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 사랑이 부딪친 벽


                      새로운 만화의 창작과 비평 Studio Nuf (원종우/Nufgirl)
                      (두고보자 창간 이전에 쓰여진 글입니다)



1.


김진의 초기작 [별의 초상]은 작가 김진의 처녀작(단행본으로서) 일 뿐만 아니라,김진의 타 작품 모두를 포괄해서 일종의 원형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80년대 중반 대본소에 이 작품이 등장했을 때, 나는 아연할 수 밖에 없었다.그것은 순정만화안의 어떤 변동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이런걸 두고 획기적 의미-선을 긋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순정만화계는 황미나,김동화,약간 뒤늦게 출발한 김혜린이 이끌고 있었는데, 이들 작품군의 공통된 특징은 배경이나 소재,캐릭터상에서 상당히 서구취향을 보여준다는 점과,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러브로망을 주로 다룬다는 점이었다. 서양취향의 러브로망의 전성기는 순정만화가 뻔한 연애싸움의 묘사를 넘어서, 남성(?)만화 못지 않는 스펙타클한 사건의 전개와 치밀한 극적 구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거의 10년간에 걸친 황미나,김동화의 장기집권은 그에 비해 아직도 단순한 학원연애나 에피소드를 다루는 간단한 작품들을 자연스럽게 부차적 위치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때쯤 전혀 색다른 작품 [별의 초상]이 출현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조금 후에 강경옥의 출현을 의미지을 수 있을테지만, 일단 강경옥의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별의 초상]과 그 작가 김진이 우리 순정계에 가져다 준 것을 좀 더 살펴보겠다.

2.
[별의 초상]의 소재는 러브도 아니요, 로망도, 역사도 아니다. 주인공은 공주도 아니고혁명가도 아니고 소녀도 아니다. 그 그림스타일은 순정(80년대 중반 당시의 의미로)도 아니요, 그렇다고 극화류도 아니며, 만화체는 더더욱 아니다.

[별의 초상]의 주인공들은 초등학교시절의 기억과 함께 엇갈리는 현재신분 대학생으로써, 학생신분과 사회인의 중간쯤에서 붕뜬 상태로 자기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갖지 못하는 인물들로 설정된다. 그들은 학교생활이나, 연애생활의 특정공간이 아닌, 시간적인..즉 개인사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시간을 왔다갔다 하면서 진행되고, 진학,학점,연애,삶 자체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주인공 윤하의 심리상태가 묘사된다. 사실상 윤하가 그렇게 무관심하고 피곤해하는 혹은 쉬고싶을 따름인 상태로 되기까지 관여한 인물들이 하나씩 등장한다.

반대를 무릎쓰고 결혼해서 윤하와 그 여동생 선이를 낳고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자살해버린 아버지의 기억. 남편의 자살을 용서하지 못하고 남편과 닮은 윤하에게 차갑게 대하는 어머니. 어린 윤하에게 맡겨진 책임-여동생 선이. 그리고 선이는 윤하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구속하는 가정사자체 ,나아가서는 운명의 상징이다. 윤하는 자유와 책임(사랑이란 이름의 책임)사이에서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내다가 불치의 병에 걸리고 ,결국 막판에는 연애고 삶이고 다 귀찮아 하면서 죽어간다. 혹은 처연히 운명을 수긍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주변에서 그를 바라보는 민규를 비롯한 친구들은 그의 삶이 너무나 안스럽고도 짜증난다. 왜 그는 적극적으로 선택하지 않고 그저 이끌려다니기만 하는건가라고, 하지만 그건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만화[별의 초상]은 한사람의 심리적 과정을 기억과 주변인물,그의 행동과 암시적 대사등을 통해서 해부하고 묘사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특별한 것은  그것이 이제껏의 순정만화처럼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라 작품의 모든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의 모티브는 이제껏의 순정만화들처럼 정해진 주인공의 모험(크건 작건)이 아니다. 이작품이 추구하는 바는 누가 어떻게 했다 (동사가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떻게 했지? (주어가 강조된다) 즉, 작가 김진은 순정만화에서 어떤 인간을 탐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작가는 만화를 통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는 만화를 통해서 질문을 한다. 그래서 독자는 생각을 해야만 한다. 이과정에서 나오는 재미란 사뭇 독특한 종류의 재미다.

독자는 이야기 자체의 드라마성을 즐기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만화 속에 삽입된 다양한 종류의 암호를 해독하는 재미를 즐기게 된다. 애매한 표정, 애매한 대사, 애매한 읊조림. 애매한 행동, 모순적일때도 있는 여러가지 기억의 난해한(시간을 무시한) 교차. 상황전체를 보여주기 보다는 클로즈업을 많이 사용하고, 클로즈 업된 화면안의 소품이나 배경들을 동원해서 퍼즐은 갈수록 복잡해져간다. 어떻게 아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작가 김진의 등장은 순정만화계에서 이런식으로 획기적이고 새로운 쟝르의 효시를 알리는 충격적 등장이었다.

3.


그러나 김진이 탐구하고 표현하고자 한 인간은 대체 어떤 인간인가? 윤하의 경우, 불쌍하고 안타깝지만 문제는 그가 왜 그런 불쌍한 인생을 걸어가야 했느냐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 질문이 윤하의 냉정한 어머니에게 던져질 수 있으며, 철없는 선이에게 던져질 수 있다.

그밖에 윤하의 주변에 많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결국 작가의 묘사방식에는 불쌍하다. 혹은 못됬다라고 한 두마디로 이야기 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따지고 들어가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수많은 성장기와 사연과 심리과정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결국 악한이건 착한이건 인간은 모두 불쌍한 존재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한편 민규는 불쌍하지 않다. 그는 평범한 가정과 성장기를 가졌고, 특별히 하고싶은 일도 없고 특별히 소망하는 것도 없다. 앞으로도 대충 취직해서 먹고 살만큼만 벌면 만족할 수 있고, 좋아하는 그녀는 잠시 다른세계(윤하의 비극적 세계)에 한때의 열정으로 혹해있지만, 나로선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그렇다. 나는 윤하들에 비교해서 행운아인 편이고 그 행운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에 대한 관심으로 갚겠다. 그들을 이해하고 될 수 있으면 그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싶다.

사실 그의 행운은 그가 그런 만족할 줄 아는 자세를 가졌다는 점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작은 세계의 사람이다. 그 세계는 열정적이고 과격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지만 안정적이고 다정한 행복감을 선사할 수 있다. 그는 가능한 것만을 바라며, 그것들은 아마도 다 이루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김진이 그후 줄기차게 생산해온 그 많은 작품들의 인간은 모두 사실은 [별의 초상]의 모티브에 종속된다. 비극적 인간-윤하와 그 가족들,. 희극적 인간-민규와 하숙집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선택하는 여자.


4.

김진의 작품들을 살펴보면서 불쌍한 인간들-왜 불쌍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욕구를 실현하지 못하기때문이다.

어떤 욕구인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싶은 욕구,  욕구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로 설정된다. 모든 동정심과 화해와 용서의 가능성은 여기로부터 나온다.

(권력이나 명예,돈같은 욕구는 인간적인 욕구축에 못낀다. 그래서 그것을 실현하지 못했다고 해서 불쌍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욕구는사랑에 대한 욕구가 못채워진데 대한 비뚤어진 표현일 수 있다. 그러하다는것이 밝혀지면서 그 주체도 불쌍한 인간들의 대열에 끼게 된다. )김진의 바람의 나라, 혹은 1815년 등 초장편작품으로부터 초단편작품들, 동서양과 현대와 고대를 막론하고 관철되는 주제의식은 바로 이것이다.김진의 인물들은 어느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이 욕구를 둘러싸고 하나의 생을 만들어왔고 타인과의 관계를 만들어왔고 하나의 사회를 만들어왔다(사실 사회라는 측면은 상당히 주목되고 있지 못하지만 굳이 든다면 그런 비극적 개인사의 집합체쯤으로 사회를 판단하는듯하다. 황혼에 지다.숲의 이름등등,...혹은 개인외부에 존재하는 일종의 역사의 수레바퀴쯤으로..그래서 개인의 삶은 돌맞은 개구리가 되기 십상이다)

다시 말해 작가 김진이 보여주는 인간들,인간들의 역사,그 사회를 가엾게 여기고 용서하는 시선은 사랑을 얻지 못해서 생긴 비극에 대한 동정이다. 덧붙여 말하면 그러므로써 김진은 순정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적어도 순정독자들은 모두가 인생과 세상사의 중심에 사랑을 놓고 생각한다. 김진과 순정독자는 최초에 사랑이라는 코드를 공유하고 있었고, 그래서 김진의 작품은 순정만화일 수 있었다. 물론 이는 김진의 약점이기도 하다.


5.
좀 더 나가보자. 구는 왜 충족되지 못하는가? 필연? 우연?
물론 충족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 레모네이드처럼 연작에서 사랑받을 수 밖에 없게끔 보여지는 그 귀엽고 다정한 인물들을 발견한다.그들은 본질적으로 [별의 초상]의 민규의 자손이다. 들을 막아서는 장애는 오해와 비교적 간단한 유혹등이고 그것들은 대부분 그들의 천성적인 사랑나기적 정체성을 훼손하기엔 너무 작고 약하다.

장애물도 작고 그것을 대하는 인물들도 작고 약하며, 그들의 세계도 작고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충분히 행복해질 가능성이 있다. 이디오피아 전체를 구하지는 못하더라도 같은 반 결식아동 한사람쯤은 반 친구들이 도와줄 수 있는것과 마찬가지로 ,...행복은 작은 차원에서만 가능하고 욕구의 충족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그렇게 해서 획득된 행복역시 변증되지 못한 아주 작은 행복에 지나지 않을테지만, 그게 뭐 어때서?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아주 세상과 삶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하고 가는 법이니까.

그러나 결코 충족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충족될 수가 없다. 충족된 적이 없었으니까. 그것은 작고 작은 삶이 아니라 사회속에서 일정한 역할과 위치를 차지하는 자로서의 삶이다. 그들을 가로막는것 역시 작은 오해따위가 아니라 각 사회를 뒤덮고 있는 갖가지 규정, 규칙, 의무,등 개인의 취향에 따라 쉽게 뒤바꿀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무휼이라든가, 1815년에 나오는 군인들이라든가, 아마도 here의 학생들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비극적인 인물들은 끊임없이 작은 삶의 작은 행복을 영위하는 작은 자신을 꿈꾸고, 그렇지 못하게 만드는 큰 삶의 큰 문제를 안은 자신의 처지, 혹은 자신 그 자체를 괴로와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자신이나 그 처지를 바꾼다는 생각은 물론 하지 않는다, 일단 그렇게 되면 비극은 성립될 수 없을 뿐더러, 바꾼다는 것은 계획이므로, 이미 존재하는 삶의 묘사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김진은 단지 상황을 이해하고 위로할 뿐이다. 엄마가 결혼생활에 괴로와하는 딸에게 말하듯이 "얘야, 그것이 인생이란다.."

그러나 덧붙여둘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자신의 처지, 자신을 포함한 사회의 조건을 바꾸기 위해서 자기 인생을 던져넣은 사람은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특히 20세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포함해서 이상과 그밖에 여러가지 것들을 신념으로 해서 주체로서 살아나갔고 그렇게 스스로 역사를 엮어갔다. 그속의 가치들을 저울질 해서 순위를 매기고 무작정 사랑이나 휴머니즘만을 이야기할때,그것은 무의미한 환원론으로 그쳐버리고,그런식으로 다른 가치들을 덮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순정만화는 다른 가치들에 대해 그리도 배타적인가?


6.

김진의 작품속에서 사랑과 행복과 삶의 문제에 대해 합리적으로 구분하자면 크게  3부류로 나뉘어 얘기될 수  있다. 작은 삶과 작은 행복의 가능한 꿈, 큰 삶과 큰행복의 불가능한 꿈과 그에 대한 절망, 그리고 현실.

세번째부류인 현실에 관해 말해보자. 크기로 말하면 중간치의 삶과 행복이겠지만 사실은 복잡하다. 왜냐하면 이경우가 가장 현실과 닮아있는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알다시피 현실속의 개인은 아주 작은 삶과 행복을 가꾸고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보다 큰 사회적 삶에서 분리되어 존재하지 못하는 법이다.  가령 귀여운 현우가 대학에 들어가더니 운동권이 되어서 임수경처럼 방북했다가 감옥에 들어간다.

혹은 현우네 큰형이 방송통폐합으로 잘려서 실업자가 되더니 절망한 나머지 집을 나가 부랑자가 되고  살인사건에 휘말려서 쇠고랑을 찰 수도 있다. 그 모든 사랑을 가족간의 사랑으로 극복하려했지만 누나,언니들의 남편들의 반대로 말미암아 상황이 경제적으로 악화된다. (현실의 한국 남편들은 다들 그렇지 않은가? 처가와 경제적으로 관련되는건 질색팔색, 이건 분명 사회적 시각으로 볼 문제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으로 검사가 된 진우가 형과 동생을 담당하게 되고, 그는 법복을 벗느냐, 가족을 변호하느냐 고심하게 된다. 이때 진우의 부인이 임신소식을 알리고....쯧쯧쯔. 결론은 그렇다. 꿈이 아닌 진짜의 경우 작은 삶과 큰삶은 서로 서로 뒤엉켜서 서로를 막고 서로를 도와주고 그러면서 행복을 방해한다. 작디작은 그녀는 하등의 악의도 없지만 그녀뱃속에 든 아이와 그녀 손지갑 속의 생활비는 분명 문제가 된다. 이쯤되면 꿈은 정녕 쓰레기냄새 속에 섞여 희미하게 추억될 뿐인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남는 이야기는 꿈과 현실의 모순이라는 주제는 분명 아니다. 명약관화한 인간존재의 상황속에 각 개인이 남긴 구구절절한 사연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분명 아름답지는 못한 사연이다. 그것이 아름답게 여겨질때 그것은 아마도 전후맥락 다 자르고 특정부문만 확대과장해서 이야기할 때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세번째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첫번째의 작고작은...이나 두번째의 크고 큰...에 이사 가 버린 것이다.


7.

김진은 이야기를 아름답게 꾸미는 법을 안다. 작은 이야기는 작게, 큰 이야기는 크게 할 줄 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작은 행복은 작은 행복의 꿈으로, 큰 이야기의 행복은 큰 이야기의 비극으로, 때로는 귀엽고 사랑스럽게, 때로는 장엄하고 찬연하게 희극과 비극의 꿈을 연출해가고 있다. 이제 김진의 심리묘사는 가히 탁월한 경지에 이르렀다. 주인공들은 설명하지 않는다. 항상 암시적으로 지껄이거나 행동할 뿐이다. 그러므로써 그들의 행적을 쫓는 독자는 추리적인 즐거움을 갖게 된다. 그러나 감동은.? 

내가 처음 [별의 초상]을 보았을 때, 그 다음에 [레모네이드처럼]을 보고, 그다음 [1815년]을 보았을 때, 그때는 감동일 수 있었다. 비극다운 비극이고, 희극다운 희극이었다. 그러나 그후로 계속 되풀이 될 뿐인 그 감동,그 비극과 희극은 이미 매너리즘에 빠질 뿐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감동은 없다.

솔직히 말해서 그 세편이후로 김진의 작품군은 전작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반복을 통해서 김진은 애초에 제시했던 그 주제를 더 파고들었는가? 더 풍부히 해내고 있었는가? 

레모네이드연작의 경우, 뒤로가면 갈수록 이야기는 지지부진해진다.

그렇게 된 이유는 작가 김진의 레모네이드 인물에 대한 파악이 언제나 이미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현우라면 분명 커나가면서 어떤 아이로 자랄지 아무도 모른다. 무슨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는 현실과 그 아이에게 맡겨놓게 될것이다. 그러나 만화속의 현우는 어떤 일을 겪고 어떤 성장기를 가지더라도 기본적으로 선안에서 놀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현우는 조숙한 척 하면서도 어린티를 못벗은, 온갖 짠 티는 다 내면서도 동전 모아서 예집 을 되찾겠다는 막내일 뿐이다. 그애가 비극적인 애가 될리가 없는 것이다. 현실속에서 다채로움 그 자체를 취재하고 현우에게 맡겨놓지 않는한, 레모네이드 후속편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것 역시 순정만화의 한계지점이다.

여성작가의 경험치가 작은것부터 시작해서 취재에 들어가는 막대한 돈과 시간이 보장되지 못하는 점도 그렇고 더욱더 중요하게는 순정만화계는 아직껏 꿈을 소비하는 시장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이 아름답게 치장되고 동경되는 이상,  현실이 되기 힘듦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8.

한편 비극의 후속편들은 어떨까?

1815년 연작 (작가의 말에 따르면 연작 전체 제목은 the song)은 [1815년][가브리엘의 숲] 내가 알기론 이 두편 뿐으로 애초에 설정했던 서사적 연작기획은 이젠 포기된것으로 보여진다. 1815년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 가족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지를 담고 있다. 또 [가브리엘의 숲]역시 소년 페데리코의 성장기를 숲에 비유하면서 곁들여서 그 주위사람의 가족사가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이루지 못해서 만들어진 비극을 그리고 있다.

두편 다 가족사적 비극을 그리고 있는데, 문제는 이때 비극을 이끌어내는 주요계기가 전쟁이나 흉년등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조건이라는 점이다. 이는 처음에 [별의 초상]에서 설정한 비극의 개인적,혹은 가족사적 조건을 좀더 넓히고 풍부화시킨 시도라고 보이며, 이런 차원에서 그 두 작품은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나 왜 나머지 것들이 계속 나오지 못했을까. 추측해보건데, 사라져가는 대본소 단행본시장도 문제려니와, 그 두편으로 이미 애초 기획의 목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만들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가브리엘의 숲]에선 가난이 가족을 망치는 것을 두고볼 수 없어서 일생을 돈을 위해 바치고, 그 돈으로 가족의 사랑을 찾으려했던 불운한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또 1815년에선 군인이라는 직업-가업이자 국가에 대한 책임-속에서 큰아들과 부인을 희생당하는 비극적인 가장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두 상황-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진전과 관련되고 한편으로는 전쟁에 관련된 -은  이 연작기획이 포괄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대표적인 상황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이야기를 더 다채롭게 하려면 이 상황에 대한 해석자체가 더 풍부해져야 한다. 전쟁에 대한 또 다른 태도,또 다른 가치규정, 혹은 자본주의에 대한 또 다른..그것이 없다면 나머지 이야기는 두 이야기의 되풀이에 그치게 되는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김진의 인간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사랑이기에, 더 이상의 이야기는 아직 무리였던 것이다.


9.

김진의 룩스-포이부스 연작은 김진 만화의 앙상함(!)을 해결하기 위한 모색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sf의 외피를 썼지만, 정확히 말해서 sf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학에 관한 어떤 명상도 담고 있지 않다.

살펴볼 때, 그것은 오히려 인간사에서 일어났던 여러가지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즉,  짐작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속에서 자유롭게 배치한 인간(비슷한...)들의 욕망과현실이 타협되거나 포기되거나  (혹은 실현되거나...하지만 실현되는 작품은 아직 안나온것 같은데..) 하는 각 상황과 과정을 보여준다. 

가령 새 우주로 가서 새역사를 시작한 인류는 유전자합성이 잘못되어 태어난 변종인류와 전쟁에 들어간다. 이유는 그들이 괴물이기 때문이다.

또 새 인류의 모든 사항은 컴퓨터에 의해 정해지는데, 애초부터 인생을 제어당한다는 이 부조리함에 룩스를 비롯한 주인공들이 저항하기 시작하므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또 말세의 지구는 음모를 꾸민다. 소년들을 솎아내어 쓰레기는  버리고 우성인자는 새역사를 위해 우주로 띄어보낸다. 그러나 그 우성인자의 유전자속에 그런 부조리가 기억되어 새로운 비극을 만들어낸다.

먼 시간속의 먼 공간은 분명 이색적이며 특정 역사,공간,사건에 대한 연대기적,고증적 취재가 필요하지 않아 비교적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신에 다른 공간,다른 차원의 시간에서 일어난 일들에 비유할 인간사의 여러 주제에 대한 취재와 다양한 관점이 필요할 것이다.그러나 이점에서 역시 김진은 예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령 서론격인 [혹성나레이스]에서 보여준 뒤섞인 인종-변종이 처음부터 소외되고 절멸되는 과정은 현대 민족적 분쟁에 대한 구체적 비유가 되지 못한다. 민족문제는 단지 인종적 문제일 뿐이란 말인가? 민족문제는 다른 여러가지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문제와 연관되어서만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김진은 여전히 앙상한 논리로 대응하고 있다.

변종일 지언정 생명으로 태어나서 좋아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싶었는데 이사회는 변종의 행복은 인정하지 않는구나..하고 또하나의 비극을 만들어낸다. 모든 문제를 그런식으로 환원적으로 (사랑,휴머니즘, 혹은 당위성에 호소하는 동정) 처리하다 보면 모든 문제 자체의 차이는 없어지고, 결국 기껏 한 새로운 시도조차 의미를 잃게 된다.왜 인류는 자기와 다른 존재는 인정하지 않거나 미워하는가?따위의 고루한 한탄들...

또 [에레보스의 연가]에 나오는 날개달린 인간의 모습은 인류의 아름다운 꿈의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 분명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동경의 대상이되, 만약  미움당한다면 그것은 아마 중세의 마녀사냥 당사자들이나 그럼직한 경우일것이다. 왜 작가는 날개달린 인간이라는 변종을 만들어냈을까? 그보다는 차라리 뱀의 갈라진 혀를 가진 인간이 더 낫지않았을까? 그렇게 이야기 하는 이유는 물론 아름다움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그외에 이 연작의 여러가지 단편들은 하나같이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인종적 편견과, 뛰어난 인자에 관한 편견으로 희생당하는 인간성의 문제다. 여기선 예의 사랑이 휴머니즘으로 폭을 넗히고(?) 있는듯 하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환원적임을 부정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과거의 반복이다. sf적 외피는 그것을 결코 감출 수 없다.

많은 일본 sf만화들이 그러한 정체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예를 들어서 건담의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안으로 그야말로 하드한 밀리터리SFf적 취향에 대거 투자했고, 그것으로 한때 성공했었다. 그러나 김진의 대안은 무엇인가?

10.

.여기까지 얘기하고도 이게 무슨 쓸데없는 짓인가 라고 그만두지 않게 되는 것은 순전히 김진이라는 작가의 역량 덕분이다. 바꿔 말하면 김진은 그만큼 탁월하고 우리 시대 순정작가의 일종의 이정표적인 위치에 있다고 판단할만큼 독특하다는 말이다. 그러한 김진작품의 기본적 유의미성을 글의 서두에 밝힌 바 있지만,  그에 덧붙일 것이 아직도 몇가지 남아있다. 김진은 사뭇 타 순정만화들과는 다른 만화어법,소재를 다뤄왔다.

본격적인 데뷔작 별의 초상은 그것이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외적인 화려함이나 소재적인 화려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순전히 심리묘사와 그러한 묘사를 위해 배치된 이미지들의 성공적인 연결이 이 장편만화에 많은 팬들을 주목시켰다. 그 팬들은 이후 김진의 주독자층이 된다. 그들은 김진의 아주 개인적인 (보편화되지 않은) 암시적 연출이나 스토리텔링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왔고, 그것이 암시적인 만큼 그 해석의 주체로서 역량을 발전시켜왔다.

독자와 작가사이에 일반화된 의사소통 코드에 관해서 이만큼이나 자유로운 표현이 허락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해석되어지는 관계는 드믈다. 순정만화계에서 김진은 그 매니아독자층의 존재로 스스로의 표현영역을 보호받는 흔치 않은 케이스다. 그리고 이것은 순정만화의 본질적인 문제-독자와 작가사이에 만들어진 쟝르의 규약이 만들어내는 순정만화의 한계선-을 움직일 어떤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 다른 면으로 바라볼때 그것은 작가의 책임이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그녀의 독자들은 그녀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숙고할 태세가 되어있고, 그럴때 그녀는 무슨 말을 어떻게 더 해야 하는지 라는 말이다.

이 점에서 나는 지금 상황이 일종의 갈림길이라고 본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녀의 독특한 주제의식은 이미 할 말을 다 해버린 상황이다.요즘 김진이 보여주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날림그림은 스스로 그런 기로에 서서 주춤거리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다를것없는 말을 반복할때 그 지겨움이 그렇게 표현되리라 생각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더이상 나아가려 할때 그것은 어떤 활로를 찾아낼 것인가?

나또한 한사람의 김진의 매니아(?)로서  기대하며 동시에 요구한다. 김진-그녀는 전혀 새로운 꿈꾸기를 창안해내던가, 아니면 다채로운 현실에 다양한 관점과 태도로 눈을 돌리던가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현세처럼 '스스로 신화가 되리'인 것인가? [바람의 나라]는 작가 김진의 최대역작임에 손색없는 규모와 소재를 자랑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반복을 중단하지 않고 있는듯이 보인다. 그대로라면 결국 [바람의 나라]는 그런 자족적 신화속으로 사라져가리라.


 ▶ 기사:  원종우/Nufgirl
 ▶ 조회: 2907 | 등록: 2002/08/28 
별의커미의 커미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팽귄은 커미의 몬스터를 작꾸만 좋아 한다. 윤희경 2005/02/06
맞아요... 저도 김진의 작품에서 느꼈던 한계점을 잘 지적해 주셨네요. 솔직히 푸른 포에닉스는 정말 아니었지요. sf로서는 최악. 마루 200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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