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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린과 서사적 여성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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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만화의 창작과 비평 Studio Nuf(원종우/Nufgirl) (두고보자 창간 이전에 쓰여진 글입니다)
1.
우리들의 성모님을 김혜린의 출발로 삼는것 (월간 oz의 김혜린론의 경우)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김혜린은 순정만화작가고 순정만화작가로서 김혜린의 출발은 한국적 현실보다는 서구취향의 꿈과 소재가 혼합된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증거는 그녀의 작품들 곳곳에서 드러난다. 때로는 닮은 독백으로, 때로는 캐릭터의 취향으로.무엇보다도 그녀의 처녀작 북해의 별은 우리들의 성모님이 담고 있는 민족적 가치관과 정서에 대한 관심은 일단 보여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2.
출발을 베르사이유의 장미로 삼는다 할때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남성적 가치를 체현한 강력한 여성캐릭터, 시민혁명을 포함한 근대적 역사의식과 역사소재, 한낯 로맨스의 주인공이나 개인적 삶의 주체를 뛰어넘어 사회적,역사적 삶에 대처하는 등장인물들의 삶의 자세와 행적들에 대한 관심.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서구 궁정사회의 화려한 외관과 휘황한 로맨스다. 이곳에서라면 각혈하는 거지들이 행인의 옷을 잡아당기는 빈민굴조차 주인공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돋보이게 하는 좋은 배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순정만화는 왕자님을 만나는 가난한 신데렐라-대학보내야 하는 오빠하나쯤 가지면 더 좋고-의 꿈에서 이제 막 벗어나 80년대의 풍요에 어울리는, 보다 화려한 취향의 세련된 바비인형을 향한 꿈으로 변신을 요구 받고 있었고, 서양의 실제역사에서 가져온 갖가지 화려한 외관과 드라마틱한 스토리요소는 아주 좋은 소재가 될 수 있었다.
김혜린이 베르사이유-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이러한 80년대식 순정만화의 화려한 꿈을 생산해내려 했다는 점을 되새기는 것에 다름아니다.예를들어 김동화가 '유리가면'혹은'백조'로부터 출발하여 '내 이름은 신디'를 창조했을때 그것은 예술가의 세계가 가지 화려한 매력을 80년대 순정만화의 꿈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인 것이다.
3.
그러나 더도 말고 베르사이유...정도의 균형( 주제의식과 화려한 로맨스사이의 줄타기)으로 계속 밀고 나가기에 김혜린은 사뭇 다른 순정작가들과 다른 점을 지니고 있었다. 가령 같이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출발한 황미나( 이오니아,...아뉴스데이..미스터블랙..그리고 엘세뇨르..)와 비교할때 김혜린의 경우는 당시 (80년대 중후반) 우리 정치상황과 대비하여 그렇게 화려한 꿈만으로 점철하기엔 너무 예민하고 지적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북해의 별 후반부로 갈수록 순정적인 (로맨스)스토리에서 보다 하드한 역사스토리로 비중을 이동시키게 된다.
이는 이후 그녀의 작품들을 두가지 기준에서 구분가능케 하는 실마리가 된다.
전술했듯 김혜린은 자신이 다루는 소재(역사)가 만만치 않음을 깨닫고 보다 진지하게 파고들기로 한다. 테르미도르는 북해의 별이 담고 있는 역사적 정황의 통찰에 대해 자코뱅독재의 경험을 대비하여 그 전망과 계급적 내용에 대해 부연한다.
히스꽃 필무렵은 북해의 별과 테르미도르 중간쯤에 설 터이다. 이때 김혜린의 그림과 연출은 그야말로 피크에 달한다. 너무나 장식적인 패션, 너무나 감정적인 캐릭터들의 눈동자들, 너무나 섬세하고 시적인 인물들의 심리묘사와 나레이션.
이때 순정만화가로서 김혜린은 최고의 테크닠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그녀의 다소 하드한 스토리와 소재에 대한 반대급부였을 것이다. 어떻든 그녀는 아직도 순정만화가였고 베르사이유의 화려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비천무가 완간된다. 여기서 그녀는 역사속에 적극 개입하여 태도를 취하는 기존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그야말로 순정만화에 걸맞는 인물들을 창조해낸다. 오직 사랑만이 인생의 전부였던 두 남녀-특히 남자의 비극적 인생과 그를 둘러싼 중국정치계는 화려함과 드라마틱함의 극치를 달린다. 물론 그러한 것을 표현하기에 이미 그녀의 그림과 연출테크닠은 무르익을 만큼 무르익어잇었다.
말하자면 그렇다. 테르미도르와 비천무는 그녀의 출발점이었던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2대 과제의 각기 다른 결론의 꽃이었다.
테르미도르에서 그녀는 베르사이유..의 주제의식에 대한 일정의 결론을 추구했고, 다른한편 비천무에서 그녀는 베르사이유...의 순정만화로서의 드라마성과 화려함을 극단까지 표현해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녀 창작의 제 1기가 막을 내린다. 물론 베르사이유에서 더이상 뽑아낼 것은 없다. 시간은 이미 90년대하고도 중반을 넘어서고 잇엇다.
4.
메이져 시장에서 김혜린의 작품들은 전술했듯이 베르사이유의 그림자와 함께 시작하고 막을 내렸지만,제 2막의 출발은 다른곳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80년대 후반부터 김혜린이 각종 순정동인지 혹은 잡지의 단편으로 간간히 내고 있던 일단의 작품들이 그것이다. 베르사이유..에 대한 저항인지 혹은 '순정적임'에 대한 또다른 각도의 저항인지는 또다른 재미난 주제가 될테지만, 어떻든 이 작품들-우리들의 성모님, 겨울새 깃털하나, 당신을 위한 방문객등-은 모두 다 한국의 동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순정적인 그림체의 일정부분을 포기하고 있다. (주인공들의 눈동자는 까맣고 간혹 빛나지만 결코 에메랄드나 사파이어는 아니다. 머리카락은 퍼머넨트로 굽실거릴 수는 있어도 애초부터 금발은 아니다.) 즉 이 작품들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한 요소는 순정만화적인 화려함이나 로맨스는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무엇?
재미있는 것은 계속해서 작가 스스로가 순정드라마와 서양역사를 소재로 창작하면서도 그 창작의 의미, 그 창작자 자신에 대한 재규정을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들의 성모님은 쫒기다 죽어가는 (유리핀과 대별되는) 운동권?
나이가 서양문물에 밀려 보릿자루신세가 된 전통무속과 광산촌 창녀의 가슴팍에서 (기독교의 성모에 비교된다기보다는 서구의 합리적 이성주의에 비교되는...그리고 아름답고 현명한 공주 에델라이드에 비교되는) 위로받으며 죽어간다. 명백히 순정만화에서 선호되는 몇 가지 요소에 대한 저항이다.
당신을 위한 방문객에서 작가 지한은 현대문명속에서 자신의 작품이 어떤 도움이 될수 있을지 고민한다. 자신속의 예술혼-양심부터 살릴때 어떤 가능성이라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는 이 만화는 자간을 읽으면 이런 뜻이 된다.
' 의심이 가더라도 일단 그리자 (혹은 쓰자) 계속 그린다면 어떻게 그릴것인가라는 질문은 모색될 수 있지만, 그리는것을 포기한다면 질문 자체도 불가능하게 된다.'라는,...
뒤이어 연작으로보이는 겨울새 깃털하나에서 작가 지한은 다시 등장한다. 보다 모호한 고통의 원천을 들이대며 실존적 고민을 털어놓는 이 사내에게서 나는 문제가 무엇인지 잘은 알 수 없어도 창작 자체가 굉장한 실존적 무게속에서 이루어진다(적어도 김혜린이 생각하는 창작자에게서는)는 메시지를 읽는다. 그것이 사회적 소재를 다룬 책이든, 개인적 실존을 다룬 책이든, 그래서 그것이 이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하건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 그런 고통과 무게를 가지고 창작에 임하라..!라고 하는 자신에 대한 채찍질 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같이 살 맞대고 살 수 없는 사랑스런 연인의 손위에 어느날 단정한 책 한 권이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면 족하지 않은가? 그대여...하고 작가 김혜린이 말하고 있다.
즉 작가는 이 몇편의 작품들을 통해서 순정만화쟝르의 틀에 나름대로 저항을 타진하고, 그러한 변신의 위험성과 필요성 사이에서 작가적 자존심과 실존을 걸고 어떻게 고민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부터 김혜린의 제 2기가 가능해진다.
5.
이라크노아에서 김혜린은 자신의 영역을 일단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변신의 한걸음을 독자에게 선언한다.
그러니까, 내 생각으로는 그녀에게 SF는 일단 답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도 동일한 결론에 이르렀던 것 같다. 어찌되었든 이라크노아는 일찌감치 막을 내렸다. 초장편 체질의 그녀에겐 드믄 일이지만 말이다.당시 순정만화 작가 강경옥이 별빛속에를 성공시키고 있던 때였고 순정만화의 소재상의 다변화가 모색되던 시기였다. 황미나등도 코믹무협에서 환타지, SF등 여러가지 영역으로 공간을 확대하고 있었고, 이미 단편의 경우에는 이정애등이 다소 가벼운 성공작들을 내고 잇었다.
변신을 꾀하며 순정만화에 저항하던 김혜린으로서는 분명 도전해볼 만한 영역이었다. 그러나 다른 작가들처럼 그녀에게도 SF는 한계를 분명히 보이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하드한 SF에서 소프트한 SF가 나올 수는 있어도 그 반대가 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SF독자들은 80년대 일본을 풍미하던 건담류의 다소 하드한 밀리터리풍의 SF에 영향받아 만들어졌고, 순정독자들 의 흐느적거리는 선과 일천한 기계지식, 지상계에 머물고 있는 상상력, 여성작가들의 경험적 한계가 이러한 SF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을리 만무했던 것이다. (강경옥의 경우는 추후 작가론에서 보충하도록 하겠다) 이라크노아는 SF적 외피를 쓴, 즉 공간을 달리한 김혜린식 드라마였고 오히려 불필요한 외피로 인해 피해를 본 경우였다.
그러한 상황을 작가자신은 어느누구보다 잘 깨닿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라크노아에서 김혜린은 노골적으로 순정만화의 코드들에 저항한다, 인물들의 눈동자 어느것도 더이상 반짝이지 않으며, 그들의 머리칼, 옷차림, 배경 어느곳에도 화려하거나 섬세한 면은 제거되어있다. 장식적 아름다움은 척박한 화성의 바람과 함께 결정적으로 사라져버렸다.
불의 검이 시작된다. 서양과 중국문화의 장식적 화려함이 거세된 그녀의 펜이 이번엔 우리땅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환타지로 재구성한다. 우리 민족의 공인된 문화적 특징중의 하나가 무엇이던가, 바로 소박함이 아니었던가..?
김혜린은 관록있는 서사물의 대가다. 역사물을 줄곧 다루어온 그녀의 관록이 이 소박한 환타지에 실재감과 스케일의 매력을 부여한다. 없어진 장식성을 '한의 민족성'에 대한 정서적 공감으로 메꾸는데 성공한다. 또한 이제껏의 역사물속에서 끊임없이 작가를 괴롭혀오던 의미성의 문제에 대하여, 극중 바리라는 인물을 통해 해결을 시도한다.
그는 이 잊혀진 민족사를 노래로 전하는 예술가의 몫을 해내면서 은연중에 이 작품자체의 의미를 항상 일관되게 전달하는 끈을 놓치지 않는다. (물론 북해의 별에도 테르미도르에도 시인은 항상 있어왔고 그들은 항상 그렇게 참여적으로 존재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 전체를 통틀어서 바리만큼 면면히, 그리고 깊이있는 존재감으로 등장한 자는 없는것으로 보인다)
불의 검을 보면서 또하나 주어지는 화두는 그녀의 이제껏의 작품들에 없었던 여성의 존재감이다. 불의 검의 주인공은 사실상 여주인공 아라로 여겨지는데, 원치않게 태어난 애를 등에 업고 민족을 보호할 칼을 다듬는 외유내강의 이 여성은 사실상 우리민족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혹은 역사의 천사? 어떻든 그녀는 우리들의 성모님에서 보여지는 만큼의 포용력을 갖고있으며,겨울새...의 **가 보여주는 만큼의 인내력도 갖고 있고, 유리핀뺨치는 자유의지를 소유했으며, 유제니를 능가하는 비타협적인 전투성도 갖고 있고 히스꽃의 **만큼이나 동정심도 많고....기타 등등. 그리하여 그 모든 사연과 한을 껴안고 흐르는 한강(아리수-아라)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러한 그녀는 여성이다. 이런식으로 서사전체를 관통하는 여성의 존재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간단히 말해서 작가 김혜린은 순정만화의 몇가지 코드를 포기한 대신에 순정만화를 여성만화로 재규정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불의 검은 연재되면서 아라-카라로 대별되는 여성의 삶의 방식, 혹은 여성적인 강인함이란 무엇인가 등등의 논의를 파생시켜 왔다. 작가자신의 이런 여성존재감에 대한 새 인식은 이후 샤만의 바위, 누프누르등에서 계속 표현된다. 그런 맥락에서 김혜린의 제 2기의 화두는 여성만화로서 순정만화..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불의 검이 있다.
6.
불의 검은 상기했듯이 김혜린 만화의 제 2기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었다.
그것은 1기의 순정만화/근대 시민혁명이라는 화두의 종말과 더불어, 여성만화/한민족사라는 새로운 화두의 출발이다.
그러나 두 시기의 구분은 단절이 아닌바, 그것은 처음부터 현재까지 흐르고 있는 서사성으로 일관성을 이루고 있다.
그녀의 만화는 단지 몇몇의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몇몇 단편들에서는 분명 주인공중심의 작은 세계가 이야기된다. 그러나 그 역시 그 밖의 큰 세계, 많은 사람과의 관계속에서만 이해되고 묘사되어진다. 즉 언제든지, 무엇을 다루든지 결국은 총체적 관계망으로서 사회를 그려내는 서사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기에서 그 서사성은 서구역사를 다루므로써 그 스케일에 걸맞는 휘황찬란한 장식성과 드라마틱한 로맨스,그리고 이국적 매력으로써 순정만화적인 욕망과 양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2기에서 추구되고 있는 바, 서사성과 결합해야할 여성만화적인 정체성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우선 여성만화란 무엇인가란 문제의 논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에 순정만화는 여성만화와 쉽게 등식화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성이란 존재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위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여자애다운 (얌전하고 순종적이며 인내심있고 외모를 가꾸는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놀이와 교육을 받으면서 소녀시절을 보내고 이윽고 나이가 차면 시집가고 (시집가는것이다. 결혼이라기보다는..) 곧 아이를 낳고 나머지 인생은 육아와 남편,시집 뒷바라지로 보내다가 장성한 아들딸과 제 궤도에 이른 안정된 가정의 모습을 흐믓하게 바라보면서 눈을 감는다.
여성이라는 존재의 일반적 인생모델이 그렇고, 그러한 한에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욕망이나 동경, 꿈, 기타의 가치들은 이 모델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주어질 뿐이었다.
일반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이 '여성성'은 과거의 순정만화들이 담지했던 여러가지 욕망 (뭐ㅡ꿈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과 완전히 일치하며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그 사이의 능력 혹은 처지의 차이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순정만화는 곧 여성만화였다. 그러나 지금 과거에 주어졌던 여성존재의 내용과 위상은 그 뿌리부터 의심받고 있다. 그들의 규격화된 인생모델은 거부되고 있음이 사실이며, 다시 재론되어지길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변화된 상황에서 여성의 존재에 대한 재규정이 완성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논의중'에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계속 '논의중'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만들어진 사회시스템속에서의 탈출, 자유의 획득, 시스템 자체와의 투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버려야 할 과거의 어떤 것들에 대항속에서 현재와 미래의 어떤것에 대하여 언제나 논의중인 그러한 상황....그러므로 지금 여성만화로서 순정만화는 과거처럼 확정된 여성존재의 묘사와 표현을 할 수 없다. 그것은 여성존재에 관한 그 수많은 논의들의 공간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여성존재를 논의하는 공간으로서 여성만화'나는 우선 이렇게 여성만화를 정의하겠다,
그러므로 지금의 순정만화들은 너무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여성의 모습을 묘사하기도 하고 그 욕구를 그려내기도 하며, 여성이 당면한 어떤 주제에 관해 행동양태를 다루기도 하지만 때로는 남성을 다루기도 하고 남성과 관련한 세계를 다루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그것은 작가의 여성관과 여성적 시각을 내포하고 그에 의한 해석을 가하여 이루어진다. 즉 순정만화들은 직간접적으로 여성존재라는 화두를 다루고 있다.
물론 그안에서 여성존재를 이해하는 내용은 매우 다양하지만 말이다.
또한 그것들은 여성독자들의 욕망또한 채워져야 함을 잊지 않는다. 가령 여러스타일의 멋진남자들을 전시하고 취향에 따라 즐기게끔 해주던가, CF에서나 나올듯한 멋진 배경을 선사해주던가, 약간 공주병 있는 독자들을 위해서 백마탄 왕자님과의 로맨스가능성을 눈앞에 보여주던가, 유행에 민감한 독자들의 눈요기를 위해 분주히 잡지스크랩을 해가며 주인공들의 패션쇼를 연출해주던가 말이다.
7.
한편, 순정만화독자들과 순정만화작가들사이에서 순정만화가 차지하는 어떤 논의 (여성자신에 관한)라는 측면의 강조는 여성만화로서 그것의 긍정성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순정만화의 소재와 스케일을 부분적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여성에 관한 여러 논의들은 그 자체로 주변성을 전제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여성의 사회적 역할, 여성이라는 화두 자체는 주변에 위치한다.
가령 최근의 페미니즘논쟁사는 계속해서 '차이'와 '주변성'을 가지고 이루어져온것이 사실이며,페미니즘논의 자체의 주가가 올라간 것도 따지고 보면 거대담론에 상대적으로 주변,혹은 차이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부터다.
오리엔탈리즘이 서구역사를 세계사와 동일하게 취급하고 그 속에서 동양자체의 역사는 서구문명사에 의해 규정되고 가치지워지는 부차적이며 특수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처럼.
남성중심의 역사기술,혹은 거대담론은 언제나 여성과 관련한 문제를 그에 의해 규정해오고 가치평가해왔다고 볼때. 여성 자신들은 문제들의 해결방식을 새로운 저항적 형태로 추구하게 된다. 사소한것으로 평가되는 문제들을 중심의 자리에 끌어올리고, 남성들이 만들어 온 이제껏의 지배담론들에 의해 문제를 해석하기를 거부한다. 즉 여성과 관련된 담론은 애초부터 서사성이 배재되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역사처럼 서술되고 해석될 수 없다.
그것의 가장 공인된 방식은 애초부터 대화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성과 관련된 현실적 담론은 항상 주변적이고 조그만 문제의 가치가 커다랗고 전체적인 문제의 가치와 그 중요성면에서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 출발로 할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해피매니아를 보자. 그건 상당히 장편이긴 하지만, 결코 장편이라고 볼 수 없는 묘한 작품이다. 왜냐하면 그안에 서사성은 없기 때문이다. 대신에 매번 다른 상황과 그에 따른 주제어가 부여된다. 그속에서 최소한의 일관성을 가진 (이 경우에는 멋진 연애를 하고싶다는 소망)주인공의 종횡무진을 지켜보며 독자들은 대화무드로 들어가게 된다. 나라면...에서부터 하지만 이런 경우는...요런 경우는...이런 식으로 말이다. 여기서 전체사회의 맥락과 관련한 이러저런 가치평가 (도덕이든 순결이든 모성이든 혹은 성범뵈든 여하튼 거대담론에 지배되고 있는 아마도 남성적인 잣대에 의한)는 문제가 안된다. 이른바 여성의 수다공간이 펼쳐지게 되고 여기서는 작가도 독자도 신나게 떠들어댄다. 그러면서 자신(여성인)의 중요성을 , 현실속의 여성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즐기게 된다.
그리하여 실제 여성들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그녀들의 세계는 모든 총체적 상황과 관계맥락에 괄호들을 쳐둔다. 이제 작가와 독자들은 '그래 수다로 풀자'라는 캐치플레이즈를 걸고 대화모드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서사성..총체성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그녀들의 세계는 축소되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새로운 여성상이 실제사회에 적용되거나 공감되기 위해 필요한 여러가지 인식들..즉 문제와 연동된 실제사회와의 관련성에 관해서 다루기 시작하게 되면 수다는 곧 시들해지는 경향을 띠게 된다. 뒷곁 강아지 뱃때기를 걷어차거나 이미 밥풀 한알 안붙어있는 바가지를 요란히 긁어대는 수동적 시위행위...혹은 스트레스 해소..의 차원을 뛰어넘기가 좀체로 쉽지 않은 것이다.
한편 김혜린은 서사적 특징을 일관되게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자.
아라가 강간을 당해서 아기를 낳았다. 죽이고 싶은 아기였지만 그래도 불쌍한 핏덩이다. 게다가 그아이의 피로 인해서 동족들에게 멸시까지 당한다. 그러나 그녀는 모성을 포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동족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원수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서 동시에 애 아비를 포함한 원수들을 쳐부술 칼을 간다. 그녀의 몸은 원수에 의해 더럽혀졌지만,그녀의 마음은 항상 님에게. 그러나 더러운 몸으로 위대한 그분을 모실수는 없지. 옆에서 내조하는 것이 내 사랑의 방식이다. 더구나 내님은 민족을 이끌 중요한 지도자인데 여기서 나하나가 튀어나와 민족의 장래를 망치는것은 내 아이를 비롯한 후세를 위해 자제해야 한다. 여성이 강하다는것은 장난이 아니다.
이런 방식 즉,김혜린식의 서사성, 거시적 시야의 접근방법은 애초부터 작은 문제들에 대해 '대화'를 배재하게 된다. 그녀의 결론은 결국 민족사와 관련해서, 혹은 전체 공동체와의 관련성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저울질 하면서 거시적인 가치관의 잣대아래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감동적인 하나의 여성상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댓가로 대화의 여지가 축소되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또다른 재미.세기말 순정만화에서 기대되는 대화의 즐거움을 일정정도 포기하게 된다.
대화모드는 여러가지 재미를 지닌다.
여자에 대해 수다를 떨때 그것은 여성의 사회진출이니, 애키우는데 따른 여성인생의 희생측면이니 하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남자친구욕과 멋진 남자이야기, 그리고 좋아하는 보석과 패션, 인테리어 취향, 상류사회의 동경,다이어트까지 포괄하는 넓은 화젯거리를 가진다. 테크닠이 문제가 되기는 하겠지만 일단은 여성의 사회진출보다는 다이어트와 연예인 세계가 더 수다의 재미를 주기도 하는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설명모드는 오직 하나의 재미-드라마의 재미와 감동-만을 추구한다.
그것은 독자의 이런 저런 주변의 잡다한 관심사에 대한 욕망은 일단 무시한다.
그러므로 김혜린의 여성만화라는 주제와 서사물이라는 형식의 궁합은 조금 위험하다.
즉 독자가 순정만화에 요구하는 재미가 결핍될 수 있는 것이다.
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녀안에 들어앉은 여성캐릭터의 존재감은 예전의 로맨스서사극으로 물러날 수도 없게 만든다. 그녀는 결코 1기에서 다루었던 소재들을 다시 다루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독자들의 변화에 따른 영향이기도 할 것이다. 황미나에 의해 엘세뇨르가 연재될때 나를 비롯한 많은 황미나 팬이 고개를 갸우뚱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그때 역사로맨스는 그 수명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80년대식 순정만화의 꿈은 이제 90년대식 이미지 백화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각론에서 다루기로 하자.)
이런 상황에서 광야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어찌보면 모든 서사적 작가들의 꿈일 터이다. 알다시피 서사란 항상 맥을 가진다. 그녀는 북해의 별등 1기 작품들에서 근대적 시민의식이 낡은 체제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는 과정- 혁명의 찬란함을 맥으로 가졌었다. (여기서 표현되는 어두운 측면들은 그 찬란함을 돋보이게 하는 필요악적-그래서 비극적인 측면으로만 존재한다.)
2기의 불의 검에서는 폭력에 저항하며 생존에 성공하는 여성 =민족 이라는 맥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한의 정서를 아주 세련되고 서사적으로 자극하면서 우리 역사와 여성관속에서 진지하게 상상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여성상을 제시하는데 이렇게 성공한 경우는 드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성공이다. 그것은 고유의 순정만화적 코드-장식성과 화려함,로맨틱을 점점 버리려는 경향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대체할만한 수다의 자유로운 재미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여성만화이자 순정만화로서 위태위태해 보인다.
이제 근현대사에서 그녀는 어떤 맥-화두를 잡으려 하는것일까? 그녀는 서양역사물의 광휘에서 우리고대사의 환타지적 자유로움을 넘어 이제 리얼리즘이 요구되는 영역으로 발을 디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물론 이 리얼리즘은 복식과 소품만에 국한되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리얼함이란 여러수준에서 제기될 수 있는 범주인바, 환타지도 현실과의 관련을 유비하므로써 얼마든지 리얼리즘을 구현할 수 있다. 현실과의 관련성-그러한 의미에서, 적어도 리얼리즘에 대한 의지라면 나는 일단 작가 김혜린을 믿는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작가자신보다도 순정만화라는 쟝르자체의 모순에 있다.
광야 제 1권의 표지그림에서 보이는 한복차림의 남자주인공의 모습은 사실 좀 코미디다. 그 기다란 몸뚱아리에 입혀진 한복은 무늬만 한복이었다
여성만화로서의 그가 맞부닥치는 문제는 명약하다.
어떻게 하면 그 서사성과 총체성을 유지하면서 -그리하여 리얼리즘을 일관되게 추구하면서, 순정만화에 요구되는 갖가지 욕망들과 타협할 것인가..혹은 그것들을 대체할 새로운 재미를 구현할 것인가하는 문제일것이다.
표지에서 보여진 그 무늬만 한복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바로 그러한 문제의 편린이다.
아직 서구적 체형을 포기하기엔 너무 힘든 순정만화계인 것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그녀는 여성만화로서 여성의 존재감을 이 '그다지도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역사시간'속에서 어떻게 제대로 드러낼 것인가. 스스로 설정한 '여성만화'라는 개념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서사적 연출수법에 어떤 돌파구를 뚫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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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원종우/Nuf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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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375 |
등록: 2002/08/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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