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에게 희망을!

안녕하세요? 글쓴이의 신상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코미데올로기 꼭지입니다. 아무튼, 사실 개인 사정으로 당분간 붓을 꺾게 되었죠. 앞으로는 재미있는 주제로 빠짐없이 찾아 뵙도록 하지요.

입시라는 건, 아무리 '자기와의 싸움'이니 뭐니 해도 확실히 곁에 있는 친구 하나하나를 짓밟고 위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지요. 한 번 낙오자는 영원한 낙오자요, 한 때의 승리자도 영원하지는 않다! 그래서 뒤떨어진 사람은 뒤떨어진 대로, 올라선 사람은 올라선 사람대로 끊임없는 긴장과 억눌림 속에서 지내야 하는 것이 수험생활이죠. '트리나 포올러스'란 작가는 한국에 와보기라도 했는지,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어여쁜 그림책에서 이 소름끼치는 진실을 묘사하고 있더군요.

"아무도 설명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그들이 가는 곳이 어디이건 간에
꼭대기로 올라가려고 정신이 없단다."

....
밟고 기어 오르느냐
밟히느냐 그것뿐이었습니다.

똘망똘망하고 초롱초롱한 어린 새싹들도 빠짐없이 이 끔찍한 죽음의 행군에 편입될 것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미래의 우리에게 미리 레퀴엠이라도 바치듯 노래를 불러댔나 봅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아니, '내가 졸고 있는 사이 적들의 책장은 넘어간다'라는 오싹한 격언에서 보듯, '전우'보다는 '적'이 좀더 현실에 근접한 표현일 듯 싶습니다. 이런 수험현실을 밀착 취재한 만화는 '수험의 제왕'(고지 시나사카, 전 4권, 학산문화사)라 할 수 있겠죠. 케이지라는 재수생이 '수험의 제왕'이라는 신비스러운 인물(9수생이면서 대리시험응시자, 각종 금력, 무력, 권력의 소유자)의 지도편달(또는 속임수?)로 고난과 역경의 삼수 끝에 게이오대에 합 격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팁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후의 승리자는 결정적인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자이다. 출제자의 경향을 파악하면, 지
피지기 백전백승이다 (일본은 본고사 비중이 큰가봐요). 절대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 경쟁자에게 좋은 정보를 주면 안 된다. 자신은 포기하고 노는 척 하면서 분위기를 흐리고 몰래 공부한다. 주위에 데마고그(대중선전)를 퍼뜨려 혹세무민하고 자신이 고지를 선점한다......

결국 수험의 제왕은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모든 상황을 조정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결과를 이끌어냅니다. (물론 극 전개상 마지막에서 청출어람의 케이지가 스승을 능가하긴 하지만) 일단 우연이나 비합리성이 개입될 여지가 없이 계산대로 목표 인물의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도구적 이성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 여기에서 말하는 '인간'은 '남자'입니다. 젠장! 이 수험의 제왕은 여성에 대한 악질적인 고정관념을 억지스러움의 극도까지 끌어내지요. 등장하는 여성은 초점없는 큰 눈과 큰 가슴을 가진 '공략의 대상', 승리한 남자에게 주어지는 '전리품'이거나, (감히) 남자와 같은 지적 수준에 도달한 (그래서 더 이상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이라는) 역겹고 우악스러운 '공대뇬'입니다.

만일 이 작품이 단편으로 끝났다면, 수험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희극적 요소를 재치있게 끌어내는 참신한 블랙코미디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입시라는 현실에서 어떤 반성도 희망도 끌어내지 못하고, 현실에 순응한 끔찍한 교훈만 제공해 주기 때문에 읽고 나면 쓴웃음만 나옵니다.

입시 이데올로기는 계몽주의적 인간관에 기반하고 있는 것 같군요. 누구나 동등한 이성을 가지고 출발하고, 그리고 그 이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주어진 3년의 시간 동안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낸 결과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는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 그렇죠? 많이 들어 본 논리이지요?

쩝~ 고대 그리스에서 노예들에게 심어주었던 환상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선, 노예로서 현재 뼈빠지게 일하는 것에 대한 가치부여!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아무튼 근면하고 성실하고 정직하며 순종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믿음직하다는 노예 근성을 가슴 깊이 박아넣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이렇게 열심히 일하다 보면 정말정말정말 아주아주아주 드물게 자유민으로 해방될 수도 있다는 희망! 극도로 노예의 직분에 충실하면 자유민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가지게 해서, 너도나도 자발적인 굴종의 경쟁에 뛰어들게 하는 것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주어진 비참한 처지에 순응시키는 방법은 비슷한가봐요. '학생이니까 공부해야 한다'나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나....

하지만 저런 소리는 순 뻥이에요. 우선, 자유의지고 뭐고, 이런 입시 체제에 낑겨넣어질 것을 우리가 '자유계약'으로 '합의'했나요?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을 선택이라고 그러면서 일단 선택한 거니까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요? 커리큘럼 선택하는 자유라도 있나요? 아니, 적어도 우리가 배우는 그 과목들의 내용이 100% 진리라는 것을 우리가 동의했나요? 그리고 동등한 이성을 가졌다고요? 이성이 동등할지 몰라도 각자 처지가 다르고 가정 형편이 다르고 재능 있는 분야가 다른데 어떻게 같은 잣대로 - 그것도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모든 사람을 평가하겠다는 것인지요? 우리가 선택하지도 합의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은 분류체계에 따라 우리가 고기덩어리 등급 나누듯 나눠지는 것에 우리가 왜 순응해야 하나요? 게다가 2001년 수능같이 변별력이 꽝이어서 실력 아닌 실수가 결과를 결정하게 되는 시험에서 (2차 수능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 본고사로 뒤집기를 시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닌, 바뀐 입시제도 때문에 재수하는 것도 불가능한!)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입은 젊은이들은 어디서 피해를 보상받아야 하나요?

'학생'이니까 공부해야 한다니, 노예로 태어났으니까 시키는 대로 복종해야 한다는 말과 무엇이 틀린가요? '학생'이란 호칭 말고 그 말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있나요?

수험시절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작가가 그려낸 '굿모닝 티처'(연재 시작 당시 작가는 대학교 3학년)에는 이런 고등학생들의 고민이 그려져 있습니다. 범생이의 환타지라고 감히 부르고 싶은 이 만화에는 교과서 같은 대사들이 칸칸마다 넘쳐납니다. 무진장 길고, 주옥 같은 대사들은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고 존재 하나하나를 소중히 감싸려고 하는 작가의 시각을 담고 있죠. 다른 만화에 비해서 인물들의 성격이나 일화가 상당히 사실적인 것도 이 만화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인공(?) 정경희 선생님은 (남)학생들이 바라는 선생님의 이데아를 물화시킨 존재입니다. 매력적인 외모, 밝고 활달한 성격, 출중한 지적 능력, 체력, 그러나 그 능력을 남용하지 않는 사려 깊음, (학생들에게) 친구 같고 연인 같은 모습... 교사 일인당 학생수가 너무 많다는 남한 공교육의 악조건도 이 만화에서는 한 사람의 선생님이 더 많은 학생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축복으로 바뀝니다. 뒤틀려 있거나 꼬인 듯한 인물들도 알고 보면 순박하고 천진하기 이를 데 없고, 그들간의 갈등은 감동적으로 해결됩니다. 고등학교 시절이 빨리 지나쳐버려야 할 괴로운 과도기, 또는 유예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소중한 삶의 부분이라는 메시지가 전체를 관통하고 있지요.

하지만 대학만 잘 가면 모든 것이 순탄하게 해결된다는 고등학생들의 환상을 그대로 반영하듯, 대학 때는 별다른 방황 없이 '자연스럽게' 고등학교 때 꿈꿨던 모습 그대로 폼 나는 어른이 되는 결말이 저에게는 실망을 느끼게 했어요. 결국 주요인물들은 꽤 괜찮은 대학에 진학하고 (서울대 의대, 법대, 사범대, 외대 영어과. '좀 노는구나' 싶던 영열이도 수산대에 가지요.) 당연한 듯이 의사고시, 사법고시,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통과하고 과수석으로 졸업을 하고 그러네요.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방황을 더 많이 하고 진로도 열두 번도 더 바꾸게 되는 사람이 대부분일텐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뽀다구 나는 젊은 시절을 보내기보다는 아주 구질구질하고 징글징글한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결국 이 만화에서 말하고 있는 수험생활의 고뇌는.. 그냥 고립분산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그치고 있네요. 하지만 수험생들에게는 이 만화가 아주 큰 힘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다정다감'(박은아, 대원), '특명! 1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나예리, 대원), '쿨핫'(유시진, 서울문화사) 같은 작품에는 여학생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고등학교 생활이 그려져 있습니다. 입시와 함께 가사 책임, 외모 가꾸기 압력, 마초 남학생/남교사가 가하는 폭력, 조신하고 여자다워야 한다는 간섭 같은 여학생들에게만 가중되는 부당한 억눌림,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을 간간이 찾아볼 수 있네요. 특히 유시진은 섬세한 감수성으로 청소년들을 바라보고 있지요. (유리 도시에 사는 것 같은 인물들과 관념적인 고민들 때문에 불만족스럽기도 하지만...)

과연 우리는, 또는 우리의 아이들은 대책없는 경쟁의 시대를 살아내고 힘없는 꽃 한 송이 한 송이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게 될까요? 그 때까지 살 수 있을까요? 휴... (왜 글쓴이도 모르는 걸 설의법으로 써서 넘어가냐구요? 죄송합니다. --)

그렇다면 이 글을 쓴 사람의 신분은 과연 무엇일까요? 수능 식으로 오지선다 문제를 내겠습니다.
① 불안 속에서 수능 성적표를 기다리고 있는 고3, 또는 재수생
② 초긴장 상태에서 하루하루 보내는 수험생 가족
③ 참교육 실현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전교조 소속 고등학교 선생님
④ 노력하는 학생에게 성적 향상을 보장한다! 엠씨 스퀘어 판매 사원
⑤ 관록의 쪽집게 과외 교사

어허! 이렇게 쓰고 보니 수험생활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알 수 있군요. 물론(?) 스스로 창의력을 키우는 연습을 해야 하므로 답은 알려드리지 않습니다. 다음호 두고보자에서 다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