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capcold

 

 

 

 

음지의 만화 (5) 유사정식판본

 - 1500원 시대의 전략: 유사정식판본

  500원짜리 단행본들이 이 좁은 한국시장에서는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페이퍼백(염가, 조악한 인쇄품질과 더불어, 두 번 읽으면 제본이 떨어져 나가는 막강한 제본으로 인하여 '소모성' 서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장을 나름대로 만들어나가고 있을 때, 서울문화사의 1500원짜리 '정식 라이센스' 드래곤볼이 발간되었다. 당시의 기준으로는 상당히 고품질의 인쇄상태(사실,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의 그림체의 영향이 컸다), 당대 유행어 등을 적절히 배치시킨 나름대로 신경쓴 번역 등 , 소장하고 싶은 욕구를 확실히 자극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써 담배갑 크기보다 작았던 500원짜리 해적판과 확실한 차별화를 할 수 있는 '정상적인' 판형의 등장으로 인하여 해적판과 '정식 소장용' 판본의 이원화가 이루어지는 듯한 희망이 잠시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오히려 이러한 판형의 이원화를 역이용하는 사례들이 등장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1500원짜리 '소장용 판형' 해적판의 등장이다. 이들이 모델로 삼고 있었던 것은 다이나믹 콩콩 계열의 만화책도, 이전의 한국 만화 단행본 형식도 아닌, '드래곤볼'을 필두로 본격화된 '아이큐 점프 코믹스' 단행본이었다. 1500원짜리 판본들과 같은 판형에, 같은 가격 그리고 비슷한 편집 포맷을 지닌 일련의 만화책들이 '정식 라이센스' 단행본들과 대등하게 서가에 비치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500원짜리 해적판은 크기나 모양, 펼쳐보면 드러나는 품질 자체에서 확연한 차이가 났지만 1500원짜리 해적판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 1500원 해적판들은 종이의 질, 인쇄품질, 1겹표지 사용 등 실제 품질에 있어서는 '정식 판본'들에 못미쳤으나(그렇다고 해서 결코 정식 판본이 절대적인 기준에서도 품질이 우수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것들은 대다수의 독자들의 독서에 큰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판형확대와 비교적 충실해진 번역 하나만으로도 많은 '일반'독자들은 기꺼이 속아넘어갈 준비가 되어있다. 무엇보다도, 이미 드래곤볼의 성공과 500원 판본의 대대적인 보급으로 인하여 일본만화에 대한 수요는 이미 확실하게 생겨나 있었고, 해적판 업계에서도 조금이라도 수익성이 더 높은, 즉 마진이 더 크고 판매가 될 만한 방식의 제품을 공급해주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 셈이었다.

  이들의 중심 전략 가운데 하나는 바로 정식 라이센스 판본과의 차이를 없애고, 스스로 정식임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첫 번째로 한 일은 500원 판본과는 차별화된, 그림에 대한 검열/수정의 완화였다. 먹칠은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웬만한 묘사는 아주 노골적이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상상 가능할 정도까지 보존되었다. 사례로 설명하자면, 드래곤볼에서 거의 처음으로 선보인 청소년 만화에서의 여성 유두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에 대해서 500원짜리에서는 먹칠'옷'으로 가린다면, 1500원 해적판에서는 그대로 묘사하거나 혹은 효과음으로 살짝 가리기를 선보였다는 것이다. 물론 출판사와 발간 시기에 따라서 삭제와 수정의 정도차이는 편차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500원 판본보다 느슨했다는 것은 사실이다(물론 500원 판본에서도 예외적인 경우는 있었다; 일례로 란마 1/2 의 초기 해적판 가운데 하나인 500원짜리 '람마 1/2'(90년 발간)의 경우, 1-4권까지는 어째서인지 아예 무삭제로 가는 '만용'을 부린 적도 있다).

  두 번째로 한 일은 저작권 보호 문구를 새겨넣는 일이었다. '본 도서는 일본 **출판사와 정식 라이센스를 맺었으며, 내용 일부 혹은 전체를 복제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류의 경고문이 책 앞 혹은 뒤에 보란 듯이 새겨져 있는 것은 기본이었다. 하지만 한 술 더떠서, 자신들의 '합법성'을 설파하기 위해서 유령단체를 만들어서 그 이름을 내거는 일까지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1500원 해적판의 초창기 선구자 가운데 하나인 '한일만화연구회'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들의 경우 이 이름 하에 '그림터'라는 출판사를 표방하고 '킹 코믹스'라는 출판 라인을 두는 등 뛰어난 위장술을 발휘했다.

  세 번째는 나름대로의 적극적인 판매/홍보 전략 실행이었다. '동경대 최우수 도서 선정' 등의 자극적인 홍보문구(물론 진위 확인 따위는 관심사도 아니었지만)는 비디오 시장의 그것을 연상시켰으며, 각 동네 서점에 대한 적극적인 유통 노력을 통해서 해적판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너무나 '정상적으로' 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고야 말았던 것이다. 500원 해적판의 경우 '불량스러워' 보이는 외견 때문에 소형 서점과 문방구 위주로 유통되었지만, 1500원 판본은 버젓이 만화를 다루는 모든 규모의 서점에서 거래가 되었다.

  위의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1500원 해적판은 많은 경우 정식 라이센스와 거의 대등한 위치에서 거래되었다. 초창기 이들의 주요 레퍼토리는 80년대 중후반을 풍미한 일본의 초히트작들이었다. 이 중에서도 그림터의 '북두신권'과 '시티헌터'는 '드래곤볼'보다는 사뭇 수용자층이 좁지만, 그에 못지 않은 인지도를 자랑했다. '켄시로'와 '사에바 료'를 '라이거'와 '우수한'으로 알고 있는 것은 마치 드래곤볼의 주인공 '손고쿠'를 '손오공'로 알고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 레퍼토리들은 500원판, 혹은 '구호'로 대표되는 대본소용 해적판까지 이미 기출시된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다양한 '가지치기'를 시도했다. 이를 위해서 주로 500원 판본과 마찬가지로 동일 작가의 다른 작품('시티헌터' 작가의 전작인 '캐츠 아이' 등)을 발간 시도하거나, 유사 장르의 다른 작품들을 출간해보는 방식('북두의 권' 스타일의 격투물인 '사이버 블루' 등)을 취했다.

  하지만 물론 기본은 여전히 일본에서 대히트한 작품들 위주로 들여오는 것이었는데, 성공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예상외의 실패도 여러차례 있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미츠루 아다치의 '터치'를 그림터에서 발간했던 것인데, 아직 다양한 일본만화의 문법에 충분히 익숙해지지 않았으며, 또한 일본만화에 대한 왜곡된 기대감(특히 성적, 폭력적 묘사에 대한)을 품은 일반 독자들의 감수성에 파고드는 것에 처절하게 실패, 단 몇 권만을 발간하고 시리즈를 접었다. 사실 '이 만화를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의 만화수준은 높습니다' 라는 식의 광고문구를 삽입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발행인 자신도 그다지 아다치 미츠루 식의 감수성에 상당히 낯설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집중적인 일본만화 홍수에 빠져든 3년 후에 동일 작가의 H2가 들어와서 성공을 거두었고, '터치'는 H1 이라는 상당히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제목으로 재발간되어 덩달아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얄궂게도'(?) 이때 그림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여하튼 많은 작품들은 인기가 부족하거나 일본의 진도를 곧바로 따라잡음으로써 시리즈 발행 자체가 중단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다행히도 500원 판본에서 성행했던, 1,2회 분량만 모아놓고 뒤에 다른 만화를 끼워넣음으로써 단행본 분량을 채워서 파는 극악한 상술은 1500원 판본에서는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즉, 아무리 못해도 4-5회 분량정도까지는 채워주었다는 것이다) 인기부족에 대해서만큼은 냉정하리만큼 가차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완결편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괄구입하기도 여의치 않았던 것은 역시 해적판이기 때문에 '재판 발행'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여담이지만, 2001년 현재 여러 대형 만화출판사들의 출간/유통 형태는 여러모로 이 당시의 해적판 만화출판사에 비견될 수 있을 만큼 부실하다).

  1500원 해적판의 폐해 중 첫 번째는 역시 정식 라이센스와 해적판의 외견상 구분을 대단히 모호하게 함으로써 정식 라이센스 업자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물론 정식 라이센스되어서 들어오는 작품은 90년대 초반 당시에는 대단히 한정되어 있었고(곧바로 단행본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사의 잡지연재를 거친 것을 묶어서 내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충돌의 지점이 되는 작품들은 매우 숫적인 측면에서는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드래곤볼'이라는 막강한 히트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권리 요구의 목소리는 커질 수 밖에 없었고, 서울문화사는 지속적으로 '정식 판본' 캠페인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고 라이센스 업체들의 단속요청들이 씨앗이 되어 93년에 대대적인 해적판 단속이 실시되었다(유감스럽게도 만화에 있어서 최대의 비극은, 이런 일이 발생할 때 만화 전체의 이미지가 같이 나빠져버린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1500원 판본 시장이 500원 판본 시장을 완전히 흡수해버렸다는 것에 있다. 물론 500원 판본이라는 초저가 페이퍼백 시장이 한국이라는 좁은 시장에서는 정상적인 수익성을 기대하기 힘든 형식이라는 것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파악 가능한 일이지만, 500원 시장의 소멸과 함께 소모성 페이퍼백에 대한 실험이 현재까지도 완전히 중단되다시피 했다. 다양한 판본과 가능성들의 실험보다는, 단일화된 (그나마 일본의 모델을 그대로 수용해서 이미 한국시장에 대해서는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었던) 형식의 상품규격과 소비형태를 주류에서 고착화시켰다.

  세 번째는 2001년 현재 더욱 큰 문제로 번져버린 과도한 종수 발행의 단초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일본 작품들을 한꺼번에 많이 수용해오는 것과 더불어, 단일 시리즈를 원작보다 훨씬 많은 권수로 만들어내는 상술까지 겹쳐서 시중에 발간되는 다양한 만화책을 계속 사보는 일이 한층 어려워졌다. 능력이 되는 만큼만 사보면 될 것 아닌가, 라는 타당한 주장과는 달리, 시중에 나와있고 보고 싶으나 돈이 부족한 경우들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늘어난 대여 수요로 치환되었고, 1500원 판본들은 이전의 500원 판본들과는 달리 실제로 대본소, 책 대여점 등에 비치하기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서 검증된 초창기 히트작들이 한국에서도 히트를 치자, 만화가 여러 책 대여점에서 점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아예 후에 만화대여점이라는 형식으로 업종전환을 하게 되었다(물론 1500원짜리 판본의 등장과 히트만으로 이런 일들이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기존 만화 출판사들이 이것을 유통왜곡으로 규정하고 저항하기보다는 같이 편승해서 단행본 종수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해적판과 라이센스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500원 판본이 소멸함에 따라서, 둘 사이의 가격차이 또한 사라졌다. 몇몇 해적판 업체들의 경우 정식으로 출판 관련 기구에 납본을 하는 등 아예 합법적인 활동을 벌이기까지 할 정도로 구분은 모호해졌다(저작권 단속은 친고죄이기 때문에, 해당 라이센스 홀더 - 여기서는 일본 출판사 -가 직접 움직이지 않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단속할 수 없다). 결국 이런 방식의 '유사정식판본'은 해적판이 거의 소멸한 현재까지도 꾸준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또다른 유사정식판본

  사실, 해적판은 일본 만화에 대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중에 이야기가 나올 서구만화를 이야기하자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한국작가의 것이라 할지라도 해적판은 버젓이 만들어진다. 적어도 해적판의 정의에 '저작권자인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무단으로 찍어 상업적으로 판매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런 방식의 불법출판물들이 정식 계약 판본들과 외관상, 혹은 실질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그것도 충분한 해적판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작가 작품의 해적판의 경우, 해외 만화의 해적판과는 달리 노골적인 불법 제작 및 유통의 문제라기보다는 허울 좋은 '정식' 출판사가 작가의 의향을 묻지 않고, 인세를 정당하게 지급하지 않는, 한마디로 '사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식으로 문서화되어 체결된 계약서로 각자의 권리들과 거래관계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면 창작물에 대한 권리는 창작자에게 있고, 권리를 일부 위임받지 않은 상태에서 제작 유통한 모든 책들은 '해적판'이다. 하지만 이런 원론적인 차원까지 들어가지 않더라도, '대화출판사' 등의 극명한 사례들이 있다. 이곳에서는 92-93년 경에 김동화 선생의 '멜로디와 하모니', '레오파드' 등을 재출간했는데, 작가와의 합의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물론 인세 지급도 함께 말이다. 이런 경우라면 확실한 해적판이라고밖에 칭할 길이 없다. 작가와 사전합의가 있었던 작품, 없었던 작품 다 묶어서 한꺼번에 CD-ROM으로 구워서 출시되었던 '고유성 SF 걸작선' 등도 비록 출판물의 형태는 아니지만 거의 해적판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정식 판매집계, 정당한 인세지급 등은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한다; 사실 이런 부분에서의 불법과 사기는 한국만화 출판계에서는 현재까지도 너무나 쉽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말이다. 이런 국내작가 만화의 해적판화가 '출판관행'이라는 모호한 말로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황당한 일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결코 어렵지 않은 일이다.

 

 

 

 

 

 

 

 

 

 

 

 

 

 

 

 

 

 

 

 

 

 

 <수정이 대폭 완화된 폭력묘사>

 

 

 

 

 

<이정도면 구라도 거의 예술이다>

 

 

 

 

 

 

 

 

<라...라이거!>

 

 

 

 

 

의문점 1. 한일 만화연구학회는 과연 누구인가?

의문점 2. 부론손은 있는데 작화를 맡은 하라 데츠오(원철부)는 어디있는가? 독점 계약도 부론손하고만 했다는데...-_-;

의문점 3. 동경대학 선정 올해의 도서에 선정되었다는 것은 언제 어떻게?

의문점 4. 해적판이 난무하오니 킹코믹스와 그림터를 확인하라는데, 확인하면 무엇이 달라진다는 것인지? 어차피 해적판인데...

 

 

 

 
다음회:
- 93년 일제단속
- 해적계의 메이져, 제삼아트
- 쉬어가는 코너: 해적판 작명의 비법들

!@#...매번 외치는 공허한 울림...'제보 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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