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사라>와 <레드문>을 다시 읽었습니다. 가공적 스토리전개보다는 일상적 삶에 천착하는 요즈음의 만화를 보다보면, 가끔은 이런 탄탄한 스토리의 만화들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이 두 만화는 많이 닮아 있습니다. 만화史에 무지한 저로서는 어느 작품이 먼저인지 알수 없지만 틀림없이 누군가가 먼저 씌여진 작품을 읽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뭐, 그런 것에 상관없이 둘다 너무 좋은 작품이긴 하지만요.
이 두 만화는 둘 다 '이름붙이기' 혹은 '가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평범하게 태어난 주인공들은 영웅/메시아로 예언된 인물의 이름을 받게 되고, 그 가면을 쓰게 되지요. 이름을 새로 붙인다는 것. 그것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바꾼다는 것이지요.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나에서 다른 사람으로. 그런데 그 과정이 그닥 손쉽진 않겠지요. 그 바뀜의 과정이 바사라에서는 사막의 고난으로, 레드문에서는 한번의 죽음과 재생으로 상징되지요. 그러고 보면 레드문이 훨씬 노골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사실 여기서 말하는 이름붙이기와 가면쓰기는 우리 삶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다워야 한다"라는 것. 사회에서, 가족내에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어떤 상. 그것들이 모두 이름이고 가면일수 있으니까요. 그 가면을 벗기고 내 생살을 드러내는 일이 가능할까요. 그건 정말 아플지도 모릅니다. 함부로 생살을 드러냈다간 타는 듯한 햇볕에 타없어질지도 모릅니다.
생얼굴을 드러내는 것. 이것으로 이 만화들은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승리하고 메시아가 될수 있는 이유도 그 빌린 이름과 가면을 통해서가 아닌, 자신의 생얼굴을 드러냄으로서이지요. 메시아답지 않은 우유부단함과 남에 대한 애정, 부드러움. 이런 것들이 결국 강한 것이라고 합니다. 진부하지만 매력적인, 그런 이야기입니다.
생얼굴을 드러낸다는 것. 일본의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적 경험을 '생얼굴'에 비유한 적이 있지요. 계층과 구조에 맞게 만들어진 가면을 벗을때야 비로소 근대인의 특유한 '내면'이 나타난다고 말이지요. 왜, 근대인은 성찰하는 사람이라지 않습니까.
그런데 왠지 나는 내 생얼굴위에 덮여진 두꺼운 가면을 벗어버리기가 참 어렵군요. 뭔가 캥기고 두려운 것이 많은 모양입니다. 착하게 살아야 할텐데. 참, 편하게만 살고 싶은 모양입니다. 가끔은 내 생얼굴이라는 것이 있기나한것인지 의심도 듭니다.
몇년전인가 시인 김지하가 한 고백이 생각나네요. "난 이제 그만 김지하라는 무거운 이름을 버리고 싶다. 그리고, 내 할머니가 지어주신 '김영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싶다. 김영일. 이 순하고 착한 이름을 가지고."
바사라도, 레드문도 필시 그랬을테지요. 가면은, 무겁고 고달픈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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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1102, IP : 211.106.12.70 2000/09/24 Sun 02:27: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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