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에서 프린세스 안나로 : 변병준론 

 

 유아/미숙/권위/상투적인 깜악귀가 다른 데다 실으려다가 빠꾸된 글

 

                    

 

내가 변병준을 처음 만난 것은 97년 초반, 만화잡지 영챔프에 실린 <고맙다! 변비요정>이라는 단편을 통해서였다. 이 단편은 상당히 독특하고 재미있었다. 무엇보다도 과장되었으면서도 리얼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클로즈업하는 연출을 대단히 과감하게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나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의 만화에 대한 사고는 나를 얼마나 웃기는가, 나를 얼마나 감동시키는가, 나를 얼마나 긴장하게 만든는가 등이 전부였으니 감상이라 해봐야 "웃겼다" 정도일까. 더구나 장편도 아닌 단편이었으니 그렇게 그냥 잊고 지나갔었다.  

 

나중에 만화웹진'두고보자'모임에서 나를 가리켜 변병준의 단편집 <첫사랑>에 나오는 캐릭터와 닮았다는 말이 나오는 바람에 만화방에서 <첫사랑>을 찾아 펼쳐들었다. 그리고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고맙다! 변비요정>이 바로 변병준의 것이었음을 알았다. 그 당시에는 영챔프에 화면 자체에서 무서운 리얼리즘적 귀기가 흐르는 변병준의 장편, <프린세스 안나>가 연재되고 있었고 만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이 사람 저 사람의 눈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더구나 얼마 후에 <프린세스 안나>의 단행본이 나오자 변병준은 단번에 몇 손가락 내에 꼽히는 차세대 '작가'의 지위로 오르게 되었다. 한국만화의 기념이 될만한 희귀종이 또 하나 탄생했음을 공인받은 것이다.  

 

민중만화는 패배 혹은 승리 그 어느 쪽도 아닌 ‘역사적으로 해소’된 흐름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80년대 후반에 등장한 이희재의 <간판스타>나 오세영의 <부자의 그림일기> 같은 걸작을 기억하지만 그것은 현재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90년대 들어서 시대적인 역동성과 생명력을 가진 민중만화, 혹은 리얼리즘 만화를 가지지 못했다. 소년만화는 격투물이 아니면 연애물, 개그물로 요약되고, 성인(남자)만화 역시 도박이 아니면 킬러, 무협이 아니면 성애물이었을 뿐이다.  

 

상업화된 대중예술로서 만화는 작가가 작품을 만든다기 보다는 장르가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이 다시 장르를 강화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현실의 반영과 현실에 대한 주장은 단지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채 자신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정도’만이 용인되며 오직 어느 정도 장르관습에 따를 것인가, 혹은 얼마나 변용시킬 것인가의 미세조정만이 출판사에 의해서 작가적 역량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니 소위 작가주의적인 만화가의 행보가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셈이다. 거의 도인 가까이 되지 않고서는.  

 

변병준의 단편집 <첫사랑>에 수록된 단편들을 시간적으로 배열해서 읽어보면 한 작가가 상업적인 관습과의 타협 속에서 자신의 특성들을 어떻게 구제해내는가를 함께 체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만화평론가 이재현이 지적하는 대로 그의 캐릭터 및 작화들은 현실과 매우 닮아있다. 보통은 작화가 현실적이면 설정이 환타지이거나 SF, 혹은 역사물이고, 설정이 일상적이고 현재의 공간이라면 작화는 모다 과감한 생략과 과장을 거치는 만화체에 가깝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현실과 가상의 균형이 독자로 하여금 만화의 대중적인 쾌감을 이끌어내기 쉽게 하기 때문이다.  

 

변병준의 <첫사랑>의 작품들은 신기하게도 작화가 매우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설정 역시 일상적이다. 캐릭터들은 실제 한국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작품 내의 사건 역시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의 범주를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이 자체만으로도 주류에서 몇 발자국 벗어나 있었던 셈이다. 그대로라면 상업적인 보장이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그의 스타일은 장르를 개그물로 한정하면서 캐릭터들의 리얼하면서도 과장된 표정들로, 캐릭터들의 감정의 기복을 과장을 통해 표현하는 이러한 방식에 만화의 재미를 의존한다. 그리하여 개그물로 분류가 가능한 단편들이 영지 계열의 상업지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게 된다.  

 

이재현은 변병준을 일컬어 리얼리즘 스타일과 개그의 만남으로서 리얼리즘 만화에 새로운 감수성과 상상력을 부여하고 있다고 평했다. 내 생각에, 작가의 일상적인 사건배경설정, 효과적인 연출, 리얼한 작화를 동반하는 표현방식 등은 그의 역량과 의도를 웅변하고 있지만 사실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들의 완성도가 그렇게 뛰어나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보통 자신의 작가적 스타일에 맞는 내용을 담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95년의 ‘투웬티 세븐 신인만화대상’ 수상작인 <어느 여름날의 코미디>는 어느 여름날에 만나 자신을 유혹하는 한 여성의 팬티에 새겨진 ‘ADIDAS'라는 글자를 천이 접히는 바람에 ’AIDS'라고 잘못 읽은 주인공의 슬랩스틱 개그이며 돌발적인 캐릭터에 돌발적인 상황연출에 그친다. 이은누라는 사람이 글을 쓴 <겨울여행>(투엔티세븐, 96년 7호) 역시, “어릴 적에 결혼을 약속한 못생긴 여자애가 온다길래 도망쳤는데 알고보니 대단한 미인이 되어 있더라”는 어느 정도 에피소드의 재미에 의존하여 단편적 완성도는 떨어진다. <요리사의 사랑>(투엔티세븐, 96년 13호)은 돌발적인 상황에 더하여 내용전개의 재미와 극적 완성도가 보다 보완된 편이다. 그러나 아직 ‘뛰어나다’라고 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완성도라는 애매한 개념을 쓰기 보다는 개그적 상황의 상투성이 종종 눈에 밟히는 것이 변병준의 개그단편들에 공통되는 마이너스 요인이다. 모두 알다시피 소년만화, 영지 계열의 남성만화의 상투성이란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몇 가지 포맷을 계속해서 관습적으로 우려먹는 경우가 많다. 여성 캐릭터의 가슴이 사건에 대한 개연성 없이 억지로 노출된다든가 하는 등등. 이 때까지 변병준은 리얼리즘적인 스타일의 독특성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개그물로서의 재미를 종종 여기에 의존시켰다. 여타의 작품들에 비하면 그 정도가 덜한 편이긴 하지만 이러한 상투적인 장면연출에 의존하면 작품의 질적 저하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변병준의 작품세계가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은 <재남리의 첫사랑>(투웬티 세븐 96년 18호)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농촌에 사진을 찍으러 간 사진작가가 그곳에 사는 한 부모없는 아이와 농촌처녀에게 반해서 그곳에 눌러살게 되는 과정을 서정적이고 코믹하게 전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과잉된 성적 시선’에 재미를 의존하는 굴레에서 탈피했다. 바로 전작인 <요리사의 사랑>에서부터 변병준은 개그물의 범주를 탈피하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에서 보다 본격적이다. 코믹하기는 하지만 개그물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이 작품은 드디어 본격적으로 ‘리얼리즘 만화에 새로운 감수성과 상상력을 부여한 형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변병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사진을 찍는 듯한 연출법이 아예 사진작가인 주인공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변병준의 이러한 연출은 이후로 단편의 말미에에 제시되어 단 한 장면의 정지화면으로 단편의 전체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대단한 효과를 발휘하곤 한다. (영화적인 연출이 주가 되는 최근의 조류에서 변병준의 스타일은 눈여겨 볼만한 것이다)   

 

 

이후 단편집에 수록된 <싸나이가 울다>(투웬티 세븐 96년 24호)에서 변병준은 비타민제로 자살을 연습하는 월부책 판매원을 그리며 그의 개그물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 중의 하나였던 ‘캐릭터들의 과장된 활짝 웃는 표정’을 버린다. 이 작품은 변병준의 변화과정을 구분하는 또 하나의 획이다. 개그적인 요소로부터의 완전한 탈피하고 정적인 내면묘사로 작품이 이끌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도 그가 삶의 암울함으로 인해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인간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인간의 얼굴, 그리고 감성은 이후 <프린세스 안나>의 핵심적인 스타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원래 작가적인 만화세계가 상업적 압력에 의해 눌려있다가 점점 자기입지를 확보하면서 드러낼 수 있게 된 결과일까, 아니면 이러한 변화과정 그 자체가 변병준의 변화과정 그 자체일까? 아마도 전자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되긴 하지만 그의 세계가 성숙한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후로 <스트리킹>(투웬티 세븐, 97년 4호)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요소들이 다시 등장하는 등 동의하기 어려운 작품이긴 하지만, 개그물인 <고맙다! 변비요정>(영챔프, 97년 17호)은 확실히 상투성에 의존하지 않고 연출의 묘로 승부한 뛰어난 신선한 개그물이다.    

 

 

 

 

그리고 97년 동아-LG 국제만화페스티벌의 수상작이며 이 단편집에서 최고의 걸작인 <어느 섬마을 이야기>가 창작되었다. 이 단편은 도저히 장려상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완성도를 보여준다. 시집 간 딸을 보고 싶어하는 농촌 할머니의 마음을 단 16p로 그려내었으면서 그 안에 서정과 코믹한 재미, 진지함까지 하나로 융화되어 있다. 만화적인 생략과 리얼리즘적인 묘사가 조화를 이루며 여유와 긴장을 사이에 균형을 이루고 있도 이 작품의 미덕이다. 수작의 반열에 놓일만한 <재남리의 첫사랑>을 뛰어넘는 걸작으로 이 젊은 작가의 감성이 충분히 리얼리즘의, 아니 예술적인 깊이를 가지고 있음을 입증한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가장 마지막의 작품인 <서피스타>(투웬티 세븐 98년 1호)는 캐릭터의 분위기나 각각의 장면들이 마치 <프린세스 안나>의 예비작인 듯이 보인다. 이것은 <프린세스 안나>가 단지 소설을 만화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소설의 내용을 차용한 것이라는 점에 대한 근거가 되어준다.    

 

                               (위쪽) 프린세스 안나

   (왼쪽) 서피스타

 

<프린세스 안나>는 변병준이 그간의 작품에서 이루어낸 성과들이 모여서 본격적으로 발휘된 작품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림을 얼핏 봐서는 과연 <첫사랑>과 같은 작가의 작품인가를 의심할 정도이다. 이러한 놀라움은 일단 유래를 볼 수 없을 만큼 정밀묘사의 치열함을 보여주는 작화에 의한 것이다. 캐릭터의 얼굴에 있어서 생략적인 만화체의 여운이 남아서 독자의 감정이입이 배려되지만 털옷의 보풀 하나하나까지 묘사하는 그의 묘사는 보는 이를 압도한다. 여기에 금방이라고 ‘찰칵’하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연출은 보다 전면적이지만 보다 잠재적으로 작품 전체에 깔려있다. 리얼리즘 계열의 사진작품을 보는 듯한 정적인 압축미는 감성에 따라 배치된다. 

 

<싸나이가 울다>에서 선보인 ‘현실의 암울함, 죽음의 충동에 지배되는 삶’이라는 감성도 배수아의 소설에 힘입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배수아의 소설과 변병준의 만남은 상당히 유니크한 효과를 자아낸다. ‘현실의 암울함에 대한 묘사와 삶의 의욕상실’이라는 점에서 이 둘은 같은 지점을 공유하고 있지만 환상적이고 감성적인 배수아의 소녀적 취향은 사실 순정만화의 표현법에 보다 더 어울리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변병준이 배수아의 ‘말’을 빌어 창작한 만화 <프린세스 안나>는 암울하고 환상적인, 동화적인 감성과 리얼리즘적인 치열함을 간직한 정밀묘사 사이의 갭이 그 자체로 더 유니크한 효과를 자아낸다. 변병준의 작업은 배수아의 언어에 현실적 개연성을 부여하면서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이끌어간다. 배수아의 ‘프린세스 안나’는 암울한 현실에 의해 파생된 죽음의 충동을 동화적인 환상으로 치장하며 보듬어 안는 캐릭터이다. 변병준의 ‘프린세스 안나’는 암울한 현실에 의해 파생된 죽음의 충동을 안나의 눈으로 압축적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증오’라는 이름이 어울릴만한 것이다.

 

    

 

코믹하면서도 서정적인 세계로부터 증오의 감성으로 이동하면서 자신의 작가적 역량을 마음껏 펼쳐보인 <프린세스 안나>는 사실 이런 작품이 영지에 연재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을 그리는 작가가 있다 하더라도 한국사회는 그것이 대중적 생명력을 가지고 유통될 수 있도록 기획해서 출판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부재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감성과 환상, 그리고 리얼리즘적 작법이 어우러진 만화가 우리 앞에 던져진 것이다. 일본에 유학하며 그곳에서 간간이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는 변병준의 앞으로의 작품을 굳이 민중만화의 계열에 위치시킬 이유는 아마 없을 것이다. 민중만화들은 그 당시에나 그 이후에나 그다지 본받을 만한 양식들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희재나 오세영은 사실 예외에 속하는 작가들이다. 변병준은 이전의 영향 속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하나의 흐름을 독자적으로 일구어내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그의 행보를 주목해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