 정신적이며 물리적인 폭력에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녀를 사창가에 감금하고 변태적으로 농락했던 핀토를 살해하고 나서야 소냐는 피부색이 다양한 '자매'들이 따뜻한 인사로 기다리는 감옥으로 돌아가 평안하게 휴식한다.
결국 『화이트 소냐』에서 경험되는 다양한 폭력은 남성적 질서에서 발생하는 문제로 읽혀진다. 소냐는 남성/여성의 정체성 교란에서 시작해 백인/유색인, 자유/구속, 선/악의 이분법적 규범을 파괴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폭력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2) 주제는 좋은데 어째 필은 안오고...:
여성과 폭력의 문제를 급진적으로 다룬 『화이트 소냐』는 국내 유수의 지면에서 여러차례 호의적으로 언급된 바 있지만 현재까지 독자들로부터 직접적인 반응을 얻고 있진 않은 것 같다. 판매부수의 문제라기보다 읽고 난 반응이 썰렁하게 느껴지는 것이 문제이다.
"주제는 좋지만 이상하게 마음까지 땡기는 건 아니더라." 사회학적인 관심에서 작품을 읽었다는 후배C씨(여성, 25)는 『화이트 소냐』의 감상을 이렇게 밝혔다.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과격한 여전사가 활약한다는 설정이 서로 흡사한 영국만화 『탱크걸』은 재미있게 보았다는 동료 P씨(여성, 28)도 마찬가지이다. "취향의 문제인지 작품이 교조적으로 읽혀져." 내 주변 친구들의 평가만으로 『화이트 소냐』를 읽은 독자 전체의 입장을 대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중적인 호소력이나 직관성을 본질적인 특성으로 두는 만화인 만큼 『화이트 소냐』가 독자들로부터 별다른 호응을 얻고 있지 못하다는 평은 주목할 만하다.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겠지만 짐작할 수 있는 문화적 차이는 놔두고 하나의 내부적 문제만 지적하고 싶다. 만화에서의 공감대는 시선의 조작에 크게 좌우된다고 할 수 있는데 『화이트 소냐』의 소냐는 시선의 수동적인 대상으로 고정되고 있는 것이다. 인물 외부의 시선으로 인물과 상황을 그려내는 만화에서 인물은, 시선이 주체이기 보다는 주로 시선의 대상이기 쉽다. 그러나 인물의 시선이 반영될 수 있는 실험이 다양하게 응용되는 동북아권 만화와 달리 『화이트 소냐』의 경우 철저하게 인물 외부의 시선을 견지하고 있어 마치 하드보일드 영화와 같은 효과로 소냐의 현실을 냉정하게 드러내고 있다. 칸을 구성하고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유럽권 만화와 동북아권 만화의 방식차까지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소냐가 무력한 시선의 대상으로 방치되기보다는 장면을 장악하는 적극적인 주체로서 효과적으로 부각될 수 있어야 했다.
만화에서 시선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문제는 대단한 집중과 기술을 요구한다. 만화의 견고한 시각적 법칙 안에서 여성주의적인 주제를 설득력 있게 표현해낼 수 있는 입장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만큼 『화이트 소냐』에서 소냐에 대한 시선은 때로는 관습적인 남성의 그것과 같다는, 억울할 수도 있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평은 쉽고 대안은 어렵다. 『화이트 소냐』의 급진적 면모를 살리면서 여성친화적인 시선을 견지한 작품을 가까운 서점에서 발견해 내기란 쉽지 않다. 앞서 언급한 『탱크걸』이 국내에 정식으로 발간된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참고하게 되면(그래서 못보고 있다 T_T) 이현세의 『블루 앤젤』류를 제외하고는 소냐와 같은 전투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차용한 만화를 찾아보기 조차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국내 만화 시장의 유통 실정상 『화이트 소냐』가 수입된 것 자체가 용감한 모험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와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권 만화는 성별을 경계로 양 영역의 창작과 소비가 폐쇄적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여성주의적 만화를 남성만화의 영역에서 기대하는 것은 당분간 아예 불가능하다. 소녀적 환상에 경도된 듯 보이기도 하는 여성만화의 영역에서 역시 여전사류의 만화는 쉽게는 찾기 힘들지만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나 유시진의 『신명기』와 같은 히트 만화에서와 같이, 전체가 아닌 부분의 역할로 분명히 있기는 하다. 대체로 여성의 전투성을 강조하거나 과격하고 급진적인 방식으로써 여성문제를 웅변하는 대신 여성의 감성이나 욕망의 익숙한 문제들을 여성의 시선으로 제기하는 작품들이다.
여성문제의 범주 안에서 『화이트 소냐』와 같은 유럽권 만화와 동북아권의 여성만화를 나란히 비교한다는 것은 지역적 문화나 장르의 차이를 무시한 불균형한 시도일 수 있다. 그렇지만 방점을 두고 싶었던 부분이 어디까지나 『화이트 소냐』의 국내 출간이라는 현상적 차원에 있는 만큼 여성독자의 공감대를 중심으로 작품의 문제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성작가만이 여성주의 만화를 그릴 수 있다는 독선적인 결론으로 추락할 위험이 우려스럽긴 하지만 현재 국내 여성독자의 공감을 자극할 수 있는 만화는 여성문화의 특수성을 자연스럽게 시선에 담아내는 여성작가쪽이 우세인 것 같다.
『화이트 소냐』의 독자 반응은 시간을 두고 계속 지켜볼 생각이다. 이 작품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을 사실상 몹시 기대하는 입장이고 담론이 형성되는 과정에도 반갑게 참여할 수 있을 것 같다. : 『이프』 2001년 겨울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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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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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470 |
등록: 2002/0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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