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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다시 문제는 창작이다 - (1) 창작주체들의 역할, 진화의 과정
만화는 흐른다 04/04/20 05:24 두고보자
대자연의 법칙에서, 환경의 변화 속에서 멸종당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은 결국 진화를 이룩해내는 종 뿐이다. 창작 환경도 이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창작 주체들은 창작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다시금 자기 역할규정을 해야 한다(때로는 그 것이 "원래 하던대로 계속하자"라는 결론으로 결정되어도). 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분명히 한국에서 만화창작의 환경은 여러 변화를 겪고 있다. 따라서 "창작에 관여하는 모든 주체들이 작품의 목적과 의미에 적합하도록 서로 잘 뭉쳐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자"라는 뻔한 일반론적인 결론이 어쩌면 불가피할 지라도, 구체적으로 이들의 세부적인 역할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O 종주권의 행방: 만화가

흔히 만화가는 '혼자서 모든 것을 창작하는' 작가주의적인 직종으로 여겨지곤 한다. 실제로도 다른 여러 주류화된 대중문화 장르에 비해서 그런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만화창작의 넓은 스펙트럼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당장, 가장 주류적인 대중만화의 창작에서 만연해있는 문하생과 어시스턴트들의 존재, 화실과 스튜디오 개념의 존재를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엄청난 원고생산량을 자랑하면서도 컬러링을 제외하고는 혼자서 모든 작업을 담당하는 [시민쾌걸]의 김진태 같은 작가도 있지만, 최근 출간된 작품인 [태극기 펄럭이며]의 마지막 페이지 문하생 모집광고에 "화실 내 식당운영"이라고 공지해놓을 정도인 김성모 같은 작가도 있는 것이다. 작가는 연재 형식, 그림체 등 다양한 변인에 의하여 가장 합리적인 창작 방식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따라서 처음의 명제는 "만화가는 작품을 혼자 창작하는 것부터 속칭 공장제로 생산해내는 일까지 선택의 폭이 넓다"고 수정되어야 한다.

실제로는 어떨까. 주간/격주간 만화잡지 연재가 주류 만화의 방식으로 개가를 올리고 있을 당시에는, 5-6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중간급 화실이 전형적이었다. 하지만 전통적 시장의 축소와 함께 이것은 운영상의 한계에 부딪혔다. [힙합]의 김수용, [짱]의 임재원 등 수년간 주간 소년만화잡지의 수위를 달리고 있는 소수의 작가들만이 안정적인 현상유지가 가능한 상황에서, 선택은 크게 두 가지 갈림길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1인작업으로 회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분업화된 전문가의 길이다.

1인작업으로의 회귀는, 특히 젊은 신인작가들에게 있어서 뚜렷한 경향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중소형 화실 개념의 쇠퇴, 잡지공모전의 감소 등 기존의 주류지면에 진입하는 경로 자체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주류적 감수성 때문에 할 수 없이 그 길을 선택하는 경우와는 다르다. 예를 들어 단편 [공룡둘리]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최규석의 경우, 이전의 기준에서 보자면 공모전 수상 - 주간지/격주간지 잡지연재 - 중소형 화실 형성의 전형적인 패턴을 걸어갈 수 있었던 작가다. 하지만 변화하는 창작환경과 스스로의 작가의식 속에서, 적어도 아직은 다른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속칭 온라인 만화가들은 1인작업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심지어 독자와 만나는 유통과정의 일부분까지도 스스로 일임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명실공히 2003년의 최대 화제작으로 꼽히는 정철연의 [마린블루스]는 분명히 주류적인 감수성의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1인작업을 통해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스스로 유통시키고 있다. 하지만 1인작업의 단점 역시 명확하다. 작품에 대한 작가 개인의 통제력이 상승하는 대신, 경우에 따라서는 독자들과의 연결고리를 놓치고 매니악한 취향으로 한정될 위험 - 따라서 상업적 성공가능성을 희생할 위험이 있다. 나아가 작업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편이어서, 주류 장편만화 스타일의 호흡에는 맞지 않다. 현재 휴식중인 형민우의 [프리스트]가 그러한 괴리의 대표적 사례다.

이에 비해서 분업화된 전문가는 일정 정도의 속도 이상으로 원고가 나와줘야 하는 주류 오락물에 적합한 형태로, 분업화된 작업 공정 속에서, 연출과 작화를 맡는 전문기술인으로서 기능한다. 작화 과정 자체도 경우에 따라서 여러 단계(배경-인물-소품, 또는 콘티-데생-펜선-스크린톤 등)로 구분되며, 각 단계에 있어서 전문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 중 전체감독의 위치에 서있는 만화가의 경우, 개인 차원의 창작능력 이상으로 지휘/경영 능력이 요구된다. 한국의 경우 아직은 전문 기술인으로서의 만화가에 대한 인식이 낮으며 대표적인 성공사례를 꼽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실제로 미국 등에서는 각 분야에서 일정한 대가의 경지에 올라서 인정받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예를 들어서 [샌드맨Sandman]시리즈에서의 작업으로 명성을 확고히 한 토드 클라인의 경우, 식자의 전문가(Letterer)다. 하지만 그것은 타이프를 넣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각 캐릭터의 발언에 손으로 쓴 개성적인 글씨체를 부여함으로써 작품의 품격을 창조하는, 작화 분야의 장인이다. 작화 도우미들이 문하생 개념에서 어시스턴트 개념으로 이미 이월해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작화가로서의 만화가의 입지는 더욱 굳건해질 수 있다. 사실, 본격적인 상업적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주류 오락만화 장르를 이런 식으로 더욱 체계화, 고효율화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그 속에서 각 파트를 일임하는 성원들에게 확실한 동기부여를 하는 방법이 기존에는 '무사히 지면 데뷔를 시켜준다'는 언약이었다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그 분야 자체에서의 장인이 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김성모 화실, 박봉성 화실 등 여러 수십명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는 대형 만화 프로덕션에서 근무중인 수많은 만화작화가들에게 보다 현실적인 목표가 되어줄 수 있다.

O 이야기의 힘: 만화 시나리오 작가

만화시나리오 작가는 아직도 대중적 인식으로부터 비교적 가려져 있는 부분이다. 물론 여러 작품들이 실제로 작화와 시나리오가 동일한 창작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점도 있지만, 만화가 그림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고 할 때 정작 이야기 자체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부족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려한 화면과 특수효과의 헐리웃 블록버스터들이 정작 시나리오의 빈곤으로 인하여 실패하듯이, 이야기의 힘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특히 90년대 후반 들어서 일본만화의 엄청난 유입과 함께 '보편적으로 멋있는 주류적 작화 기술'을 습득하고 재현하기가 쉬워져서, 그 속에서 차별화하는 방법은 결국 천재적인 새로운 시각연출을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밖에는 없다. 전통적으로 만화를 이미지예술이라기보다는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꺼리' 쪽으로 즐겨온 한국의 주류 오락만화라면 당연히 후자쪽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9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야설록, 김세영, 윤인완 등 일부 스타급 인물들의 활약에 힘입으며, 만화 시나리오 작가들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표면화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류 오락만화는 더욱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생산되기 위하여 시나리오 작가를 강조하며, 시나리오 작가의 작품 전반에 대한 통제력이 올라갈 것이다. 이미 90년대 중후반부터 두각을 나타낸 만화 및 무협지 제작사인 '야설록 프로덕션'을 필두로, 현재 스포츠 투데이에 연재중인 '김세영의' [갬블]은 이러한 전망을 뚜렷하게 해주는 대표적인 사례인데, 작품 연재에서 만화의 그림을 그리는 작화가의 이름이 아예 표기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만화가의 이름이 표기되고 시나리오 작가가 그림자의 영역에 머물렀던 허영만/김세영 콤비의 [오! 한강]이 연재되던 80년대 후반의 상황과 완벽하게 오버랩되고 있다.

O 대등한 파트너: 기획자

만화를 기획한다는 것은, 한국에서는 학습만화 장르 등 일부 영역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이었을뿐더러 실제로는 당대에 유행하는 주제를 하나 던져주는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만화는 작가가 그려오면 출판사 편집부에서 '선택'한다는 식의 방식이 강했던 터라, 뚜렷한 컨셉을 가지고 처음부터 설계해나가는 방식의 만화창작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기본 전제처럼 여겨진 잡지 모델이 쇠퇴하고 단행본 시장의 거품이 사정없이 빠져나가면서, 만화에서도 기획 개념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런 와중에 지난 1-2년간 [파페포포 메모리즈], [그리스 로마 신화]의 대성공과 [마법천자문] 등 작품적 재미와 학습효과를 고루 갖춘 신개념 학습만화의 등장으로 기획의 힘이 본격적으로 부각되었다.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인 치밀한 전략은 비단 완성된 작품의 마케팅 차원에 머물기를 거부했다. 예를 들어 [마법천자문]의 경우 작품의 세계관과 학습 컨셉 등에 대한 구체적인 구성이 완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소년만화풍의 그림체와 연출을 진행할 수 있는 만화가를 사후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만화를 그리는 작가가 창작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줄어들었다는 한탄섞인 푸념보다는, 목표와 수단이 뚜렷하게 정해져있는 만화에서 기획자가 창작의 대등한 파트너로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왜나하면 좋은 기획과 좋은 작가는 결국 좋은 창작물, 나아가 예상가능한 긍정적인 독자반응까지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여러 주류 만화 출판사 편집부의 경우, 수년전까지만 해도 적극적인 기획 개념에 회의적이었다. "일본에서는 인기작 하나에 5-6명씩 붙어서 같이 기획하고 자료수집도 한다. 하지만 기자 한명이 작품 4-5개를 담당하는 한국 만화출판계의 현실에서는 적극적인 기획이 불가능하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종수를 줄이고 확실한 히트를 노리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장 모델을 구축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편집부는 최초의 컨셉 및 세계관 구성, 타겟과 종합적인 마케팅 연계 설계까지 만화창작 자체에 깊숙이 개입해 나아가고 있다. 비록 작가와의 역할분담에 있어서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나가기에는 아직은 시행착오가 많은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한 움직임 또는 의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2년여 전부터 일부 잡지에서 도입하고 있는 '담당기자 표시제도'다. 연재작품의 작가 표기란 밑에, 담당기자의 이름을 같이 병기함으로써 창작에 대한 참여지분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사실 만화의 기획은 전통적 개념에서는 출판사 편집부 내부의 임무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소형출판사의 선전과 다양한 지원사업의 확대로 만화 출판과 유통의 경로가 다양해진 지금, 아직 소수지만 전문 기획자 개념이 새로 생겨나고 있다. 만화에 대한 전문적인 경험과 식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특정한 출판사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는 개인, 또는 소규모의 기획사가 작품의 내용에서부터 출판 의의, 마케팅까지도 설계해서 출판사에 프로젝트를 제안하며, 작가와 출판사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자청하고 있다. 이들 역시 창작의 구체적인 부분에 개입하는 또다른 창작주체이며, 시나리오 작가, 작화가, 편집부 등 여러 다른 주체들과 협력할 때 최상의 창작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힘이다. 예를 들어 여러 작가들의 단편을 하나의 컨셉으로 담아낸 모음집 [김광석 프로젝트 스무살]을 기획하고 진행한 것은 '병준그림방'이라는 기획사로, 만화가로서 좋은 작품활동을 보이고 있는 변병준의 기획자로서의 활동공간인 것이다.

O 진화의 다음 단계는?

본 글에서 필자는, 창작에 개입하는 방식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창작자'가 아닌 '창작주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그렇다면, 이 다음 단계의 진화는 무엇일까?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이후에 새롭게 급부상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주체들은 바로 창작의 반대편에 있는 것으만 여겨졌던 독자들일 것으로 예측된다. 비단 이미 큰 인기를 끌고 급속히 주류급의 영향력을 확보해 나아가고 있는 동인만화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이미 구체적으로 독자들이 창작의 지분 속으로 들어올 가능성은 싹이 트고 있는 중이다. 작년에 컬러원고와 이전의 편집문제를 수정한 완전판 개념으로 복간출시된 [먹통X]의 경우, 팬을 자처하는 한 개인 독자가 신진 만화 기획사에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직접 사전 구매 인력을 모집하여 실제 출판까지 연결시킨 사례다. 이것은 기존의 출판사 관행이나 개념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유연한 발상이 만들어낸 성과로, 이후 독자들이 창작 주체의 하나로서 만화의 발전에 어떤 기여를 할지 새로운 기대를 가득 품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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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참고사항

* 계간만화(2004, 봄)에 게재된 특집의 (두고보자와 공유하지 않는) 나머지 글의 축약본을 보기 위해서는 http://www.qcomic.com/qmanhwa/q2004spring.php
: http://dugoboza.net/tt/rserver.php?mode=tb&sl=10 (co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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