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시한 스파이 - 전영희
전영희의 (비교적) 신작인 '섹시한 스파이'는 활달한 성격의 여주인공이 정체불명의 회사에 입사해 스파이로 활동하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 이 바닥의 작품들이 대개 그렇듯 이후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이 간단치 않다.
당연하게도 ... 실제 주인공의 스파이 활동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신 남자주인공의 (옛 애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여주인공에 대한 자존심을 건 집착이 작품 전개의 주요한 동력이 된다. 슬쩍 스파이물에서 느와르 비스끄무리 한 것으로 바뀌고 주인공의 초능력과 이것을 둘러싼 흑막 ... 이 암시되지만 작품이 끝날 때까지 암시만 된다.
이 작품이 기존의 무엇인가를 의식했다면 아마도 원수연의 ‘풀하우스’일 것이다. 풀하우스는 ... 제목부터 그렇지만 듀나가 말한바 ‘내기에서 애정으로’ 클리셰를 가장 충실하게 ... 그리고 성공적으로 구현한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작가 특유의 매력적인 캐릭터, 의상디자인, 적절한 서스펜스의 부여 등등 상업작품의 이런 저런 미덕들이 잘 녹아 들어가서 꽤 읽을만한 작품이 되고 있다.
그에 비해 ‘섹시한 스파이’는 어떤가하면 ... 이 또한 나름대로 읽을 만 하다(여섯 권을 읽는데 40분을 넘기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어두운 과거를 가진 마피아 두목이 과거사의 폭로로 인해 사회적으로 매장(될 가능성도 사실 별로 많지 않아 보이지만)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딸이 아버지의 죄악상(?)에 놀라(작품 내내 아버지를 도와 같이 일을 벌이고 다녔으면서 말이지 ...) 참회의 의미로 수녀가 된다는 결말은 고전적이면서도 신선했고 ... 꽃무늬 양복이나, 가로줄무늬 바지 같은 몇 몇 아이템들의 패션센스도 괜찮았다(웬만한 작가라면 그런 톤은 속옷에나 사용했을 것이다). 뉴욕의 할렘가에서 차로 몇 시간 달려 멕시코 국경을 넘어가는 기동성이라든가 조종사가 머리에 총을 맞고 고꾸라져도 추락하지 않는 헬리콥터라든가 하는 자잘하지만 흥미로운 부분들을 찾아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재미.
전영희라는 작가(의 신상)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이것이 단지 h가 과문한 탓만은 아님을 이해해 주시기를) ... 최근 작품이 뜸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녀...는 놀랍게도 지난 2년간 세 편의 작품만을 내놓은 과작작가가 되어 버렸는데, 같은 출판사에서 활동하는 창맹의 동지(...) 한유랑과 황미리가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음을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다.
어쨌거나 발랄한 학원로맨스가 안전빵이고, 그런 의미에서라면 ... 한유랑의 ‘오!! 나의 주인님’ 같은 작품에 대해 끄적이는 것이 현명했을지도 모른다. 일단 재미있으니까. 가난한 소녀가 아버지의 수술비를 위해 모은 전재산으로 미소년을 사서 노예로 굴린다는 설정! ... 신선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아무리 순정만화라도 ‘내기에서 애정으로’ 운운은 이젠 좀 재고해 볼 때가 되었고, 하드보일드나 기업극화류의 노선을 걷는 것은 더욱 모험. 저 대단한 김영숙도 고전하고 있지 않은가. 학원로맨스 + 약간의 코믹함 + 팬덤 + 순정학폭물 ... 조금은 숙여가면서 그릴 필요가 있다. 누구나 원수연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전영희가 근래의 부진에서 벗어나 더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기를 바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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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ad : 885, 2001/08/11 Sat 01:26:12 → 2001/08/11 Sat 03:0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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