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 한자루 달랑 들고-한 예술가의 자의식

삽 한자루 달랑 들고-한 예술가의 자의식

글 : nufgirl

1. 들어가며-잡다구리한 생각의 실마리들..

늦은 원고를 쓰려고 하는데 요즘 두고보자 논쟁란이 심상치 않다.

만화를 둘러싼 '예술'논쟁. 이 논쟁은 만화라는 매체가 예술적 가능성을 충분히 가진 매체인가 라는 오래된 (그리고 빈곤하지만 긍정적인  결론을 내려온) 질문에서 머무르지 않고,  이 매체적 가능성이 얼마나 현실성으로 변해왔는가 (혹은 인정받아왔는가)를 두고 벌어지고 있다. 나아가서 예술이라는 개념과 그것이 적용되기 위한 기준,혹은 조건같은  화두를 향하고 있다. 뭐, 기왕에 늦은 원고, 현재의 논쟁과 연관성을 살리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이 논쟁에 대한 나의 생각으로부터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매체의 예술성은 매체에 내재해있고, 그 매체가 기법과 응용범위를 발전시켜감에 따라 더더욱 커진다. 하지만 이 매체를 사용해서  만들어진 실제 예술행위-창작과 감상, 그리고 관련된 '판'자체를 포함해서-가 얼마나 예술적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이에 대해 만화가 박재동은 '만화가 예술이냐,아니냐를 질문하지 말고, 어떤만화작품이 예술이더냐,  아니더냐를 논하라'라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아런 방식의 언급은 매체와, 그것에 담긴 것을 구분하는데는 명쾌하게 통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논의를 협소화시키고,절름발이로 만들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즉 '어떤 만화작품이 예술이냐,아니냐를 논한다'는 것의 실 내용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는 것이다. 그러므로써 그는 예술,비예술의  기준을 슬쩍 감상자 각자의 아주  주관적인 취향과 생각문제로 돌려버리고,  결국 작품론이라는 것 자체를 빈곤하고  애매한 리뷰와 감상문으로 축소시켜버리(혹은 오해시켜버리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각 작품론은 -그 작품자체의 내적 구조와 에너지의 미적  해명-과는 별개로, 그것과 감상자의 거듭되는 의사소통의 운동상황과,  이러한  미적 사건이 외부의 세계(시, 공간  모두)와 어떻게 관계를 시도하고, 실현하며, 전체 속에서 위치 지워져  다시 한번 사건화 되고 있으며, 그리하여 계속 창조적인 미적 운동과정속에서  거듭 태어나고 있는가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 저러한  매체를 통한  다양한 예술적 성취들-특히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한참 전 과거의 것들은 살아있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예술적 가치의 여부와 그 높낮이는 이러한 자기 생명력 자체의 크기와, 구조, 그 생명활동의 범위에 관한 문제일 수도 있다.  그것은  살아있는가. 살아있지 못한가. 그리고 그 배후에는 어떤 내,외적 해석이 가능한가를  해명하는 것이 '미'혹은 '예술'을 해명하고 자 하는 이의 기본적인 욕망이다.

한편 만화를 포함한 각 예술매체들은 단지 미적 차원뿐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자기 영역을 만들어내며,만들어 내야 한다. 그건 영화같이 복제시대의 대중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하는 장르부터, 대중이 감상하든 말든 행위자의 단 한번의 순간적  아우라를 자기 정체성으로 하는 퍼포먼스의 장르까지, 그것 자체가 존재하기 위한 집터...멍석...무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건 작든 크든 돈과 거래가 오고가는 시장이기도 한 것이다.

각자의 시장은 모여져서 문화시장-문화판을 만들고 더 큰 돈이 오고가며...여기서 어떤 이는 그 돈을 욕망하고, 어떤 이는 명예를 욕망하고, 어떤이는 생존을 욕망한다.하지만 그 무엇을 욕망하건 그것을 좌우하는 것은 권력이다.  여기는 이미 시장이요 사회인 것이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권력이 교체될 때 가장 중요했던 것이 '천명'-하늘의 뜻을 명분으로 함-이었던 것처럼, 여기서 이루어지는 힘의 관계는 '예술성'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그 정통성을 주장하게 된다. 명분으로서, 즉 권력의 수단으로서 예술성은 앞 장에서 언급한 예술성과  구분되는 또 하나의 현실적 예술에 대한 정의다. 

그것은 인형속에 또 인형이 들어있는 러시아 인형, 혹은 끝없이  포장된 빈 상자 같은 것이다. 끊임없이 선전되고 독점되며 신비화되고 난해해지고 ,  그럴수록 열망되고, 그럴수록 손닿지 않는 높은곳에 올려져 버리는 -이미 실체가 없거나 실체가 있어도 박제화되어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만 -그것은 돈과 같다. 돈  자체는 먹을 수도 없고, 녹여서 금반지도 못만들지만 (지금은 금화가 유통되지 않으니까) 그것은 다른  먹을것이나 금반지와 바뀌어지는 역할로서 자신의 사용가치를 대신한다. 마찬가지로 권력으로서의 '예술'은 그것이 실체가 있든 빈상자든 그 따위는 중요하지 않고, 그것이 돈과  맞바꿔지고, 명예와 맞바꿔지며, 어떤이에게는 멍석을 보장해준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비난하면서도 무시하지 못하고, 거꾸로 바꾸지 못하면서도 비판한다. 그것에 영향 받으면서도, 그것을 뛰쳐나오고자 한다. 이 상황에 대한 '인식'은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찌푸릴만한 인식인 동시에 하나의  야누스적 존재론이다. 예술의 내,외적 에너지의 원천중 하나이기도 하다.문제는 인식하느냐, 못 하느냐이다. 바꿔말하면 자의식의 문제다.

그들은 이러한 자의식으로 자기 스스로를 인식하고, 자신이 놓인 판을 인식하고, 그 판이 놓은 당대를 인식하며, 그 인식에 대한 미적 행위를 시도 한다. 피카소와 고흐의 작품은  고가에 시장과 박물관을 나돌고 있지만, 그들  자신은 어떠한가?  그들은 우선 화가들이였으며,인식하는 주체였고,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여기서 살아남고  또 죽어간 위대한 예술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인식과 행위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작품내에  한정되지 않는 '예술사'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제 와서 빈상자를 요란하게 선전하는 화상들 조차도 그들의 작품이전에 그들자체의 선전을 더 중시하지 않는가..


2. 한 노동만화가가 있었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비약이 더 커지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난 원래 장진영의 '삽 한자루 달랑 들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다는 걸 상기하겠다. 위의 긴 이야기를 통해서 내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만화의  예술성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따져봐야 할 것은  그 작품을 안팎으로 둘러싸고 있는 여러 차원의  상황과(여기에는 논쟁란에서 거론되었던 폭력이나 섹스같은 것도  포함된다), 그에 대한 작품자체의 자기 인식, 그 진정성에 관한 면모라는 점이다.

[주 : 논쟁란의 논쟁과 관련하여, 소비되기 위해 남발되는 폭력과 폭력미학(!)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독자들이 바보인가? [소돔120일]  보고 '발기하는' 자가 과연 있을까? 거꾸로 여성의 섹스에 대한 깨달음을 [필링]에서  구할 자가 있을까?  (박무직은 조선일보 인터뷰기사에서 자신의 필링이 기존의 관음적인 남성시선 포르노의 시각을 배제하고 여성의 성을  진지하게 다루려고 한다는 맥락의 발언을 했었다..)한편 1차감각을 자극하고 끝나버리는 것과, 그것을 지나쳐 2차, 3차로 곱씹어지는 것은  이미 그것이 주는 쾌락의 길이와  횟수에서 무엇이 더 나은지 확연하지 않은가?]

장진영이라는 작가는 화가지망생(?)출신으로, '단지 만화가 좋아서' 만화 그리는데  몰두하다가 개중에는 동호회활동을 거쳐, 혹은 문하생생활을 거쳐, 대본소, 혹은 잡지 만화계에 데뷔하는 대부분의 만화작가들과는 다르게,  민중미술의 연장선에서 노동만화를  그려오던 작가다.(자세한 프로필은 책 뒤에 실린 비평 두편을 보면 된다)

즉 그에게는 '만화'라는 개념보다 '미술'-'예술'이라는 개념이 선행되어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예술이란 뭔가. 그는 80학번이었고, 그를 둘러싼 시대상황과 그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자기인식은 자신의 예술활동이 당대 사회현실에 대해 참여적이어야 한다고 결론내리게 한다. 참여적이라는 것은 여러차원에서 가능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개인적 표현의 차원이 아니라, 실제 노동운동에 필요한 선전물의 삽화,디자인이나  선동만화같은 것을 수시로 만들고 대규모로 찍어내고 뿌리는 집단 커뮤니케이션의 적극적 차원이었다.

왜 만화인가. 여기서 만화는 그매체가 가지는 예술성보다는 매체가 가지는 강력한 정보전달력, 접근하기 쉽고 반응이 즉각적인 특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제성 같은 것은 특성들로 인해 선택된다. '노동만화'라는 구분법 자체가 함의하는 그 이데올로기적, 매체적, 형식적 제한성만을 놓고 본다면, 신선함, 발상의 전환, 기법의 개발등 현대예술이 높이 평가하는 미학적 가치들중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그는  이제 더 이상 화가, 혹은 예술가로서의  만화가가 아니라, 그냥 노동만화가가 된다.

3. 그러나 정말 그의 자의식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하는 노동가요가 있다.

"...그러나 한걸음 또 한걸음..어느새 적들의 목전에~"라는 사정이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그 영역이 작든 크든 간에 하나를  열심히 파고들다 보면 어떤 적을 만나고, 그것을 피해갈지, 부딛쳐갈지 또는 다르게 어째야 할지 결정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일단 저 노래가사는 (부딛치는) 사태의  필연성과 그로부터 오는 싸움의 의지를 과시한다. 그 노래가 유행하던 당시 (89년? 90년?) 주간 전국 노동자신문에 장진영은 같은 제목의 장편 만화를 연재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노동만화들 특유의  거칠음과 노골적인 선동성, 일면적인 논리등이 없지 않지만, 반면에 타 선동지의 노동만화의 일회성이나 형편없는 숙련도에 비해, 어느정도 드라마적 구조와 자연스러운 연출법, 능수능란한 그림등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던 작품이었다. 공부하려고 시골서  상경한 한 여자애가 식모에서  공장까지 전전하며 결국은 전쟁터의 전사로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전선에 서게 되더라는 내용의....그야 말로 노래가사와 똑같은 맥락.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장진영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지 않은가. 

누가  나에게 이길을 일러주지 않아도,  한걸음 한걸음 예술가의 길을  제대로 걸으려고 하다보니 노동만화가가 되어있더라는. 이 자부심-어느 고급장르의 어느 신비로운 예술의 후광이 씌워진 예술가들보다도 내가 더 진정어린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라는  선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판 1. 누가 나에게..)

그로부터 시간이 지났다. 전선에서 상황은 변했다. 이제 그렇게 많은, 그렇게 신속한, 그렇게 즉각적인 대량의 선동만화들은 필요없을 뿐  아니라, 그렇게 큰 효과를 가져오지도  않는다. 모든 것은 일상화되고, 안정화되고, 정기적이 되며, 그의 만화 역시 거기에 적응해갔다.

작품집 '삽 한자루 달랑들고'의 후반부에는 본편과는 관계없이 몇몇 사보나 신문에서 청탁받아 연재한 작품들이 꽤 다수 수록되어있다. 서민가정의 생활이나, 아이들의 동심 따위를  소재로 한 이 작품들을 읽으며  나는 좀 당황했다. 소재나 주제,  연출법과 형식, 모든 면에서 이것은 매너리즘의 극단에 빠진 사보만화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이 졸작들이 바로 그 시기의 작품들이다.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자의식.....남아날 리가 없다. 그는 단지 가장으로서,  가정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충 대충 그려서 원고료  몇푼과 바꾸는, 그래서 그걸로 쌀도 사고,  가스값도 내고 하는 장인 이었다. (사실 기법적 측면에서 그 작품들을 보면 장인이란 말도 좀 그렇다)

본편 서두에서 그는 말한다.'지겨운 전세살이를  청산하고 정착하기 위하여'강화도로 이사올 것을 결심했다.  여기서 '지겨운 전세살이'란 정말 단지 집문제를 이야기 하는 건가? 아니다. 강화도에 온 후로 보여주는 그의 생활태도는 생활비 때문에  졸작들을 계속 되풀이해서 그려대는 자신의 무자각한 생활태도와 작품생활을 겨냥한 말이다.

그리하여 이어지는 시골생활에서 그는 말한다.  '벽돌이 필요하다면 직접 흙벽돌을 굽고  말지, 그 졸작을 팔아서 벽돌 몇장을 사긴 싫다'는 것이다.  1차노동을 통한 의식주의 자가해결은 사람에게 기본적인 자신감을 회복시켜준다. 그림 그리는 재주밖에 없는 사람이 그림그리는 데 자신감과 자부심조차도 떨어져나갔다면, 그를 일으켜 세워 줄 수 있는 것은 그래도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과 자신감 뿐 일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는 더 이상 자기 스스로 납득하는 기준 이외의 외부적 기준과 요구사항과 상황과 기타등등에 굽신굽신하며  이리저리 휘돌릴 필요도 없고, 주눅들고 외소해 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강화도행은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예술정신을 치료할 병원행이었던 것이다.

(도판 2. 새우깡 먹는 갈매기/도판 3. 후진 만화. 도판 4. 벽돌)

4. 2차 치료는 어떻게 가능한가

본편 중반부에 들어서면 해답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이미 챗바퀴같은 그림작업에서 점점 마음이 떠나가고 있었다. 친구들과 이웃들을 사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농사는 결코 혼자  짓지 못하며, 잡아본 건 붓밖에 없는 남자가 벽돌을 굽거나 집짓거나, 삽을 쓸려면 이웃이  있어야 한다. 강화도의 새 이웃은 그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었다.

그가 지난날 진지한 예술가적 자의식으로 노동만화를 시작했을 때, 그는 혁명가였고 인텔리겐챠였고 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당시  자신의 독자에게 어떤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와는 별개로 그는 무엇보다도 의식적인 선동가였던 것이다. 그는 노동자와 그들의 현실과 싸우는 방법을 노동자 스스로보다도  먼저 인식해야 했고 분석해야 했고 가르쳐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와 그의 독자들은 '분리되어있었다'

그들 사이의 인식의 차이가 줄어들고, 인식해야할 상황 자체가 급박하지도 복잡하지도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들은 평등해졌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렸다.  노동자는 현장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대체 어디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강화도에서 상황은 그반대였다.

장진영은 그들에게 무엇이든 배워야 했고 의논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그들과 함께 움직이고 생활해야 했다.  그와 그들의 관계는  마을이라는 울타리로 둘러싸여 하나의 집단으로 거론될 수 있는 '이웃'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예술가의 자의식이 자폐적이  되면 남는 것은 스스로 의 넋두리일 뿐이다. 공허한 메아리만큼 아름답지 못한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강화도생활은 그를 이웃과 함께 바깥으로 끌어내준다.

그렇다. 애초에 그의 예술관은 무엇으로부터 시작했던가. 시대와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을 같이 내쉬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예술이라는 생각에 누가 그길을 가라하지  않아도 몇십년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왔던 것이 아니겠는가.

자연스럽게도, 그러한 경로와 함께 그의 만화는 가면 갈수록 한층 풍부해지고 있다.본편 초반부에 보이는 막연한 희망과 고독한 암담함의 섬세한 묘사. 곧 이어지는 농사일로 먹고산다는 것의 암울함에 대한 씁쓸한  자각은, 이웃들 하나 하나의 생활의 방식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자연을 보며 비유하게  되는 인간사에 대한 사색까지 연장된다. 이러한 모든 소재적  변신은 그전의 그의 만화를 돌이켜볼  때 정말로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훌륭한 점은 소재적 변신과 함께  그것을 묘사하는 연출기법과 화법의 변신이 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직접적인 선동에 주력했던  그가 이제는 돌려말하는 법을 즐겨쓰곤 한다. 그리고 이는 그가 예술가로서  관찰력과 사고력을 회복했다는 뜻도 된다.

(도판 5 서당행)

5. 자기자신과의 싸움

사실 쓰다보니 치료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지만, 이 치료는 의사가 없다는 점에서 치료가 아닐 지도 모른다. 그는 단지 변해가고 녹슬어가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저항해 싸워나가고 있던 것이다. 앞서 나는 예술가들을 둘러싼 존재론적 상황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무한함을 추구하는 유한함 따위의 철학적 존재론이 아니더라도,빈상자의 후광, 혹은  갈매기에게 던져주는 새우깡 따위가 상징하는 존재론적 딜레마는 어디든 명백하게 실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걸 알고 있다 (모른다면 그는 예술가가 아니다) 그에 부응하건.적응하건, 저항하건, 그것이 미적인 방식으로 행해지는 한, 그것은  각자의 몫이다. 가장 나쁜 것은 눈을 감아버리고  모르는척 해버리는 것이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게 된다.)

만화가 장진영의 [삽한자루 달랑 들고]를  누구에게나(오히려 만화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더욱 더 ) 어필하게 만드는 그 힘은 바로 여기 있다.

(도판 6 황새와 뱁새)

자기자신과의 싸움에 결연히 뛰어들고, 그 싸움을 단지 혼자만의  자폐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사귀기의 과정으로 실현하고, 그것을 아름답고도 설득력있고 덧붙여 세련되게까지 묘사하는데 성공했다면, 일단 지금 상황에서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그것은 예술가 자신에게 좋은 것일 뿐 아니라,  모든 (자기 길을 가려고 하는 )읽는 이에게 보편적으로 좋은 것이다.

모든 만화가가 예술가이기를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더  많은 만화가가 예술가가 되기를 바란다.

[end]


 ▶ 기사:  누프걸
 ▶ 조회: 6975 | 등록: 2002/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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