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한혜연 인터뷰

조용한 만화가, 한혜연
그의 내부에 고여 있는 세계를 엿보고 싶다!

나는 만화가 한혜연을 세 번이나 만났다. 첫 번째 만남은 우연, 두 번째는 인연, 세 번째는 운명이라는데... 내가 운명적인(?) 만남을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여전히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무심한 그대!) 왠지 오기가 생겼다. 이번에는 꼭...!!!

그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강아지 토토(♂), 고양이 미유(♀), 친구와 함께. 마루에 올라서니 동그란 상에 체리, 참외, 천도복숭아, 수박이 예쁘게 차려져 있었고, 저녁을 먹지 않았다고 하자 즉석에서 샌드위치까지 만들어졌다.

풍성한 먹거리 덕분에 화기애애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미리 준비해 간 첫 번째 질문을 교과서처럼 읽으면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토토는 개껌을 가져다 놓고 옆에서 계속 뒹굴거렸고, 미유는 멀찍이서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토토는 혜연님이 미유를 안아주는 것은 신경도 안 쓰는 듯 했지만, 먹을 것을 주면 맹렬하게 질투했다.)

[조용한 만화가, 한혜연]

뭉실: 어떻게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셨는지 궁금해요.
혜연: 취직이 안 되어서요. 여기저기 시험을 쳤지만 다 떨어지고 학점도 개판이고.
뭉실: 직업으로 삼아 보니까 어떠세요?
혜연: 나쁘지 않아요.
뭉실: 만화가 직업이라는 의식이 항상 있으세요? 그냥 좋아서 하시는 거예요?
혜연: 특별히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하다 보면 좋은 일...
뭉실: 데뷔하신 지 오래되시지 않았어요?
혜연: 8년째.

한혜연은 말이 정말 없다. 대부분의 대답이 단어 혹은 단문이다. 하지만 그게 그의 매력이다. 여백이 많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의 집도 여백이 많다. 가구를 최소화하고 공간을 넓게 활용했다. 문득 특이한 모양의 식탁이 눈에 띄었다. 예전에 쓰던 테이블의 상판만 떼어내서 학교용 책상에 붙인 것이라고 한다.

뭉실: 홈페이지 게시판에 왜 글 안 올리세요?
혜연: 할 말이 없어서요. 아, 예... 밖에 없을 테니...
뭉실: 팬레터에 답장도 안 해주세요?
혜연: 예.
뭉실: 말은 잘 안 하시는데, 만화는 청산유수라는 생각이 들어요.
혜연: 친구들도 그래요. 도대체 그렇게 말을 안 하는 인간이 어떻게 이런 만화를 그리느냐? 만화 주인공들의 대사는 어떻게 짜내느냐?
뭉실: 평소에 하고 싶던 말을 하는 건가요?
혜연: 그런 건 아니고... 이 주인공이라면 이런 말을 하겠지...
뭉실: 감정이입은 많이 안 하세요?
혜연: 때로는 감정이입도 할 때도 있죠. 내가 만약 이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말할 테고...
딸기: <금지된 사랑>에서 희성이가 커밍아웃 할 때... 다른 때와 달리 대사가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말을 많이 안 해서 그런 게 아닐까 짐작했죠.

[한혜연의 작품세계]

한혜연은 참 폭이 넓은 작가다. 초기 작품은 "신 사미인곡", "아담과 이브" 등 명랑만화였다. 요즘에는 월간 [화이트]에 "M. 노엘", [나인]에는 "아마존", 웹진 [N4]에는 "Love Biology"을 선보이는 중이다. [화이트] 연재작은 그의 특기(?)인 공포·미스테리물의 계보를 잇는다. 반면, [나인]과 [N4] 연재작들은 '여자'라는 화두를 부각시킨다. 나와 딸기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고 탁월하게 묘사하는 그의 작품세계에 반했다.

{공포·미스테리물}

딸기: "일루전"이나 "M. 노엘"같은 호러물에 엽기적인 장면이 많잖아요...
혜연: 엽기적인가? 하나도 안 엽기적인데...
딸기: 독자가 보기엔 엽기인데, 그 안의 인물들은 굉장히 조용하고 합리적이고 침착하게 대처하면서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표정들을 짓고 있어서... 처음에는 이 사람은 침착한 얼굴밖에 못 그리나(웃음) 라고 생각을 했는데...
혜연: 내가 침착해서 그런가?
딸기: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인 양 나와서 굉장히 특이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왜 그런가요?
혜연: 이유가 없어요.
딸기: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혜연: 별 일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딸기: "일루전"을 학교에서 실험하실 때 구상하셨다고 어디선가 봤는데...?
혜연: 그냥 수업할 때 잠시 딴 생각을...
딸기: 아니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셨단 말이에요?
혜연: 잡히는 살인자들이라는 것이 도대체 머리들이 너무 나빠서... 도대체 이러니 당연히 잡히지 내지는... 긁적긁적...
딸기: 역시 천재!
뭉실: 추리물이지만, 형사의 치밀한 추리물보다는 범인의 스토리에 더 관심이 가던데요?
혜연: 제 생각은 실제로 잡히는 살인자보다는 잡히지 않고 그냥 묻혀진 살인자가 많을 거라고 생각을 하니까...

딸기: 호러랑 [나인]에서 연재하시는 것들이 별개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욕망'에 충실한 것이 아닐까? 욕망들 중에 10대 소녀들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연애나 로맨스 그런 거 말고... 숨기고 있던 욕망, 자기가 잘 알아채지 못했던 욕망들... 그런 게 많잖아요? 나에게도 있는 욕망인데, 그 욕망이라는 게 인지하지 못했을 땐, 좋은 남자 만나서 잘 살겠다는 욕망이라던가, 뭔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그러다가 또 훌륭한 남자를 만나겠지? 하여튼 천편일률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다른 어떤 행동을 보였을 때, 이러면 안돼... 자기를 돌아보게 되더라구요. 네? 전혀 관심이 없으시다구요? (웃음)

{후루츠 칵테일}

뭉실: '딸기 빙수'에서 감시인 얘기는 어떻게 구상하신 거예요?
혜연: 아트박스나 그런 데 가면 감시인이 참 불편하거든요. 특히 내가 큰 쇼핑백을 들었을 때라던가... 괜히 옆에 와서 주섬주섬 하고... 참 불편한 감정을 많이 느꼈는데... 저 사람들의 평소의 삶은 어떨까?

뭉실: '토마토 쥬스'는 젠더 문제인가요?
혜연: 그냥...
딸기: 맞아! 남동생 있으시죠? 혹시 남동생이 이거 보고 뭐라고 얘기 안 해요?
혜연: 남동생이 봤을까? 이게 나오게 된 계기는 남동생의 행동이 약간 수상하다고 느껴져서 일단은 생각했었는데... 과연 나는 내 남동생이 저렇게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남동생 치장 시켜준 경험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거든요. 가발 씌우고 옷 입혀서 사진 찍어주고...
딸기: 저는 남동생이랑 단 둘인데도 그렇게 해준 적 있어요.
혜연: 아들인 척 하는 딸이었는데... 막내 동생은 너무나 나이가 어려서... 기왓장 깨지면 올라가서 기왓장 고치기, 전기제품 수리하기, 장독대 놓기 내지는 기타 등등...

뭉실: '복숭아 샤베트'에서요, 맨 마지막에 그 여자가 결국에는 도망가잖아요. 다른 작품들이 현실적인 것에 비해 유난히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던데...
딸기: 아니, 왜 이렇게 잘 끝났지? 이랬는데...
혜연: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지도 어쩌면 모르는데... 당장 어디 가서 무엇을 먹고 살 것이며...
뭉실: 그 남자랑 결혼을 못한 이유는 그 남자가 가진 게 없기 때문이에요?
혜연: 그것은 여자였는데...
뭉실: 어, 여자였어요? 같이 도망간 애가?
혜연: 너무나 좀 미약하게 표현이 되었나...
딸기: 같이 여자 화장실 들어가서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
뭉실: 하지만 옷 벗고 누워 있어서 나는 당연히 남자인 줄 알았어.
딸기: 왜? 여자도 같이 옷 벗고 누워 있을 수 있어.
뭉실: 그럼 이 사람들도 여자인가요?
혜연: 여자인데요. 명확하게 가슴이 있는데...
뭉실: 뭐야, 나는 왜 몰랐지? 이것도 여자예요, 그러면?
혜연: 네. 바로 옆에 보면 누워 있는데... 가슴이 있을 텐데?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이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확인하느라 소동을 피웠다. 작가가 의도적으로(심의를 피하기 위해서?) 성별을 모호하게 처리한 것인지, 아님 이성관계건 동성관계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구분하지 않은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Love Biology}

딸기: 기획은 어떻게 하시게 된 거예요?
혜연: 그 전부터 생각은 했었고, [N4]에서 20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만화를 청탁했는데 대충 맞을 것 같아서.
뭉실: 첫 장면부터 베드신이 나와서 이건 순정만화의 쾌거라고 생각했어요.
딸기: 저는 엘리베이터 자위신이 최고였어요. 어떻게 생각해내신 거예요? 굉장히 쇼킹한데... 엘리베이터 세워놓고 하는 키스랄지 애무랄지 그 정도가 대부분 아닌가요?
혜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렸는데요. 그냥 그 주인공의 상황에서, 내가 그 상황에서라면 그렇게 했겠다 싶으면... 그리는 거죠.

뭉실: 최근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임신한 걸 알게 되자 아주 무덤덤하게 지우러 가잖아요? 보통 여자라면 괴로워하고 고민하지 않나요?
혜연: 약간 그런 건 있죠. 그 다음에 조금 나오게 될 거고... 내가 그 상황이라도 나는 그냥 그렇게 할 것 같으니까...

[한혜연의 작품세계에 대한 덧붙임]

뭉실: 여자와 여자간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나요? "후루츠 칵테일"도 그렇고, "금지된 사랑"이나 모두 동성관계에 대한 것인데...
혜연: 그런 건 없는데, 남녀간의 관계를 그린 건 내가 아니더라도 많이 있는 거고, 특별히 그리고 싶은 생각도 없고...
뭉실: 한혜연님 작품은 레즈비어니즘과 우정 사이의 줄타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딱히 동성애물을 표방하는 건 아니고... 미묘하게...
혜연: 그냥 여성들의 관계에 대한 한 단면을 그리는 거예요.

뭉실: 작품에 20대 중반의 여자들이 많이 나오던데...?
혜연: 왠지 그 시기가 제일 복잡다단한 것 같아요. 지금은 복잡할 게 뭐 있나요?
뭉실: 여자 등장인물의 머리형이나 옷을 보면 굉장히 현실적이거든요? 실제로 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그대로던데, 비결이 뭔가요?
혜연: 번화가 나갔을 적에 관찰을 많이 해요. 머리 장신구들에 대한 약간의 강박증이 있어서... 희안한 머리 모양을 한 여자가 있으면 도대체 저 머리는 어떻게 한 것일까 유심히 보고, 새로운 머리핀, 집게 기타 등등이 나오면 그 때 그 때 저건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뭉실: 사랑했던 과거를 추억할 때 꼭 베드신이 나오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혜연: 그런 게 제일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요.
뭉실: 혜연님 만화에서는 사랑과 성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요. 대개 순정만화에서는 사랑을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로맨스로 포장하던데...
혜연: 그런 거 전혀 못 느끼고 있었는데...

[한혜연과 여자친구들]

뭉실: 여중, 여고, 여대를 나오셨죠?
혜연: 네.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남녀 반을 갈랐어요.
뭉실: 여자만 있는 생활에 불만 없으세요?
혜연: 없는데요.
뭉실: 여자친구가 많으세요?
혜연: 네. 여자친구들이 좋아요.
뭉실: 아직도 여자친구가 좋으세요? 이젠 만나기 힘들지 않나요?
혜연: 사실은 내 친구들이라는 것이 저 친구(동거인)의 친구들이고... 주로 이 집에서 모이고 그러다 보니 나도 함께 있는 거고... 정작 자주 만나는 내 친구는 하나도 없지만...
뭉실: 잘 맞으시나 봐요?
혜연: 네
뭉실: 그래서 작품에도 우연히 만나는 사이가 많나요? 계속 친하게 지낸 사이보다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거나 서로 모르는 사람을 만나게 하시잖아요?
혜연: 어차피 모든 관계라는 게, 지금 친구라고 말하는 것도, 우연히 같은 반이 되었기 때문에 만나거나, 같은 과라서 만나게 된 사람을 친구라고 여기거나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그냥 우연히 만나게 되더라도 그냥 서로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거죠.
뭉실: '코팅 오렌지'의 두 사람도 친구로 지내게 되는 건가요?
혜연: 그럴 것 같은데요. (웃음)

뭉실: 그런 식으로 우연한 만남으로 친구가 된 적 있으세요?
혜연: 네. 종종 있어요. 그냥 어떤 모임 같은 데서 말이 잘 통하고 그러면...
뭉실: 그게 계속 이어지나요?
혜연: 이어진다고 해야 할 지는 모르겠는데, 1년에 한 두 번씩은 만나요.
뭉실: 사람 사귀는 거 좋아하세요?
혜연: 내 자신은 사람을 사귀는 걸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꼽사리 끼어서 가만 앉아 있는 건 좋아해요. 별명이 '꿔다 논 보릿자루'...
딸기: 얘기도 안 하면서 가만히 앉아 계시는 거예요? 떠들썩한 분위기 좋아하시구요?
혜연: 네. 그냥 가만있는 것도 좋아해요.

아, 힘들다. 드디어 인터뷰가 끝났다. 나와 딸기는 말없는 그에게서 한 마디라도 더 뽑아내려고 온갖 신경을 기울였더니 완전히 뻗어버렸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미친 듯이 졸았고,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몇 일간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인터뷰 쓰는 게 이렇게 늦어진 것인가? ^^;) 한 번의 인터뷰에 기를 다 소진한 것 같다.

하지만, 그를 다시 만날 기회가 온다면 나는 또 달려갈 것이다. 그는 그만큼 매력적이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신뢰가 간다. 만화가는 만화로 보여주면 족하다. ("내 만화는 ∼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왜 모르는 거냐?"라고 외치는 사람은 약장수 같다.) 바로 지금, 조용한 그의 내부에 고여 있는 세계를 엿보고 싶어진다.

감동의 물결, 다과상

혜연님의 동거견 토토

혜연님의 동거묘 미유

인터뷰하는 한혜연님

신사미인곡 앞표지

또하나의 환상 앞표지

M.노엘 1권 앞표지

후루츠 칵테일 앞표지

후루츠 칵테일 뒷표지

Love Biology 베드신

Love Biology 자위신

금지된 사랑 1 앞표지

금지된 사랑 1 뒷표지

금지된 사랑 2 앞표지

금지된 사랑 2 뒷표지

미유와 함께 포즈

사인하는 한혜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