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과 나무의 시 - 지적이고 드라마틱한 성담론 앞에서

1.
얼마전 다케미야 게이코의 [바람과 나무의 시] 열권을 정독할 기회가 있었다. 초등학교 당시 모 소년잡지에 잠시간 연재하더니 그후 만화가게에서 드문 드문 발견해 띄엄띄엄 읽었던 이 작품은 이제 어른이 되어서 만화계에 야오이 열풍이 부는 상황을 바라보며 제일먼저 생각났던 작품이었다.

물론 어릴적에 주인공 세르쥬와 지루벨은 스커트제복을 입은 여자아이들로 고쳐져서 나왔었고 대체 어떻게 된 스토리인가 어리둥절할 만큼 삭제대목이 많았지만,-사실 그래서 중심화두인 성담론은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던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내기억에는 세르쥬의 아버지 알스란의 사랑의도피가 무척 로맨틱하게 남아있다- 어떻든 내가 제일 처음으로 만화속에서 성을 발견한 것이 이 작품을 통해서였다. 지금에 와서 아직도 해적판이지만 대체로 무삭제판형의 열권을 한꺼번에 읽고나니, 역시 감상이 그때와는 틀리다. 다시 만난 [바람과 나무의 시]는 로맨틱 순정물도, 미소년 전시회도 아니었다.성담론에 정면 뛰어들고 있었고, 그것도 아주 고전적 관점으로 뛰어들고 있는, 어찌보면 문화사적인 의미에 충실하다는 게 일단 재감상의 핵심이다.

이야기의 무대는 제3공화정 기아를르의 기숙학교, 유럽문화계의 중심지 빠리, 그외 스위스의 자연이 교차된다. 모더니즘의 출발....즉 자본주의는 정상궤도에 진입해 나날이 발전하고 있고, 과학기술분야도 마찬가지이며, 그런 물질적 기반위에서 지배계급에 한해 역사상 가장 풍부한 문화가 꽃피던 시기.  정신사적으로도 중세는 완전히 파산하고 그간의 신적 권위와 터부로 엄격히 제한되어있던  인간,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다양한 면모에 관심이 집중되던 시기며, 모든 철학과 예술은 그러한 관심에 대한 추구와 표현으로 풍부해져가던 시기였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시대. 그러나 인간 자신의 가능성과 실존에 대한 끝없는 신뢰와 낙관이 상식이 된 시대. 동시에 신을 버린 순간부터 고독과 불안에 황폐한 정신으로 타락할 수 있엇던  시대, 그래서 계몽적이면서도 퇴폐적일 수 있고, 고전주의적이면서도 광기어릴수 있는 것이 이시기 문화의 모순적 특징이었다.

그런사정이므로 이시기 성담론이 어땠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작중 주인공 세르쥬의 친구 파스칼은  말한다. "인간은 소나 말이나 마찬가지로 하나의 생물학적 종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에 있어 섹스란 생식을 위해 신이 부여한 능력이며 의식이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성에 한정될 뿐, 동성간의 섹스에 생식은 불가능하므로, 이런경우 성은 자연과는 독립적으로, 생식과 신 따위와는 결별하고 완전히 홀로 파악되어야 할것이다' (정확히 이렇게 말한 건 아닙니다. 제가 해석하기에 말이죠)

즉 신과 자연과 분리된 인간존재론의 차원에서 성이 전면화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에로티시즘이다. 작품 [바람과 나무의 시]에서  딱히 동성애를 선택한 이유는 그러한 주제와 상통한다. 당시 성은 수줍게 시작해서 극단적으로 탐구되었고 철학적으로 해석되었으며 가족질서와 관련해서 정치적 문제이기도 했으며, 더우기 프로이트의 등장이후로 인간과학이 되었다.

[바람과 나무의 시]는 성을 매개로 한 두 소년의 정신적 성장기를 시도하므로써  이 문제에 대한 고전적 해석 전체에 도전한다. 그 도전의 제 일보는 인물과 상황의 배치를 통해서 에로티시즘을 둘러싼 담론의 지형도를 그려내는 것이었다.


2.

[바람과 나무의 시]의 한사람의 주인공 지루벨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모호한 정체성 - 단지 외모뿐 아니라 성적 대상으로서, 성격적 대상으로서도 -으로 표현된다. 남성도 여성도 아니라는 것은 성적 매력을 가지면서도 생식적 대상으로서 파악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규칙과 상식을 무시한 예측불허의 행동을 하는 그의 성격과 비밀에 휩싸인 그의 내력은 에로티시즘 자체의 신비와 매혹과 그리고 위험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즉 에로티시즘의 인물적 체화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지루벨을 만나서 성적으로 자극받고 그러한 자극과 자극의 주체인 자신의 육체에 의문을 던지는 또 한사람의 주인공 세르쥬가 있다. 그의 정체성을 특징짓는 것은 탁월한 음악적 재능,  검은 피부, 성실함과 용감함이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한편으로는 신과의 접촉-신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선물이자 신을 찬미하기 위해 존재하는 천상의 예술?적인 측면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 그와 그의 아버지를 연결짓는 성장기적 맥락의 코드로 배치된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으로서 음악적 재능을 포기하면서 가문의 요구에  복종해나가던중 짚시여자를 만나서 휘돌리지 않는 자기 자신의 주관적 삶에 대한  자극을 받고 세르쥬를 낳는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이 그러한 주관적 삶의 결론을 내주길 바라면서 지병으로 죽어간다. 구체적으로는 음악가의 길이다.

그러나  재능의 의미와 그 재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마치 신의 축복하에 아담이 탄생한 것과,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이 여하히 살것인가의 문제처럼 다른 문제일 수 있다. 교수진은 그의 음색이 입학초기에 맑고 영롱하던 모습을 잃어가고 격렬하고 고뇌하는 괴로운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그의 음색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으로 지루벨을 지목한다.

에로티시즘,삶,내면적 모습의 변화와 더불어 변화하는 음악. 세르쥬는 지루벨과 비교할 때 인간성 자체를 대표한다고 보여진다. 자극에 정직하고 욕망에 정직하지만 더불어 신과 자연과 상식과 스스로에 대해서도 성실하려고 하는 인간이 부딪치게 되는 고뇌어린 인간성? 어떻든지간에. 그는 검은 피부를 가진 짚시창녀의 핏줄이다. 사교계와 친척들에게서 받는 수모와 상처에 대해서 성실하게 버텨온 그에게 검은피부는 고독의 상징이다.  그는 지루벨과의 첫만남 이후 상대의 고독을 간파하고 일종의 동질감을 느낀다.

바따이유에 의하면 에로티시즘은 고독한 인간실존의 일부이자 구원이자 배반-나락이다.

인간은 죽음을 예정한다는 의미에서 신이 아니며, 죽음 자체는 각자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하고 결핍된 존재다. 그러한 고독과 결핍의 구원으로 에로티즘은 존재한다. 순간의 결합, 그러나 결합순간의 이질감이 공존하는 에로티즘속에서 생명은 죽고 또 태어난다.  그속에서 에로티시즘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고, 동시에  무한히 추구될 수 밖에 없는 모순적 기제로 존재한다. 세르쥬의 검은피부와 그로부터 오는 고독과 지루벨의 커뮤니케이션은 여기서 이루어진다. 

세르쥬의 성실함과 용감함은 인간의 이중성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으로는 질서와 사회 없이는 살수 없는 존재-삶과 생식의 존재요, 또한편으로는 광기와 욕망과 고독-죽음과 에로티시즘의 존재로서의 이중성이다. 모더니즘이 출발한 이래 많은 문화,인류학자들은 축제 (관제가 아닌 민속)에 관한 해석을 이런 인간 이중성의 실제적 해결방식으로서 이해해왔으며,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대비적 해석, 심지어는 동양사상의 음양이론도 마찬가지의 인간이해방식을 보여준다.

세르쥬는 신과 삶과 타인앞에 성실한 동시에 자신의 삶과 육체에 성실하므로 또한 용감하고 혁명적-바꿔말하면 반역적이고 타락할 수 있는 모순을 안고 있다. (타락의 기준에 대해서는 항상 사회적이고 역사적으로 설정되어온다. 그러나 동성애가 타락의 하나의 표지가 되는 것은 아직까지 여전하지 않은가?)

여하간에 이러저러한 모습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세르쥬를 우리 자신의 위험하고 아름다운 파우스트로 내세워 삶의  모순속에 놓아보내고 지켜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의 편력이 어떤 과정을 격고 어떤 복병을 만날지, 그리고 어떤 결론으로 끝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작품이 완간되지 않기도 햇지만, 인간의 삶과 존재란 항상 정답이 없는 문제-그래서 철학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에 역시 같은 무게와 질문으로 에로티시즘이라는 거대한 문제가 버티고 서있음을 알게 된다.


[바람과 나무의 시]에서 다뤄지는 에로티시즘을 생각할때 많은 독자들은 사드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사드는 냉정한 시각에서 한 인간의 실존에 성적 쾌락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추구될 수 잇으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지를 몽상적이나마 실험해본 자였다. 그에게 있어 실존과 지배와 쾌락은 일치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는데, 현대문화속에 그것은 사디즘-변태적 폭력성욕과 행위-좀 더 넓혀서는 지배욕과 피지배욕에 관한 용어를 사드가 대표할만큼 심리분석면에서 전폭 받아들여지고 적용되고 있다.

그런데 지루벨에게 있어서-특히 지루벨과 지루벨의 삼촌 (실제는 아버지) 인 오귀스트 보우의 관계에서 지배의 이미지는 직접적인 모티브가 되고 있다.  오귀스트는 어릴적에 마르세이유의 부유한 상인집안의 양자가 된다. 그러나 그건 겉모습이고 속내는 그집 아들(후계자. 의붓형)의 변태적 (동성애적) 욕망의 노리개용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어린 오귀스트는 이런 성적 경험에 의해 냉소적이고 성을 혐오하는 편견을 가진 시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에 의하면 성은 지배자의 폭력이요, 힘이요, 피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모욕이자 오욕이다. 모든 순수함(자연적인, 그래서 위대한,)은 성앞에서 더럽혀질 수밖에 없으며.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순수할 수 없다.  아마도 그는 사드적 에로티시즘의 해석을 수용하고 동시에 혐오하는 것으로 결론내릴 수 잇을것 같다.

어떻든 오귀스트는 의붓형의 형수에 의해 또한번 능욕(?)당하고 그 사이에서 지루벨을 낳는다. 형수와 형은 도망가고 자신도 빠리로 도피한 사이에 지루벨은 홀로 성장한다. 아무도 돌보지 않고 어떤 교육도 받지 않은채 5세가 된 지루벨은 담요를 마마로 부르고 토끼를 파파라고 부르는 자연아였다.  우연히 돌아와 지루벨의 모습을 본 오귀스트는 지루벨을 자신이 박탈당한 순수의 상징으로 파악한다. 우리모두 알다시피 당시 루소의 교육법은 상당히 인기였다. 모든 한다하는 부르조아 가정의 아버지들은 루소의 교육관련 서적을 주문하는 것이 상식이었다고 한다. 더우기 당시는 의무교육이 없었던 때다. 아이들은 어떻건 아버지의 손에서 아버지의 실험성,혹은 상식에 의해 교육받는다. 오귀스트는 아이를 온전히 자기손으로 교육시킨다. 아이로부터 담요와 토끼를 빼앗고 오로지 자신 스스로만이 그애의 지배자로 선다.

고독을 몰랏던 자연아 지루벨은 오귀스트와 오귀스트의 손님들을 보면서 고독을 자각하고 그 다음엔  오귀스트를 자신의 보호자, 지배자로 받아들이지만 그런 과정이 그에게서 순수와 자긍심을 빼앗지는 못한다. 이러저러한 게기를 통해서 오귀스트와 지루벨은 성관계를 갖는다. 지루벨은 자긍심을 잃지 않은 대등한 연인으로서 관게를 원하지만 오귀스트는 지배자의 입장과 연인의 입장에서 그것을 사드적으로 공존시키는데 실패한다. 그러기에는 지루벨의 자긍심이 너무 높고, 지루벨에 대한 그의 사랑도 깊었기 때문이다. 상황변화를 틈타서 오귀스트는 지루벨을 아를르의 학원으로 보내고 철저히 감시한다. 지루벨은 연인의 배반,고독앞에서  동료학생들과의 성적행각으로 스스로를 달래려 한다.그런상황에서 세르쥬가 나타난다.

세르쥬의 지루벨에 대한 태도는 지루벨에게 충격을 주고 나아가서 그 배후에서 관찰자로 있는 오귀스트에게 충격을 준다. 왜냐하면 세르쥬의 태도는 앞서 말했듯이 인간존재의 가장 고귀한 측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지루벨의 유혹에 (즉 에로티시즘의 마성에) 대부분의 인간-과 학생-들은 두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번째는 그러한 유혹을 자기것으로 만들어 버리려 하는것, 즉 오귀스트처럼 혹은 사드처럼 유린하여 지배하고 그로써 극복했다고 자위하는 태도이고, 두번째는 그러한 유혹을 죄악시하여 거부하고 도피하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을 온전한 인간의 영역 (동물권을 벗어난) 으로 파악하여 탐구하고자 할 때, 일단 두번째 태도는 존재하는 육체와 그에 대한 의문과 매혹을 외면하므로써 문제제기 자체를 무화시키려 하므로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인간 스스로의  발전을 위한 변증과정의 거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번째 태도의 경우 사드가 그랬듯이 허무적인 결론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다. 스토리 안에서 그것은 오귀스트의 실패와 지루벨의 건재로 나타나는데, 성애를 냉혹하게 지배하고자 했지만 성애에 의해 기쁨과 쾌락을 느끼는 스스로에게 당황한다. 또한 스로의 과거나 지루벨의 존재를  과히 초월할 수 없었다. 즉 지배하고자 할때 지배당하는 자의 존재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지배자는 동시에 피지배자일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오귀스트는 성애를 완전히 냉혹하게 지배하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나 지루벨 자신은 자기스스로의 능동적 성욕과 자부심을 가진 강력한 주체로 건재하고 있다.

결국 그는  지루벨에게 나타난 새로운 존재 세르쥬를 주목한다. 세르쥬는  앞서 밝혔듯 존재에 성실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지루벨을 이해하기 위해 '피부속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조건에 역시 성실하고 용감하게 임한다.

이런 자세는 [바람과 나무의 시]가 견지하고 있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태도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즉 거부하지 말지어다. 육체와 에로티시즘은 인간의 것,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기를 거부한다면 자신을 거부하는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분명 위험하지만 (그러기에 사로잡혀 노예가 되거나, 아니면 대문 꽁꽁 걸어잠그고 기도나 하게 되기 일쑤지만) 근대 이후로 인문학의 정신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것에 그 고귀함이 있었다. 싸워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인 것이다. 그 모든것을 앎으로서 자유로와지려는 지적 의지가 있다.


6.
제 1보에서 에로티시즘을 둘러싼 담론의 지형도를 그려냈다면 제 2보에서는 프로이트가 나올법 하지 않을까? 그리고 제 3보에서는 그 모든 탐구끝에 음악가로서 세르쥬의 완성이 그려질지도 모른다.

물론 작품이 완결되지 않았으므로 모르는 일이지만. 그럴  법도 한 것이 전편을 통해서 확실히 느껴지는  작가의 태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앎의 의지에 관한 긍정적 태도와 함께, 앎을 통해서가 아니라 앎을 향한 과정을 통해서 완성될 인간성에의 낙관이다. 이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풍미한 거의 모든 고전문학작가들의 공통점으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결국은 죽어갈 (조금은 허무한) 인간의 일생이 그래도 문학으로 남겨질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바로 이것이다.  이점이 이 작품 [바람과 나무의 시]가 몹시도 에로틱하면서 동시에 몹시도 지적인 작품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아직 완결을 못본 (나로서는 완결되었는지 알 방법이 없다)채이나마 이 작품을 더듬고 싶다는 생각이 든건, 이점에서 이작품 [바람과 나무의 시]가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7.

대중문화로서 만화가 다루는 대부분의 에로티시즘은 소비되기 위해 생산되는 포르노 구조속에 놓여있어왔다.

그것은 인간의 에로티즘에 대한 여하의 자극과 상상과 사색을 분리시킨다. 그렇게 분리된채 소비되는 에로티시즘은 그것을 둘러싼 여하의 맥락이 극단적으로 단순화되고 파괴되어진채 이미 독자의 감상을 통해서 풍부화되고 재 해석될 여지를 잃게 된다.

불륜은 불륜으로, 매춘은 매춘 으로, 동성애는 동성애로.더이상의 질문을 지워버린다. 그러나 맥락과 해석이 제거된채 소비되는 에로티시즘은 더이상 매혹적이지 않다. 존재의 비밀에 접근하므로써 더 아름다와지려는 육체의 움직임에 족쇄를 채워넣는다. 근대이후 서양 인문학이 이루어놓은 지고의 명제는 '육체의 해방, 에로티시즘의 복권'이었다.

그러므로써 인간자신은 더욱더 풍부하고 지적인 존재로 발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지금 육체는 해방되고 에로티시즘은 복권되었는지 되묻지 않을 수가 없다. 육체는 쾌락시장속에 버려지고 에로티시즘은 얇은 종잇장위 광고카피가 되어 떠돌아다닌다.

이래서야 지금이 중세인지 밀레니엄인지 알 도리가 없다.


 ▶ 기사:  원종우/Nufgirl
 ▶ 조회: 5099 | 등록: 2002/08/29 
17권으로 완간되었습니다 예상대로 새드엔딩이지요 학원(오귀)을 벗어난 도피행은 그들을 파국으로 몰고 새장안의 새인 질베르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거친 세파속에서 망가집니다 결국 오귀를 부르며 마차에 치이고선 죽으면서 세르쥬를 부릅니다 그의 영원한 안식처인 세르쥬를... 그 뒤 세르쥬는 그의 저택으로 돌아오지만 이미 재정신이 아닙니다 그가 어렸을적 아버지의 죽음보다 질베르의 죽음이 더욱더 충격적이였을테니깐요 너무도 어린 연인인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결코 성장하지 못하는 두 캐릭터인 것이지요 나나 2003/05/23
다케미야 케이코의 `바람과 나무의 시`는 76년도에 나온 작품으로 이미 완간되었습니다. 국내에 나온 11권은 아마도 해적판인 듯 합니다. 사람이름 표기가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봐서... -_-; 저도 이 만화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가 궁금한데 들리는 말에 따르면 마지막에 가서 지루벨은 오귀스트를 부르며 죽는다고 하더군요. 새치마녀 2003/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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