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만화를 보니 지독히 슬프다 / 이명석
출처 : 컬티즌
이명석 puppet@sugarspray.com
70년생. 서울대 철학과 졸업. 문화잡지 [이매진] 기자와 웹진 [스폰지] 편집장 역임. 현재 복합 문화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중이며, 저서로는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문화의 백과사전]과 [이명석의 유쾌한 일본만화 편력기] 가 있다.
한동안 뜸하더니 요즘 출판사 여러 곳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주고 계시다. 물론 변변찮게 팔릴 책도 못 내본 내게 집필 의뢰가 쇄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소개해달라는 것이겠지. "자,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사오 년 전에는 국내에도 잘 나갈 만한 일본 만화를 소개해달라는 부탁이 많았다. 나름대로 떠들어 드렸다. 이삼년 전에는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 만한 만화가 없겠냐고 물어보는 영화사나 방송국 관계자들이 많았다. 새 작품을 진행 중인데, 혹시 표절 소지가 없냐고 자문을 해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두어 번 말하고 나니 지겨워져서 모범 답안지를 만들어 낭독해 드렸다.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진짜인가 보다. 국내 만화가를 소개해달라는 것이다. 또 무슨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얼치기 교양 학습물이라도 만들려는 걸까? "아니요. 진짜 자기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요."
뭔가 이상하다 싶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던 베스트셀러 순위를 들여다보았다. 한국 출판인 회의가 발표한 6월 둘째 주 베스트셀러 도서의 목록을 보자. 1위에 심승현의 [파페포포 메모리즈], 그리고 5위에 정헌재의 [포엠툰]이라는 만화, 혹은 그 ‘비스무리’한 책들이 당당히 올라와 있다. 그리고 그 외곽에는 김희문의 [문스 패밀리], 정철연의 [마린 블루스]가 상당히 선전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놀랍다. 바야흐로 한국 만화 출판의 르네상스가 도래하는 것일까?
하지만 막상 그 만화들을 찾아 펼쳐보고는 '맞아, 그러면 그렇지'라고 머리를 툭 쳤다. 출판사 분들이 나에게 어떤 만화가를 소개해달라는 지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감동과 선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 사소한 삶의 행복, 사랑의 소중함과 헤어진 자들을 위한 위안, 공익 광고, 전자회사 CF, 드라마적인 뮤직 비디오, 원태연의 시, 조성모와 발라드, 박카스... 구구절절 좋으신 말씀들과 온갖 따뜻한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내가 [마린 블루스]의 해설을 쓰면서, 이 책은 그래도 좀 팔리겠다고 생각했던 '어떤 요소'들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기도 했다.
여러 작가의 작품들을 한 묶음으로 모으는 데는 항상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나는 [마린 블루스]는 [스노우 캣의 혼자 놀기]나 [비빔툰]과 같은 책꽂이에 꽂아두고, 나머지 만화들은(굳이 만화라고 하기 힘든 책들도 있지만) 일회용 비닐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조심스럽게 들추어보다가 얼른 치워버려야겠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사스보다 무서운 것에 전염될까 두렵다.
그들 만화는 부드럽고 가벼운 그림체에 얄팍한 감상을 버무려 독자들에게 내놓는다. 별스러울 것도 없다. 연애시, 발라드 가요, TV의 공익 교양물과 같은 우리 사회의 지배적 문화로 자리잡고 있는 상업적 감상주의를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연애와 이별'이 이들의 큰 관심인데, 그러한 소재 자체를 무시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허영만, 김세영의 [사랑해]나 와타세 세이조의 여러 작품들은 바로 그 '에세이적 감수성'으로 사랑의 실체를 훌륭하게 그려낸다. 그들은 만화의 단순한 그림체가 얼마나 훌륭한 시적 기조로 빚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파페포포...] [포엠툰] [문스 패밀리]는 만화 형식적으로는 아마츄어에 불과하고(다른 두 작품에 비해 [파페포포...]는 나은 편이긴 하다), 내용적으로는 뻔하디 뻔한 상황에 하나마나한 잠언들을 더하고 있다. [블루 데이 북]처럼 따뜻한 이미지에 좋은 말을 덧붙여 삶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목적인 것은 분명히 알겠지만, 평균 이상의 창의성이나 형식적 매력도 찾기 어려운 책들이 만화라는 쉽고 편한 형식을 빌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의 손길을 받는다는 것은 무척 슬픈 일이다. 발라드라도 좋다. 훌륭한 발라드면 안 되나? 만화나 책이라기보다는 팬시 상품이라고 해야 좋을(팬시 캐릭터로서의 매력도도 무척 낮지만) 제품들이 베스트셀러의 목록에 오르고, 문화산업지원센터 우수만화 컨텐츠로 선정될 이유가 있을까?
그런데 더욱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이런 만화들을 언급할 때 흔히 그 정반대의 대표자로 이야기되던, 1990년대 중반 [광수 생각]의 반대편에 [도날드 닭]을 세워 두었던, 바로 그 이우일이 [러브 북: 버니의 사랑 이야기]라는 책을 발간했다. 처음에는 예의 그 장난기가 발동했구나 생각했다. 작가의 말에서 밝히듯 그는 '평소 닭살 돋는 사랑 이야기를 혐오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나? 나는 이우일이 과거 존경하는 만화가로 매트 그로우닝을 언급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TV 시리즈 [심슨즈]보다는 [학교는 지옥(School is Hell)]과 같은 '지옥 시리즈'의 카툰 북을 좋아했고 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나는 그의 [러브 북]이 [사랑은 지옥(Love is Hell)]을 오마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인공도 똑같이 토끼가 아닌가? 그런데 아뿔싸, 동서양의 사랑의 경구를 모아 거기에 그림을 덧붙인 책이라니. 한참을 보고 또 봐야 했다. 그렇다면 이건 [사랑의 지옥]의 패러디인가? 따뜻한 사랑의 극단을 보여주며 그 무의미함을 통쾌하게 뒤집으려는 시도인가?
분명히 이우일의 책을 들여다보면 그가 [파페 포포...] 등에 비해서는 두세 수 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짙은 개성의 그림체와 독창적인 상황 설정, 귀여운 토끼와 바람 부는 절벽에 앉은 여인과 같은 이질적인 요소를 한 데 엮는 솜씨... 만약 이것이 이우일의 책이 아니라면 나는 그 주제를 떠나 만화가, 혹은 일러스트레이터로서 그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고 소개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과거와 자기 진정성을 믿어온 나와 일부의 독자들에게 그것은 분명한 실망이다. 적어도 이런저런 경구를 모아서 거기에 그림을 덧붙인다는 뻔한 시도만큼은 피할 수 없었나?
[파페 포포 메모리즈] [포엠툰] [문스 패밀리] [러브 북] 등은 분명히 외견상 무해한 만화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나 위안이나, 모두 지겨울 뿐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아름다운 물의 결정 사진과 좋은 말을 덧붙인 에모토 마사루의 [물은 답을 알고 있다]처럼 그 내용 자체는 선량하지만 자신을 과학이라고 강변하여 이 사회에 거짓을 퍼뜨리는 책보다는 낫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에모토가 기반한 동종요법(homeopathy: 칼에 찔리면 칼을 옆에 둔다. 납중독에 걸리면 납을 극도로 희석한 물을 투여한다)처럼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무의미한 시간 때문에 진짜 '마음의 치료'를 막는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 진짜 이 세계의 진실을 가르쳐주고, 사랑과 위안의 미래를 만들어줄 좋은 책과 만화들을 가로막는 먹구름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차라리 느낌표!가 낫다."
|
Comment : 7, Vote : 146, Read : 3949, IP : 61.73.66.116 2003/06/20 Fri 13:13:47 |
| 깜악귀 |
동의함. |
 |
2003/06/20 |
| 무희 |
저도 동의합니다. 컬티즌에서 보고 마구 퍼가고 싶었었지요. (음.. 차라리 느낌표가 낫다까지는 아닐지도..;;) |
 |
2003/06/20 |
| pinksoju |
느낌표와 동급정도일까요...-_- |
 |
2003/06/20 |
| 흐음 |
진짜 딴 이야기이지만, 잠시 옆길로 새보자면... 느낌표 중 아시아!아시아!는 분명 외국인 노동자들도 선별을 해서-이력을 보면 대학이상의 학력을 가진- 그들의 가족을 데려오고 있는데요. 이게 외국인 노동자의 더 비참한 현실을 가린채 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아! 불쌍한 그들을 만나게 해 줬으니 되었다. 라는 자기위안 혹은 자기 합리화를 줄 소지가 높죠.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프로가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아예 외국인 노동자를 -황금시간대에-코배기도 볼 수 없는 것보다, 외국인 노동자와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나마 낫지 않나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도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더 심도있는 프로그램을 원하고 있습니다.-황금시간대가 아니라 할지라도) |
 |
2003/06/21 |
| apostle |
`악화애 의한 양화의 구축`도 얄팍한 감상주의만큼이나 지겹습니다. 그것들이 시시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요. |
 |
2003/06/22 |
| 흐음 |
저자신, 그닥 이건 시시하다 아니다를 구별하면서 살아가지는 않습니다만, 대중들은 그걸 `시시하게`보고 있지 않잖아요. |
 |
2003/06/23 |
| hyol |
그런 책보다, 그런 프로보다 더 좋은 책과 프로가 나와야 하겠지요. 미담류의 만화의 난립으로 다른 만화가 사장되고 있고(그로 인해 독자들의 취향도 제한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이주 노동자의 처우 개선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이산가족 상봉류의 프로는 오히려 이주 노동자와 한국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출판만화와, 이주 노동자의 인권이 발전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야 하고, 미담류의 만화의 한계를 지적하고 선심성 미담류 프로를 비판하며 지양하는 태도 역시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
 |
2003/06/2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