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악귀의 암울한 만화읽기 두 번째

가난한 미소년, 어느날의 만화일기

00년 10월 16일 날씨: 맑음

현재 나의 상태는.... 최악이다.

우발적인 상황들이 겹쳐서 만들어 낸 극도의 재정적 빈궁상태. 결국 견딜 수가 없어서, 선배에게 약간의 돈을 꾸었다. 그런데 오늘 학교에서 악기를 들고 방으로 내려오느라 택시를 탔다가, 그만 5000원 짜리를 1000원 짜리인 것처럼 내버렸다. 그런데 그냥 말없이 떠나버린 택시기사 분을 욕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닌 것일까? (차라리, 인간이 아니어주지) 감정의 낭비를 극도로 혐오하는 나는, 그냥, 무감각하게 악기를 메고 방으로 왔다. 짜증이 나기보다는, 이제 남은 돈으로 어떻게 5일을 버틸 것인가가 관건이다. 6000원이 있었다. 5400원을 냈으니, (택시비가 1400) 이제 600원이 있다. 600원.

600원. 뭘 할까? 만화방에 갔다. 그동안 돈이 없어서 만화방에도 갈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면 누가 동정해줄지 모르겠다(아마 왜 그렇게 사느냐고 경멸에 찬 눈초리를 보내겠지....) 때문에 만화를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 두고보자에 어떤 작가에 대해서 뭐라 쓰기로 했는데, 그것도 자료가 될 만화들을 보지 못해서 정지상태.

600원으로 <꼭두각시 서커스>와 <마계학원>의 신간을 볼 수 있었다. 한 번 보고서 또 본다. 신간이라서 만화방 주인이 금방 다가와서 "다 보셨어요?"하고 묻는다. "아뇨"(세 번은 더 볼 건데요) 둘 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만화다. 마계학원은 개인적인 속류취향을 99% 만족시켜준다. 꼭두각시 서커스. 암울한 배경 속에서 펼쳐지는 휴머니즘은 언제나 나를 고동치게 한다. 그런데 계속보고 "멋지다... 전학생", "멋지다.... 가토"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니까 이것에 대해서 뭔가 말하고 싶어진다. 누군가에게 내 생각을, 이 만화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싶어진다.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글이 쓰고 싶어진다. 그 기분으로 쓰는 글이고, 그러니까, 600원마저 없었으면 이 글도 쓸 수 없었을 거다. 600원짜리 글이다.

돈이 없어서 뼈저리게 느끼는 건데 취향, 문화의 밑바탕에는 돈이 있다. 이걸, 지금처럼 절실하게 느낀 적이 없었던 듯 하다. 이걸 소위 물적조건이라 하던가?

....... 돈이 없는 것이 일상화되면, 보고 싶은 만화도 없어지지 않을까하는 그런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TV와 마찬가지다. 나는 고교 기숙사에서 대학 자취방으로, 7년간 TV가 없는 환경에서 살았다. 그러자 TV를 보고싶은 마음도 전혀 없어진다. 나는 만화를 볼 수 있는 돈 정도는 항상 마련할 수 있었고, 주변 사람들 중에 만화를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사람이 많은, 환경 속에 언제나 있었다. 언제나 누군가가 만화를 빌려왔다. 언제나 누군가와 만화에 대해서 대화하고 토론했다. 나의 만화에 대한 주관은 그런 객관적인 조건 속에서 형성되었다. 하지만 600원도 없다면, 이 글도 쓸 수 없었듯이, 만화에 가까이에 있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자금과 환경 속에 있지 않았다면, 만화에 대해서 무엇인가 쓰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을 아예 가질 수 없었겠지.

자극은 계속해서 가해지지 않으면 사그라든다. 만화를 많이 보아야 보고 싶은 만화도 계속해서 생겨나는 법. 매니아의 깊고 눅눅한 세계도 항상적인 자극 속에서 가능하다. 그리고 적은 양이든 많은 양이든 지속적인 자본의 투여가 필요하다. 오랜만에 만화방에 가서 만화를 보니, 보고싶은 만화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만화라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런 생활이 한 두달 이상 계속된다면 나의 만화보기라는 취미생활, 취미생활 이상의 취미생활은 소멸될 것이고, 이후 인생의 추억의 전당에도 남아있지 않게 되버릴지..... 소위 '매니아'가 되려면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매니아는 일단 중간계층 이상이다. 만화를 열심히 보고, 열심히 보기 위해서 소장하는 것은 일단 경제적 자본의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걸 경제적 자본이 문화적 자본으로 전환된다고 하던가. 만화는 다른 것에 비해서 가치가 떨어지긴 하지만) 어떤 만화비평가는 신간은 거의 다 소장한다는데, 그걸 누군가에게 빌려서 소장할 리는 없는 것이다. 사실 항상 곁에 두고 향유하지 않으면 비평같은 것은 어려울 터, 비평가가 되기 위한 일정이상의 자본투하가 적어도 10년 이상은 필요할 거다. 어떤 음악평론가는 한 달에 100만원을 CD 값으로 때려넣는단다. "때려넣는 돈이 교양이 되고, 그것이 권위가 된다"라는 건 분명 비약이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정말 특별한 인종들처럼 보이니까...... 매니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물론 그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정만으로 돈을 쏟아부으며 자료를 모으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역시 중간계층 이상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다....

나름대로 음악 매니아인 선배의 말. "돈 없음을 열정으로 커버하는 건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돈이 없다는 것이 돈이 없는 만큼 열정이 많다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으므로. 돈이 있는 사람이 열정이 더 높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왜냐하면, 더 많은 문화적 자극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고 더 많은 열정을 가질 기회를 제공받으니까. 그래서, '매니아'가 되기를 포기했다는 선배는 한 번 음반점에 들르면 50만원 어치를 사간다는 음악 매니아의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그것이 자기 자신의 문화적 성채를 튼튼히 하고 타인에게 앞선 정보를 제공하는 희열적인 위치에 오르게 될지는 몰라도, 기초가 탄탄한 문화적 풍성함을 이루는 데에는 얼마나 기여를 하는지? 매니아여, 저주받아라. 록 매니아도, 만화 매니아도 모두! 매니아에 문화적 대안이 있다고 말하는 인간들도. 이 땅에 매니아란 배짱이일 뿐이다. Rolling Stone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이쁜 돌 수집가가 되려고 하는 이들은, 저주받을 일이다.

요즘 잘 나가는 신세대 전문직종이 '문화비평가'이고 그 중 떠오르는 장르가 만화란다. 최신일본만화 몇 개의 발빠른 정보제공만으로도 먹고사는 일이 가능해지니 그럴 수밖에? 거기에서 비평가의 역할이란 '재미있지만 너무 허접하지 않은 작품'을 골라내서 말발로 '교양'의 때깔을 부여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더 많은 정보를 여러 사람과 향유하고, 의미를 공유하는 것과 문화적 소비를 촉진시켜주는 삐끼가 되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그 차이를 구별하려고 하고는 있는지. 새로 나온 만화를 더 많이 보는 싸움은 내 손에 든 600원으로는 따라잡을 수도 없다. 하지만 만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쌈지돈 털어서 누구나 돌아볼 것 없는 싸구려로 치는 만화에 열라 감동하는 사람과, "최근에 나온 이 만화를 보시면 여러분은 만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소위 어떤 비평가들과, 나는 전자일 거라고 생각한다.

싸구려 악기 들고 클럽가에서 자기 돈 들여가면서 공연하고 매일 라면을 끓여먹는 이들도, 쌀 살 돈이 없는데 잉크를 사려고 하는 만화가 지망생들(현역 만화가도)도 얼마든지 많은데,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지만 제대로 있은 적도 없는 만화비평은 어느 새 슬그머니 매니아적 취미비평, 혹은 감상, 혹은 소개로 발병도 안 나고 넘어간다. rock도, 만화도, 이제 꽤 나쁘지 않은 문화자본이 되어가고 있다. 매니아도 늘어가고, 적어도, 이전처럼 천시받지는 않는다. 그것들이 천시받았던 이유는, 적어도 만화는, 쌈지돈 몇 천원만 있으면 너무나도 쉽게 접할 수 있고 문화적 교양이 없이도 쉽게 읽히는, 상류계층이 가진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이 없이도 접근할 수 있는 매체라는 특성 때문이 아니었던가? 아마 만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만화의 내용이면서 만화 그 자체인 속류적인 삶을 사랑한다는, 그것이 우리의 예술이라는 마음을 포함할 것이다......

하지만 유행처럼 잡지 지면들도 꼬박꼬박 만화비평, 소개에 할애되고 비평가도 늘어나고, 그런데 가장 밑바닥에서 문화적인 풍성함을 이루어야 할 뿌리, 진짜 생산자들인 인디는 대접받지 못한다. 아니, 대접이라는 게 모야? 필요한 것은 돈이다. 돈. 자기들이 사서 고생하는데 왜 돈이 필요하느냐고? 돈이 필요하면 대중이 원하는 것(상업적인 것?)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건데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은 최소한 인권에 속하고, 최대한 극락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보조든 올바른 상업적 시스템이든 간에 그런 것들이 필요한 것이다. 타협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원하는 한 되도록 많은 타인과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주머니에 혹시 600원 밖에 없더라도. 계속 상처받으면서도 계속해서 데굴데굴 구르며, 소리치고 외치고 감동하는, 배고파도 구르는 돌들이다. 하지만 자기표현의 인권 혹은 극락도 배가 고프면 지옥이다.

아, 암울하다. 세계는 돈으로 쌓아 올려진 만리장성이다. 그 성의 안에서는 적어도,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다. 아마도 극락을 꿈꾸며 지옥에서 헤메는 사람들은 장성 바깥의 변방에 위치한 오랑캐 쯤 될 거다. 아앗, 정벌하지 말아 줘, 정벌하지 말아달란 말이다. 나는 오늘은 600원 어치만큼 만화를 사랑했다. 내 사랑은 딱 600원 짜리였다. 진짜다. 이 글은 그 600원 짜리의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