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장경섭, ‘그와의 짧은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인 1996년에 시작되었다. 시카프 행사장에서 호기심에 사들고 온 자칭 ‘저예산 독립만화지’ <화끈>에 실려 있던 「장모씨 이야기」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한 건물의 옥탑방을 배경으로 만화가인 ‘장모씨’가 펼치는 일종의 모노드라마인 이 작품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새로움에 새삼 감탄하게 될 정도로 기존의 만화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하고 충격적인 연출을 선보이고 있었다. 커다란 기대로 새로운 작가의 탄생을 기대하게 만들었던 만화가 장경섭은 그러나 1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주 잠깐씩 몇 개의 지면에 얼굴을 내밀었다가 오래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좀처럼 독자들의 시야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잠깐씩 얼굴을 내밀었던 지면들은 하나같이 주류 만화와는 동떨어진 곳이어서 관심을 갖고 일부러 찾아보려 마음먹은 독자라고 해도 만나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그가, 드디어 자기 이름으로 된 단행본 - [그와의 짧은 동거]를 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도대체 10년의 시간동안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것일까. 10년 동안 지극히 ‘짧은 만남’만을 허락해왔던 만화가 장경섭과의 ‘긴 만남’은 어떤 기분일까. 본격적으로 책을 펼치기에 앞서, 깜악귀님과 함께 미리 이번 단행본 분량의 작품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와의 짧은 만남’을 한 번 더 가져보았다. 다만 이번엔 지면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침을 튀겨가면서.
접기..
(장: 장경섭,
깜 : 깜악귀,
팻: 피터팻)
정리 : 피터팻
만화가 장경섭
팻 : 10년이 넘게 만화가로 활동해오셨는데도 불구하고 ‘만화가 장경섭’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는 게 무척 놀랍습니다. 어쩌면 장경섭이란 만화가를 처음 알게 된 독자가 오히려 더 많지 않을까 싶은데요. 처음 만화가로 데뷔하셨던 게 <화끈>을 통해서라고 보는 게 맞겠죠?
장 : 그렇죠. 그런데 '데뷔'라고 하면 만화가로서 인정을 받고 여러 사람들이 그 작품을 공유해야 되는데 저는 그런 건 아니었어요. 만화판 내부에서도 <화끈>을 만화잡지라고 불러야 되냐 라는 비아냥을 들었었으니까요. 저처럼 주류의 바깥에서 어물쩡거리다 시작하는 사람들은 뭐든 애매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1996년에 <화끈>을 통해서 데뷔했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어떤 입장에서 보면 그 말 자체가 전혀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말하기가 항상 난감해요. 그래서 그냥 낯설면 낯선대로 작품을 통해서 봐주셨으면 싶어요.
팻 : '데뷔'의 개념이 모호한 입장이라고 하셨지만, 어쨌든 <화끈>을 통해서 일반 독자들에게 작품을 선보이신 셈인데요. 데뷔 전에 만화 공부는 어떻게 하셨어요?
장 : 처음 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고등학교 때였고, 대학 때 만화동아리에 들어가서 사람들하고 어울리면서 조금씩 그렸어요. 그러다가 만화를 그리면서 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뭐 달리 하고 싶은 게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팻 : 10년 동안 만화가로서 어떻게 지내 오셨나요?
장 : <화끈> 관련된 작업을 1년쯤 하고나서 5년 정도 좀 떠돌았었어요. 여기저기 날품팔이로 삽화도 하고, 조교도 하고, 가르치는 것도 하고… 특별히 생각나는 건 아내 만나서 결혼한 것하고 애가 생겼다는 것 밖에 없네요. 생각이 안 나요, 10년 동안 뭐했는지. 진짜로.
어렸을 때 저는 서른 이후의 인생을 꿈꿔본 적이 없어요. 지구 멸망설 때문에…(웃음) 서른 이후에 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전 정말로 지구가 멸망하는 줄 알았어요. 겁나서 실제로 운 적도 있어요. 어렸을 때의 그 공포가 무의식에 박혀있었나 봐요.
장경섭 만화 속의 어둠과 공포
팻 : 작품 속에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뤄지고, 죽음의 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도 그런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죽음 뿐 아니라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든가 번식에 대한 두려움처럼 삶에 내재돼 있는 공포에 대해서도 천착하시는 것 같고.
깜 : 장편인 <그와의 짧은 동거>를 보면 한 번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삶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의지를 볼 수 있거든요. 그런데 기존의 단편들만 본 독자들은 자칫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희망은 못 보고 자살이라든가 죽음에 대한 탐닉만 보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장 : 자살을 얘기하면 사람들이 겁을 내거나 불쾌해 하는데, 가끔은 그런 것이 더 많이 드러나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더 크게 앓아야 나름대로 사회적인 백신들이 생기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아직은 우리 사회가 본격적으로 존재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시기는 아직 안 된 것 같아요. 물론 생계형의 끔찍한 자살들은 가슴 아프고 답답하긴 한데, 존재론적인 의미에선 가끔은 그런 과격한 생각도 해요.
팻 : 생계형 자살 같은 경우는 말은 자살이라고 하지만 사회구조 속에서 소외당하고 급박한 상황 속으로 내몰리면서 결국 사회로부터 살해당하는 거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장 : 그렇기도 하지만 저는 심지어 산업재해로 죽는 사람들도 일종의 자살로 볼 수 있다고 보거든요. 모든 죽음은 그 전에 전조가 나오고,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걸 알게 되거든요. 그러면 거기서 그만 둬야 되는데 그 안으로 들어간단 말이에요. 그렇게 자기가 죽을 걸 알면서도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저항이라고 봐요. 자기를 파괴해가면서 그 사회에 대해 저주를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자살을 보면 그 저주가 자기를 피해갔으면 하는 의미에서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하는 거죠. 신문이나 뉴스의 기사도 마찬가지구요. 안타깝다, 불쌍하다라고 말하는 건 사실은 이 사람의 저주가 제발 우리한텐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기죠.
팻 : 사실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건 어떻게든 삶의 길을 찾고 싶다는 얘기일 텐데, 그런 의미에서 「즐거운 나의 방」의 경우는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는 이야기이면서도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이야기이고, 보이지 않는 희망을 찾아서 살아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장경섭 만화의 순환구조
팻 : 평소에 작품 구상은 어떻게 하세요.
장 : 막연하지만 어떤 이미지나 이야기 같은 것들은 계속 생각나요. 그러다보면 이걸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항상 하고 있게 되더라구요.
팻 : 많이 고민하시는 흔적들이 작품에도 드러나 있는데, 작품에 대해서 스스로는 얼마나 만족하고 계시나요?
장 : 스스로 만족할 때도 있지만 그건 짧은 순간일 뿐이고요. <그와의 짧은 동거> 같은 경우도 뒤로 진행되면서 저 스스로에게 몰입되고 복잡해지는 바람에 이것이 독자들에게 제대로 읽힐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어요. 소심해서 그런지 제대로 전달이 안 될까봐 항상 전전긍긍해요. 어떻게 끝은 낸 것 같은데, 어차피 제가 하는 얘기들은 사실 끝이란 게 굉장히 애매한 것 같아요.
팻 : 그래서 그런지 작품들을 보면 순환구조로 짜여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것도 그냥 단순하게 반복되고 순환하는 게 아니라 작품 속의 세계도 그렇고 작가의 자아도 그렇고 한 번 뒤틀리면서 순환되는 느낌이랄까. 뫼비우스의 띠라든가 에셔의 그림이 연상되기도 하고.
장 : 전 그런 게 좋더라고요. 사실 이야기의 끝을 제대로 못 내요. 그런데 <그와의 짧은 동거>는 처음부터 결말을 전제해 놓고 시작했어요. 결말을 상정해놓고 그 과정을 그려 나갔는데 3회를 연재를 하고나서 연재하던 잡지가 엎어지는 바람에 더 이상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 부담을 일단 덜었죠. 그런데 저 스스로는 좀 의문이었는데 장경섭의 대표작으로 「그와의 짧은 동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그렇게 남들이 대표작으로 기억해주는 작품을 끝내지도 못하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 일단 이걸 끝내야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시간이 한 4, 5년 정도 지난 상황에서 보니까 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더라구요. 장모씨란 캐릭터도 조금은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게 되고요.
팻 :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이전이나 이후의 작품들에서도 자기 스스로를 굉장히 객관화해서 바라보고 있다는 게 느껴지던데요. 창 밖에 나가서 방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작가 장겹섭을 관찰하는 작가 장경섭
장 : 그렇게 떨어져서 볼 수 있게 된 것은 사실 최근의 일이에요. 어느날 작업실에서 콘티를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냐, 그거 아니야~" 하고 제가 혼자서 얘길 하고 있더라구요. 마치 옆에 누가 있는 것처럼. 그런데 사실 저는 10년 전에도 그랬거든요. 10년 전에도 누군가를 옆에 상정해놓고 혼자서 중얼중얼 얘기하는 버릇이 있었어요. <장모씨 이야기> 1편도 어떻게 보면 그런 모습인 거고요. 그런데, 저한테 그런 버릇이 있다는 걸 제가 실제로 느낀 건 콘티를 쓰고 있던 그 순간이었어요.
깜짝 놀랬죠. 10년 동안 계속 혼자서 떠드는 이야기를 그리고, 구상하고, 울궈먹던 사람이 실제로 현실에서도 자기가 그렇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그 뒤부터는 저 자신을 약간은 떨어져서 바라보면서 비틀어볼 수도 있고, 가지고 놀 수도 있게 된 것 같아요.
팻 : 지금까지 발표해 오신 작품들을 보면 거의 모든 작품에서 작가란 무엇인가 혹은 작가로서의 삶이란 무엇인가 라는 고민이 묻어있다고 느껴지는데요.
장 : 저는 기억력이 떨어져서 아주 인상 깊게 봐도 집에 들어오면 다 잊어버리고 인상과 느낌만 남아있어요. 그러다보니까 어떤 객관적인 상황들을 조목조목 기억해내서 그것들을 작품 속에 재현해내는 것들이 저한테는 불가능하거든요. 그래서 진작에 포기를 했어요. 그냥 저 자신의 모습을 담담하게 관찰해서 일종의 일기처럼 표현하는 게 다른 사람들에게 본격적인 작품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더라도 저 자신한테는 만족이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팻 : 그래서 「다이어리스트 블랙K」의 '다이어리스트' 같은 직업이 등장한 거로군요.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일기를 판매하는 다이어리스트라는 직업을 보고 이렇게까지 자기비하를 하는 작가도 드물 거라고 생각했어요.
장 : 저는 어차피 제가 자기의 일기 같은 이야기들을 팔고 다니는 입장이라고 생각했어요.
팻 : 그렇게 자기의 이야기를 해온 작가이신데도, 그리고 그 작품을 인상 깊게 보아왔는데도 저는 장모씨만 기억했지 장경섭이라는 작가의 이름은 기억을 못 했었어요. 예전에 <계간만화> 창간호에 발표하셨던 「고질라가 있는 풍경」을 봤을 때도 굉장히 충격을 받았었어요. 저는 그 작품이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한 비판, 좀 거창하게 얘기한다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드리워져 있는 거대한 폭력(그걸 제국주의라든가 신자유주의 같은 말들로 바꿔 불러도 좋을 텐데요)에 대한 이야기라고 봤는데요. 사실 그게 이렇게 무슨 주의니 침략이니 폭력이니 하는 거창한 언어들을 동원해서 설명을 해도 잘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인데, 그걸 익숙하고 일상적인 말과 풍경만을 사용해서, 그리고 칸 안으로 들어오거나 나가는 그림자를 그냥 묵묵히 보여주는 연출만으로 드러내는 솜씨를 보고 충격을 받았죠.
작가가 누구지? 장경섭? 우와~ 이런 작가를 왜 여태 몰랐지?(웃음) 10년 가까이 작품을 봐온 작가인데도 그 이름이 낯설더라구요. 그런데 스스로가 일기 같은 이야기를 팔고 다니는 작가라는 자기비하도 그렇고, 「장모씨 이야기」를 비롯한 거의 모든 작품에 자학적인 요소들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장: 그건 저같이 소심한 사람들의 버릇이지 싶어요.(웃음)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 자신이 열심히 살 생각은 안 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웃고 하는 게 거의 일상이 되다시피 하니까. 개인적으론 그런 자기부정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뭐, 일기장에는 자기 목이 잘리고 하는 그런 낙서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것이 만화로서 독자들에게 다가갈 때는 구성이라는 게 있고 뼈대라는 게 있어야 하잖아요. 적어도 발표하는 작품일 경우에는 그런 뼈대를 갖추는 게 최소한 기본적인 예의인 것 같아요. 그래서 머리를 싸매고 연출을 신경 쓰고, 스토리의 흐름을 고민하는 거죠.
깜 : 작품을 하시면서 영향을 받는 것들이 있다면 어떤 것들인가요?
장 : 인상적인 만화나 영화, 책을 보게 되면 작업 중간에도 많이 흔들려요. 제 위치는 항상 좀 흔들리고, 흔들리면서도 어느 정도 중심을 잡고 방향성을 가지고 가는 그런 위치인 것 같아요.
팻 : 딱 <히말라야에 가보셨나요>의 캐릭터네요. 방향성은 있는데 계속 흔들리는.
장모씨와 수봉이 형
팻 : <그와의 짧은 동거>의 바퀴벌레는 해석의 여지와 폭이 굉장히 넓은 것 같아요.
깜 : 노동자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가정주부와 남편의 관계로 보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팻 : 저는 바퀴벌레가 작가 자신을 형상화한 거라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혹은 장모씨 연작에서 칸 밖에서만 존재하던 수봉이 형이 바퀴벌레의 모습으로 칸 안으로 들어온 거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장 : 그렇게 볼 수도 있죠. 그런데 제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장모씨가 바퀴벌레와 동거하게 되는 과정보다는 헤어지는 과정이에요. 뒤틀려진 일상이 정상적으로 회귀하고 치유되는 과정.
팻 : 역시 <장모씨 이야기>는 수봉이 형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기존의 만화들에도 간혹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한 캐릭터는 있어왔지만, 수봉이 형처럼 존재 자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혹은 존재하지 않는(수봉이 형은 주인공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니까요) 캐릭터는 없었던 것 같아요.
장 : 그런 걸 클리셰라고 그러나요? 마크라고 해야 하나? 장모씨 이야기에는 왠지 수봉이 형이 등장해야 될 것 같더라고요. 독자들은 좀 낯설어 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팻 : 대화의 상대가 칸에서 배제되어 있으니까 장모씨는 열심히 대화를 하고 있는데도 그게 다 독백이 돼버리잖아요. 이게 벌써 10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굉장히 낯선 연출이고, 많은 것을 함의할 수 있는 연출이에요.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할 때도 서로 소통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각자 하고 싶은 얘기들을 지껄이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잖아요. 이쪽에서 하는 얘기가 저쪽에 전달되지 않고 그냥 허공에서 흩어져버리는 상황.
장 : 듣고 싶은 얘기만 귀에 들리기도 하고요. 사실 그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렇게 대사가 서로 오가지 않는 연출이 뭐가 좋냐 하면, 장모씨가 잘 모르는 얘기를 할 때는 상대방이 다 얘기를 해줘요. 그러면 장모씨는 그냥 동의만 해주면 돼요. “아 맞아, 그거.”(웃음) 이건 제가 볼 때는 그야말로 완벽한 대화가 되거든요. 처음에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수봉이 형이 여러 번 등장하다보니까 이야기를 진행하는 중간에 제가 잘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면 그런 식으로 연출상의 잔머리를 쓰기도 해요.(웃음)
깜 : 작품들이 늘 고독한 개인의 이야기였는데, 그러면서도 그 안에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늘 존재했었어요. 자기 일상 속에서 늘 그걸 대면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계신 것 같아요.
장 : 물론이죠. 저도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입장이니까요.
팻 : 그런데 자기 얘기를 다루는 것과 사회문제에를 다루는 방식이 많이 다르시더라고요. 저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기도 한데, 개인의 문제가 너무나 훌륭하게 만화적으로 표현된 데 비해서 사회문제를 다루시는 방식은 나래이션이나 독백으로 처리해서 말로 설명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거든요.
장 : 그런데 그것들을 일일이 그려주면 일단 너무 길어지니까 그리기도 귀찮을 뿐더러(웃음), 또 다양한 캐릭들을 그려야 되는데 저는 캐릭터가 장모씨밖에 없거든요.(웃음)
깜 : 작가들을 보면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이 있고 남의 얘기를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거울을 보고 자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자기 얘기에 국한되지 않는 얘기를 하기 위해선 좀 특별한 감각, 자기를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시선이 없으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작가로서 가장 기본적인 덕목일 텐데 그걸 못하는 작가들도 많거든요.
장 : 그런데 어차피 자기 얘기만 해가지고는 평생 작가로 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저 스스로도 그건 용납을 못 할 것 같고. 어차피 만화가로서 살려면 그걸로 돈벌이를 해야 된다는 얘긴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객관화되고 재미있을만한, 아주 통속적일 수도 있는 이야기들도 염두에 두고 작업들을 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데 문제는 항상 수봉이 형이야.(웃음) 이 인간을 어떻게 좀 따돌려야 되는데 자꾸 찾아와가지고….
만화로 세상과 소통하기
팻 : 그런데 그렇게 자기 얘기를 하시면서도 늘 연출하는 방식이라든가, 새로운 모습들을 자꾸 보여주시잖아요. 독자로서 그런 것들을 보는 재미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요.
장 : 가끔은 연출을 하면서 내가 왜 이 노가다를 해야 되나 하는 회의감도 들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숙명인 것 같아요. 내용이 아무리 재미없고 자학적이고 낯설고 하더라도 일단은 읽혀야 되고, 전달은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연출은 쉽게 하려고 노력해요.
팻 : 그만큼 독자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신경을 많이 쓰신다는 얘긴데, 그래서인지 작품을 읽다보면 굉장히 문학적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게 되더라고요.
장 :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까 아무래도 책을 보게 되거나 하는데요. 책을 읽다보면 그 내용이나 문장에 대해서 생각들을 하게 되니까 그런 느낌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네요.
팻 : 그런데 작가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구구절절하게 설명 필요 없이 그대로 독자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게 만화가 가진 힘 중의 하나잖아요.
장 : 힘이자 또 약점이죠. 감춰지는 것 없이 너무 다 보여져버리니까 만만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만화라는 매체를 가볍게 대하는 것 같기도 해요.
팻 : 그 점에서 장모씨 같은 경우에는 다 보여주질 않잖아요. 수봉이 형도 안 보이고.(웃음)
장 : 그게 의도했던 장치는 아닌데, 그런 욕심이 좀 있어요. 다 보여주지는 않겠다는. 그런데 만화는 소설과는 다르게, 예를 들면 칸을 이용한 연출이라든가 <그와의 짧은 동거> 같은 경우에 개연성이나 설명 없이 바퀴벌레가 툭 등장해버리는 이런 장면에서 독자들이 만화적인 시원함 같은 걸 느끼는 것 같거든요. 소설에서도 이런 게 가능하긴 하지만 만화처럼 충격적인 효과는 떨어지니까요.
팻 : <서브웨이 카니발>에서 장모씨가 지하도로 내려가는 장면의 경우는 이걸 글로 풀어놓으면 그 느낌이 바로 오지도 않을 뿐더러, 사실 만화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연출이잖아요.
장 : 똑같은 그림을 세 번 그리다 보니까 좀 지루해서 한 번 틀어준 건데, 만화를 그리다보면 그런 경우들이 가끔 있어요. 그런 부분들은 그리면서도 재밌지만 보는 사람들도 재미를 느끼는 것 같더라고요.
깜 : 작품들이 굉장히 독자성이 있는데, 분류하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어서 이것이 어떤 만화다 하고 부르기가 꽤 애매한 것 같아요.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기를 원하세요?
장 : <그와의 짧은 동거> 중간에 갯벌 이야기가 잠깐 나오잖아요. 제 만화는 그런 것 같아요. 바다도 아니고 땅도 아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서 계속 변하는 갯벌 같은 이미지랄까. 개인적인 욕심이라면 그냥 '장경섭 만화'라고 불리는 거죠. 누가 봐도 "걔는 어떻게도 분류하기 어려워. 그냥 자기만화야"라고.
깜 : 그건 욕심이라기 보단 어마어마한 야심이네요.(웃음)
팻 : 농담처럼 장르만화도 해보겠다는 식의 말씀을 하셨는데, 구체적이진 않더라도 앞으로의 계획이나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보곤 하시나요?
장 : 앞으로도 과작이 되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지금 자리에서 조금씩 작업이란 걸 해나갈 것 같아요. 앞으로 10년이 지난 다음에도 또 '10년 동안 뭐 했는지 모르겠어'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는데…. 앞으로는 장모씨도 약간씩 느낌이나 성격이 달라질 것 같아요. 좀 풍부해진다면 풍부해진달까. 이제 책이 나오니까 저도 어디 가면 만화가라고 얘기하고 다닐 것 같고…. 그 전에는 만화가라고 안 했어요. 그냥 대답을 못 했죠. 대답을 안 하고 있으면 20대 때는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30대가 되니까 불쌍하다는 듯이 시선을 한 번 던지고는 더 이상 안 물어보더라고요.(웃음)
스스로도 내가 뭐하는 인간인지 모르겠다고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살아왔는데, 저 같은 캐릭터는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지금 인터뷰를 하면서도 자꾸 하게 되네요. 자기를 가장 밀접하게 드러내는 나만의 이야기들은 사실 보여주고 싶지 않거든요. 부끄러운 것들이고….
팻 :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은 작품을 통해서 다 보여주고 계시잖아요.
장 : 그게 묘하더라고요. 보여주고 싶으면서도 보여지고 싶지 않은 기분. 연출을 해서 다 만드는 건데도 그래요.
팻 : 그런데도 만화를 그리신다는 건, 그것도 그렇게까지 연출에 신경을 쓰면서 그린다는 건 그만큼 자기를 드러내고 싶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텐데요?
깜 : 자기를 남한테 이야기해야 할 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끔하거든요. 나는 내가 누군지 알겠고, 내 안에선 그게 확실한데 그게 한마디로 얘기가 안 되니까 소설이나 만화 같은 걸 통해서 전달하려고 하게 되는 거 아닐까요?
장 : 그런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말더듬이인 셈이죠. 생각하는 것, 보여주고 싶은 것과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의 불일치를 어떻게든 극복해보려고 그런 식의 사족들을, 인생의 사족들을 자꾸 달게 되는 것 같아요.
팻 : 멋진 비윤데요. 지금까지 해온 작품들이 사족이었다면 부디 지네처럼 많은 발을 달아주시기를 부탁드려야겠네요. 독자로서 장경섭 작가님의 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좀더 많이 누리고 싶거든요.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며 걱정이 되는 게 있었다. 장경섭에 대해서, 만화에 대해서, 장경섭의 만화에 대해서, 우리 만화시장에 대해서, 인디만화에 대해서, 거창하게도 삶과 죽음에 대해서 중구난방 떠들어댄 2시간 반을 어떻게 정리한다지?
그리고 정리를 마친 지금, 또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다면 그건 이 인터뷰가 장경섭이란 작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장경섭 작가는 얼마 전 인터넷에 자기 공간을 마련했다. 인터뷰를 마친 다음날, 그는 그곳에 인터뷰에 대해 ‘수봉이 형’과 나눈 대화를 남겨놓았다. 어쩌면 이 대화가 장경섭이라는 작가의 모습을 더 잘 드러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http://blog.naver.com/roiroze/20018364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