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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01] 서문 | 대하순정의 시대 - 딸들의 운명에 대한 한판 서사
여성만화프로젝트 - NO.01 04/06/14 12:10 난나
 
80년대에 발표된 우리 순정만화가 그 이전과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는 것과 맞물려, 이른바 새로운 '대하서사'라고 분류될 수 있는 작품들도 등장하였다. 해적판으로 소개되었던 [베르사이유의 장미]나 [올훼스의 창]의 인기를 업고 유럽 왕실을 배경으로 '운명'이나 '혁명'을 사건화하는 작품들이 이미 순정만화의 주류를 형성하던 시점이었다. 일본 소녀만화를 충실히 학습하던 젊은 여성 작가들은 그와는 또다른 대하서사를 꿈꾸게 된다. 여전히 '가슴 속의 유럽'을 시공간적인 배경으로 삼되 개인과 환경의 대립을 나름대로 똘똘하게 인식한 작품들을 창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황미나를 필두로 한 일련의 신진 작가들은 김숙이나 김동화, 이진주와 같은 기성작가들이 공주와 소공녀 혹은 요정과 여신에 대한 환상을 쉽고 단순하게 그린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스케일이 큰 이야기들을 짜 나갔다. 선배 작가들이 점령하고 있던 연재 공간 대신 이들의 만화는 주로 대본소용 만화로 제작되었는데, 당시 만화 연재가 허용된 어린이용 만화 잡지나 소녀 잡지에서 수용하기 어려웠던 다채로운 감정과 이의 깊이 있는 표현이 오히려 가능하게 된 셈이 되었다.

황미나의 82년 작 [굳바이 미스터 블랙]이 소녀 독자들에게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던 것은 익숙하게 건전했던 여타 순정만화와 다른 차원의 강렬한 러브 로망 때문이었다. 18세기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역사적인 정황이 맵시 있게 개입된 복잡 다단한 로맨스는 성적인 무드까지 강조되면서 박진감 있게 펼쳐졌다. 이제 드레스와 궁전은 더 이상 아동용 인형 놀이가 아니라 독자적인 문화 텍스트를 갈망하던 소녀들을 위한 미학적인 매개가 된 것이다.

이후 황미나는 장르를 넘나드는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이 가운데 [굳바이 미스터 블랙] 시기의 작품들, 즉 80년대 초반 발표한 [아뉴스데이]나 [불새의 늪]의 경우 현재까지 통용되는 대하 순정만화의 특성을 구축한 작품이 되겠다. (현실이건 가상이건) 국가적인 사건을 작품의 주요 동력으로 활용하며(물론 중심 사건은 로맨스가 된다) 인물이나 연애 방식에 성인 취향의 탐미적인 코드를 발라 놓는 것. 첫사랑의 순수로 출발한 로맨스는 주요 소재로 등장하기 마련인 전쟁의 격랑 속에서 드라마틱한 전설이 되어 버린다. 그 정서적 중심에 흐르는 것은 한국형 정한(情恨). 대하서사 만화는 예민한 소녀 독자들의 절대적인 지지에 힘입어 80년대 순정만화의 최고 인기 장르로 등극한다. 83년 김혜린이 [북해의 별]로 이에 합류하면서 대하서사 순정만화에서 공유되는 서사적이며 감성적인 특성은 '진정성에의 가능성'까지 보탤 수 있었다.

역사물의 성격에 가까운 이러한 대하서사가 순정만화의 선두에 서게 된 이유를 굳이 80년대의 실제적인 우리 사회 분위기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 그저 여성을 위한 만화가 스스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초기 진화한 결과일 뿐이다. 내면적 갈등보다 인물과 인물간의 첨예한 갈등을 주요 사건으로 두는 것은 이야기 구성의 초보 단계인 것이다. 미세한 심리 변화를 주요 사건으로 플롯팅하는 것은 전자의 성과가 상당히 진전된 후의 모던한 시도가 될 것이다. 주1)

이전의 순정만화들이 선과 악의 대립을 중심 사건으로 설정한 데에서 나아가 황미나와 김혜린의 작품들에 이르러 배경이 되는 시대적 상황이 개인을 억압하는 지점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시기 순정만화의 소재와 이야기 방식이 확실히 한 단계 진보했다는 의미이다. 물론 오늘까지 순정만화의 주인공들은 절대적 가치를 반영하는 평면적인 인물들이지만 순전한 질시와 시샘으로 이웃 국가를 침략해 피바다를 이루는 [아카시아]에서의 '페드라'와 같은 극악한 캐릭터는 유사한 소재의 최신작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대개 로맨스로 촉발되는 캐릭터의 고난과 갈등이 개인적 차원에서의 각성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순정만화 독자들은 어른들의 세상을 한발 가까이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현실인식'이나 '역사의식'까지 찾으려고 무리하지 마라. 순정만화가 원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낭만이다. 대변하려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통념이다.주2) 인물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의 조건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일단 만족하자. 김혜린과 같은 진지한 문제의식이 전제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별나라 이야기를 다루건 환상 왕국을 다루건 여성 인물이 외부와의 관계에서 갈등의 근본적인 출발이나 총체적인 성격을 이해하게 되면서 이들은 성장하기 마련이다. 여성이 전쟁에 나가 싸우지 않고 로맨스의 주인공으로만 머물러 있음에 놀라지 마라. 남성들의 권력 게임에 무력하게 휘말려드는 가련한 여인이더라도 대서사의 날선 갈등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느 순간 결의하고 어느 순간 행동하며 상황에 맞서게 된다. 필연적으로 발생한 사건 사고를 우연하게 해결하고 돌아온 남성을 맥없이 맞아주는 역할이더라도 그 여성은 출발과 다른 경험과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을 것이다.

'캔디'에서 '샤르휘나' '스와니' '죠엔'까지 족보를 따져가며 스테레오 타입을 불평하지 말자. 만화뿐 아니라 현실적인 세계 역시 소란과 분쟁은 남성들이 주도하며, 여기에 권모술수로 그들 뒤로 다가설 것이 아니면 가까운 주변 사람들이나 교화하며 명랑하게 초원을 뛰어다니는 편이 낫다. 스스로 상황 해결 방식에 대한 불만을 내공으로 쌓아야 이후 '결말이라도 나홀로' 감당하려는 '시이라젠느'와 같은 유사 변종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하서사의 시간과 공간을 부유하며 세상의 시련에 종내 '몸과 마음을 더럽히지 않는' 순진한 여성 캐릭터 모두를 긍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교하게 구성된 인물과 사건망 안에서 설정된 상황을 그럴 듯 하게 고민하고 보듬어 안으며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캐릭터의 매력이라면 공감하기 쉬워진다. 우리는 그들을 둘러싼 환경을 굳이 역사나 현실의 논리로 읽지 않는다. 작품에서 주장하는 대로 그저 딸들의 운명으로 봐주면 된다. 80년대를 통과하면서 우리 딸들의 운명은 [비천무]의 만주나 [바람의 나라]의 삼국시대와 같은, 보다 설득력 있는 환경 안에 놓이게 된다. 이들은 내면 서술로서 사건 범위가 점차 폐쇄되고 있는 최근의 순정만화에 다른 문화 장르 이상의 힘과 가능성을 열어주는 작품들이다. 점차 그 방대한 사전준비나 노동 강도에 질린 작가들이 작업을 회피하고 있는 대하서사는, 실상 장르의 스토리와 서술 방식을 실험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좋은 터이다. 80년대를 풍미했던 대하서사 순정만화에서 전시되고 있는 딸들의 운명을 되돌아보며 우리 순정만화의 운명도 함께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여성만화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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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참고사항

주1) 최소한 픽션의 역사를 놓고 보자면 그렇다. 사건 서술 위주에서 내면 서술로 관심을 돌리게 되는 것이 소설이나 영화에서의 순리였다. 만화에서 내면화된 서술이란 거품의 말풍선으로 표현되는 방백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사건의 연쇄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보다 캐릭터 내부의 심리 변화에 집중하는 이야기 방식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시간이나 공간은 시선이나 목소리의 주인공인 중심 캐릭터가 인식하는 개인적이며 닫힌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유시진의 작품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90년대 이전에는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지 못했던 만화적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이런 스타일이 등장하기 전에는 드러나는 외부의 사건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이해하기 쉬운 대중적인 서술 방식으로서 활극적인 사건이 대거 투입되는 대하서사에 특히 적당하다. 물론 개인적인 견해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다.

주2) 대하 순정만화에 대한 우리의 담론들은 유난히 역사성이나 현실성을 따지는 경향이 짙다. 순정만화에서 작가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철학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는 있지만 현재적인 지형을 외면할 수는 없다. 대하서사 순정물의 가치 평가는 무엇보다 픽션 혹은 대중문화 텍스트로서의 미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생산적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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