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하시 신의 <최종병기 그녀>의 애니판을 봤습니다. 일본에서 7월 2일부터 방영되었다고 하더군요. <기동전사 건담 0083>의 카세 미쓰코(加瀨充子)가 연출했구요.
나름대로 원작에 충실하구요.(물론 개인적으로 원작 전체가 딱히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만화는 초반부 딱 1권까지의 분량으로 끝냈어야 했었다는 느낌입니다.) 유려하게 ‘생략’한 연출도 좋았구요. 무엇보다 일본 드라마적인 트렌디한 연출들이 인상깊었던 애니 시리즈였네요. 단지 아쉬웠던 점은, <최종병기 그녀>의 가장 화려한 장면 연출인 만화책 1권의 마지막 엔딩 부분의 애니메이션 연출이 TV 시리즈 특유의 연출 호흡에 섞여버리는 바람에 좀 얼떨떨하게 보여졌다는 게 많이 안타까웠네요.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위 작품을 상당히 야한 작품으로 평했던 기억이 나는데, (치세가 병기로 변신한 다음엔 항상 옷이 찢어짐.) 애니 역시 TV 시리즈라는 걸 생각했을 땐 다소 야한 구석이 있군요.
어쨌든, <최종병기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치세라는 캐릭터에서 보여지는 가학과 피학의 쾌감입니다. 갑작스런 망가짐, 새로 사서 곱게 펼쳐든 책 위에 난데없이 자판기 커피를 엎질렀을 때의 그 수습 불가능한 파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몰락. 그런 것들.
사실 앞으로 전진하며 살아가는 것의 대부분은 이런 ‘어쩔 수 없는 망가짐’에 적응하고 익숙해져 가는 과정이구요. 그런 의미에서 조금씩 조금씩 점층적으로 망가져가는 치세의 몸뚱아리는 그 자체로 삶의 테마가 되지 않을까 하네요.
<최종병기 그녀>의 1권 마지막 즈음에서 치세와 슈는 도망치기로 결심하고 역 앞에서 만나길 약속합니다. 하지만 치세는 그 약속을 어기고 이른바 ‘최종병기’로서 출격할 수밖에 없게 되구요. 병기로서 끊임없이 성장하던 그녀는 결국 그 날 다시는 인간으로서 되돌아 올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맙니다. 이른바 아예 부서져버린 거였죠.
슈는 그 날, 그렇게 도망치기로 했던 날이 그녀를 되돌릴 수 있을 마지막 기회였다는 후회 섞인 독백을 합니다. 하지만, 삶은 의외로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는 것만큼 이런 여러 가지 가능성을 허락할 만큼 녹녹하진 않죠.
그런 삶은 작고 작은 가학과 피학의 연결고리들입니다. 매회 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망가지는 치세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삶의 엑기스를 보여주고 있구요. 그렇게 가벼운 쾌감의 공감대를 만들어 나가는 거겠죠.
아직 고등학생의 나이인 치세와 슈가 이런 별로 낭만적이지 못한 엔트로피의 원리 따위를 실감하기엔 좀 더 기다려야하겠죠. 좀 더 망가지고, 일그러지고 더러워질 때까지...
슈, 잘 있었니.
미안해
줄곧 망설였었는데,
말하기가 뭐했었는데,
이참에,
좋은 기회인 것 같아서
쓰기로 했어.
미안해.
내 몸은 이제 원래의
보통 몸으론
돌아갈 수 없어.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돌아갈 수
없게 됐어.
슈가 함께
도망치자고 말해줬던...
그 날,
내가 약속을
어긴... 그 날
출격해서
나,
부숴져 버렸어.
인간으로서의
기능들이 잘 움직이지
않게 됐다고 수리하시는
아저씨가 말씀하셨어.
이제 완벽하게
예전처럼 될 순 없다고
말씀하셨어.
그렇담 부숴지지만
않았다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었단
예긴가요?
하고 물었더니
아저씨가
쓴 미소를
지으시더라구.
미안해
이런 예길 들으면 슈는
더욱 곤란해질 뿐인데...
하지만 지금 말해두지 않으면
영영 용서받지 못할 것 같아서...
이런 여자친구여서 정말 미안해
지금, 잠시 슬펐지만
한편으론 홀가분해졌어.
이제 더 이상 슈를 괴롭히지 않게 됐으니까.
상처주지 않게 됐는걸.
나 후유미 선배를
아아- 삐삐가 왔어.
미안해
나 일하러 가야해.
내일 학교 갈 수
있을까?
미안해
이젠 가봐야겠어.
미안해. 슈
나...
미안해.
정말 미안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미안해
미안해.
슈-
하지만 널 좋아했었어.
한참후에 치세가 쓰던 교환일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는 걸...
동글 동글한 글씨체로 쓰여있었다는 걸...
-그 날이, 치세의 성장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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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3455, IP : 211.237.241.212 2002/08/01 Thu 23:34:17 → 2002/08/01 Thu 23:3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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