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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기사] 만화출판인 이재근
만화출판인 이재근:1(나의 젊음,나의 사랑) 
경향신문  1998-07-24  22면  (문화)  판  기획.연재  2076자

◎우리 ‘만화판’ 이젠 바뀔때
20년동안 「한국만화」만을 전문적으로 출판해온 「회원사」 대표 이재근(49)씨. 그는 그동안 박봉성 고행석 조운학 이미례 김예린 등 수많은 작가들을 발굴해 인기만화가로 성장시켰다. 인기만화가의 하도급 제작 메커니즘 등 복잡하게 얽혀있는 만화계의 현실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한국 「만화판」에서 활동해온 이씨의 「만화인생」과 독자들에게 꿈과 환상을 심어주는 만화가들의 뒷이야기를 들어본다.<편집자 도움말>
나는 이 지면에 등장할만한 인물은 못된다. 사회 저명인사나 스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한 일은 20년 동안 꾸준히 만화작가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만화를 출판해온 것 뿐이다.
사실 만화출판을 시작하기 전 나는 만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어린 시절 다른 아이들이 한창 만화에 빠져 있을 때도 나는 가난 때문에 만화방조차 가보지 못했다. 내가 단행본으로 접한 만화라고는 손의성씨의 「흑마」가 전부였다.
그런 내가 79년 만화출판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유명 만화가치고 지금까지 내가 경영했던 「석탑」 「프린스」 「타임」 등 3개의 만화전문 출판사를 거치지 않은 작가는 없다.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내가 원고를 받아 출판한 작가만도 100명이 훨씬 넘을 것이다. 펴낸 책도 5,000권이 넘는다. 이 정도 분량이면 어지간한 대본소를 차리고도 남는다.
그렇다고 만화출판업계에서 성공한 것은 아니다. 만화계를 이끄는 기라성같은 선배들도 수두룩하다. 재산이라면 비슷한 또래의 작가들중에 「스타작가」들이 많이 나왔고 그들과 친하게 지낸 일 뿐이다. 박봉성 허영만 고우영 장태산 하승남 조운학 이현세 김동화 황미나 김수정 등. 그들과 함께 술로 밤을 지샜으며 성공과 좌절과 재기의 모습들을 지켜봤다. 쓸쓸히 만화판을 떠나는 작가들도 숱하게 봐왔다.
지금은 한국 만화계 전체가 위기를 겪고 있다. 일본만화 개방이 이루어졌고 IMF로 출판상황은 극도로 악화돼 있다. 알게 모르게 일본만화에 길들여진 독자들이 많은 터에 일본 작품들이 쏟아져 들어와 한국 만화계는 어느때보다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만화가협회에 등록된 500여명의 작가 중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는 3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뛰어난 신인작가를 배출하지 못하고 몇몇 작가들이 오래동안 독자들을 독점하고 있는 데서 비롯됐다. 또 작가들이 인기만 있으면 만화를 대량으로 생산해내기 때문에 우수한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사실 많이 팔리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출판에 있어서는 나에게도 많은 책임이 있다. 70년대 말까지 「전·후」 혹은 「상·중·하」로 유통이 이루어지던 만화책을 내손으로 소위 「대작」이라는 이름의 시리즈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요즘들어 그 일로 많은 고민과 반성을 했다. 일본 만화와 자본의 유입을 걱정하는 작가들과 어울려가며 의견을 들었다. 이달 초에는 새출발한다는 결심으로 출판사 이름을 「회원사」로 바꿨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만화계의 유통구조와 출판방식을 바꾸겠다는 나의 뜻에 동조해줬다.
만화계의 구조조정은 만화시장의 대본소 구조와 그로부터 비롯된 「만화공장」 시스템을 바꾸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현재 A급으로 불리는 인기작가들은 대본소용 단행본으로 한달에 30여권 이상씩을 펴내고 있다.
대부분 이야기작가가 대본을 쓰고 문하생들로 팀을 구성해 만화를 그린다. 작가는 최종적인 검토만 하는 경우가 많다. 심할 때는 작품을 작가가 보지도 않고 출판사에 넘겨버린다. 만화가는 이름만 내세워 만화공장의 사장 노릇을 하는 식이다.
나는 작가들에게 『이제부터는 작가가 직접 그린 작품이 아니면 출판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파격적인 원고료를 지급해 수입을 보장해주기로 했다. 떳떳하게 자기 이름으로 작품활동을 하는 풍토를 정착시켜보겠다는 뜻이다.
대본소도 4,000개 정도를 「회원」으로 받아들여 작품을 공급할 계획이다. 이미 이현세 허영만 박봉성 조명훈 하승남 조운학씨 같은 작가들이 이 작업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작가들은 『진작에 그런 작업이 이루어져야 했다』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나는 재능있는 작가가 자기 이름에 책임을 지고 좋은 작품에 매달릴 때 한국만화의 경쟁력은 지금보다 훨씬 커질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김석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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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출판인 이재근:2(나의 젊음,나의 사랑) 
경향신문  1998-07-27  25면  (문화)  판  기획.연재  1602자
◎시행착오 끝 ‘석탑’ 세우다
학습지 영업사원·철근 소매·동대문 노점상…. 어느날 군대동기 만나 만화판 입문. 무명작가 만화 재출판으로 돈만 까먹었다. 79년 거금 150만원 들여 출판사 ‘석탑’을 연다.
고향은 충남 연기군 전동면 봉대리. 8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형과 누나도 일찌감치 서울로 올라가 직장생활을 했다. 홀어머니와 둘이서 신발도 제대로 못신을 정도로 어려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68년 중학교만 간신히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나이를 속이고 학습교재 전문 출판사인 유유출판사에 영업사원으로 들어갔다. 유유는 동아출판사, 문천사와 함께 학습지 시장에서 손꼽히는 출판사였다.
사장은 요즘 말로 「소년가장」. 어린 동생들을 키우며 자수성가한 건실한 사람이었다. 그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낮에는 학습지 채택 로비를 위해 교사들을 만나고 밤에는 짐자전거에 학습지를 싣고 학교주변 문방구로 배달을 다녔다.
당시 학교의 교재 채택은 비리투성이였다. 교사들은 책값의 30% 정도를 뒷돈으로 받고 채택했다. 교사들은 학습지에서 시험문제를 내는 등의 방법으로 학생들이 구입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교사들에게 선금을 주고 나중에 팔린 책의 부수에 따라 정산을 했다. 교사들은 이미 받은 돈을 내놓지 않기 위해 노골적으로 학생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유유는 70년대 들어서면서 「교육전과」를 내놓았다. 그 무렵 신흥출판사인 교학사가 「표준전과」로 학습지 시장에 뛰어들어 선풍을 일으켰다. 결국 유유는 경쟁에서 밀려 부도를 내고 말았다. 직장을 잃은 나는 매형의 인쇄소에 들어가 실크인쇄를 배운 후 친구와 함께 인쇄소를 차려 중국에 수출하는 족자달력을 찍었다.
수색대에서 군대생활을 했다. 상병시절 우리 부대로 전입해온 정병영일병은 동대문 만화도매상에서 일하던 친구였다. 그를 통해 처음으로 만화출판과 유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정병영과의 만남이 결국은 내가 만화판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됐다.
76년 제대해 전에 인쇄소를 함께 하던 친구와 철근소매상을 차렸으나 2년만에 빈털터리가 됐다. 동대문시장에 자리를 펴고 새벽 4시부터 아침까지 청치마를 팔았다. 날이 새면 경비원들에게 쫓겨 노점을 거둬야 했다. 수입은 괜찮은 편이었다. 어느날 길에서 우연히 정병영을 만났다. 그는 제대한 뒤 동대문에서 동보서점이라는 작은 만화도매상을 하고 있었다.
정병영은 나에게 만화출판을 권했다. 돈을 주고 남의 판권을 빌려서 만화책을 출판하는 식으로 시작했다. 사무실도 따로 없었다. 정병영이 어느 작가에게 무슨 원고가 있다고 알려주면 돈을 마련해 둘이서 만화가를 찾아가 원고를 샀다. 밤에는 노점상을 하고 낮에는 만화가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 시절 대본소 인기작가는 「한국인」 「꼴찌」 등 독고탁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상무와 허영만, 김철호, 오동촌, 하승남, 이현세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신간원고는 손도 못대고 이미 출판돼 사장된 무명작가의 원고를 재출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사가 잘 될 리 없었다. 4~5개월 동안 30여권의 책을 냈으나 노점상으로 번 돈만 까먹고 있었다. 수업료를 낸 셈 치고 만화출판을 제대로 해보자고 나섰다. 79년 12월 거금 1백50만원을 주고 판권을 사들여 출판사 「석탑」을 열었다.<정리·김석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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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출판인 이재근:3(나의 젊은,나의 사랑) 
경향신문  1998-07-28  22면  (과학.의학)  판  기획.연재  1522자
◎‘박봉성’과 운명적 만남
나의 시작은 초라했다. 소속작가라곤 순정만화 여류작가 한명뿐. 같은 건물의 잘나가던 출판사 ‘삼양’. 어느날 거기서 퇴짜맞고 나오는 박봉성과 만난다.
만화출판이 활기를 띤 것은 1950년대 대본소를 통한 만화보급이 이뤄지면서부터였다. 「성문사」가 김종래·박기당·정파·이병주·신동우 등의 작품을 출간하여 성공하자 「부엉이」 「제일사」 「독수리」 등 20여개의 출판사가 잇따라 설립됐다. 이 무렵 인기를 끈 만화가는 「엄마찾아 삼만리」의 김종래, 「라이파이」로 날렸던 산호, 「땡이」시리즈의 임창, 「약동이와 영팔이」를 펴낸 방영진, 「훈이」 「목탄아」의 박기정과 박기당 형제, 「아기포졸」의 김원빈, 추동성이란 이름으로 「짱구박사」를 펴낸 고우영과 그의 형 추동식, 「찌빠」의 신문수, 「서당」시리즈의 윤승운, 「동경4번지」의 손의성 등이었다.
70년대 들어 작가 부족과 이들을 잡으려는 출판사들의 과도한 경쟁으로 도산하는 회사가 급증하게 됐다. 대본소 만화는 이영래 곽재성 이종세 오학운씨 등이 컨소시엄을 형성한 「합동총판」이 새로운 독점체제를 구축했다. 그들은 소위 「신촌 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만화가와 만화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만화가의 예명이나 작품의 성격, 제목 등에 이르기까지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일보가 「소년한국도서」를 창립하고 군소업체들이 사업확장을 시도하면서 합동의 독점체제도 점차 힘을 잃었다.
우리 만화는 그동안 여러차례 유행을 거쳤다. 50년대 「도토리용사」(김의환) 「밀림의 왕자」(일본만화 복제판)의 상업적 성공으로 이루어진 아동만화, 70년초 「수호지」(고우영) 「사랑의 낙서」(강철수)로 대표되는 성인만화, 70년대말 「캔디」(일본만화 복제판)가 만들어낸 순정만화붐 등이 그것이다.
내가 출판을 시작한 80년대는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박봉성의 「신의 아들」등으로 대표되는 「성인극화」의 시대였다. 80년대 초중반 인기를 끌기 시작해 지금까지 스타로 군림하고 있는 작가군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그들은 대부분 선배 작가들의 문하생으로 출발했다. 박기정의 문하생으로 이상무와 이두호가 수련기간을 거쳤으며, 박봉성은 오명천의 문하생, 방학기는 고우영, 한희작은 김길영, 이진주는 김기백의 문하생으로 있었다. 허영만은 박문윤 엄희자 이향원의 문하를, 이현세는 이정민 하영조의 문하를, 고행석은 최경 박기준 문하를 거쳤다.
나의 시작은 초라하기만 했다. 작가라고는 무명 순정작가 조은희가 전부였다. 동대문 노점상으로 번 돈을 들고 작가들을 쫓아다녔지만 헛걸음하기 일쑤였다. 종로6가의 사무실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같은 층에는 당시 잘나가던 출판사인 최진식씨의 「진송」과 순정만화 히트작을 많이 내던 오명천씨의 「삼양문화사」가 있었다. 진송은 「대가」시리즈로 명성을 떨친 하승남, 코믹무협작가 문상우, 오정만 등을 데리고 있었다. 삼양에는 순정작가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어느날 순정만화를 들고 삼양에 찾아왔다가 퇴짜를 맞고 돌아가는 무명의 박봉성씨를 만난 일은 오늘의 나를 있게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김석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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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출판인 이재근:4(나의 젊음,나의 사랑) 
경향신문  1998-07-30  22면  (문화)  판  기획.연재  1536자
◎만화계 강타한 ‘최강타’
‘굴러온 복덩이’ 박봉성. 그러나 첫작품은 무참한 실패. 파격대우 계속하며 7권짜리 ‘20세 재벌’ 시리즈로 출간. “미쳤다” 주위평가 불구 대히트를 엮어낸다.
박봉성은 「굴러들어온 복덩이」였다. 그날, 나는 삼양문화사에서 오명천 사장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키가 크고 고생에 찌든 얼굴의 박씨가 쭈뼛거리며 문을 밀고 들어왔다. 오사장과 작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자리를 피해줬다. 만화가들과의 교분이 부족했던 나는 무명작가라도 사귀어야겠다는 생각에 복도에서 서성거리며 한참을 기다렸다.
문밖으로 나오는 박씨는 낙담한 표정이 역력했다. 출판이 무산됐다는 것을 눈치채고 차나 한잔 하자고 사무실로 이끌었다. 원고 좀 보자고 했다. 『35만원씩 줄테니 원고를 놓고가라』고 말해버렸다. 원고를 보는 안목도 없던 때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작가를 한명이라도 확보해야겠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박씨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내려갈 차비도 없다며 원고를 내밀었다. 「압록강의 소용돌이」 3권 중 첫째권 원고였다. 급히 돈을 구해 5만원을 주었다. 다음날 나머지 돈을 입금시켰다. 박씨는 신바람이 나 있었다. 20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나머지 2, 3권을 들고 올라왔다.
당시 박씨는 형편이 어려웠다. 사글세 단칸방에서 부부와 아이들 셋이 함께 살고 있었다. 부인이 『쌀 한말만 팔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박씨는 받아든 원고료 중에서 5만원을 내놓았다. 친구가 찾아올테니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표지 그리는 그 친구는 부인이 암에 걸려 있었다. 그 후에도 박씨는 원고료를 받을 때마다 친구 몫으로 일부를 떼놓고 갔다. 박씨의 그런 인정과 인간미는 인기작가가 된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압록강의 소용돌이」 는 무참한 실패로 끝났다. 당시 책이 안팔리는 작가는 「죽작가」라고 불렀다. 박씨 역시 죽작가 대열이었지만 마음놓고 작품활동을 하라는 뜻에서 원고료를 40만원으로 올려줬다. 최고 인기작가의 원고료가 60만원 정도였으니 파격적인 대우였다.
80년 4월 석탑과 정병현씨의 「교육관」을 합쳐 「프린스」라는 이름으로 동업을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나이가 많은 정씨가 사장을 맡고 나는 부장이 됐다. 교육관에는 무명의 황미나씨가 있었다. 프린스 출범 후에도 박씨의 원고는 계속 올라왔다. 개인적으로 원고료를 지불하며 모아두었다. 어느새 2권짜리 4질이 쌓였다. 결국 정사장에게 이야기했다. 정사장은 원고를 보고도 확신이 서지 않는지 별로 말이 없었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생각지도 않던 큰돈이 생겼다. 다방업자에게 8백만원의 권리금을 받고 사무실을 넘긴 것이다. 안암동에 40평짜리 널찍한 사무실을 냈다. 냉장고에는 양주까지 넣어뒀다. 만화가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한 투자였다. 여유가 생긴 뒤 박씨의 작품을 다시 꺼냈다.
각각 다른 제목이었지만 줄거리가 일맥상통, 시리즈로 출판하기로 했다. 전체 8권을 7권으로 압축했다. 제목은 「20세 재벌」. 주위에서 「미쳤다」고들 했지만 이 작품은 만화계를 발칵 뒤집어놓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박봉성 만화의 대표적인 주인공이 된 「최강타」는 그렇게 탄생했다.<김석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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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출판인 이재근:5(나의 젊음,나의 사랑) 
경향신문  1998-07-31  22면  (문화)  판  기획.연재  1403자
◎대접받지 못한 ‘만화쟁이’
한국의 정서와 거리가 먼 무국적 만화의 양산. 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만화계는 된서리를 맞았다. 독고탁, 까치, 이강토와 더불어 최강타가 연 극화의 인기행진. 바야흐로 대량창작시대를 맞이했다.
한국 만화역사에서 80년대 초반은 「만화 대량생산 시대」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때는 79년 일본만화 복제품 「캔디」 붐에 이어 「올훼스의 창」 「베르사이유의 장미」로 대표되는 순정만화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출판사들은 일본만화 등 외국만화 베끼기에 혈안이 돼있었다.
출판업자들은 지문과 주인공만 바꿔 찍어냈다. 늘씬한 몸매와 커다란 눈, 긴머리의 여자주인공들이 벌이는 애정과 갈등은 우리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만화복제는 책을 찢어 한장씩 뒤집어놓고 밑에서 라이트박스를 비춰가며 그림을 그대로 복사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국적없는 만화의 양산은 심의제도 강화를 불러왔고 80년 들어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만화계 전체가 된서리를 맞는 빌미가 됐다. 계엄사 중령이 문화담당이란 이름으로 서울시청에 파견돼 만화를 심의했다. 동대문경찰서에서는 수사를 시작했다. 도매상, 출판업자, 만화가가 5∼6명씩 붙잡혀들어갔다. 그러나 해적출판을 전문적으로 하는 큰 출판사 대표들은 잡혀들어가지 않았다.
순정만화가 한차례 만화계를 휩쓸고 간 후 얼마간의 공백을 두고 만화는 본격적인 극화의 시대를 맞게 된다. 당시 최고의 작가는 「독고탁」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상무였다. 뒤를 이어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대표되는 「까치시리즈」의 이현세, 「이강토」가 맹활약하는 「무당거미」의 허영만이 만화계 평정에 나서고 있었다. 박봉성의 「20세 재벌」이 7권짜리로 출판되면서 다른 작가들도 자연스럽게 대량 창작에 나섰다. 독자층이 다양해지고 출판사, 대본소가 크게 늘어나면서 신인작가들도 대거 등장했다.
「20세 재벌」의 성공 소식을 듣고 서울에 올라온 박씨는 대단히 흥분해있었다. 박씨를 비행기에 태워 부산으로 내려보냈다. 그로서는 생전 처음 타보는 비행기였다. 며칠 만에 올라온 원고는 「20세 황제」. 비행기가 힘차게 이륙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첫장을 보고 『재치있는 작가』라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20세 황제」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박씨는 한풀이하듯 폭발적으로 작품을 쏟아냈다. 큰 스케일과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 전개, 최강타로 대표되는 불굴의 강인한 인물 묘사, 탄탄한 구성력으로 인기행진을 계속했다. 만화의 강력한 대중적 호소력과 상업성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는 만화가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프린스」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작가들을 여의도 룸살롱에 데려간 일이 있다. 이상무 이현세 허영만 김철호 장태산 이희재 등이 동행했다. 룸살롱이라는 곳을 가본 사람이 거의 없어 아가씨들 앞에서 쩔쩔매던 모습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든다.<김석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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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출판인 이재근:6(나의 젊음,나의 사랑) 
경향신문  1998-08-03  25면  (문화)  판  기획.연재  1424자
◎‘빼앗긴 봄’에 핀 주인공들
이현세는 극적구조의 만화열기에 불을 붙인 「만화 전성시대」의 기수였다. 83년 출간된 「공포의 외인구단」은 만화에 이어 영화에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만화의 상업적 성공은 84년 박봉성의 「신의 아들」, 85년 이상무의 「달려라 꼴찌」,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김철호의 「스콜피오」로 이어졌다. 「만화광장」 「주간만화」 등등의 만화전문지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80년 광주의 어둠을 겪고 태어난 만화 주인공들은 대중의 우상으로 자라났다. 만화 주인공들은 뒤틀린 사회와 현실의 억압에 대한 대리해소 역할을 해준 「스타」였다. 「항상 승리하는 주인공」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은 「항상 패배하는 그들의 현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승부욕으로 가득찬 「독고탁」이나 지옥같은 경쟁을 통해 승리를 거두는 까치 「오혜성」, 초인적인 노력으로 가난과 재벌의 횡포를 이겨내는 「최강타」 등이 그들이다. 허영만이 내세운 「이강토」는 때로는 「오! 한강」같은 작품의 주인공으로 사회와 이념까지 건드리며 우리 만화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다.
당시 극화만화는 보통 10권에서 많으면 50∼60권의 시리즈가 대부분이었다. 「신의 아들」은 53권짜리, 「무당거미」는 35권짜리였다. 김철호의 「스콜피오」가 56권으로 「신의 아들」의 최장기록을 깨자 박씨가 몹시 아쉬워하던 기억이 난다. 박봉성의 경우 86년 한해에만 100여페이지짜리 160여권을 내놓았다.
프린스출판사는 80년대 중반까지 많은 작가들과 거래하며 승승장구했다. 무명작가들의 발굴에도 신경을 썼다. 무명작가 작품에는 독자 경품제도를 실시하는 등 대대적인 홍보를 펼쳤다. 장태산은 84년 프린스에서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를 펴내며 「죽작가」 딱지를 떼고 대단한 인기작가로 부상했다. 이밖에도 이종원 오정만 이동포 등 주목받는 신인들을 많이 배출해내 「히트작가 제조기」라는 별명도 얻었다.
「캔디」 등 일본만화에 눌려있던 순정물도 80년대 초·중반 새로운 작가들의 등장으로 인기를 모았다. 「내 이름은 신디」의 김동화를 필두로 「이오니아의 푸른별」을 낸 황미나, 「북해의 별」의 김혜린, 「아르미안의 네딸들」의 신일숙, 「하니」 시리즈의 이진주, 「우리들의 이야기」를 펴낸 김동화의 부인 한승원 등이 선두주자였다.
황미나 김혜린 신일숙 이진주는 프린스를 통해 활동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이진주는 본명이 이세권으로 딸 이름을 필명으로 쓰면서 독자들이 여자로 알고 팬레터를 보내오는 해프닝을 자주 겪었다. 황미나 김혜린 신일숙은 개성이 강한 작가들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뚱뚱한 황미나는 항상 아래 위 검은옷에 검은 베레모를 쓰고 다녔다. 성격은 남자처럼 호탕했다. 이현세 장태산 이희재에게 「형」이라고 스스럼없이 부르며 술자리에도 어울렸다. 신일숙과 김혜린은 문하생 생활을 거치지 않고 독학과 습작으로만 실력을 쌓은 공통점이 있다.<정리·김석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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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출판인 이재근:7(나의 젊음,나의 사랑) 
경향신문  1998-08-04  22면  (과학.의학)  판  기획.연재  1578자
◎만화계 점령한 외부자본/만화출판계 호황을 틈타 몰려든 외부자본의 횡포./파격적 원고료·작가 빼가기로 기존업계가 흔들렸다. 경영압박으로 동업청산, 87년 ‘타임’ 출판사로 새출발을 했다.
만화의 기업적 생산체제가 일반화 되면서 유명 만화가들은 몇십명씩의 문하생을 두고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금도 만화가 직속의 본팀과 함께 캐릭터를 작가 수준과 동일하게 그려낼 수 있는 팀장을 주축으로 4~5개씩의 독립된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각팀은 실력에 따라 데생, 펜터치, 마무리로 나눠 작업을 한다. 이렇게 많은 작품을 소화하게 되면서 역기능도 생겨났다. 재능있는 작가들이 빨리 돈을 벌기 위해 인기작가 밑으로 몰리게되니 만화의 양은 늘어나는데도 활동작가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작품 수준이 일정하지 않고 내용도 획일화됐다.
「스토리작가」라는 새로운 분업담당자도 생겨났다. 특히 83년 「공포의 외인구단」을 쓴 김민기는 발군의 스토리 작가였다. 한때는 당구를 치다가 스토리를 하나 쓰고 다시 당구를 쳤다고 한다.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로 장태산을 인기작가를 만든 박찬호는 그후 이재학과 함께 많은 히트작을 만들어냈다. 그는 나의 소개로 허영만을 만나 최근에 영화로 크게 히트한 「비트」의 줄거리를 만들었다. 또 허영만은 만화가중 처음으로 스토리작가 김세영의 이름을 책표지에 밝히고 「오! 한강」을 연재했다.
85년 무렵 프린스는 최고 절정기였다. 국내 최대의 만화출판사로 성장하면서 대부분의 작가들이 프린스에서 출판하기를 원했다. 출판사들은 실력있는 스토리작가를 연결해주고 사무실 운영, 문하생 관리 등 만화가의 모든 뒷바라지를 도맡았다.
그러나 만화출판이 호황을 누리게 되면서 외부 자본이 몰려와 기존 출판계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파격적인 원고료를 제시하고 작가를 빼내가곤 했다. 어느 출판사는 박봉성을 스카웃하기 위해 현금 1억원을 제시하기도 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원고료를 높게 책정하다보니 출판사의 이익이 줄어들고 문을 닫는 군소출판사도 속출했다. 프린스 역시 경영압박 때문에 동업을 청산하기로 했다.
87년 「타임」이라는 이름으로 새출발했다. 당시 인기가 있던 장윤식 배금택을 스카웃했고 이후 타임의 기둥작가로 활동한 허영만이 합류했다. 어느날 고등학교 2학년짜리 소녀가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왔다. 학교를 마치고 시작해도 늦지 않으니 졸업하고 찾아오라고 설득해 돌려보냈다. 소녀는 정말로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다시 나타났다. 현재 순정작가 중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미라는 그렇게 만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첫 작품인 「인어공주를 위하여」도 꽤 반응이 좋았다.
이때는 작가들과 술자리도 많이 가졌다. 80년대 등장한 작가들은 경제적인 풍요 속에 자주 만나 서로 어울렸다.
그들 중에는 고행석 김철호 김영하 이상무 박봉성의 나이가 비슷했고 이현세 장태산 이희재 윤필 고행석의 동생 고기석 이현세의 처남 조남기 등이 바로 아래였다. 또 하승남과 이현세의 동생 이상세 천제황 황성 조명훈 박원빈 황미나 이동포 등이 또래였다. 내가 동행하는 술자리는 대부분 만화계에 발이 넓은 장태산에게 부탁했다. 그는 프린스 초창기부터 내가 만화가들과 교분을 넓히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김석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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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출판인 이재근:8(나의 젊음,나의 사랑) 
경향신문  1998-08-06  22면  (문화)  판  기획.연재  1565자
◎만화가와 술 그리고 골프
그동안 만화가들과 숱하게 어울려 술을 마셨다. 만화가들은 대부분 술이 세다. 특히 김철호는 「술꾼」으로 유명하다. 요즘도 매일 소주 1∼2병을 마신다.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의 그는 술만큼이나 일에도 욕심이 많다. 다른 작가가 일할까봐 휴가를 못간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다. 김철호 만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고박사」는 당시 같은 사무실을 썼던 만화가 고유성이 모델이다.
한때 그림을 흉내만 내도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가 높았던 이현세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술도 많이 마셨다. 그는 너무 많은 작가들이 그림을 베끼자 화가 나서 오혜성의 까치머리를 특허청에 등록하기도 했다. 그의 동생인 상세와 무세, 처남 조남기까지 만화를 그려 만화가 집안을 이루었다. 이상세는 형이 일찍 큰집으로 입양됐기 때문에 사촌인줄만 알고 자랐다고 한다.
이현세의 가장 친한 친구는 장태산이다. 둘이 만나면 장난을 그칠줄 모른다. 별명이 「짱가」인 그는 목소리가 우렁차고 다혈질이지만 친구나 선후배에게 너무 잘해줘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 「용호취」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나 요즘은 잠잠하다. 지난해 「젊은작가모임」 회장을 맡아 만화탄압과 표현의 자유를 위한 가두모임을 주선했고 이두호 원수연과 함께 1일 감옥체험에 참여하기도 했다.
지금은 성이 기억나지 않는 병호라는 친구가 있었다. 장태산의 문하생으로 재주가 많아 누구나 욕심내는 예비작가였다. 평소 말이 없고 내성적인 그는 술에 취하면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아주 잘 불렀다. 그러나 어느날 작품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음독자살해 주변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고행석은 80년대 초 만났다. 그는 언제나 술값을 먼저 계산한다. 그가 무명으로 고생하던 시절 처음으로 고급 술집에 데려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주머니를 뒤지더니 만원, 천원짜리 지폐와 동전까지 모조리 꺼내놓던 일이 기억난다. 아주 미안해 하는 얼굴로 『나는 가진 돈이 이것 밖에 없으니 나머지는 사장님이 보태서 계산하세요』라고 말해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다. 그후 마라톤을 소재로 한 만화를 출판했는데 반응이 시원치않았다. 스토리만큼은 대단히 뛰어나 머지않아 대성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예상대로 그는 80년대 중반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어눌하고 조금은 모자란 것 같으면서도 의리와 인간미가 있는 「구영탄」은 작가를 그대로 빼닮은 주인공이다. 고우영 허영만과는 골프를 통해 친해졌다. 골프는 80년대 초 고우영씨가 제일 먼저 시작했다. 나중에 허영만 박수동 이상무 등이 골프에 빠졌다. 박봉성 이현세 조명훈 등도 골프를 좋아한다. 나는 88년부터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연습장에 나간 지 얼마 안돼 허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유럽여행을 다녀오면 다른 사람에게 머리 얹어줄 기회를 빼앗길 것 같다며 막무가내로 필드로 불러내 나의 「골프신랑」이 됐다.
89년 골프를 좋아하는 만화가와 출판사 사장들이 「보기회」를 만들어 자주 골프장에 나갔다. 골프 뿐 아니라 만화계에서 존경받는 리더는 역시 고우영씨다. 고선생은 육순의 나이에도 후배들을 편하게 해주며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음담패설을 포함한 재담으로 좌중을 웃기는 재주도 뛰어나다. <김석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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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출판인 이재근:9(나의 젊음,나의 사랑) 
경향신문  1998-08-07  22면  (문화)  판  기획.연재  1393자
◎출판계 휩쓰는 ‘만화 왜란’
허영만은 문하생들에게 엄격한 스승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스스로 그림의 변화를 꾀하고 문하생들에게도 정당한 대우와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믿고 따른다. 허씨의 문하생 출신으로 데뷔작에 실패, 어려운 처지에 빠진 후배가 있었다. 그는 다른 유명작가를 찾아가 하청 작업을 맡을테니 가불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소식을 들은 허씨는 『허영만 가의 명예가 있지…』라며 조건없이 돈을 주고 자신의 일을 하도록 격려했다.
92년 나는 허씨의 문하생이었던 조모씨를 데뷔시키기로 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가며 작가를 지원했다. 허씨도 화풍이 비슷한 그를 위해 대본소용 단행본을 그만두는 등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조씨의 첫작품인 「허슬러」는 대단한 성공작이었다. 그동안 조씨는 나에게 수억원이 넘는 돈을 가불해갔다. 그러나 조씨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원고료를 더 준다는 다른 출판사에 원고를 팔아버렸다. 결국 소송을 제기해 3년을 끈 끝에 승소판결을 받아냈다. 하지만 조씨는 이미 인기가 떨어지고 돈 갚을 능력도 없었다. 이 일로 타임은 자금난을 겪게 됐고 사세가 형편없이 기울었다. 조씨는 요즘 심기일전해 다시 나와 손잡고 작업에 매진하면서 인기 회복중이다.
94년 만화총판을 하던 유연구·홍승태씨가 찾아와 동업을 제의했다. 출판사 이름을 「영현」으로 하고 서점·대여점용 성인만화를 출판하기로 했다. 박봉성의 「퍼펙트맨」, 허영만의 「들개이빨」, 하승남의 「신검마검」 「래목래인」 등으로 꽤 재미를 봤다.
국내 유명작가들의 B팀(하청팀)을 하고있던 김문수와 윤희철을 스카우트했다. 국내 유명작가치고 이들에게 작업을 맡기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실력, 경력이 충분했지만 독립을 못한 상태였다. 김씨는 조성빈, 윤씨는 윤치성으로 필명을 정했다. 민속극화에 재주가 있는 두 사람은 치열하게 작품에 매달렸다. 판촉용 전화카드를 만드는 등 출판사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성빈은 「큰만신」 「성황당」 「보릿고개」 등으로, 윤치성은 「탯줄」로 인기작가가 되었다. 이들은 신인·무명작가들에게 성공의 본보기이자 「희망」이 됐다. 나는 또한번 「히트작가 제조기」라는 과분한 소리를 들었다.
나는 한국만화를 사랑한다. 일본만화 해적출판 등 편법으로 돈을 벌 수도 있었지만 단 한번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드래곤볼」 「슬램덩크」 등 일본만화의 번역출판이 늘어나면서 독자들은 우리 만화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90년대 등장한 신세대 작가들은 SF를 가미한 귀신이야기나 「애어른」의 성유희, 순정만화 등 일본만화 베끼기에 더 열중했다. 일본만화를 통해 새롭게 자리잡은 대형 만화출판사들이 작가들을 독식하면서 출판시장은 점점 좁아졌다. 그리고 IMF와 일본만화 완전개방은 출판사 경영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김석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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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출판인 이재근:10·끝(나의 젊음,나의 사랑) 
경향신문  1998-08-10  25면  (문화)  판  기획.연재  1508자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가버렸다. 어느새 지천명의 나이. 나에게 남은 재산이라고는 대중의 욕망을 대리만족시켰던 숱한 만화책들, 그리고 고통과 즐거움을 나누며 동시대를 살고있는 만화가들과의 만남 뿐이다. 만화가들 중에는 나를 만나 유명작가가 될 수 있었던 사람도 꽤 있다. 물론 내가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청상과부가 되어 나를 키우신 어머니도 벌써 팔순을 바라보고 계신다. 어머니는 항상 말씀하셨다. 『재근아, 화가 나거든 네 이름을 세번만 불러봐라. 그러면 화가 풀릴 것이다. 그래도 안되면 「엄마」를 세번 불러라. 살인도 면할 것이다』. 어머니는 광주리에 사기그릇을 담아 이고 20∼30리씩 다니며 장사하던 시절, 그 방법을 썼다고 한다. 아내(김순학·45)와는 승훈·승준 두 아들을 낳고 18년을 함께 살았다. 가정보다는 만화판을 더 걱정하는 남편을 만나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만화 외에는 서울지검 서부지청 청소년선도보호위원으로 비행·문제 청소년을 선도하는 일을 오랫동안 계속했다. 지금도 선도로 맺어진 청소년들과 자주 만나 그들의 고민을 덜어주려고 애쓰고 있다. 그들을 통해 『만화가 청소년들의 정서를 해치고 비행을 조장한다』는 말이 전혀 근거없는 주장이라는 것을 확인하곤 한다.
문제는 오히려 만화가와 출판계 종사자들이 만화에 대한 애정이나 프로의식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만화출판 불황의 가장 큰 원인도 소위 「히트작」이 없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만화 황금기였던 80년대는 좋은 작품이 많았으며 작가층도 두꺼웠다.
요즘 청소년들은 일본 만화 주인공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게다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독자들에게 잊혀지기 때문에 만화가와 출판사는 질보다 양에 매달리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퀴퀴한 골방」의 유일한 오락거리로 치부되던 만화가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지도 이미 오래다. 만화가의 캐릭터나 애니메이션 사업이 각광받으면서 인쇄매체 만화시장은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만화산업의 기본은 인쇄매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만화영화든 팬시·캐릭터사업이든 좋은 만화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아무리 외국만화가 기세를 떨친다 해도 우리 작가들이 우리 정서에 맞는 좋은 작품을 그려낸다면 독자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 나라에 만화만큼 무궁무진한 「자원」이 어디 있는가.
나는 다시 새출발을 앞두고 있다. 앞서 밝힌대로 새로 설립한 출판사 「회원사」에서 작가가 열정을 쏟아부은 작품만을 정성들여 출판할 것이다. 파격적인 원고료를 지급해 작가들이 다작에 매달리지 않고 훌륭한 재능과 잠재력을 살릴 수 있도록 하는 시금석이 돼볼 작정이다.
얼마전 술자리에서 고우영씨와 허영만씨는 나를 보고 『사하라 사막에서 보일러를 팔고 알래스카에서는 냉장고 팔아먹을 독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북한에 우리 만화를 팔고 싶은 것이 꿈』이라고 응수했다. 요즘 출판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힘을 내라는 뜻으로 해준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고마운 분들이 많은 「동네」이기에 나는 앞으로도 결코 만화판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정리·김석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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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7 Fri 11:3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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