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누프걸 1.불우한 환경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권투,혹은 야구선수가 되는 고독하고 반항적인 소년 스포츠 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캐릭터의 모습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이상무의 독고탁과 지바 데쓰야의 야부키 죠를 들 수 있겠다.주1). 치바데쓰야의 만화를 보면 그의 그림풍이나 연출 방법등이 동시대 한국만화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80년대에 들어서서 이현세와 허영만의 성인극화류가 붐을 이루고 극화적 연출이 발전하기 전까지 소년만화계에서 내노라 하는 한국작가들의 작품들은 크건 작건 즈바데쓰야와 상당히 닮은 외관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아까 말했 듯이 캐릭터 설정에서도 스포츠만화의 전형적인 캐릭터인 불우한 환경의 고독한 영웅상을 만들어내는데 그의 영향은 작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같은 맥락에서 이상무도 제외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연출과 그림풍,캐릭터의 기초설정상 영향으로 그쳤을 뿐, 작품내부로 들어가 비교를 시작해보면 그렇게 닮은 듯이 보이는 이들 두 작가의 세계는 판이하게 틀리다.그리고 그 차이는 일본만화와 한국만화의 차이로까지 연결되고 있다. 여기서는 '내일의죠'와 '아홉개의 빨간모자'를 중심으로 비교해보겠다.
2.고아출신으로 겪게 되는 사회의 편견과 냉대,동정과 자선 이 모두에 대해서 냉소하는 야부키 죠는 자신의 자유만 지킬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사기협잡질을 일삼으며 떠돌아다닌다. 즉 몹시 거칠게 살아왔지만 "스스로의 자유만큼은 누리며 살아왔다". 독고탁 역시 끝없이 탈출을 시도하여 재산을 모으려는 고아로서 거친 반항아이기는 죠와 매한가지다. 하지만 그의 그런 행동의 이유가 단지 부자가 되기 위해서나,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짝사랑하는 원장딸 숙이에게 말끔한 신분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라는 점이 죠의 경우와 비교된다. 즉 죠는 꿈도 미래 도 없는 소년이었던 반면에 독고탁은 그리움의 대상이, 마음속에 간직한 꿈과 미래로서 구체적으로는 숙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얼굴만 떠올려도 마냥 웃음이 나고 그러다가 괜히 궁상스럽게 눈물까지 나는 예쁜 숙이'는 그가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그래서 외롭지 않을 수 있는 다정한 가정의 표상으로서의 꿈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둘의 갈 길은 틀려지게 되어 잇었다고나 할까. 죠는 스스로 자유로운-그래서 고독한 영웅이 되고자 했지만 독고탁은 처음부터 외로왔던 것이다. 그는 외롭지 않고 싶었다.
[도판1:고독한 탁이에게 숙이는 다정한 가정의 표상이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 야구한다.]
3.내일이 없던 죠에게 내일을 심어준 단뻬이 관장.
그는 권투광으로 죠에게서 권투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에 매혹되어 그의 재능을 키우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삼으려 한다. 처음에 는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죠는 소년원에 들어가 자유를 빼앗긴 상황에서야 비로소 관장이 날마다 보내주는 권투강습쪽지를 진지하게 읽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 안에서 유일 하게 자유로운 행위였으니까, 소년원내에서 리키이시라는 라이벌을 만나서 자극받으면서 이제 권투강습쪽지는 그의 적극적인 선택이 된다. 그의 마음속에 새롭게 자리한 내일- 꿈이라는 것은 곧 '이기는 것'이다. 무엇에 대하여? 요꼬라는 부잣집 소녀의 존재로 대별되는 사회의 위선적 손길, 보통사람들의 상류계급-풍요로운 생활-행복에 대한 꿈, 그리 고 그러한 꿈에 접근하려고 권투를 하는 선수들, 그에 마음이 흔들리는 자기 자신의 치졸한(?) 모습, 그 모든 것에 냉소어린 침을 뱉고 이기고자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을 둘러썬 현실을 참으로 비타협적으로 거부하려든다. 결국 그가 링 위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됨은 필연일 것이다. 현실에 대한 완벽한 비타협의 결론은 죽음일 밖에 별 도리가 없다.그래서 그는 고독한 영웅으로 숭배받게 된다. [도판2:자신을 다 태우고 만족스런 표정으로 링위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죠. 고독으로서 권투를 즐겼다고나 할까.]
4.내일을 꿈꾸던 독고탁앞에 나타난 옥기호선생 원장아들인 야구선수 준에게 말도 못하게 멸시받고 있던 고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 몇 푼의 동전이 아니라 자존심이라고 확신하는 옥선생은 야구를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자 한다. 처음엔 부정적이던 독고탁도 비밀에 쌓인 친구 봉구에 대한 신뢰와 아이들의 변모에 점차 생각을 돌려서 모았던 돈으로 야구모자를 사와 돌리기까지에 이른다. 잠시동안 그의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니라 현실로 이 루어질 것처럼 보였다. 믿음직한 봉구, 자신과 함께 야구하는 친구들, 승리투수인 자신을 사랑해줄 숙. 그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봉구가 자신의 원래신분으로 돌아가 숙이와 사귀는 상황에 이르러 독고 탁의 꿈은 뿌리째 잘려나갔다. 이제 독고 탁은 눈물을 흘리며 옥선생에게 외친다.'야구를 하게 해 주세요.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야구밖에 없어요' 이미 깨어진 꿈 앞에서 그는 왜 야구를 하려 할까? 복수하기 위해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것을 보여 주어도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청소년 야구대회에 나가 준은 물론이고 봉구를 패배시킨 독고 탁, 그는 승리투수가 되었지만 그의 꿈은 이미 무참하게 깨어진지 오래다. 피묻은 야구공을 숙이에게 던져주고 사라져버린다. 처절한 경기로 머리가 돌아버린 고아원 동료의 '야구하자 야구해'라는 중얼거림만이 계속 떠돌 뿐이다. 그의 고독한 승리는 독자들로 하여금 숭배는 커녕 마음 아픈 자숙을 하게 만든다. [도판3:전국의 독자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바로 그장면, 창문을 깨고 피묻은 승리볼을 보여주는 독고 탁의 자존심] 5.전태일과 게바라: 비슷한 설정에서 출발하는 두 작품을 이렇듯 상반되는 결과로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 차이를 나는 '전태일과 체 게바라'를 은유하므로써 찾고 싶다. 내일의 죠와 동시대의 인물인 게바라는 당대를 휩쓸던 서구와 일본의 학생운동이 숭배하던 영웅적 이미지였다.혁명정부에서 밀려난 후에도 열정적인 활동을 벌인 지식인 출신의 젊고 잘생긴 혁명아의 이미지. 그 자신이 실제로 어땟건 그들에게는 그의 이미지만이 중요했을 것이다. 심화된 현대사회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젊은 에너지를 표현해줄 이미지로서 '혁명'이라는 단어처럼 어울리는 말도 없을테니까. 하지만 모두들 알다시피 68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이런 학생운동은 혁명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 어떤 변화도 실제로 이룩하지 못한채 금시에 사 그라들었다. 한편 같은 때에 우리나라에는 전태일이 있었다. 온몸에 스스로 불붙은 신나를 끼얹고 노동자의 인권을 외쳤던 전태일은 당시 우리나라 학생운동(아직까지도)에 엄청난 의미로 존재했다. 그 의미는 게바라의 영웅적 혁명아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직접적인 삶의 문제였고 최소한의 인간존엄성의 문제였으며, 무엇보다도 그후 모든 한국 진보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로서 존재했다. 전태일은 숭배받는 영웅이 아니라 우리모두가 처한 상황을 자숙하게 하는 우리들의 형,혹은 동생이었던 것이다. 말하고 싶은 바는 이렇다. 게바라의 이미지를 영웅화시켜 숭배하는 것처럼, 일본사회의 감수성은 고독한 영웅의 이미지 죠를 만들어낼 수 있고 또 받아들여 숭배할 수 있다. 반면에 전태일이 스스로 몸을 태우고 또 그런 그를 우리 자신의 일로 받아들였듯이, 우리사회는 죠가 아니라 독고탁을 만들 수 있었을 뿐이고, 그를 사랑하고 안스러워할 뿐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적절할런지? 6.헝그리 복서와 배부른 복서 이쯤되면 가난한 나라, 부자나라의 차이등등이 거론될 법하다. 물론 그런 사회,경제적인 맥락에 대해서 말할 계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런식으로 우리사회와 일본사회의 감수성이 틀리다는 점이다. 이 점이 내일의 죠 스토리라인 일부분에 서 잠시 드러나고 잇는 것이 흥미롭다. 스토리 중후반에 가면 죠가 한국권투선수와 시합을 갖게 된다. 한국권투선수는 한국전쟁을 격어 극심한 가난과 기아속에서 오로지 살기위 해 권투를 하게 된 사연을 갖고 있다. 그러한 그의 처절한 권투관 앞에서 죠는 한동안 자신의 권투를 회의하는 위기에 처한다. 죠의 권투의 절실성을 의심하는 한국선수 (번역판에서는 태국선수로 나온다)  [도판5: 헝그리복서에도 진짜 가짜가 있다(?)] 하지만 곧이어 내린 결론은 당신에겐 당신의 권투 가 있듯이 나에겐 나의 권투가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라며 스스로를 추스린다. 맞는 말이요, 정당한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가지 덧붙여두고 싶은 것은 그의 권투와 우리의 권투가 분명 틀리다는 것을 사람들이 흔히 잊어버린다는 사실이다. 만화가 아무리 망가의 세례와 영향을 받아도 그 둘은 틀리다. 하기사 틀리기때문에 굳이 영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겟지만 말이다, 망가에는 일본사회의 정서가, 만화에는 우리사회의 정서가 들어있고 그러한 한에서 각각의 작품은 자기 완성과 책임을 가질 수 있으며 각각의 독자들로부터 감동을 일으키고 사랑받을 수 있다. 7.전문 스포츠 만화의 길, 스포츠 드라마 만화의 길(주2) 다소 거친 표현이지만 이상무와 치바 데츠야 이후 일본 스포츠만화와 우리 스포츠만화의 각기 다른 모습의 발전을 이렇게 정리해보았다. 실제로 일본 스포츠 만화는 점 점 더 스포츠 자체의 전문적인 재미와 정보를 즐기는 쪽으로 나아가는 듯이 보인다. 오히려 내일의 죠 같은 경우는 그 스포츠의 주체인 죠라는 인간의 실존적 문제가 예외적으로 강조된 특별한 경우로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스포츠 만화 뿐만이 아니라 다 른 소재의 만화들 역시 특정직업이든, 분야든, 소재자체를 전문적으로 파고드는 전반적인 경향이 보인다. 반면에 이상무 이후로 우리 스포츠 만화는 언제든지 스포츠를 인간 드라마의 일부분이자 하나의 도구로서 취급하여 온 전통을 가졌다.(이상무는 드라마의 황제라는 별명이 있을만큼 이러한 면에서 탁월하다)이것은 후에 이현세,허영만의 스포츠극화에서도 고스란히 지속되었고, 굳이 스포츠물이 아니라도 다른 소재를 다룬 만화에서도 대체로 그런 경향을 같이 하고 있다. 거꾸로 보면 우리사회가 일본사회에 비해 어쩐 특정분야에 특별히 집착적으로 매달리는 정서가 그리 일반적이지 않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가령 무협만화-일본의 경우는 사무라이만화? 아니면 파이터물?-만 보더라도 일본에서는 무술이 그 자체로서 의미이자 주제로서 추구되는 내용으로 흔히 그려지나, 우리만화에서는 주인공이 엮는 드라마속의 한낮 일부분, 그것도 도구로서의 역할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마치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도자기문화가 뛰어났지만 한번도 도자기를 본연의 그릇의 기능을 제거한 채 감상용으로만 제작한 역사가 없었던 것처럼, 한국독자로서 나는 일본의 전문분야를 파헤친 만화 -가령 맛의 달인이라든가-를 보면 우리 만화를 볼 때 느끼는 그런 감정이입과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그런 것 같다. 그저 아, 그렇구나 하고 끄덕이는 정도일 뿐이다. 바로 얼마전에도 " 이제는 드디어 우리 만화계에도 전문분야를 소재로 한 만화가 나오고 있다 "며 환호성을 지르는 뉴스보도를 접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 뉴스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드디어","이제는"이라는 말을 쓰는 건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나? 만화가 다양해지는 건 좋지만, 일본식의 전문만화만이 우리 만화 발전의 방향인 것처럼 일본만화의 예를 들면서 과장해서 보도하는 것이 귀에 거슬렸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만화의 발전방향의 중심에는 드라마의 전통이 자리하고 있다고 항상 생각해왔기 때문이다.아마 우리만화작가들이 훌륭한 전문만화를 만든다면 그 안에는 분명 그 전문정보의 부축을 받는 드라마의 모습일 것이다. 우리가 우리자신의 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우리 공통의 경험들, 상황들, 정서들, 그것을 다루는 드라마, 이것들은 우리만화가 미국만화양식의 영향을 받건 일본만화양식의 영향을 받건 유지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우리만화를 우리독자로 하여금 선택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어줄 것일테니까. 그리고 그것들이 수많은 외국양식의 범람과 영향 속에서 우리만화의 맥을 끊이지 않고 이어줄 우리만화의 정체성일테니까 말이다. ----------------------------------- 주1)물론 야부키 죠가 '도전자 허리케인 (원제,내일의 죠) 한 작품에서만 등장하는 주인공인 반면에 독고탁은 이상무의 전 작품에서 등장하는 고정 캐릭터다. 하지만 적어도 불우한 환경의 고독한 스포츠맨이라는 점은 그 수많은 작품들속의 독고탁들에게서 동일하게 드러나는 면모인 것이다.
주2) 여기서는 '드라마'라는 개념을 특정 소재에 대한 정보와는 본질적으로 무관하게 순전히 주인공의 성격과 사연, 그를 둘러싼 사람들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 희노애락의 추이를 엮은 내러티브가 중심에 놓여있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로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