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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아니 그리 오래지도 않은 옛날. '허리케인' 죠는 한국인이었고, 한국에서 '드래곤볼' 단행본이 일본 본토보다 빨리 출시되었으며, '용소야' 시리즈의 만화가 '성운아'는 만화가를 지망하는 뭇 소년들의 우상이었다. 일본만화가 정식으로 수입되기 훨씬 이전부터, (아직도 거의 들어오지 않고 있는) 영미권 성인물들이 소개되기 이전부터 이미 바벨 2세는 라이파이나 각시탈과 동등한 위치에서 독자들의 시선을 받아왔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만화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절대로 완전히 합법적일 수도, '도덕적'일 수도 없다. '해적판'이라는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도 만화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키기란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만화를 읽는다는 것은 좋든 싫든 '해적판'이라는 '미운 오리새끼'를 애써 숨겨놓고 생각할 수 없는 과정이다. 해적판. 그것이 이 기획기사의 중심화두다. 아무리 부끄럽거나 천박하게 느껴지더라도, 한국이라는 이 나라에서 만화가 걸어온 길을 이야기하고자 하면서 이 화두를 비켜가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군사정권 시대 30여년을 관통하는 강력하고도 근본적인 문화 탄압의 칼바람 속에서 만화가 살아남는 하나의 방식이었으며, 지금까지도 만화계에서 하나의 중요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기획코너에서는 앞으로 여러회에 걸쳐서 한국만화계에서 해적판이 차지하는 위치의 궤적을 짚어볼 것이다. 이 탐색은 '아하, 그런 것이 그때 있었지'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도, '음, 불량불법만화 이야기를 가지고 엄청나게 우려먹는군'하는 마음으로 읽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우리네들이 직접 접해온 이야기들이다. 왜냐하면, 우리시대의 만화광들은 일본원서만을 독파하며 내공을 쌓지도 않았고, 또 토종 우량 한국만화만을 보면서 크지도 않았으니까. '鐵拳 チンミ'를 아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실제로 접한 것은 '쿵후소년 용소야'였을 뿐이다. ...자, 그럼 이제 불량 불법의 세계로 들어가보도록 하자. |
<일진회. 만화탄압.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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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이란 무엇인가. 우선 처음에 해적판이 과연 어떤 것들을 지칭하는 것인지 범위를 먼저 정해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합법의 좁은 세계와는 달리 불법의 세계는 '넓고도 광대하다'. 누구나 조금만 노력하면 충분히 탈법을 저지를 수 있다! 여느 손재주 좋은 고등학생이 연습장에 유명 만화 일러스트를 그려주고, 그 대가로 친구들에게 한끼 식사, 볼펜, 아니면 아에 소량의 현금을 받는 흔하디 흔한 경우도 엄밀하게는 저작권법 침해고, 명백한 불법이니까. 해적판의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위에서 말한 '불법', 정확하게는 '저작권 침해'다. 해적판에는 항상 '원작'이 존재한다. 해적판은 원작의 모방이지만, 그것이 원저작자 및 출판권자 등 저작권 주체들과의 합의 없이 불법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측면에서 리메이크와는 구별된다. 그 모방은 책을 불법 대량 복제해서 유통시키는 기계적인 방식에서부터, 원작을 고스란히 배껴서 다시 그리는 '창조적인' 작업까지 다양하다. 실제로 7-80년대 국내에 유통된 여러 해적판은 후자의 방식이 많았고, '에이스를 노려라', '도전자 허리케인' 같은 의외의 성과를 이룩하기도 했다(이 부분은 후에 저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다음으로 해적판을 규정하는 중요한 조건은, 그 모방이 전체적이고 상업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특정 원작의 독특한 캐릭터 혹은 메카닉을 무단으로 도용하여 사용하는 행위도 저작권 침해이지만, 패러디, 카메오 등 여러 가지 요소로 사용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에 범위를 한정시키는 것이다. 여러 동인지의 경우 인기작의 캐릭터들을 바탕으로 외전이나 패러디 등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들을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해적판들과 동일선상에 놓기는 어렵다. 또한 외국의 메카닉, 인기 캐릭터들이 한국만화에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할 경우 어디까지를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고, 어디서부터를 '모방'(혹은, 표절)으로 간주해야 할 지 기준이 애매하다. 예를 들어서 고유성 作 '로보트 킹'의 주연 메카닉인 로봇 킹은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자이언트 로보'의 GR-2호 디자인을 차용한 것이 명백하지만, 그 디자인의 성격이나 전체적인 느낌은 상당히 다르며, 작품 자체의 드라마 전개도 전혀 관계가 없다. 하지만 90년대초에 유행한 수많은 '드래곤볼2'과 '란마 1/3' 시리즈 같은 대체 판본(원작의 연재 진도보다 이후의 이야기를 임.의.로 그려서 신속하게 유통시키는 해적판)들은 원작에 없는 독창적인 전개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해적판의 범주에 넣어주어야 마땅하다. 그것들은 패러디, 만화문화 공유 같은 동인으로서의 목적이 아니라, 원작의 인기를 등에 업고 원작의 자리로 비집고 들어가려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제작 유통 수용의 과정에서 해적판을 정의하기는 더 명쾌하다. 우선, 작가 스스로가 이것은 '배꼈다'라고 인정한다면 (유감스럽게도, 인정하는 경우가 그리 흔하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굴절된 만화사 속에서, 현재 중견 이상의 작가군 가운데 한번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해적판 제작에 참여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해적판으로 간주할 수 있다. 유통의 측면에서는, 첫째 불법적인 유통경로를 거치는 경우를 꼽을 수 있다. 80년대 말-90년대 초에 유행한 '500원 판본'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다. 500원 판본은 일반적인 유통경로인 만화 도매상, 대본소 등을 일절 거치지 않고 철저한 현금거래로 각종 문방구와 소매 서점들을 일대일로 돌면서 직거래했다. '그쪽 사람들'이 '어디에선가' 만화책을 봉고차에 가득 실어서 매우 불규칙하고 비정기적으로 서점에 잠깐 나타났다가 거래를 마치고 곧바로 사라진다(당연히 반품이나 재판 주문 같은 행위는 먼나라 이야기였다). 하지만 더욱 많은 해적판은 '정상적인' 심의절차를 통과하고 심의필 도장이 찍힌 채로 합법적으로 유통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유통은 반드시 불법적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꼬리를 잡히지 않는 것'일 뿐이다. 요약해서, '해적판'이라는 것은, 상업적인 목적으로 1) 원작을 완전히 복사하거나('불법복제') 2)전반적으로 배껴서('도작', 혹은 '배껴그리기'), 또는 3) 원작으로 속이려는 목적으로 자체적으로 제작한 ('대체판본') 불법/합법적으로 유통시킨 불법 판본을 칭한다는 말이다. 어째서 이런 해적판들이 한국 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지는 천천히 설명할 몫이다. |
<불법출판과 '심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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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해적판을 만드는가. 해적판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문화 상품 수입 규제, 검열, 저작권에 따른 비용 소요 등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들을 고스란히 비켜가면서 상품성 높은 작품들을 시장에 유포, 손쉽게 만화 시장에서 '한몫 잡는' 것이다. 불법 음반, 불법 (활자) 서적 시장 등과 달리, 아직 국내 만화시장은 자율성으로 일구어진 정리된 내부 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라서 (아직도 몇몇 시민단체와 국가기관이 연합하여 '불량만화' 소동을 일으켜서 여러 출판사들을 눈 깜박할 순간에 고사시켜버릴 수 있지 않은가!), 불법과 합법의 경계가 상대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더욱이 6-70년대 이래로 일본만화가 한국만화에 비하여 질적/양적으로 급격하게 성장했고 그 일본만화가 최근에서야 정식으로 개방되어 나가고 있기 때문에, 불법적으로 여러 상품성 있는 일본만화들이 도입될 충분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바탕에는 박정희 정권 당시의 문화 전반에 대한, 그 중에서도 특히 만화에 대한 서슬퍼런 탄압(전쟁의 폐허 위라는 비슷한 시기, 비슷한 조건 속에서 당시의 검열과 탄압은 한국만화가 서 있는 위치를 출발선상보다도 훨씬 뒤로 밀어 넣는 작용을 했다)과 일반의 인식부족, 그리고 일본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타성이 놓여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야 모든 문화 분야에서 나타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만화에서 해적판이 더욱 기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만화의 제작/유통과정이 그만큼 취약했기(하기) 때문이다. 유통망이 취약하다는 것은 그만큼 불법적인 요소가 개입되더라도 자정작용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고, 상품성이 있을 경우 충분히 뛰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6-70년대부터 시작된 독과점적 공장형 대본소 체제에서는 독창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창작물이 나오기가 워낙 힘들었고(그렇게도 대단히 척박한 환경속에서도 자신의 작품세계를 만들 수 있었던 몇몇 작가들은 그래서 더욱 그 가치가 빛난다), 보다 검증된 인기작을 수입해오는 것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수익성이 더 좋다고 판단되는 것이 당연한 절차였다. 사실상 워낙 만화가 작품이라기보다 소비재로서 인식되던 당시에는 '뭐든지 그려서 공급하기만 된다'(아니, 정확히 말해서는 뭐든지 그려서 공급해야만 겨우 작가와 문하생들이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하지만, 점점 양질의 작품을 찾는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이 필요할 때에는 여지없이 일본만화를 불법적으로라도 들여오는 것이었다. 500원 판본들 또한 만화를 직접 구매해서 본다는 개념이 희박하던 유통망의 허점을 파고 들어온 것이었고, 비용 절감은 인쇄 품질, 번역 품질, 그리고 저작권에 대한 전적인 무시를 통해서 이루어 상당한 시장 성과를 이루었다(물론 공식적인 집계자료는 없다... 다만 점차 시장의 폭이 넓어지고 참여 업체가 많아졌다는 사료를 통해서 추론하는 부분이다). 해적판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과정에서 소비자(독자)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진행이 될 수 없다. 첫째로는 제작 및 유통환경의 개선 없이 독자의 눈높이가 올라갈 경우, 제작/유통을 개혁하기보다는 다른 곳에서 다른 방법으로 독자들의 눈에 차는 것을 구해주는 것이 더 용이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건전하고 합법적인 수입의 형태가 아닌 해적판이라는 왜곡된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물론 비현실적이고 시대역행적인 민/관의 검열제도의 몫이 크지만 말이다. 더욱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보다 많은 양을 단번에 소비하려는 (소위, 만화는 '쌓아놓고 봐야 한다'는 사고방식) 국내 독자들의 성향은 여러 해적판 업자들에게 '드래곤볼' 대체 판본과 가짜 단행본(잡지 연재분을 팩스로 공수해서 몇 회 단위로 제본, 출판하는 방법)을 양산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만화읽기 성향 자체가 공장형 대본소 체제의 만화에 익숙해져 있어서라는 측면도 있지만, 한번에 몰려갔다가 이내 관심을 꺼버리는 전반적인 '냄비성' 습성의 발로이기도 하다. 즉, '유행'을 타면 엄청나게 관심 수요가 불어났다가, 조금만 고삐가 늦추어지면 바로 풀어져버리는 관심패턴이, '연재'라는 만화 제작 형식과 맞물려 들어갈 때 해적판이라는 갓길로 새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첫 번째 줄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해적판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바로,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은 투자와 비교적 적은 위험부담만을 가지고도 쉽게 장사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만화 전반을 모두 '불량'으로 규정하고 있는 사회상 속에서는, 진짜 불량 불법이 구분이 좀처럼 가지 않기 때문에 (특히 만화의 ㅁ자도 모르면서 만화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일부 출판업자들과 행정관료, 검열관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어쩌다가 꼬리를 잡히더라도 그 파장이 불량 불법에 대한 처벌이라기보다 만화계 전반에 대한 인식악화로 이어져버린다. 그렇게 소동이 커지고 있을 때 슬그머니 은둔해버리면 그만이다. 실제로 이것은 가깝게는 97년의 '일진회' 사태 당시 그대로 재현되었던 시나리오다. 투자를 많이 하지 않아도 되는 손쉬운 돈벌이에 위험부담도 상대적으로 적다. 불법을 저지르기 위한 최상의 조건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것이 바로 해적판이 만들어지는 이유다.
2회 예고: 해적판의 흐름 - 1 !@# ... 다음 회부터는 몇 회에 걸쳐서 각 시대별로 해적판이 만들어지고 유통, 소비되는 양상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독자분들 중에서도 해적판과 관련된 사연, 생각나는 사실들이 있다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
<이나중 탁구부=괴짜구락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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