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각 문화예술분야의 역사를 10년 단위로 종합하여 집대성한 역작, <한국 예술사대계>. 그 90년대편에 수록된 90년대 만화/애니메이션사.
. 이번 기회에 본문을 여기에 공개합니다. 도판은... 과감히 생략. 물론, 실제 책에는 좀 있습니다. -_-;
!@#... 당초 지면 관계상(150매 준 것을 우겨서 200매로 늘려내고, 실제로는 235매를 썼습니다) 많은 부분들이 축약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같은 부분들. 그런 것은 우선은 아쉬운 대로, <만화세계정복>(두고보자 저, 2003.12)을 보시길. 애니메이션사 쪽 역시 세부 흥행 수치라든지, 관련 일화들이 거의 생략되어 있습니다(예를 들어, "돌아온 영웅 홍길동"(95)은 정말로 흥행 성공작인가, 같은 이야기들). 뭐, 애니메이션 쪽은 만화에 비하면 제2전공에 불과(...)하지만, 언젠가 다른 말할 기회가 있겠죠.
!@#... 여튼, 기존 만화사 관련 서적들이 대체로 비워놓고 지나간 90년대 이후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두고보자의 성격상, 이런 것이 제격이죠. 자 그럼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클릭.
어지러우니까 접어요...
90년대 만화사
글/ 김낙호 (만화연구가)
I. 개관: 90년대적 현상의 시작
병영사회 지속과 대중문화 부흥의 공존이라는 기형적 상태에서 잉태된 80년대적 양상들은, 애초부터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시대에 길을 내줄 운명이었다. 87년의 정치적 민주화 확보, 그리고 이에 힘입어 촉발된 80년대말-90년대초 문화연구 담론의 폭발적 유행 덕분에 각 대중문화 장르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엄청난 관심을 유리하게 활용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특히 대중문화의 풀뿌리로서 자리매김해온 만화라는 분야에서 90년대적 현상은 여러 측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오락성 소일거리라는 기존의 인식틀에 산업적, 예술적 담론이 본격적으로 더해지면서 만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새로운 활력을 발휘했다.
산업적 측면에서 90년대적 현상의 기반이 되는 사건은 1988년 잡지 <<아이큐점프>>와 <<르네상스>>의 창간으로, 장르별 특화 및 독자 세분화의 측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여성지와 타블로이드 신문을 전문으로 하던 출판사인 서울문화사에서 출간한 <<아이큐점프>>는 일본 만화출판사들의 기업화된 잡지관리시스템을 수입해서 한국시장에 적용시키고자 했다. 빠른 발간 스케줄 및 사춘기적 감수성을 지닌 준청소년층이라는 특화된 대상 공략은 한국에서는 대단히 신선한 시도였고, 이현세/야설록의 <아마게돈>, 이상무의 <제4지대> 등 대담한 발상의 작품들이 히트로 이어졌다. 또한 최초의 순정만화 전문 잡지인 <르네상스>는 80년대에 농축되었던 순정만화 향유층의 열망을 수면 위로 급부상시키며 순정만화 붐을 일으켰다. 이와 함께 한국 주류 만화시장의 구성방식은 점차 대본소 중심에서, 잡지 연재 및 이를 묶어낸 단행본으로 체질 변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90년대식 만화 지형도의 분기점은 그 다음에 뒤따랐다. <<아이큐점프>>지의 주요 인기 작품들이 연재 종료되면서, 출판사는 떨어져 가는 인기를 만회하기 위하여 새로운 작가 발굴과 시스템 개혁과는 다른 손쉬운 길을 택한 것이다. 1989년 말, 결국 일본의 검증된 히트작 <드래곤볼>이 한국 연재를 시작하고, 대형 히트를 기록하였다. 이를 계기로 다양한 일본 만화들이 본격적으로 대량 수입되기 시작하여 만화 시장의 급격한 외적 성장과 일본만화 출판 비중의 과반이라는 산업적인 현상으로 정착했다. 이러한 시작은 90년대 중반 만화 위주 도서대여점의 기형적 성장, 90년대 후반의 시장 위기론 등으로 이어졌다.
담론적 측면의 변화로는 민중문화론의 쇠퇴와 함께, 페미니즘이나 수용자 중심 시각 등 다양한 방식의 문화연구적 측면이 부각된 점을 들 수 있다. 리얼리즘이나 학습성을 미덕으로 삼았던 민중문화적 시각에서, 장르 문화적 완성도와 향유자와의 유대가 평가를 받는 방향으로 이동한 것이다. 소년지향 장르만화에서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진짜 사나이>등 밀리언셀러가 탄생하는 동안, 리얼리즘 색채가 강한 성인만화의 산실 역할을 했던 <<만화광장>>이 점차 힘을 잃고 결국 93년에 폐간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90년대를 대표하는 문화예술 담론이라면 역시 문화산업론인데, 만화는 그 폭풍의 여파를 고스란히 받아냈다. ‘쥬라기공원 효과’
1) 와 함께 만화는 정당한 사회적 위상이나 산업적 건전성이 채 정립되기도 전에 먼저 문화산업의 원동력으로 추켜세워진 것이다. 즉 산업적 측면에서의 성공 및 프랜차이즈 가능성이 만화로서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로 부각된 셈이다. 이것은 정식 개방된 일본만화 및 일본만화식 제작시스템의 영향과 함께 90년대 만화 작품들의 가장 중요한 경향성인 장르성의 공고화에 기여했다.
장르성의 발달은 특정 작품 차원에서는 장르적 규칙의 도입이 강화되는 것을 일컫고 작품군에 있어서는 특정 요소에 따른 취향의 다양한 클러스터화가 진척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구만화, 무협만화 등 단순히 소재에 따른 ‘OO만화’라는 커다란 범주보다는, 하렘물, 야오이물 등 세부 취향과 장르적 규칙에 따른 ‘OO물’이라는 범주가 작품들의 경향성을 이해하고 즐기기에 더 유효한 잣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단순한 유행이나 아류작 양산의 수준을 넘어서서, 취향 기반 독자군의 형성과 함께 개별 작품들의 기술적 완성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독자 취향층을 연령별, 성향별로 세분화시켜온 일본만화의 직접 유입과 함께 장르적 완성도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수준은 급격하게 높아졌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에 실패한 분야인 명랑만화는 한국 만화사에서 지금껏 차지해온 영광에도 불구하고 명멸 직전까지 가는 심각한 침체를 겪어야만 했다. 반면에 잡지연재-단행본 판매의 공식을 바탕으로 한 소년만화와 순정만화는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인 수혜자로 자리매김했다. 이렇듯 장르성 공고화를 발전의 원동력으로 하는 큰 맥락 속에서 90년대 초반까지의 장르 도입 실험, 90년대 중반 이후 캐릭터 중심 전개의 강화, 90년대 말 이후 지나친 취향 세분화에 따른 역효과 등의 주요한 흐름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지나친 장르공식화, 산업화에 대한 반발로서 제기된 독립만화 움직임 역시 90년대적 맥락에서 비로소 가능했다.
애니메이션 분야의 90년대는 이 용어 자체에서 이미 읽어낼 수 있다. ‘만화영화’라는 기존 용어의 사용이 급감하고 ‘애니메이션’이라는 단어가 급부상한 것은,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움직이는 만화 정도로 치부하던 과거와의 단절과 새로운 위상정립을 의미했다. 애니메이션을 유망한 고수익성 영상산업으로 바라보고자 한 산업계의 요구, 자유로운 영상 예술의 분야로 인정받고자 하는 독립 창작계의 부흥, 그리고 TV 만화영화를 보며 자라나서 자기 취향문화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된 젊은 세대의 성장이 맞물린 것이다. 87년 <떠돌이 까치>를 필두로 하여 지상파 방송 전용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어 큰 호응을 얻어냈고, 이러한 움직임은 올림픽 붐과 융합한 <달려라 하니>, 캐릭터 프랜차이즈로 이어져 성공모델을 제시한 <아기공룡 둘리> 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만화분야와 마찬가지로, 자체적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 와중에 외부에서 수입된 대형성공 사례로 인하여 전체 판도가 급속도의 변화 물결에 휩쓸리는 패턴이 나타나게 되었다. 극장판에서 그러한 계기가 된 것은 91년 미국 월트디즈니사의 극장 장편 뮤지컬 재기작인 <인어공주>의 히트로, 아동층에 한정되어 있다고 여겨졌던 극장 애니메이션에 대한 광범위한 수요층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수차례의 극장 애니메이션 붐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는 <블루시걸>의 당혹스러운 성공, <아마게돈>의 시행착오 등 명암이 교차했다. TV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는 SBS의 개국과 함께 최신 일본 TV물들이 급격한 증가가 시청자의 눈높이와 취향을 주도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응하여 90년대 중반 이후 국내 제작 작품들도 <영혼기병 라젠카>의 사례처럼 기획단계부터 세부취향과 장르성에 대폭 집중한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90년대는 대중오락문화의 모호한 덩어리로 존재하던 만화/애니메이션에서, 세분화된 취향과 구체적인 산업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확인하며 열렸다. 그리고 이후 십여년 동안 만화는 대중문화와 예술의 경계를 지우는 문화연구적 시각, 문화와 산업을 융합시키고자 하는 문화 산업론적 시각 속에서 장르 문화적 속성을 더욱 세련되게 발전시키며 시스템화의 길을 걸었다.
II. 90년대의 만화/애니메이션 환경
1. 90년대 전반 잡지 판도의 재편
대중문화예술로서의 만화는 생산과 유통의 맥락이 작품 내용의 경향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88년 <<아이큐점프>>와 <<르네상스>>의 창간이 한국 만화계의 90년대를 열어놓았다는 시대구분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잡지 판도의 재편은 새로운 세대의 작가군, 새로운 장르와 취향을 만화계에 선보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어주었다. 기존의 만화잡지들이 성인과 아동으로 나누어질 뿐이었다면, 이 두 잡지에 실린 작품들은 그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타협하거나 또는 학업을 명목삼아 만화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었던 청소년층을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각각 남성과 여성의 사춘기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한층 자유로운 표현, 인간관계와 성장이라는 호소력 있는 모티브 등이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결국 잡지의 추진력을 <드래곤볼>이라는 외국작품에 맡기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큐점프>>는 80년대 만화잡지들의 속성과 더 가깝게 맞닿아 있었다. <아마게돈>의 이현세, <헬로 팝>의 김형배, <영심이>의 배금택, <스카이 레슬러>의 장태산, <전설의 야구왕>의 고행석 등 80년대를 통하여 인기를 끌었던 작가들이 여전히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직접적인 경쟁자 역시 허영만의 <날아라 슈퍼보드>가 연재되던 <<만화왕국>>, 여전히 분투중이던 <<보물섬>> 등 80년대를 살아온 잡지들이었다. 신인작가의 경우도 기성 중견 작가의 화실에서 문하생 경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이 데뷔하는 방식을 따랐다. 당시 파격적인 신인 등용으로 취급받았던 김준범의 <기계전사 109> 역시 허영만 화실 출신이라는 경력과, 80년대에 허영만과 작업한 스토리 작가(<담배 한 개비> 외) 노진수의 협업 속에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보다 근본적인 변화는 주로 아동영화와 애니메이션 제작 및 수입을 전문으로 하던 대원동화에서 91년 주간지 <<소년챔프>>를 창간하면서 일어났다. <<소년챔프>>는 제호에서부터 <아이큐점프>와 경쟁할 것을 노골적으로 암시하였으며, 실제로 같은 독자 취향층을 노리고 시장에 진입해 들어왔다.
창간 당시 고행석의 <마법사의 아들 코리>를 주요 작품으로 내세우기는 했지만, 이 잡지는 후발주자이자 기존 만화계와의 연계가 부족하다는 핸디캡 때문에 유명 기성작가들을 다수 확보하는 일에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 빈자리를 채우고자 한 것이 <슬램덩크>라는 일본 인기 만화의 유치, 그리고 과감한 신인 등용이었다. 공개 공모전을 시도하는 등 신인 등용에 집중한 결과, 기존의 기성작가 인맥이 아닌 새로운 감수성의 작가군이 등단하는 기회가 열렸다. 만화 동호회 활동을 통해서 만화를 그려온 젊은 세대가 화실 문하생이라는 중간역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지면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신인 작가의 자리는 해오름(의 서영웅, 손희준 등), 그래피티(고병규, 이명진 등), AAW(양재현, 김태형 등) 등 유명 동호회들의 광장이 되었다. 이들 젊은 작가군이 여타 잡지의 기성작가들과 차별화되었던 특징은 철저하게 독자들과 동세대적인 감수성으로 무장했다는 것이었는데, 그 결과 <<소년챔프>>는 이내 상업적 성공가도로 올라선다. 공모전을 통한 신인등용, 인기투표 수치에 의한 철저한 작품관리, 작품내용과 연출에 대한 편집부의 강력한 개입 등 일본식 만화잡지 시스템이 성과를 발하는 순간이었다. 산업 모델 역시 잡지연재분이 모이면 곧바로 단행본으로 묶어내며, 단행본 판매가 주요 수익원이 되어주는 구조를 취하게 되었다. 개별 창작물의 모음이라기보다는 조율에 의한 제작 시스템이 보다 강조되는 방식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러한 모델의 도입에 어느정도 성공한 것은 결국 <<소년챔프>>와 <<아이큐점프>> 뿐이었으며, 적응에 실패한 <<보물섬>>, <<만화왕국>>, <<소년중앙>> 등 여러 잡지들이 결국 사라졌다. 이들은 이후 연령별 취향분화를 한 사업확장을 시도, 94년에 각각 중고생층 이상을 노린 <<영챔프>>와 <<영점프>>, 아동층을 노린 <<팡팡>>과 <<샤크>>(95년 창간, 각각 <<월간챔프>>와 <<월간 점프>>를 계승) 등의 자매지를 창간했다.
순정만화 역시 변혁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르네상스>> 창간 이후 한동안은 잡지만화와 대본소용 장편만화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대본소 독자 자체가 줄어들고 잡지시장이 부흥하면서 대세는 잡지로 기울었다. 비록 단명한 졸속 기획도 많았지만, 시장의 형성과 경쟁구도의 강화 속에서 정기적인 창간 러시가 일어나며 풍부한 지면이 형성되었다. <<요요>>, <<미르>>, <<댕기>>, <<터치>>, <<윙크>> 등을 위시한 수많은 잡지들이 90년대 초반에 창간되었다. 이들 순정잡지들은 초반에는 비슷한 성향의 재탕에 불과했으나, 경쟁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점차 연령별 취향별 세분화를 시도해 나아가 성인여성만화를 표방하며 98년 창간된 <<나인>>에서 완연히 꽃을 활짝 피우게 되었다. 9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아동성향 순정지 역시 약진하여, <<밍크>>, <<파티>>, <<비쥬>> 등으로 이 시기 순정만화잡지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성인만화2) 영역의 90년대는 신문지면의 성장과 함께 개막했다. 90년의 스포츠조선 창간은 스포츠신문 간의 경쟁구도를 심화시켰는데, 뉴스거리가 한정된 스포츠 연예 소식보다는 연재만화 분야에서 오히려 차별성이 부각되었다. 그 결과 스포츠신문 만화의 터줏대감들이었던 고우영, 강철수 등의 명성과 함께, 이두호, 허영만, 이현세 등 80년대 극화풍 만화계를 풍미한 굵직한 이름들이 스포츠신문에서 이름을 비추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타 만화분야의 대본소 쇠퇴와 잡지창간 붐은 결국 95년도에 성인만화 영역에서도 효과를 발휘하여 중견 작가진들이 주주로 참여한 격주간지 <<미스터블루>>라는 결실로 나타난다. 같은 해 연령별 세분화를 노리고 있던 대형 만화잡지 출판사들 역시 성인만화 영역으로 확장을 꽤하여 <<소년챔프>> 브랜드의 대원에서 <<트웬티 세븐>>, 그리고 <<아이큐점프>> 브랜드의 서울문화사에서 <<빅점프>>를 창간했다. 이들 잡지들은 새로운 90년대적 취향과 80년대 대본소와 <<만화광장>> 류 잡지들의 전통적 성인 독자들의 만화 독서 성향을 동시에 충족시켜주기 위한 균형점을 모색해 나아가며 시행착오를 거듭하다가, 90년대 말의 여러 산업적/사회적 악조건 속에서 조락하고 만다.
가히 잡지의 춘추전국시대라고도 볼 수 있는 90년대에는 이외에도 <<코믹테크>>, <<만화창작>>등 만화 관련 잡지들이 창간되었으며, <<애니메이툰>>, <<모션>>, <<애니테크>>, <<한국판 뉴타입>>등의 애니메이션 전문지도 제한적으로나마 활성화되었다. 또한 이후 글에서 다시 다루고자 하는 독립만화 성향의 잡지들인 <<오즈>>, <<히스테리>>, <<화끈>> 등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무협에서 강세를 보인 홍콩 및 대만 만화를 전문적으로 다루기 위하여 92년 창간되었던 <<천하만화>> 등의 잡지 역시 90년대 잡지시장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2. 90년대 후반과 문화산업 논리 지배
90년대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키워드는 ‘문화산업’이다. 때로는 그것은 때로는 신지식인이라는 캠페인 표어와 붙어 다녔으며, 때로는 원소스 멀티유즈라는 방법론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기도 하며, 결국 문화콘텐츠라는 국산 신조어로 귀결되었다. 나아가 90년대 후반 전국을 강타한 경제적 침체의 물결은 산업으로서의 문화라는 개념을 한층 더 부채질했고, 산업적 효용성은 대중문화예술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판단의 척도로 정착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만화의 90년대는 사회적 지위, 시장의 관심, 실제 산업적 가치 등의 다양한 시각들이 서로 어긋나는 모순적인 시기로 마무리 지어졌다.
산업적 맥락이 만화계 전체에 거대한 충격파를 던졌던 가장 극명한 사건은 <드래곤볼>을 필두로 한 일본 만화 직수입 물결
3) 이었다. 이전에도 물론 한국만화는 일본만화의 영향을 계속 받아왔고 또한 해적판의 형식으로 많은 유입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공식적인 문호개방으로 들어온 <드래곤볼>의 히트는 만화의 창작 및 유통구조에 있어서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냈다. 잡지 연재과정에서 단행본을 출간하는 연계 구조가 한층 보편화된 것은 물론, 단기적 상업적 성공을 노린 해적 출판을 엄청나게 성행시켰다. 호호샘 코믹스, 그림터, 구호 등 다양한 해적판 프로덕션들은 기존 해적판 출판사들이 표현수위나 정서적 이질성 등을 우려하여 손대기 꺼려했던 <북두의 권>, <시티헌터> 등 일본의 오락성 높은 대형 인기작들을 거리낌 없이 쏟아내었다. 이것 역시 연속 히트를 기록하자 일본만화 번역출판은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 정식 라이센스 수입을 하는 잡지 출판사의 경우도 처음에는 단행본 출간을 위해서 먼저 잡지 연재를 거치는 방식을 취하다가, 96년 이후부터는 이러한 물량공세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연재 없이 곧바로 단행본을 출간하는 패턴을 확대해나갔다. 그 결과 만화 단행본의 종수가 엄청나게 늘어났으며
4) , 그 중 일본 만화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약 60%까지 증가했다. 하지만 일본만화와의 경쟁이 없고 종수가 많은 대본소 만화를 제외한다면 이 점유율은 훨씬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나아가 이에 발맞추기 위한 한국만화의 물량 역시 증가했고, 이러한 붐 속에서 만화는 엄청난 외형적 성장을 거듭하여 만화의 산업적 효용성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성공했다.
90년대 후반 만화시장의 외형적 성장과 관련된 또 하나의 키워드는 도서대여점이다. 대체로 만화단행본은 발간주기와 권당 열람시간이 빠르며, 원가가 낮고 시리즈물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여타 문자서적보다도 대여점의 운영방식과 궁합이 잘 맞는 편이다. 정작 속칭 ‘만화방’이라고 불리우는 대본소들이 유통망의 한계와 문화적 취향의 변화로 쇠퇴를 맞이할 때, 도서대여점들은 실질적인 만화대여점으로 빠르게 전환해 나아갔다. 출판사들의 입장에서 이들은 독자대상 판매량을 감소시키는 존재이기에 “대여점에서 책을 빌리면 세균이 감염된다”는 논리까지 동원하는 등 90년대 중반까지 노골적인 적대관계를 표명했다. 하지만 단행본 출간 종수의 급격한 증가 속에서, 출판사들은 대여점이 수천부 이상의 초판 물량을 고정적으로 소화해주는 탄탄한 소매시장이라는 점에 착안, 실질적인 공생관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즉 대형출판사들을 위주로, 작품의 품질관리나 치밀한 마케팅 기획보다는 종수에 기반한 물량 자체에 집중하는 출판 관행이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97년 IMF 금융관리체제의 여파로 많은 실업자들이 저자본 저기술 창업의 출구로 도서대여점을 시작하여, 일시적으로 대여점의 숫자가 급증했던 것 역시 이 경향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대형출판사들은 서울문화사의 서울미디어랜드, 대원의 학산문화사 등, 잡지를 위시한 출판 라인 자체를 확장하기 위한 자회사를 키워냈다.
5) 또한 98-99년도 시기에 즈음하여 시공사, 삼양, 대명종 등을 위시한 여러 기존 문자 출판사와 대본소 만화 전문 출판사들이 속칭 ‘코믹스’ 판형으로 불리우게 된 만화단행본 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질적 수준 관리를 도외시한 일방적인 외적 성장은 이내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는데, 거품효과 제거 및 출판업 전반의 불황으로 인하여 도서대여점이 감소하면서 실질적인 대여점 공급용 단행본 물량에 의존하던 주류 만화시장 역시 침체국면에 들게 되며 90년대를 마무리했다.
90년대 후반의 움직임으로 특기할 것은 바로 높아진 관심과 사회적 지위 사이의 괴리다. 만화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허황됨으로, 어린 독자들도 흡수하는 포용력이 유치함으로, 빼어난 오락성이 불량함으로 왜곡되어 탄압과 통제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은 박정희식 문화억압정치의 전형적인 부산물이며, 상당히 오랜 경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70년대 이래로 주기적으로 대대적인 불량만화 소탕 캠페인이 벌어지곤 했는데,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는 사건을 촉발점으로 하고 그것의 원흉으로 만화를 상정, 도덕적 비난을 집중시키며 사회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식이었다. 90년대는 특히 학부모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만화의 물량 증가 및 경쟁적 표현 수위 상승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는데, 조직적 담론구성으로는 YWCA의 만화 모니터 활동이 대표적이었다.
6)
97년을 뒤흔든 속칭 ‘일진회’ 사건은 조직화된 학원폭력의 원흉으로 만화를 지목하여 오랜 악습을 반복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그 결과로서 만들어진 청소년보호법 조례는 이후 만화계의 판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청보법은 만화를 청소년 유해 품종 가운데 하나로 분류하고 있으며, 성인만화로 선별된 작품에 스티커표시를 하고 별도 서가로 비치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도록 정하고 있다. 이것은 만화 자체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산업적으로도 소형 서점에서 만화가 사실상 사라지도록 하는 악재로 작용했다. 나아가 검찰이 이현세의 상고사 환타지 <천국의 신화>를 음란물 유포죄 명목으로 기소하도록 하는 법적 근거가 되어주었다. 수년간의 법정 싸움 끝에 2004년에 최종 무죄 처리되기는 했지만, 과정상의 직접적 영향으로 성인만화잡지 <<미스터블루>>가 폐간되는 등 이미 위축되고 있던 성인만화 장르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외에도 이 시기에는 작가, 출판사, 스포츠신문 등을 대상으로 하는 무더기 검찰기소가 줄이었다. 문화산업으로서 육성해야 한다는 당위와 여전히 낮은 사회적 위상이 공존하는 기묘한 상황이 90년대 후반에 연출된 것이다.
높아진 관심과 산업적 불황 사이의 괴리 역시 90년대 말의 모순적 상황을 구성하고 있다. 90년대 후반의 거품호황을 지나서 만화산업의 성장은 명백하게 시장포화점에 도달하고 있었고, 대여점 역시 98년의 11223개소를 기점으로 2000년에는 6200개까지 줄어드는 급격한 감소추세를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대형출판사들은 오랜 기간 단행본 물량에 의존하다 보니 새 시장층을 개척해내는 일에 둔감해져 있었다. 이러한 시장 위기는 97년의 사회적 파동과 함께 성인 잡지시장에 먼저 타격을 주었는데, <<미스터 블루>>가 98년 3월 폐간된 이래로 같은 해에 <<트웬티세븐>>이, 그리고 00년에 <<빅점프>>까지 폐간되어 성인용 만화잡지의 명맥이 사실상 끊어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업 경쟁은 더욱 강해져서, 신규 사업 진입자인 시공사, 삼양, 대명종 등이 일제히 신규 잡지를 창간했다. 단행본 물량을 성공의 주요 척도로 하는 판도 속에서 잡지는 완성된 상품이라기보다는 단행본 작품들을 소개하는 곳에 불과하다는 ‘팜플렛론’이 지배했고, 건실한 만화출판사로 인정받아 해외 라이센스 취득에 유리해지기 위해서는 여하튼 잡지를 발행하고 있어야 한다는 업계속설이 맞물린 것이다. 그 결과 99-2000년 사이에 여러 잡지들이 졸속으로 창간되어 이내 사라지는 패턴을 걸었고, 급격한 인터넷 붐 속에서 온라인 만화잡지까지 가세하면서 시장의 형국을 더욱 파악하기 힘든 곳으로 변모시켰다. 이러한 혼란은 더욱 가중시킨 것은 바로 원소스 멀티유즈 논리의 도입으로, 실제 산업적 성과를 검증받지 않고도 주변의 투자를 부추키는 특이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만화의 핵심적인 가치를 프랜차이즈 비즈니스의 중추역할에서 찾는 이러한 논리는 만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일으키는 장점이 있었지만, 정작 만화예술 자체의 매력을 호소할 수 있는 기반을 약화시켰다는 폐단도 동시에 발생시켰다.
3. 애니메이션 부흥의 시행착오
90년대는 애니메이션 부흥의 각종 시행착오가 농축되었던 시기다. 80년대 후반 내내 위축되어 있던 극장 애니메이션이라는 분야는, 91년 디즈니의 <인어공주>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다시금 가능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문화산업이라는 논리를 업고, 애니메이션은 영화의 대중적 호소력과 캐릭터 프랜차이즈의 산업적 파급력을 동시에 지니는 매체로 조명 받았다. 이에 오랜 일본 하청작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체 작품 제작 대한 자신감이 충만해 있던 한국 애니메이션계는 야김찬 자체적 극장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들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90년대 들어서 더욱 현저해진 인건비 상승에 따른 하청 물량 감소라는 산업적 위기감도 작용했다.
90년대의 극장 애니메이션 붐은 새로 발굴한 청소년/성인 관객층에 대한 공략을 목표하며 시작했다. 그리고 95년을 전후로 1차 극장 애니메이션 붐이 일어나서 여러 작품들이 일거에 쏟아졌다. 가장 먼저 개봉한 것은 94년의 <블루시걸>이었는데, 본격 성인 애니메이션이라는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에 힘입어 전국 45만명 관객동원이라는 당시기준으로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성인취향의 코드로서 성애와 폭력을 적극적으로 내세운 첩보 모험물으로, 90년대 한국 애니메이션의 재기라는 상징적 의미를 평가받아 서울정도 600년 타임캡슐에 안장되는 영예도 누렸다. 하지만 작품의 품질은 이야기 영상 연기 등 전 부문에 걸쳐 매우 조악한 수준에 불과하여, 졸속 기획과 화려한 마케팅으로 관객을 우롱했다는 악평을 들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90년대화된 청소년 취향을 노리고 등장한 <돌아온 영웅 홍길동>, <헝그리 베스트5>, <협객 붉은매>, <슈퍼차일드> 등이었는데, 모두 타겟층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소품으로 단명하고 말았다.
90년대 극장판 중 가장 주목받았던 프로젝트는 바로 <아마게돈>으로, 이현세/야설록의 인기 청소년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었다. 개봉시기는 96년으로 가장 늦었지만 실제 기획은 가장 먼저 공개되어 관심을 집중시켜왔던 작품으로, 인류의 기원과 우주문명, 지구의 멸망을 구원하기 위해서 미래로 파견되는 초인이라는 큰 스케일의 이야기가 담긴 SF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집중시켰다. 제작이라는 측면에서도 선녹음 작업, 컨소시엄식 투자 유치 등 여러 선진적인 시도를 하는 등, 기대주로서의 위용을 과시했다. 하지만 막상 실제로 완성된 작품은 오히려 이야기 구성이라는 기초적인 부분에서 심각한 난조를 보이며 실망을 자아냈고, 따라서 개봉 성적 역시 초라했다. 이렇게 해서 많은 기대를 자아냈던 첫 번째 극장판 애니메이션 붐은 실패했다.
1차 붐의 실패 이후, 대상연령층을 대폭 낮춘 작품들로 96-97년간 다시금 여러 시도들이 집중되었다. 반응도 작품 완성도도 가장 양호했던 것은 96년의 <아기공룡 둘리 - 얼음별 대모험>이었는데, 인기 캐릭터와 탄탄한 이야기구성이라는 핵심을 지켰기에 이러한 성과가 가능했다. 나아가 <아마게돈>을 제외한 이 시기 개봉작들이 대부분 일본인 스텝에 의해서 제작되었던 것에 비해서 순수 국내제작 작품임을 강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동영화에 대한 극장가의 지분 자체가 사실상 소멸되어있던 90년대 중반 영화계의 상황과 맞물리며, 제한적인 성공에 머물렀다. 이후 교훈적인 내용의 위인전이라는 컨셉으로 <난중일기>가 개봉되었고, 7-80년대를 풍미한 김청기 감독이 들고 온 <왕후 에스더>와 <임꺽정> 등이 이어졌다. 물론 반응은 지극히 미미했으며, 작품의 완성도 역시 아무리 아동 대상이라도 90년대의 취향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는 시대착오에 가까웠다. 대기업의 투자로 화제를 모았던 <전사 라이언> 역시 비슷한 결과만을 냈다. 80년대처럼 방학철 이벤트로서 고정 관객층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90년대적 문화 취향을 풍부하게 제공해주고 있는 여타 극장 영화 일반과 경쟁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서 한겨레신문 시사만화로 유명세를 떨친 박재동의 야심찬 프로젝트 <오돌또기>가 닻을 올렸으나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표류하게 되는 등, 여러 기획들이 결국 기획에 머무는 모습을 보였다.
TV의 경우는 아동이라는 고정 시청자층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에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80년대 후반의 기조를 이어받아, 90년대에도 KBS는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계속했다. 1주일에 25분짜리 1편이라는 많지 않은 시간배정이었으나, 국산 TV 애니메이션이 시청자들과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는 귀중한 통로였던 것이다. 89년 <원더키디>의 해외 수출을 염두에 둔 무국적성이 국내 반응 미진 속에 침몰한 뒤, 배추도사 무도사라는 한국적인 캐릭터들이 전래 동화를 들려준다는 내용의 <옛날옛적에>로 이미지를 회복하였다. 이후에도 유명 한국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시리즈물 <영심이>, <날아라 슈퍼보드>, <사랑의 학교> 등이 명맥을 유지했다. 특히 서유기를 모태로 한 현대적인 환타지 모험물인 허영만 원작 <날아라 슈퍼보드>는 아동층의 강력한 호응 속에 이후 3개 시리즈가 더 만들어지는 인기를 누렸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을 ‘사오정’이라고 부르는 문화적 유행까지 탄생시켰다. MBC는 이두호 원작 <머털도사>의 성공 이래로 연재물보다는 특집방송용 장편 작품에 집중, <머털도사> 연작, <장독대>, <요정핑크> 등 여러 작품들을 활발하게 제작했다. 90년 개국한 SBS는 기본적으로는 최신 일본 애니메이션의 수입에 주력했지만, 자사 마스코트를 주연 캐릭터로 삼은 입체 애니메이션 <빛돌이의 우주 2만리>를 통해서 야심찬 자체제작의 첫발을 딛었다. 하지만 극장판의 붐 속에서 TV시리즈 역시 상대적인 축소를 겪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극장판들의 연이은 실패로 애니메이션 전반에 대한 투자가 감소되어 갔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케이블 TV의 개국과 애니메이션 전문채널 투니버스의 도입은 새로운 희망을 품게 했다. 하지만 투니버스의 야심찬 기획인 SF환타지 <영혼기병 라젠카>는 역시 스토리상의 난맥상을 드러내며 시청자들과의 교감에 실패하는 등 아쉬움을 남겼다.
이런 와중에서 틈새 시장을 노린 것이 바로 비디오 전용 애니메이션(OVA)이다. 양영순의 동명 코믹 에로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누들누드>가 그것으로, 98년 출시되어 상당한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성인용 에로 애니메이션이 일정한 지속적인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7)
90년대 애니메이션 환경의 또 다른 특징은 기술적 혁신이다. 오랜 하청작업으로 축적된 전통적 원화 및 동화 작법에 대한 노하우와 더불어,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한 다양한 기법들이 개발되었다. 특히 3차원 기법의 경우 전통적인 2차원에 익숙한 일본보다도 먼저 일정 숙련도에 올라서는 등 각광받았다. 이것은 특히 저예산 작업에도 유리하게 작용하여 교육기관 등을 통한 일련의 독립작가군의 등장을 독려했다.
4. 향유 환경의 진화
80년대는 대중문화가 부흥하기는 했지만, 획일적으로 주어진 몰취향적인 집단 유행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은 87년 민주화와 88년 올림픽을 통한 국제적 감각 개방을 계기로 하여 급격하게 바뀌어 나아갔고, 90년대의 문화수용자들은 다양한 개별적 취향들을 능동적으로 주장하는 향유자로 진화했다. 애초부터 독자와 가까운 거리를 자랑하던 만화라는 분야에서, 향유자의 권한 확대는 창작 및 생산 양식 자체에 곧바로 영향을 미쳤다. 소년향 만화 잡지에서 편집시스템에 대한 독자 목소리 반영 확대가 하나의 예다. 물론 80년대에도 잡지에서 독자 엽서 집계를 통해서 인기순위를 책정하는 일은 있었지만, 경쟁이 심화되고 작가군이 다양해진 90년대에 작품의 지속과 중단에 그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이것은 주간이라는 빠른 발간주기, 공모전을 통한 신인등용, 잡지 내 완전 경쟁 시스템 등 본격적인 일본식 잡지 편집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다. 또한 당대의 대중문화 현상을 민감하게 반영하는 움직임 역시 확연해졌다. 특히 작가군의 연령이 한층 내려가며 독자들과의 동세대성이 증가하면서, 또래 취향문화에 대한 작품 내 참조와 반영이 긴밀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기성작가군 역시 이들과의 경쟁을 위하여 앞 다투어 그런 소재들을 다루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연재만화 전반에 동시대 대중문화적 유행이 고르게 반영되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작가데뷔를 하여 일본 대중문화 흡수를 포함, 가장 동세대적인 감수성을 그려냈던 이명진의 <어쩐지... 저녁>의 경우는 당연하거니와, 중견작가 김영하의 전방위 대중문화 패러디물 <짬보람보>만 보더라도 불과 수년전에 <펭킹라이킹> 같은 전형적인 80년대식 명랑만화를 그린 작가의 것이라고 보기가 힘들 정도였던 것이다.
만화를 통한 소통경로 자체가 확대 및 세분화된 것 역시 취향의 반영이다. 80년대의 대표적인 만화전문지 <보물섬>만 해도 순정 지향 만화, 소년향 만화, 명작동화류 만화 등이 하나의 지면에 혼재되도록 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연령별로도 청소년 지향인 것과 아동 지향인 작품들이 구비되어 있는 종합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향 독자에게 특화한 <아이큐점프>, 순정향으로 특화한 <르네상스> 등의 창간은 이러한 판도를 일거에 바꾸었다. 성별, 연령별 취향에 따른 분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그쪽이 독자 동원 및 결속에도 더 효율적이라는 점을 깨달게 된 것이다. 이러한 판세 변화 과정에 적응하지 못한 기존 ‘종합지’들이 하나씩 폐간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것은 독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만화를 모아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자신이 선호하는 장르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철저하게 벽을 쌓게 되는 단점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단점은 이후에 취향의 과잉세분화와 만화문화 전반의 매니아화라는 문제를 야기시켰다.
취향의 전체적 발달에는 일본만화의 공식적인 영향력 역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주류 만화계는 80년대를 거치면서 극심한 잡지간 경쟁 속에 다양한 세부 취향 장르와 효율적 장르공식을 창조해낸 바 있다. 그리고 정식본과 해적판을 아우르는 일본만화 수입의 물량공세 속에서 독자들의 눈높이는 급격하게 상승했다. 장르적 완성도에 대한 안목이 까다로워졌으며 취향 역시 급격하게 세분화되어 갔다. 특히 90년대 초창기에는 정식본보다 해적판의 물량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500원이라는 낮은 가격에 문구점 유통을 한 소형 판본이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8)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일본만화에서 개발시킨 ‘웰메이드’ 장르규칙들을 먼저 도입해내는 국산 작품들이 큰 인기를 선점할 수 있었다. 일본식 학원 폭력물, 속칭 경파물 캐릭터들의 구성원칙을 효과적으로 도입한 이명진의 <어쩐지... 저녁>과 박산하의 <진짜 사나이> 등이 단행본 판매 누계 100만부를 돌파했고, 80년대 후반 이후 일본 소년만화의 격투형 대결구조를 무협 장르의 틀에 맞추어 넣은 소주완/지상월의 <협객 붉은매> 역시 가담했다. 따라서 장르규칙과 동세대 취향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겸비하기 유리한 젊은 작가층이 부각되었고, 공모전의 도입은 그것을 더욱 유리하게 만들었다.
취향과 안목으로 무장한 독자들은 스스로 커뮤니티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중 먼저 주목할 부분은 아마투어 창작 커뮤니티인데, 80년대 후반~90년대 초 무렵에 지역 및 학교 단위의 만화창작 동아리들이 번창했다. 특히 취향별로 분화된 잡지들은 독자 홍보란을 통해서 이들의 인력모집과 홍보에 있어서 좋은 매개체가 되어주었다. 또한 “90년대의 순정 스타들은 모두 <르네상스> 독투란에서 데뷔했다”는 속설이 생길 정도로, 독자투고란에서 그림실력을 자랑하던 이들이 수년 후 정식으로 데뷔하는 현상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나아가 동호회 PAC 출신인 강경옥의 경우처럼 80년대 유명 동호회 활동을 거친 작가들이 프로로 데뷔해서 두각을 나타내자 동인 창작에 대한 관심은 더욱 확대되었다. 그 결과 90년대에는 소년향 만화, 순정만화를 불문하고 동호회 출신 인력들이 폭넓게 판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들의 결속력 역시 강화되어, 80년대에는 ‘크레파스연합’ 등의 이름으로 소규모 연합체를 이루며 활동하는 것에 그쳤던 것에 비해 89년에 전국규모의 정식 연합회인 ACA(아마투어 만화인 연합)이 결성되어 정기적 회지 판매전과 축제행사를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90년대 들어서 PC통신과 함께 더욱 활성화되었다.
나아가 독자들은 결코 창작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향유 일반에 대해서도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이들은 신간 정보, 작품 감상, 해외 동향, 각종 도서자료 등을 폭넓게 교환하며 향유자의 힘을 키웠다. 이전에 학급 내, 기껏해야 학교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정보교류는 PC통신의 붐과 함께 전국 차원으로 퍼졌는데,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 주류 PC통신 서비스회사는 물론 각종 사설 BBS에서도 만화 애니메이션 향유 커뮤니티는 확실한 인기 아이템이었다. 만화는 지극히 대중적이면서도, 접근방식에 따라서는 상당히 매니아 성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등 취향 기반 대중문화로서의 속성이 강하다. 또한 주류 미디어에서 다루어지는 영역이 적기 때문에, 광범위한 정보 공유와 세밀하게 취향별로 분화된 커뮤니티를 지향하는 초창기 PC통신인들의 성향과 잘 부합했건 것이다. 이들은 온라인 정보공유와 오프라인 상영회를 통해서 커뮤니티성을 키워나갔고, 이 과정에서 전문적 식견을 가진 사람들이 규합되는 경우도 발생하여 90년대 후반 이후 업계에서 평론가나 기획자로 활약하는 이들도 다수 등장했다. 초창기의 온라인 동호인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서 일종의 얼리어댑터 역할을 하며 만화/애니메이션 산업의 수요층에 대한 중요한 참조자료로 작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 분야에서 매니아층의 질적 수준이나 시장의 양적 규모를 과대평가 하도록 만든 단점 역시 가지고 있었다. 또한 초창기의 향유정보 공유 차원에서 벗어나, 90년대 말에는 불법 복제 자료의 공유가 급증하여 오히려 산업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증가했다.
취향을 지켜내고 보장받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행보 역시 이들을 통해서 촉발되었다. 90년대 말 이후, 독자들이 업계와 정책추진에 직접적인 발언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일환으로 TV 애니메이션 방영시간 이동 운동, 극장 애니메이션 재개봉 운동, 절판 도서 재판 서명운동, 관련법 재편 촉구 등 다양한 활동이 이어졌다. 정작 업계가 해내지 못한 부분에 향유자들이 직접 팔을 걷고 나선 것인데, 이러한 경향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또한 향유 방식 역시 더욱 포괄적으로 변모하여, 좋아하는 작품 및 취향을 바탕으로 한 동인 창작, 캐릭터 분장(‘코스프레’), 팬시물품 제작 유통 등 다양한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5. 관련정책과 기관의 범람
우선 만화 심의제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 90년대의 시작은 여전히 암울했다. 한국 간행물 윤리위원회는 89년을 기점으로 이전의 법정기구에서 민간 사단법인으로 전환한 바 있으나, 여전히 사전심의를 실시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만화 전 분야에 걸쳐서 절대적인 효력을 발휘했다. 당시의 핵심 판단기준이었던 89년도의 실천요강은 “만화를 아동의 인격과 개성 도야에 공헌을 하는 내용이어야 한다”고 명문화시켜놓았다. 심지어 “만화가 아동에게 아무 보탬을 줄 수 없는 저질 또는 무가치한 내용이어서는 안되며, 작가는 저급한 필명을 쓰면 안된다”고 세세하게 잡아주고 있을 정도다. 만화 내용에 대한 내용분석을 지속적으로 실시해서 이러한 움직임에 실체적 근거를 제공해준 것은 YWCA 청소년 유해환경 감시단 등 시민운동 진영이었는데, 이들과 대립하며 만화의 위상을 회복시켜줄 체계적인 운동은 세력이 미약했다.
만화의 물량은 늘어나고 향유층의 안목이 달라졌으며, 산업적 관심 역시 증가하여 담론과 실제의 괴리가 커지고 있던 차에, 97년 ‘일진회 사건’을 계기로 청소년 보호법
9) 이 발효되었다. 이 사건들을 계기로 사전검열은 사후심의제로 바뀌고 간륜은 법정기구로 복귀했으며, 성인만화 판단 여부는 작가 자율에 우선적으로 맡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성인용 만화에 대한 소매 차원의 제한 규정이 강력해지고, 성인용을 표방하지 않았으나 사후심의에서 성인용으로 규정되어버릴 경우에 대한 불이익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는 실질적으로 만화 창작과 유통 자체를 심각하게 경색시켰다. 제도 도입 초창기의 우려와는 달리 간륜에 의하여 성인만화로 사후 규정되거나 아예 ‘청소년 유해물’로 낙인찍히는 경우는 제한적이었지만, 창작 상황을 개선시키지는 못했다.
저작권 측면에서 90년대는 암중모색의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문화산업논리, 특히 원소스 멀티유즈 개념이 적극적으로 주창되면서 창작자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어떻게 활용되고 어떤 이익을 낳는지에 대한 폭넓은 고민을 해야 했다. 잡지 고료를 받고 혹시 단행본으로 만들어질 때 약간의 작업비를 더 얻어내는 정도에 그쳤던 주먹구구식 관행과, 종합 문화산업적 저작권 라이센스 산업의 개념이 혼재되어 있는 시기가 온 것이었다. 저작자의 허락 없이 특정 작품과 캐릭터를 팬시사업에 활용하는 경우에 대해서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온라인 만화방의 저작권료 지급 문제도 점화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일찌감치 캐릭터 프랜차이즈에 입문한 <아기공룡 둘리>는 ‘둘리나라’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저작권 사업 개념을 서둘렀고, 개인, 단체, 사업체 차원에서의 움직임들이 뒤따랐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후 2000년대에 발생하게 될 각종 저작권 개념 재정립의 중요한 기틀이 되어주었다.
지원정책의 측면에서 볼 때, 제작 지원 사업의 도입이 가장 특기할 만 하다.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체들은 문화콘텐츠 산업의 부흥을 위하여 가장 가시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지원사업들은 크게 창작 지원을 위한 공간 및 설비 임대, 그리고 직접적인 자금투자 등으로 이루어졌다는데, 이러한 취지에서 98년도에 부천시가 부천 만화정보센터를, 99년도에 서울시 산업 진흥재단이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를 설립했다. 98년에 문화체육부에서 문화관광부로 재구성된 문광부 역시 문화상품과(현 문화콘텐츠 진흥과)라는 부서를 통해서 직접적인 지원책을 강구해나갔다. 그리고 2000년에 재단법인 문화콘텐츠 진흥원을 설립하여 이러한 움직임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특히 부천시의 경우는 지원기관으로서의 부천만화정보센터를 설립함과 동시에 만화도서관 건립, 프랜차이즈 사업을 육성하기 위한 사업체인 PCN 등 다각도로 만화 애니메이션 지원에 투자하여 ‘만화도시’라는 도시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만화계와 공공기관 양측의 전문성, 일관성, 지속성의 문제가 빈번하여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지원정책과 사회적 관심의 또다른 형태는 바로 축제 행사다. 90년대 후반은 실로 행사들이 난립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급증했다. 서울시에서 주최하여 95년 시작된 서울 국제 만화 애니메이션 페스티벌(SICAF)를 필두로, 97년 동아 엘지 국제 만화 애니메이션 페스티벌(DIFECA)와 춘천 만화축제(CAF) 등이 생겨났다. 또한 98년 말 설립과 동시에 부천 만화정보센터 역시 부천 만화축제(BICOF)를 개최했고, 나아가 이듬해에는 부천 학생 애니메이션 페스티벌(PISAF)를 별도로 개최하는 등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행사들은 만화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난립에 따른 중복과 행사 내실의 전문성 부족 등 고질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면모도 보였다. 공모전 역시 활성화되어, 각 잡지사의 신인공모전은 물론 스포츠조선 등 신문사의 카툰 중심 공모전, DIFECA 공모전이나 신한은행의 ‘새싹만화상’ 등 민간 스폰서 역시 활성화되었다. 91년부터 8년간 실시된 스포츠서울의 신춘문예 만화평론 부문 역시 이 시기의 만화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현상이다. 이외에도 발표된 작품 가운데 수여하는 출판만화대상 등의 시상식 역시 도입되었다.
이러한 붐과 밀접하게 연관된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전문 교육기관의 증가다. 최초로 만화관련 개학 학과가 생겨난 것은 90년 공주문화대학이었으나, 90년대 중반 이후 지방 사학 설립 붐 및 문화산업 논리에 따라서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학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 결과 99년 당시에는 4년제 14개, 2년제 17개 학과가 집계되었고
10) , 일반 미술 대학에서 만화관련 전공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모두 포함시킬 경우 약 100여개까지 달한다는 비공식 통계도 나왔을 정도다. 나아가 애니메이션 특성화 고등학교 설립계획까지 진행되어, 2000년 하남시에 한국 애니메이션 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물론 이들 중 대다수는 애니메이션 기술, 즉 움직임을 창조하는 영상기술 자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었기에 실제 장르문화예술로서의 만화/애니메이션을 엄밀하게 다루는 학과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특히 만화 전공의 경우 사실상 10여 곳에 지나지 않았으나
11), 이 분야에 대한 사회적 인식 향상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급격하게 불어난 학과 수에 비하여 내실을 기할 수 있는 커리큘럼이 미비하고 전문 교육 인력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누적되었다. 출판문화인 만화와 영상문화인 애니메이션 교육을 무리하게 묶어서 병행하는 폐단은 물론, 학문적 교수능력보다는 창작계와 응용미술학계의 명망을 척도로 교수진을 꾸리는 등 한계가 작용한 것이다. 게다가 산업적 거품의 제거로 인하여 장기적 진로 역시 불투명하여 90년대 말을 지나면서 애니메이션 학과는 영상 기술 분야로 다시 전문화하고, 출판만화 관련 학과나 커리큘럼은 장기적 침체 국면에 빠지는 문제를 야기시켰다.
90년대의 혼란스러우면서도 활발한 움직임 속에서, 각종 이익단체 역시 다양하게 조직화되었다. 우선 작가 단체로서는 오랜 역사를 지닌 한국만화가협회(만협)와 신생 우리만화연구회(우만연)가 양대 체제를 구축했다. 우만연은 88년 설립된 민중문화적 색채를 강하게 지닌 바른만화연구회의 연장선으로, 만화 및 애니메이션 작가들이 주가 되고 평론가, 제작자 등을 아우르며 92년도에 우리만화협의회로 출범했다가 95년 현재의 모습으로 확대 개편했다. 이들은 이후 각종 공공 행사에서 만화계를 대표하는 자격을 부여받았는데, 90년대 초반의 활발한 담론 활동과는 달리 중반 이후에는 다소 침체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97년 만화탄압에 대한 비상대책위원회 운동에서 드러나듯이 작가 권리에 대한 조직적 대응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대두되었는데, 그 결과 같은 해 젊은작가모임(젊작모)과 한국여성만화가협회(여만협)가 설립되었다. 제작자들 역시 90년대 들어서 만화애니메이션제작가협회, 잡지만화출판인협회, 한국만화출판인협회, 만화방 업주들의 모임인 만화진흥공동협의위원회 등 다양한 단체를 결성했으며, 학술 분야에서도 한국만화문화연구원
12), 만화평론가협회,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등이 90년대 후반을 장식했다. 단체들의 실제 내실에는 편차가 있었지만, 실로 다양한 단체들이 활기찬 실험을 거듭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다음 글에서 계속...]
------------------------------
[각주]
1) 90년대 이후, 문화 창작품의 산업적 활용인 속칭 문화콘텐츠 산업을 독려하기 위하여 동원된 대표적인 논리. 헐리웃 영화 <쥬라기 공원> 및 관련 프랜차이즈 사업의 대형 히트를 일부 언론에서 단순 수치비교를 하며 “쥬라기 공원 한편의 경제효과가 현대 자동차 1년치 수익과 맞먹는다”고 보도한 것에서 유래한다.
2)‘성인만화’는 편의상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명칭이기는 하지만 정당한 비평적 용어와는 거리가 있다. 비록 성인 취향의 만화를 나타낸다는 의미 자체로서는 문제가 없지만, 역으로 만화 일반의 이미지를 아동용/청소년용으로 한정시켜 놓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인만화라는 용어에서 오는 성적, 폭력적 과잉의 편견 역시 비평적 작업으로 극복해 나아가야할 대상이다.
3) 사실 국제 라이센스 계약을 통한 최초의 일본만화 수입작품은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삼국지>였지만(조선일보 1989.11.28), 주류 만화시장 전반을 견인하는 파급력과 이후 일본만화 수입 관행의 모델이 되어주었다는 점에서 <드래곤볼>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도 계약관계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내 연재가 시작되는 등, 저작권 관행은 한동안 혼란을 벗어나지 못했다.
4) 단행본 출간 붐이 가장 극적으로 전개된 95-98년 기간 동안, 해적판을 제외한 연간 만화 출판 종수는 95년 4699종 (전체 출판물 대비 점유율 14.6%), 96년 5592 종 (17.3%), 97년 6297종 (18.7%), 98년 8122종 (22%) 으로 증가해왔다. (2000출판연감, 대한 출판문화협회 발행)
5) 대여점용 단행본을 양산하다가 조락한 서울미디어랜드와 달리, 학산문화사는 <<찬스>>, <<부킹>>, 웹진 <<해킹>> 등 잡지 운영으로 내실을 기하며 90년대 말에는 서울문화사, 대원CI와 함께 업계 상위권의 경쟁자로 자리매김했다.
6)만화탄압에만 앞장섰다는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이들은 지속적으로 만화에 대한 산업통계 자료와 교육을 실시했다. 실제로 3차 만화자료집으로 명명된 <만화-너무너무 어려운 작업>(1991.5, 서울 YWCA 발간)을 보면 작가 및 평론가들의 만화 담론을 취합하여 정론지 역할까지 담당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만화, 성인만화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은 이들의 분석틀과 제언방향을 조악한 수준의 도덕률에 그치도록 했고, 결국 만화에 대한 편견을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동원되었다. 이들의 활동은 97년 청소년 보호법 제정 이후로 사실상 중단되었다.
7) 칼럼니스트 선정우는 ‘성인 애니메이션을 다시 생각하자’ (CT News, 2003.4.21일자)에서 성인용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들었다: 1) 저예산이기 때문에 불황에 유리하다 2) 해외 수출이 용이하다 3) 만약 성공할 경우 성인문화에 대한 불공정한 비난을 개선할 수 있다
8) 해적판 만화의 변천과 역할에 관해서는 필자의 졸고 ‘음지의 만화 - 해적판의 발자취’ (<세계만화정복>, 만화집단 두고보자 저, 2004)에서 보다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9) 청소년보호법이 만화에 행사하는 각 독소조항에 대해서는 1996.12.20에 실시된 한국만화 애니메이션 학회 창립 심포지움 발제문 <정부의 만화 심의정책 비판과 그 대안>(이재현)이 가장 정연하게 정리된 자료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서 발제자는 “...심의에 관한 정부의 정책적 역할은 정보검열자에서 정보제공자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간 정부정책에 대해서 만화계에 축적된 불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10) <가고 싶은 만화학과,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월간 만화창작, 99.10월호.
11) “4년제로 치면 상명대 만화전공, 목원대 만화예술전공,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순천대 만화예술과, 전주대 영상만화전공(쫌 모호하군요), 공주대학교 만화예술학부, 예원대 만화게임영상학부(모호하군요 역시.) 조선대 만화애니메이션학부로 8곳 정도이며 2년제로 치면 청강문화산업대학의 만화창작과, 경민대학의 만화예술과, 부산예술문화대학의 만화예술과, 인덕대학의 만화애니메이션전공으로 4곳 정도입니다. 물론 세부 전공으로 만화를 가르치는 과는 있으나 적어도 과 이름에 만화가 적시되어있는 곳을 고르면 겨우 12곳 정도라는 말이죠.” (박인하, http://blog.naver.com/enterani)
12) 한국 만화역사를 총괄정리하기 위한 프로젝트인 <한국만화통사>를 집필하기 위해 만화평론가 손상익 등에 의하여 결성된 ‘한국만화통사 편찬위원회’의 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