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과 만화, 그 새로운 미학 -성완경/인하대 교수
만화는 가볍고 재미있다. 거기에는 이야기, 형상, 마술의 상호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영상문화시대를 관통하면서 만화는 새로운 개념미술이자 포스트모던 예술의 풍부하고 핵심적 형식으로 부상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술과 만화의 관계는 어떠한가. 필자는 ‘발화(發話)’의 예술인 만화가 오늘날 미술에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고 이야기한다. 팝아트 이후 만화를 미술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미술 쪽에서 보았을 때 만화는 자극적이고 매력적인 그 무엇이다. 그 자극과 매력은 아직도 어느 정도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 대체로 키치와 혼성의 미학 혹은 그 언저리 쯤에서 우리는 만화의 미술적 번안 혹은 미술적 해석의 주류를 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만화라는 생산물의 내용과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들여다보면 그 자극은 이런 유의 미학이나 관점만으로 귀결되기에는 아까운 혹은 불가능한 새로운 시야를 우리에게 예비하고 있는 것 같다.
미술과 만화는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중심축을 갖고 진화하고 있다. 만화를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만화의 익숙한 본성에서 정의하는 것과 예술형식으로서 만화의 특징을 정의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우선 전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만화의 주요한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점들을 놓칠 수 없다.
첫째, 만화는 우선 재미있다. 폭 빠져서 읽는다. “한번 손에 쥐면 먹고 자는 일도 귀찮아지는 책” 그것이 만화다. 만화는 사람을 폭 빠지게 하는 그 무엇이 있고 우리의 기억에 오랫 동안 각인된다. 아니 그냥 각인이 아니라, 어릴 적 고향처럼 깊은 향수를 자아내며 마음속 깊이 내장된다. 《칸, 페이지, 이야기》의 저자 베노와 페터즈에 따르면 누구나 한 개 이상 자기 기억 속에 ‘잊을 수 없는 만화의 칸’, 혹은 ‘’잊을 수 없는 장면’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칸 그림은 실제의 만화와 꼭 같은 그림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촉발되어 자신의 기억이 만들어 낸 그림, 혹은 변형한 그림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것은 만화의 이미지가 어떻게 우리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 있으면서 깊이 갈무리되는지를 말해 주는 흥미로운 사례일 것이다.
둘째, 만화는 가볍다. 물론 무거운 만화도 더러 있다. 무겁고 심각하고 거창한 만화, 권가야의 〈남자 이야기〉나 엔키 빌랄의 〈니코폴 3부작〉처럼. 그러나 대체로 만화는 낙서같이 자유롭다. 이 가벼움을 우리는 즐긴다. 너무 가벼워 식상하는 수도 물론 있다. 그러나 가벼움은 자유로움과 통하는 만화의 중요한 덕성이다. 〈꺼벙이〉나 〈O달자의 봄〉, 〈홍대리〉, 〈기동이〉 혹은 〈고우영의 삼국지〉나 〈고인돌〉. 이 모두에서 가벼움을 뺀다면, 그건 말이 안 된다. 가벼움이 재미이고 생명이다. 만화를 읽으며 우리는 주류 문화의 권위나 엄숙성을 뛰어넘는 즐거움과 해방감을 맛본다. 특히 엽기적 유머와 변태적 상상은 저항과 전복의 빠뜨릴 수 없는 주요 수단이 된다. 유럽만화의 레제르, 고틀리브, 빌렘 같은 작가나 한국만화의 양영순, 정연식, 곽상원, 이우일 등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폭력적이고 위악적인 것, 자극적이고 성애적인 것, 환상적이고 현실도피적인 것, 기상천외하고 극단적인 것에 대한 추구 등 많은 성인용 극화 장르 만화의 일반적 경향도 본질적으로는 이런 욕망과 관계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만화는 억압된 욕망과 금기를 깨뜨리는 욕망의 해방구이자 일탈과 저항의 장소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다.
이동기 〈모던 걸〉 91×72.7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0
안석주 〈모던 걸의 장신운동〉 만문만화 ‘가상 소견’ 중, 조선일보 1928
셋째, 만화엔 만화 특유의 팬덤 문화가 있다. 만화가 만화 고유의 대중문화적 즐기기의 대상이란 사실을 가볍게 보아선 안 된다. 대개 만화 독자들은 미술 애호가들보다 더 주견이 뚜렷하며 열성적이다. 자신의 아이덴티티와 취향의 차별화에 대해 민감하다. 만화 독자들은 그들 고유의 팬덤과 마니아의 세계가 있고 숭배와 열광, 평판과 비평에 특유한 형식이 있다. 또한 DIY(스스로 해보기), Zine 문화, 코스프레 등에서 보듯이 스스로 대단히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열광을 나누고 자기 주견이 확고한 비평가의 몫까지 톡톡히 해내고 때로는 스스로 만화를 그리기도 한다. 대개 그들은 인터넷 사이트를 갖고 있고 독특한 커뮤니티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만화가가 직접 운영하는 홈페이지도 있고 이런 추세는 점점 더 활발해지고 있다. 만화는 다른 어떤 예술 장르보다 작가와 독자, 그리고 독자와 독자 사이에 주고받는 쌍방소통적 요소가 중요하고 팬덤과 마니아의 정서가 활발한 영역이다.
이처럼 만화는 저자와 독자가 함께 나누는 인기, 애정, 대화가 대단히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장르다.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한이 만화를 텔레비전과 더불어 쿨 미디어의 하나로 정의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독자가 참여하는 미디어라는 것이다. 이 점은 만화라는 장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열쇠가 되는 대목이다주1).
만화, 멀티미디어 시대 예술의 ‘이상한 끌개’
그러나 위에 얘기한 것은 만화를 읽고 즐기는 방식의 특징을 말한 것이지, 만화 그 자체의 근원적인 매혹을 설명하기엔 아직 부족한 감이 있다. 만화가 주는 매혹의 힘을 제대로 설명한다면 이야기, 형상, 마술의 상호관련에서 찾아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따로 쓴 글이 있으니 여기선 그 핵심만 요약 설명해보겠다.2)
모든 형상의 비밀은 이야기에 있다. 이야기(이스토리아) 없이 형상(피구라)은 태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이 세계와 자신을 이해해 왔다. 그리고 또 통어해 왔다. 이야기란 곧 형상이다. 형상은 눈에 보이는 것도 있고 눈에 안 보이는 것도 있다. 눈에 보이는 형상보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상이다. 혹은 더 정확히 얘기하면 형상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중간에서 역동적으로 존재한다. 형상은 상상을 자극한다. 그리고 상상의 산물이 곧 형상이기도 하다.
스토리 만화의 측면에서 보자면 만화의 핵심적 속성의 첫째는 이야기의 주기성(연재)과 동일한 주인공의 반복적 등장이다. 이것은 근대 만화의 대중적 인기를 해명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또 한 가지 만화의 형식적 특징은 ‘연속된 칸과 페이지로부터 이야기가 태어난다’는 점이다. 만화는 인쇄된 지면이라고 하는 공간 속에 특유의 방식으로 이야기와 그림을 분절시키고 배열하면서 ‘시간과 공간의 연속체’를 만들어 낸다. 연속된 칸 그림으로 지면을 구성한 인쇄된 만화 형식이 우리를 사로잡는 힘은 그것이 칸과 그림과 텍스트로 구성된 지면 위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교묘한 교차배합을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끌어들이는 특이한 힘을 떠나서 설명하기 어렵다.
칸과 칸 사이,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 그리고 한 칸의 그림과 전체 지면공간 사이에서 시선이 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고 되짚어 배회하기도 하면서 시각적인 동시에 문학적인 서사를 음미하고 그래픽과 공간의 매혹에 빠져든다. 그 점이 만화 특유의 마력이다. 칸들의 배열과 그 상호연결, 칸과 페이지의 관계, 그림과 문자 텍스트의 연결방식, 다양한 모양의 의성어나 의태어, 그리고 만화 특유의 그래픽으로 전환된, 흔히 ‘만화 아이콘’이라 부르는, 등장인물이나 동식물, 물건, 풍경들. 이 모든 것이 만화에 특유한 방식으로 공간과 시간을 분절하고, 축약하고, 연결하고, 중첩시키고, 우회시키는 등 다양한 시공간을 편집해 내면서 만화의 이야기와 그 매혹을 만들어 낸다.
특히 중요한 것은 칸과 칸 사이의 관계다. 칸의 구성은 이야기의 구성이자 시간의 흐름의 공간적 구성이기도 하고 그림의 구성이기도 한데, 이 구성에는 대체적인 컨벤션(관습)이 있지만 자유롭고 새로운 형식의 구사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1990년대 우리 나라의 여성만화가들(순정만화)이나, 프랑스의 뫼비우스(특히 〈아르작〉 연작), 크리스 웨어(〈큄비 더 마우스〉) 등은 특히 칸의 운용에 있어 유연한 솜씨를 보였다. 우리는 대개 각 칸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지만 사실 만화에 의해 촉발되는 우리의 상상력이 작용하는 공간은 칸과 칸 사이의 여백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하나의 칸과 다음 칸 사이의 이 틈에서 행위의 혹은 장면의 상호관련을 포착하고 음미하면서 하나의 사건이나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것은 만화를 읽는 독자의 상상력이다.
독자라는 주체의 적극적 역할은 아이콘이나 캐릭터의 카툰적 특성, 곧 핵심을 살린 약화식 그림이 우리를 사로잡는 매혹의 이유와도 상통한다. 카툰식 그림이란 일종의 ‘그림 기호’나 ‘시각상징어’처럼 상징성과 연상성, 특징화와 전달성이 강화된 약식 그림이다. 《만화의 이해》의 저자 맥클루드에 따르면 만화는 우리의 감관을 확장하여 이 세계와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언어라고 한다. 마치 우리가 운전할 때 차의 기어라든가 운전대, 백미러 등이 우리 몸의 연장이 되어 우리가 차와 일체감을 이루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만화를 읽는다는 것은 독자들이 카툰화된 주인공 속에 몸을 숨기고 감각을 자극하는 세계로 안전하게 들어가는 것이며 그 속에서 마음껏 모험을 펼친다는 것이다.
만화는 또한 그래픽(그림)상으로도 대단히 놀라운 형식 실험을 보여 주어 왔다. 앞서 만화의 칸과 칸 사이의 공간에 관해 말했지만 그것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페이지 전체도 중요하다. 우리의 시선은 한 칸에서 다음 칸으로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만화는 한쪽 페이지 전체, 혹은 양쪽 페이지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파놉티콘(panopticon, 한곳에서 내부가 전부 보이는 원형 교도소)적 시각장치를 가진 서사형식이다. 이 점은 만화와 영화를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이기도 하다. 만화는 페이지 공간 위에서 구현되는 그 시각장치의 다양하고 창조적인 운용에 크게 빚을 지고 있는 서사형식이다. 만화작가마다 혹은 작품마다 다른 개성도 그 시각장치의 운용방식과 그 안에 담기는 그래픽적, 회화적 표현의 특질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림의 개성과 매력은 이 시각장치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다. 만화는 다른 어떤 조형예술의 장르보다 더 폭넓게 ‘그리기’의 자유를 실천해 왔고, 의미를 담은 그림,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라는 그림의 오래된 본능과 전통을 현대적, 대중적으로 재해석해 냈다. 적응력이 뛰어나고 효용 가치가 높은 시각 상징어라는 점에서든, 회화적으로 밀도 있는 멀티미디어 언어라는 점에서든, 만화가 보여 주는 시각적 서사의 다양성과 그 그림의 표현미학적 질 그리고 실험성은 정말 현기증이 나리만큼 대단한 것이다. 작품 〈쥐〉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은 “만화는 연극보다 유연하고 영화보다 심오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한 작품의 완성에 13년이 걸린 자신의 〈쥐〉와 같은 작품을 포함한 이른바 그래픽 노블(그림소설)류의 저자만화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이런 만화들은 1980년대 이후 유럽과 미국의 새로운 주류만화로서 입지를 확고히 굳혔다. 최근의 몇몇 만화는 멀티미디어형 예술을 지향하는 실험들을 흥미롭게 보여 주고 있다. 데이브 맥킨이나 크리스 웨어의 만화에서 우리는 일종의 시각적 사운드를 지향하는 만화, 하이퍼텍스트 구조로서의 만화를 만난다. 크리스 웨어의 〈지미 코리건 이야기〉는 이번 2003년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최우수 만화책상을 받았다.
만화는 오늘의 멀티미디어 시대 예술과 산업의 소용돌이 치는 폭풍의 중심에 있는 ‘이상한 끌개(strange attractor)’와도 같은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 문화산업의 시대가 되면서 문화 생산, 이미지 생산에 소용돌이가 생기고 있다.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비디오, 멀티미디어, 게임, 방송, DVD, CD-Rom 등, 밀고 당기고 혹은 부서지고, 합종연횡하기도 하는 요란한 소용돌이. 소용돌이는 피할 수 없고 그 위력은 정말 파괴적이다.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만화가 있다고 생각된다. 문화생산에서 이미지와 서사, 복합미디어 형식, 대중문화적 감수성과 그 문법, 인터랙티브, 뉴 테크놀러지와의 연관 등이 점점 더 중요해지면서 만화라는 이 ‘이상한 끌개’를 중심으로 소용돌이 치는 파장의 의미를 새로운 눈으로 볼 필요가 생기고 있다.
만화가 출현한 역사적 맥락을 보면 그 산업적 측면, 수용자와의 연관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화는 태생 자체가 대중 오락산업 및 대중사회의 출현과 밀접한 연관 속에 있다. 그런데 이 조건이 바로 만화의 끝없는 자기 변신과 적응력을 만들어 온 중요하고 흥미로운 요소다. 만화가 현대의 생활 속에서 다양한 쓰임새와 적응력을 갖고 있다는 것, 출판만이 아니라 상업 광고와 공공 캠페인, 교육, 방송, 디자인, 패션, 문구산업, 인터넷 산업, 영상산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 만화가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는 것, 특히 디지털 기술과 그 문화산업의 전반 여건과 만나면서 새로운 변신과 확장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 그게 바로 흥미로운 점이고 눈을 크게 뜨고 주목해야 할 새로운 변신의 조건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것을 표피적으로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인 안목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만화를 ‘제9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만큼 만화가 독자적 예술로서 그 입지를 구축했다는 얘기다. 이제는 만화가 예술이냐 아니냐는 질문은 거의 무의미하다. 지금 우리는 예술로서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언어’로서 더 본격적으로 만화를 주목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만화에 대한 이해는 이야기와 마법, 그림책의 전통, 만화적 유머와 발상법, 가벼움과 유연성 등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 기초하면서 이제 더 적극적으로 영상문화의 본질적 특성과 뉴테크놀러지에 대한 이해 속으로까지 그 지평을 넓힐 필요가 생기고 있다. 영상언어와 영상문화의 본질적 특성이 무엇이며 왜 만화가 21세기 멀티미디어형 커뮤니케이션의 핵심 장르로 주목받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만화에서 우리는 이미지와 의미 사이의 다중적 포섭관계, 멀티미디어 형식의 서사, 디지털 인터페이스 디자인, 하이퍼텍스트 문제 등 오늘의 영상문화시대의 여러 문화론적, 인문학적 화두와 만난다. 만화는 중요한 예술 장르일 뿐만 아니라 새롭고 잠재력이 큰 언어 형식이다. 만화는 오늘의 영상문화 속에서 새로운 주목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와 같은 기본 시각을 바탕으로 만화와 미술의 관련도 새로운 시야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팝아트와 키치 미학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키치 이미지의 매혹이라는 것을 넘어 만화의 풍부한 자산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만화를 읽어라’ 이것이 우선 그 한 가지 효과적인 답이다. 읽을 만한 놀라운 작품들이 전세계적으로 많다. 아주 눈을 크게 뜨고 볼 만한 작품들이 정말 풍부하게 있다. 또한 형상의 역사, 미술사의 이해도 좀 진보적인 방향으로 심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카리카튀르(풍자화)와 이야기 그림의 전통을 더욱 차분히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기 이래의 인상학 연구와 카리카튀르 그림들의 역사적 의미를 주목해 봐야 한다. 특히 폴리티컬 그래픽스(정치적 풍자화)의 전통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9세기의 고야와 도미에, 20세기의 표현주의와 신즉물주의 계열 작가의 사회적 비평과 심리적 분위기, 그리고 1960년대 후반 프랑스 신구상회화, 곧 서사적 형상회화의 시선, 이런 것들에 대한 새로운 주목과 올바른 자리매김도 필요하다고 본다.3)
그러나 근원적으로 만화를 통하여 그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이야기와 그림의 관계가 무엇인지, 이를테면 ‘뜻 그림’, ‘이야기 그림’, 곧 ‘스토리 보드 아트’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 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또한 만화에 담긴 그 가벼움과 재미, 만화적 상상력과 그 전복적 가치는 무엇인가. 그리고 만화의 팬덤 문화가 보여 주는 ‘인터랙티브’와 자기조직력의 의미도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화는 연극보다 유연하고 영화보다 심오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는 행위의 문제이고 그림을 통한 ‘발화(發話)’의 의미다. 그림이란 무엇인가. 드로잉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아 내는 행위다. 그린다는 것은 조형적 사건만이 아니라 의미의 사건이기도 하다. 가시성 속에 의미와 이야기를 담는, 혹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행위다. 이 점에서 개념예술로서의 드로잉, 내레이션 문제, 스토리 보드로서의 예술의 문제 등을 깊이 숙고해 봐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미술의 매우 중요한 화두로 깊이 천착될 가치가 있다.
만화의 그림이란 ‘더 말하는 그림’, ‘더 불멸의 기억의 그림’, ‘인식론적으로 더 깊이 각인시키는 그림’이랄 수 있다. 독자의 자발적인 연상력을 유도하며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만화는 더 현대적인 개자원 화보, 더 역동적인 상형문자라 할 수 있다. ‘만화에 빠진다’는 그 매혹의 의미를 생산적으로 전환했을 때,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인상적으로 더 깊이 각인시킨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각인시키느냐가 더 중요하며, 또한 이를 위한 사유의 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이제까지 우리의 미술교육은 창작행위를 시각적인 것, 조형적인 것에 지나치게 종속시키고 국한해온 감이 있다. 이제는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미술하는 사람도 신화, 구비문학, 마술 등에 관련된 상상력을, 문학적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또한 당대의 문화적 토픽을 이해하고 의미 있는 이슈를 던지는 지적이고 인문적인 사유능력이 요구된다. 특히 오늘의 예술과 기술의, 그리고 사회관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가 무엇이며 그 형식과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하고 폭넓게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오늘과 같은 멀티미디어 시대, 편집의 시대, 혼성적 표현형식과 혼성적 의미론의 시대에 아주 절실히 요구되는 과제다.
앞서 아트 슈피겔만이 말한 유연성(“만화는 연극보다 유연하고 영화보다 심오하다”)은 만화가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미술가들에게도 그 유연성과 심오한 연출력이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만화 내지 멀티미디어 크리에이션의 복합성과 혼성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조형 작업이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만화는 일인용 ‘저예산 영상산업’이자 미디어 아트의 훌륭한 출발점이다. 만화는 새로운 개념미술이자 포스트모던 예술의 풍부한 핵심적 형식일 수 있다. 온고지신이 중요하다. 모든 예술의 뿌리로서 스토리 아트의 전통과 자원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재생산이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만화는 미술의 훌륭한 반면교사이자 새로운 선배일 수가 있다. ■ 주) 1) 한국의 아마추어 만화문화의 저변은 대단히 넓다. 수천 개의 아마추어 만화 동아리들이 학교를 중심으로 또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오 결속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상당수가 중 · 고등학생 등 젊은 세대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 판진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의 시각에서의 더욱 다양하고 소수적인 취향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여고생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보이그룸 멤버들을 만화 속에 등장시켜서 서로 동성애를 즐기는 것으로 묘사한다든지, 이미 프로로 데뷔한 작가가 자신의 숨겨진 욕망을 드러내는 단편들을 발표하기 위해서 다른 필명으로 판진을 발간하기도 한다. 이러한 동아리들에게 활동무대가 되어 주는 정기행사도 많이 열리고 있다 (김낙호, 앙굴렘한국만화특별전 도록, 2003).
2) 졸고<만화를 다시 보라- 만화가 매혹적인 이유>, ≪민중미술 모더니즘 시각문화 - 성완경 평론집≫, 열화당, 1999 및 ≪성완경의 세계만화탐사≫, 생각의 나무,2001
3) 이에 관해서는 졸고 <익살과 독설의 미학, 풍자화>, ≪계간미술≫ 31호, 1984년 가을 호. 그리고 <수용의 시각으로 본 서구 현대미술의 또 다른 면모>, ≪계간미술≫21호, 1982년 봄, 위 평론집 재수록.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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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3, Read : 845, IP : 218.148.222.80 2003/03/24 Mon 21:59:36 |
| pinksoju |
위의 그림은 중간의 이동기의 [모던걸]과 안석주의 [모던걸의 장신운동]이구요. 월간미술 홈피에서 퍼왔습니다. 성완경씨 글만 올라와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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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24 |
| pinksoju |
궁금한게 있는데요...`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한이 만화를 텔레비전과 더불어 쿨 미디어의 하나로 정의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독자가 참여하는 미디어라는 것이다. 이 점은 만화라는 장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열쇠가 되는 대목이다주1).` 마셜 맥루헌의 쿨미디어에 대한 이해가...제가 이해한 거랑 다른 것 같은데...음...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정세도가 낮은 쿨미디어의 의미를 알려주실 분 계신가요? 제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텔레비전과 만화가 정세도가 낮은 쿨미디어인데 책과 영화가 정세도가 높은 핫미디어라는 점이..언제나 헷갈려서 언젠가 한 번 미디어쪽 관련 학과 친구에게 물어보니 정세도가 낮아서 독자의 참여할 여유분이 많다는 것은 만화의 경우 텔레비전이 리모콘을 돌려서 채널을 바꿔서 가볍게 독자에 의해 취급될 수 있는 어쩌구...라고... 성완경씨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고 있네요...음...혼란스러운...;; 딴지 걸려는 게 아니라 정말 잘 몰라서 그러니 답변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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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24 |
| capcold |
에에... 본문 중에서 정세도의 개념을 전혀 엉뚱한 의미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 맞습니다. 신문방송학도들은 뒤로 자빠질 노릇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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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24 |
| capcold |
!@#... 아 그리고 로그인을 해야 나머지 기사도 볼 수 있는 모양이군요. 이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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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24 |
| pinksoju |
아뇨..로그인을 해야 저 기사만 볼 수 있습니다...아무래도 웹상엔 나머지 글들은 올라오지 않은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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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24 |
| capcold |
여하튼, 많은 부분에서 `미술인이 만화를 바라보는 시선`에 충실합니다. 마치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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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24 |
| pinksoju |
흐음...미술인보다도...프랑스의 골격에서 출발한게 더 짙다고 생각했는데...정확히는 미술의 역사라고 세워진 근대 프랑스 미술중심에서+프랑스 이론의 기본 골격에서...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 맞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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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24 |
| pinksoju |
다시 읽어보니 제가 좀 생뚱맞은 소릴 했군요...끝까지 안읽은게 탄로나는 순간..:P 뒤로 갈수록 미술인의 입장에서 미술잡지에 소개하신 것 같네요. 미술에 받아들여지려고 애쓰는 예술적인 만화의 태도같은 데에선 그러나 분명 상당한 프랑스의 문화적 냄새가 많이 난다고 생각하지만.(영화가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서 고다르가 문학가들이나 미술가들에게 발악한 것을 생각한다면...) 그런 의미에서 두고보자가 영원토록 장수하길 기원합니다. 더 이상 `무엇`을 위한 만화 `무엇`에 의한 만화는 사양하고파요. 그러나 이왕 엉뚱한 소리 한 번 한 이상...;; 이번 월간 미술에 만화가 소개된 것이나 미,만 만,미 전시의 경우 매체란 매체는 다 먹으려는 현대미술의 욕구에서 발현된 것이지만(작년 7월인가 8월엔 게임이 소개되기도 했죠.) 만화를 위해서도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2년전, 회화 전공 수업 시간에 강사가 추천하던 전시가 있었는데. 모 S대학 출신의 작가로 학생시절 중에도 기발하고 출중한 아이디어와 뛰어난 드로잉으로 본보기로 삼을만한 작가라며 적극 추천을 하시더군요. 만화를 좋아한다던 그 사람의 작품은 캔버스 두개를 걸어놓고 그 사이에 홈통을 붙여놓았던가? 하며 맥클루드의 홈통이론을 마치 자신의 아이디어인양 도용해서는 그 신선함을 검증받았더랬죠. 너희들은 본받아야 한다...라는 뉘앙스로 주입시키던 강사 앞에서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씁쓸하게 돌아섰던 기억도 납니다. 만화가가 되겠다던 서양화과 친구에게 만화의 이해와 쥐를 빌려주었더니 `너 너무 이론에 치우쳐진거 아니냐?`라는 소리를 듣질 않나, 저패니에 미쳐 있는 한종대 미술원 졸업생 친구에게서 며칠 전 `만화와 애니가 뭐가 다른데?`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모든 매체는 다 수용하겠다라는 현대 미술의 아성을 지닌 미술인들에게도 만화가 얼마나 무지의 영역인지 그렇게 가끔 깨고 나면 짜증이 마구 치밀어오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미술에서 만화가 소개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참 반갑기만 합니다... 적어도 만화 이론을 자신의 아이디어인양 도용하는 작가는 발붙이기 힘들어 질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비록 오늘 10년이 되어가는 칸과 칸 사이의 이론이 매우 신선하고 새로운 영역인 것처럼 전공시간에 배우긴 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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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25 |
| ash |
음. 잘 읽었어요. 복잡한 얘기이긴 하지만, 현대 미술의 `이런 저런 그런` 경향들에는 별로 관심이 안 가죠.. 요즘은 또 다를지 몰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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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25 |
| pinksoju |
음...현대미술의 `이런저런그런`경향을 제가 설명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데요...단지 만화의 이미지나 아이디어를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마구 차용하는데서 분노를 느낄 뿐입니다. 한쪽에서 만화가 예술이니 아니니 싸우고 있을 때 예술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잘나신 다른 매체가 만화 특유의 강점을 가지고 쓰고 있더란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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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25 |
| ash |
네..^^ 그 부분에 대해서 잘 읽었고요. 제가 오해를 하게 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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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25 |
| pinksoju |
제가 오해한 거라니 다행이네요...글솜씨가 없어서...자책하고 있었답니다..흑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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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25 |
| ash |
제 탓일 뿐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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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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