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한겨레 신문 서평)
남긴글 뉴 스 명 : 한겨레신문
등 록 일 : 2000/10/03
등록시간 : 18: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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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만화의 불모지대에 가까운 국내에 프랑스 만화 4종이 동시에 출간됐다. 고급종이에 전부 칼라로 찍어 값이 비싸기는 하지만, 작품을 엄선한 탓에 4종 모두 내용과 그림에서 상당한 수준을 선보인다. 각종 만화제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정확한 데생에 기초한 사실적인 삽화체에, 일본 만화보다 극적 과장이 덜한 대신 디테일이 빽빽하고 사색적 요소도 곁들여진 이 만화들은 확실히 새로운 느낌이다.
교보문고가 번역해 내놓은 <존 디플의 모험-잉칼>은 글쓴 이나, 그린 이부터 만만하지 않다. 글쓴 이 알렉산드로 조도로프스키는 국내에 개봉됐던 실사영화 <성스러운 피>의 감독이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사구>와 뤽 베송 감독의 <제5원소>의 각본작업에 참여했고 일본 애니메이션 <아키라>의 감독 오토모 가츠히로에게 <메가멕스>의 시나리오를 써주기도 했다. 그림을 그린 뫼비우스의 본명은 장 지로로 `지르'라는 또다른 필명으로 서부극 만화의 고전 <블루베리>를 그렸고, <사구> <에일리언> <제5원소>의 아트 디렉터, <블레이드 러너>의 의상 디자이너를 맡았다. 에스에프에 관한 한 장르와 국가를 불문하고 상상력과 영감을 제공해온 두 사람이다.
80년대 초반에 발표된 <존 디플…>은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고서 갖은 잡학을 동원해 발휘할 수 있는 우주와 생명의 순환에 대한 상상력의 최대치를 담고 있는 듯하다. 사립탐정 존 디플이 우연히 우주 역사의 한 장이 가고 다시 새 장이 싹트는 중심에 휘말려 드는 얘기다. 그래서 만화의 배경은 먼 미래일 수도 있고, 혹은 지구 위에 문명이 싹트기 전일 수도 있다.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방대한 스케일 안에, 장자의 호접몽이나 융 심리학의 집단 무의식 같은 모티브를 섞어 그 우주의 역사가 존 디플이라는 한 개인 안에서 재현되는 구성을 취한다. 그러면서도 감히 존 디플은 초월이나 구도 따위에는 관심 없이, 이전이나 앞으로나 세속적 쾌락에 낙천적으로 몰두할 것 같은 캐릭터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신감이, 자칫하면 건방지게 보일 정도다.
비앤비 출판사가 펴낸 레지스 르와젤 글·그림의 <피터팬>은 월트 디즈니
피터팬의 성인용 버전에 해당한다. 소설가 최인훈씨가 <심청전> 등의 전래 설화를 다시 쓰면서, 동화 같은 허구 뒤에 숨은 지독하게 모진 현실을 들춰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출발한다. 소년 피터를 둘러싼 19세기 런던의 인간사회는 악취와 비린내가 진동하고, 피터의 홀어머니는 다른 어떤 창작물에서도 보기 힘들 만큼 잔인하고 못됐다. 어른들에게 저주를 느끼며 영원히 아이로 남고 싶어하는 피터의 `피터팬 신드롬'은 현실만큼 절박하다. 그 피터가 꿈처럼 나타난 요정 팅커벨을 따라 보물섬으로 간다.
비앤비가 함께 펴낸 <쌍브르>는 줄거리나 그림이, 4종의 프랑스 만화 가운데 가장 익숙하게 다가온다. 프랑스 혁명 전후를 배경으로, 창녀의 딸로 태어나 사람들의 편견과 저주를 버티며 살아가는 한 여인의 사랑 이야기다. 그 사랑이 갖은 난관을 뚫고 프랑스 혁명의 모토처럼 평등과 박애를 꽃피울 것을 예감케 하는데, 극적 갈등이 선명하고 그림도 만화체에 가깝다.
교보문고의 <제롬 무슈로의 모험>은 벽에서 상어가 나타나 아이를 삼키고 달아나고, 체크무늬 구름이 세상의 빛을 덮어버리는 황당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이런 `뜻밖의 일'들로부터 가정을 지켜내는 제롬 무슈로의 직업은 보험외판원이고, 그가 내주는 보험금은 경직된 사고로부터의 자유다.
임범 기자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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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0/06 Fri 14:05: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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