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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지기 쉬운 우리의 일상 - [호박과 마요네즈]
망가지기 쉬운 우리의 일상

"호박과 마요네즈" - KIRIKO NANANAN, 닉스미디어

만화를 즐겨보는 사람에게라면 단골 만화방이 있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편리하다. 그 편리함은 대체로 '익숙'하다는 데서 오는 편리함이다.
원하는 만화책이 어디쯤에 진열되어 있는지, 음료수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콜라 캔 하나에 500원인지 600원인지를 따로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것은, 특히 다른 사람에게 말붙이기를 꺼려하는 나 같은 종류의 인간에게는 굉장한 편리함인 것이다. 게다가 몸에 익숙해진 단골 만화방의 소파는 너무나 편안하고 따스해서 마치 내 몸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골 만화방에서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낯선 만화방을 찾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 바로 단골 만화방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만화책 찾아내기' 이다. 가끔 헌책방이나 중고 음반점을 뒤지거나, 집 앞의 비디오 가게를 놔두고 두 번이나 길을 건너야하는 아파트 단지의 '영화마을'까지 비디오를 빌리러 가는 것과 같은 이유로, 나는 낯선 만화방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 낯선 공간의 진열대에서 보물처럼 숨어 있던 '작품'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은, 지하철에서 우연히 옛친구를 마주쳤을 때의 즐거움에 견주어도 좋을만한 것이다. 그렇게 만난 옛친구와 서로에 대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 '작품'이 품고 있던 소중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다.

KIRIKO NANANAN(나나난?)의 "호박과 마요네즈"는 바로 그렇게 '발견'한 사랑스러운 작품 중 하나이다.

평범한 인물, 평범한 일상,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묘사

"호박과 마요네즈" 등장인물들의 가장 큰 특징은 별다른 특징이 없다는 점이다.
조그만 양품점의 아르바이트생인 주인공 츠치다.
음악가를 꿈꾸는 백수이며 츠치다에게 '얹혀' 살고 있는 세이.
어쩌면 이 도시에서 마주칠 수 있는 젊은이들 중 절반 정도는 이들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평범한, 그야말로 '만화 주인공답지 않은' 인물들이 스토리를 이끌어나간다.
게다가 그들이 만들어 가는 스토리 또한 어찌나 평범한지 츠치다가 아르바이트로 나간 술집에서 일어난 손님과의 트러블이라던가,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옛사랑을 만난다던가 하는 사소한 일들이 그야말로 커다란 '사건'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오죽하면 작품 말미에 주인공 스스로가 '우리들의 이 흔해빠진 일상은...' 이라고 독백을 다 하겠는가.
그러나 그 '흔해빠진'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나의 이야기, 혹은 내 가까운 친구의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친근하고 아련해진다.

스토리와 인물은 평범하지만 이 정체불명의(아직까지 이 작가에 대해 들어본 바가 전혀 없으므로) 작가 KIRIKO NANANAN의 그림과 연출은 결코 평범하지가 않다.
"호박과 마요네즈"의 그림은 마치 '사진'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사진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그려놓았다는 뜻이 아니라, '정지'된 느낌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낙엽은 땅을 향해 떨어지고 있지만 그림 속에서 '정지'해 있다. 물론 애니메이션이 아닌 출판 만화인 이상 떨어지는 낙엽의 움직임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작가는 낙엽의 움직임을 나타내줄 수 있는 보조선의 사용마저도 지극히 절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진 같은 느낌을 주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우습지만 '사진과 다르기 때문'이다. 사진은 앵글 속의 풍경을 모두 담아내지만(물론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앉아 있는 사람의 뒤통수라던가 그 사람이 기대앉은 의자의 등받이 같은 경우에는 사진에 나타나지 않지만 여기서는 3차원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2차원적으로 생각하기로 하자.) KIRIKO NANANAN의 그림은 사진과는 달리 많은 것을 생략한다.
어린 시절, 기름종이를 사진 위에 대고 희미하게 비치는 사진의 윤곽을 따라 그림을 그려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그림을 그릴 때 곤란한 점의 하나가 세세한 부분까지 따라 그리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사진이 생각만큼 선명하게 기름종이에 비쳐지질 않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윤곽'만을 따라 그릴 수 있을 뿐이었고, 희미한 부분들은 생략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KIRIKO NANANAN의 그림은 바로 이렇게, 사진을 먼저 찍어 놓고 그 위에 종이를 대고 그린 게 아닐까하는 혐의를 두고 싶을 만큼 '기름종이 그림'의 느낌과 가깝고, 그런 의미에서 사진의 느낌을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만화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이 독특한 그림체는 평범한 인물들의 평범한 일상을 표현하는 데,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객관화시키는 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만큼 잘 어울린다.

익명의 도시, 얼굴 없는 주인공

"호박과 마요네즈"의 등장인물들은 정면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옆모습이나 뒷모습, 혹은 고개를 숙인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간혹 얼굴이 드러날 경우, 그들은 멀리에 서 있어서 얼굴이 뚜렷하지 않거나, 담배를 피우느라 얼굴의 일부가 손에 가려진다. 더구나 그들은 한결같이 긴 머리를 가지고 있어서 조금만 고개를 숙여도 얼굴의 상당 부분이 머리카락에 가려져 버리는 것이다.
작가가 이렇게 자신의 주인공들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뒤에서나 옆에서, 혹은 멀리서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보다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는 작가의 필사적인 노력인지도 모른다. 정면에서 그들을 바라보게 되면 그들의 모습 속에서 작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작가의 시선은 흔들리게 될 것이므로. 또 어쩌면 그것은 도시에서의 일상과 익명성을 표현하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인지도 모른다. 도시에서의 만남은 결국 상대에게 등을 보이거나, 혹은 상대의 등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므로.

오늘은 웃어야지라고 생각했다.

"호박과 마요네즈"에서 주인공 츠치다의 독백은 스토리의 흐름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요소이다.(실제로 이 이야기는 츠치다의 독백으로 시작해서 츠치다의 독백으로 끝난다.
독백은 제대로 사용하면 작품에 윤기를 더해주는 거름의 역할을 해주지만, 자칫하면 작품에 똥칠하는 격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과 같다. 츠치다의 독백은 생략되어 있는 상황을 슬쩍 설명해주거나, 그림으로 표현된 상황만으로는 읽어내기 힘든 츠치다의 심리를 표현해준다.
글로써 상황을 설명하거나 등장인물의 감정을 드러내는 이유는 대개 작가의 역량 부족 때문인 경우가 많다. 상황과 감정을 만화적으로 표현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냥 쉽게 '말'로 설명하고 넘어 가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호박과 마요네즈"에서 츠치다의 독백은 작품에 문학적인 느낌을 더해줄 정도로 작품과 잘 어울어져서, 지나치게 객관적으로 묘사되어 자칫 건조하게 느껴지기 쉬운 스토리를 풍부하고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오는 길에 슈퍼에서 파와 생선을 사고
국수집 앞을 지나면서는 배기구에서 풍겨나오는 맛있는 냄새를 맡으며 세이와 수다를 떨고
이런 사소한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어제 널은 빨래, 세이가 걷었네.

힘내! 세이, 라고 속으로 말한다.

하기오가 왔다.
나와의 약속에 일부러 지하철을 타고 칼같이 시간을 맞추어서 하기오가 왔다.

세이가 잊고 간 아직 빨지 않은 옷이 아까워 빨 수가 없다.
세이의 체취 때문에 빨 수가 없다.

'우리의 생활은 매일이 일상'이다. 그 '흔해빠진 일상'의 어느 한 순간, 문득 스스로의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면, 낯선 만화방의 진열장 한 쪽에서 하늘색 표지의 이 만화 "호박과 마요네즈"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혹시 그 낯선 만화방에서 "호박과 마요네즈"를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뭔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만화를 만나게 된다면, 우리의 일상은 아주 조금, 풍요로워질 것이다.

우리들의 이 흔해빠진 일상은 실은 아주 망가지기 쉬워서
끝내 잃어버리지 않는 건 기적이다.
Read : 1493,  IP : 61.33.59.96
2001/02/17 Sat 19:26:46 → 2001/03/14 Wed 10:5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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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강추임돠.~~   바사라소녀   2001/03/18 1191 
79    20세기 소년   UGLY빈   2001/03/04 1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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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 강경옥만화 무지좋아해여...   미나   2001/07/12 1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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