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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어떤 만화를 지지할 것인가 - 리얼리즘의 외연을 확장하는 만화 (2)
만화는 흐른다 02/12/09 13:37 김태권
3.

이런 의미에서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만화가 요구됩니다 : 첫째, 생생할 것 ; 둘째, 전형을 형상화할 것. 즉, 예술적 형식에 충실하면서도 리얼리즘을 희생해서는 안되며, 반면 리얼리즘에 목을 맨 나머지 생경함으로 흘러서도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재미없는 지루한 만화가 되지 않기 위하여 피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생경한 대사를 앞세우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앞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입장은, 등장인물의 "행동의 묘사"를 강조하고 "시대정신의 메가폰"을 꺼리고 있습니다. 또한 엥겔스는 한 서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견해가 숨겨져 있으면 숨겨져 있을 수록 예술작품을 위해서는 더 낫지요." 중요한 것은 "생생한" 행동일 것입니다.

둘째, 구태의연한 형식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리얼리즘은 새로운 시대를 반영하는 새로운 내용을 담아야 하는데, 과거 형식이 아무리 그럴 듯 하더라도 그것을 고집하는 것은 독자를 피곤하게 할 뿐입니다. 새로운 시도와 새로운 실험만이 독자의 눈을 계속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브레히트의 입장은 곱씹어 볼 만 합니다. 브레히트는 루카치가 고전적인 부르주아 작가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비난하며, '낡고 훌륭한 것보다는 오히려 새롭고 졸렬한 것', 새로운 인간형인 근로대중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메모한 바 있습니다. 이 명제의 해석은 여러 가지로 가능하겠으나, 여기서는 브레히트가 20세기의 새로운 형식인 '표현주의'를 적극 옹호한 사실을 염두에 두며 이야기한 것입니다.

셋째, 도식적 인물과 도식적 플롯을 피해야 합니다. 이것은 처음 두 가지 조건의 귀결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도식적 인물이 나오면 당연히 생경한 대사만 할 것이며, 도식적 플롯에서는 뭔가 생생한 행동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도식적 인물과 플롯은 이미 오랫동안 사용된 것이므로, 구태의연하겠지요.

리얼리즘을 표방한 기존의 작품 가운데 많은 것이 다음과 같은 '종합 선물 세트'를 이용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착한 피억압자. 나쁜 억압자. 착한 피억압자는 두들겨 맞다 맞다 울컥해서 벌떡 일어나 깃발을 잡습니다. 착한 피억압자 주변의 '그래도 어쩌겠어, 운명에 순응하자'라는 친구들. 나쁜 억압자 주변의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도록 하세요'라는 친구들.

그리고 여기에 '리얼리즘에 있어서의 한국적 특수성'이라 할 만한 신파성이 결합합니다.

첫째, 착한 피억압자의, 결코 맺어지지 못하는 여자친구. 맺어지지 못하는 것은, 적어도 제가 보기엔 피억압자가 바보같고 연애에 젬병이라서 그런 것인데 (좋으면 좋다고 말이라도 한 마디 하지 그러니), 그리고 여성 스스로 좋고 싫은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묘하게 무시하면서도, 그게 다 현대사의 질곡 때문이랍니다.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그려지는, 겁탈당한 여성의 이미지. 이렇게 한국사회 민중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것이 리얼리즘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둘째, 또 하나의 한국적 리얼리즘. 피억압자는 용써도 집니다. 울컥 해서 벌떡 일어나지만 집니다. 소심하고 비겁한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얼마나 저항하기가 싫으면, 저항한 사람이 꼭 죽거나 박살나는 꼴을 보아야지만 마음이 편한 것일까요? 안타깝습니다.

한 가지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 왜 여러 의적 중에 해방 이후에 임꺽정만 뜨는가?

난나님의 논문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임꺽정은 소설로 만화로 다양한 버전이 해방 이후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조선사람이 쓴 의적 소설의 모델은 임꺽정이 아니라 (요즘 여러 관공서와 은행에서 견본 모델로 종사하고 있는) 홍길동입니다. 한말 개화기의 어수선한 시기에 농민 봉기를 시도하며 정부를 압박한 세력은, '임꺽정당'이 아니라, 홍길동을 연상시키는 '활빈당'이었습니다. 벽초가 쓸 때까지 임꺽정은 다소 묻혀진 존재였습니다. 조선 후기 어느 실학자의 글에서, "조선의 3대 도적은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이다"라고 한 것을 보았는데, 역사적으로도 유명하고 소문과 민담도 무성했던 세 저항집단 패거리를 꼽은 것이겠거니와, 굳이 해방 이후에는 임꺽정만 여러 차례 꾸준히 소설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히 생각해보건대, 이 3대 도적 가운데 홍길동과 장길산은 정부의 진압이 끝내 불가능했거늘, 예외적으로 임꺽정만은 참살되고 맙니다. 벽초가 임꺽정을 소설로 살려놓을 때, 패배하는 장면을 쓰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원래 저항자의 패배는 허준의 홍길동에서 이어지는 도적소설의 전통은 아닌 것입니다!

'홍길동전'을 현대에 옮겨 놓고 생각해보면 그 과격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도 사상검열이 횡행하는 수상한 시국이니, 여러분께서 직접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만, 아무튼 마지막 장면만 놓고 보더라도, 경찰서며 군부대며 재벌집을 제 집 드나들듯 털어먹던 무장 게릴라에게 청와대가 회담을 요청하고, 그곳에 찾아온 게릴라 대장인 마르코스...아니 홍길동이 정부 각료로 참여하라는 권유를 비웃고 무시하며, 정부수반과 고위 관료들을 농락하고 능멸한 후 연막탄을 터뜨리고 사라져서는, 치안이 약한 한반도 도서지역을 무력으로 점유하여 독립국가를 선포합니다... 반면 임꺽정은 요즘 식으로 하면, 게릴라 내지는 무장 강도 세력이 내분으로 갈라지고(해방구의 이미지가 약하게 되어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토벌부대의 진압에 무력하게 무너지며, 게릴라 대장은 산 중에서 사살됩니다.

황석영 작가가 굳이 장길산을 소설화하고, 그 마지막을 토벌당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구 건설로 놓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셋째, 피억압자가 용써도 지는 것의 원인이기도 한데, 집단으로 덤벼도 시원치 않은 판에, 기를 쓰고 혼자 움직입니다. 억압자 집단이야 당연히 깃발 잡고 일어선 체면이라도 있으니까 그리로 들어가진 않지만, 그렇다고 저항집단에 선뜻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조직화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감, 이것 역시 한국적 특수성입니다. 조직이니, 집단이니, 당파성이니, 계급이니, 거대담론이니, 정치색이니, 이런 것 한국사람들 이상하게 싫어합니다. 학벌, 지역감정, 이런 것은 내버려두면서 왜 애꿎은 계급을 욕하고, 정치세력화라는 것을 싫어하는지...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마 어릴 때부터 많이 맞고 자라기 때문이 아닐까요. '노동운동/시민운동의 순수성'이라는 족보에도 없는 흰소리가 난무하는 한국 사회입니다.

아무튼 마지못해 집단에 가서도 피억압자는 왜인지 '이건 나하고는 잘 맞지 않지만...음'이라고 마치 순정만화의 검은 머리 냉미남이 된 것처럼 혼자 투덜거리고, 조만간 저항집단이 붕괴될 때, 그래도 한 때 동료였던 사람들이 독자들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하여 열심히 열심히 죽어주고 있는 마당에, 엉뚱한 언덕에 혼자 앉아 실패한 연애질에 대한 회상에 사로잡혀 버리곤 합니다.

정말 재수없는 주인공이건만, 왜인지 이런 주인공에 끌리는 사람들도 많은 모양입니다. 주인공의 기회주의는 양비론으로 그 절정에 달합니다. "그래, 억압자에게 군말 못하고 사는 것도 한심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조직적으로 저항해서 이기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도 안돼." 이길 생각도 없으면서, 그럼 저항은 멋부리기 위해 하는 것일까요.

넷째, 열심히 하지도 않고 신나게 불평만 하다가 처참하게 깨진 주제에, 쓰러진 채로 희망은 가지겠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노력도 없이 결과만 바라는 한탕주의적 세계관이라고나 할까요, 아니면 희망만 하면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주술적 세계관이라고나 할까요. 패배할 일만 골라서 한 주제에, 패배는 싫다고 하는데, 그럼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요? 리얼리즘의 한국적 특수성...마지막에 꼬마 나무가 자라거나, 꼬마 사람이 나오거나, 아무튼 '꼬마'적인 객관적 상관물이 놓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세대는 연애도 젬병이고, 조직화도 못해서 이렇게 지지만, 자라나는 다음 세대는 뭔가 획기적인 주술을 개발해서 이길 수 있을 거야"라는 호그와트의 메시지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한(恨)'이라는 족보도 수상한 개념을 '한국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인지, 한(恨)스럽습니다.

이러한 상투적 리얼리즘의 한국적 변형 역시, 재미있고 설득력있는 만화를 위해서라면 과감히 포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작품의 내용에서, 작품의 수용에서, 작품의 창작에서,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단호함입니다. 제대로 된 리얼리즘, 정말 재미도 있고 현실도 반영하고 설득력도 있는 리얼리즘 작품이 나오려면, 우선 도식적이지 않아야 할 것이고, 또한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 만연한 신파성 역시 지양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해봅니다.


4.

기존의 리얼리즘 작품에서 발견되는 도식성 - 그리고 특수한 경우 신파성 - 을 극복하는 한 방안으로, 필자는 리얼리즘의 외연을 확대하는 작품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인물의 전형'을 세우려는 많은 시도들이, 한 집단 내에서 그 집단의 사고를 따라가는 인물들을 대비시켜 그림으로써, '전형적 인물'을 그리는 함정에 빠져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애초에 '전형'을 세우려는 의도가, 변덕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사상이나 행동이 사회적 힘에 의하여 규정 - 적어도 제한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목적에 있었다면, 굳이 집단에 동화된 인물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거르스는, 그러다가 벽에 부딪치는 인물을 보여주는 것이 차라리 보다 재미있고 설득력도 있지 않겠습니까.

"독일 이데올로기"에 나오는 유명한 명제입니다 : "어떠한 시대에서도 지배적인 사상은 곧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또한 유명한 명제입니다 :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이 명제를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마르크스의 이 명제를 결정론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인물이 속한 집단이 인물의 생각과 행위를 구체적으로 지정해 준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마르크스의 다른 견해들과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과도 별로 맞지 않습니다.

그보다 이 명제는, 집단이 그 소속원들의 생각을 대체로 내버려 두지만, 어떤 부분들에 대해서는 금지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듯 합니다. 예컨대 "1시에는 식당, 2시에는 거실, 3시에는 안방으로 가라"고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12개의 방문을 다 열어봐도 좋지만 13번째의 방만은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금지하는 쪽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주인공은 13번째의 방문 앞에서 고민하다가 열어보고, 벽에 걸린 전 아내들의 시체를 보고, 황금열쇠에 피를 묻히고...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플롯에 있어서도 흥미진진합니다.

기존의 많은 작품들은 집단에 속한 인물이 집단의 지침에 충실히 움직이는 모습을 묘사해왔습니다(주로 행동이 아니라 말로). 억압집단에 있는 인물들은 충실히 억압합니다. 피억압집단에 있는 사람들은 저항하거나 아니면 억압집단을 충분히 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소심해서 움직이지 못합니다.

많은 작품에서 이것을 전형으로 여겨왔습니다. 예컨대 한국을 지배하는 일본인들은 무작정 나쁜 사람들로 되어 있고, 친일파도 나쁜 사람들, 자본가도 그냥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현실을 알기로는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현실성의 결여 이외에도, 이러한 인물들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인물들이므로 내적인 갈등도 적고, 따라서 재미없이 생경한 인물이 됩니다. 생생함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형상화에 있어서도 그다지 재미있지 않습니다. 현실성이 없어도 재미있을 수는 있는데(그리고 실로 위험한 작품들은 바로 그런 것들인데), 인물의 평면성 때문에 재미조차 없어집니다.

그러나 집단이 개인을 '지정'하지는 않지만 '제한'한다는 관점으로 볼 때, 보다 생생한 인물들이 나올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집니다.

이 경우 다음과 같은 과정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인물이 어떤 행위를 욕구합니다. 그런데 그 행위가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인물은 그 금지하는 힘을 주목합니다. 그 힘은 그 인물이 속한 사회의 사회적인 역관계에 따른 것입니다. 인물은 이제 선택을 요구받습니다. 금지되는 행위를 욕구하지 않고 자신의 집단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브레히트의 시에 나오는 대로 "그리하여 나는 나의 계급을 버리고, 비천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는 길을 갈 것인지. 그리고 선택 이후 자신의 선택에 어울리는 행동을 할 것입니다.

물론 독자에게 제시되는 순서가 이런 순서를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고, 또한 이 단계를 그대로 인물이 거쳐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필자는 지금 또 하나의 도식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보통 우리가 사회에서 겪을 수 있는 일의 한 모델을 묘사하는 것 뿐인데, 이제 그것을 만화로 어떻게 형상화하는지 보이고자 합니다.

데츠카 오사무의 "붓다"를 봅시다. 그 역사적 배경을 도식화하면, 불법에 귀의한 집단의 착한 인물들과 불법에 귀의하지 않은 집단의 나쁜 인물들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데츠카 오사무의 관점은 신분질서의 폐해를 고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바, 이것은 만민평등을 주장하는 집단의 착한 인물 대 카스트를 옹호하는 나쁜 인물의 구도로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데츠카 오사무는 손쉬운 해결을 거부합니다. "붓다"의 후반부는 다소 긴장도 떨어지고, 싯달타가 안정되면서부터는 작품도 도식적이라는 혐의가 짙지만, 그 초입부는 데츠카 오사무의 오리지널로서, 무척 뛰어난 것입니다.

초입부의 주인공은 싯달타가 아니라 한 노예 소년입니다. 소년은 무사로서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속한 사회가 그것을 금지합니다. 소년은 노예 집단, 노예 계급에 속해있으므로, 무사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 소년은 자신에게 금지된 것을 욕구합니다. 그러나 조직적인 저항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신앙을 가지는 것도 아니며, 자신의 노예 신분을 속이는 것으로 아슬아슬한 길을 갑니다. 이 소년보다 극에서의 비중은 낮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인물은, 소년의 약혼자입니다.

소녀는 주목받는 청년 무사로 행세하는 소년과 사랑에 빠집니다. 소녀는 소년과의 사랑이 맺어지기를 욕구합니다. 그러나 소년은 신분이 발각되어 체포됩니다. 사회가, 그리고 소녀의 계급이 사랑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소녀의 아버지는 나라의 대신으로, 소녀에게 소년을 잊을 것을 명합니다. 이것은 소녀의 집단이 소녀에게 행동을 지정하는 것인데, 소녀는 이를 거부하고 아버지와 격하게 다툽니다(확실히 이런 맛이 있어야 인물이 실감이 납니다). 마침내 대신의 집 앞으로 소년이 끌려갑니다. 소녀는 끌려가는 소년을 바라봅니다. 소녀의 앞에는 선택이 놓여있습니다. 금지조항을 어기고 소년을 쫓아갈 것인가. 그렇게 되면 둘다 사회에서 추방된 몸으로 황무지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집단의 금지조항에 굴복하면, 소녀는 사회에 복귀할 수 있습니다.

소년과 소녀의 눈이 마주치고, 데츠카 오사무는 몇 개의 오프컷으로 그 상황을 잡아냅니다. 그러나 소녀는 사회적 힘을 이기지 못합니다. 소녀는 방안으로 돌아서서 울음을 터뜨리고 아버지의 위로를 받습니다. 소년은 추방되어 저항하다가 살해당하고 맙니다.

"붓다" 자체를 리얼리즘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습니다. 워낙 시대배경이 어정쩡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 소녀와 같은 인물을 그려내는 만화를 필자는 리얼리즘 만화로서 지지합니다.

5. 인물이 속한 집단의 규정에 따르는 인물로 나타나는 것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 반항하려고 애쓰지만, 그것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 상황, 이것이야말로 사회적 힘의 성격과 그 크기를 잘 보여주는 설정이라 할 것입니다. 독특한 인물, 실패한 반항자. 사회적 힘보다, 변덕에 가까운 자신의 의지가 차라리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 있어서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직시해야만 하는 인물.

이런 인물을 가장 잘 그려내는 작가 중 하나가 미노루 후루야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미노루 후루야를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인가 - 논란의 여지가 많으며, 그의 정치적 입장이 과연 지지할 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필자조차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려내는 인물은 리얼리즘이라는 사조가 도달하고자 했던 지점을 부분적으로 성취해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정치적 입장이, 예컨대 인간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비하한다거나 소외된 계층에게 더욱 잔인한 면모를 보인다거나 여성비하적 언동을 여과없이 보여준다거나하는 등의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가 보여주는 세계는 너무나 리얼한 것입니다. 이른바 '세계관에 대한 리얼리즘의 승리'라 할 만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자와나 마에노도 심하긴 심했지만, 그의 다음 작품에 나오는 이또킹 이하의 주인공들은, 어떤 '인물의 전형'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뽀대있게 살 것을 욕구하는 - 그저 욕구만 하고 있는 마초 성향의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이들은 자신이 단지 부랑자일 뿐이라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명대사 : "넌 너무 현실을 직시하는 경향이 있어!"

그러다보니,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그들이 꿈꾸는 위치와는 반대로, '만인지하 일인지상'의 저열한 상황에 처하여, 자기보다 못한 인물을 발견하면 어김없이 물고 늘어지며 자위합니다. 그런데 미노루 후루야의 작가적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정말 이 인간 쓰레기(본인들도 알고 있는 바)인 주인공보다 더 쓰레기같은 인물이, 어김없이 나타나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물들 역시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사는데, 정말 그 인물보다 다시 더 쓰레기같은 인물이 나타나줍니다!

잔인하도록 철저한 작가정신입니다.

이들은 자신을 좌절시키는 사회적 힘에 맞닥뜨려, 선택을 강요당합니다. 인간답게 살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살다 죽을 것인가. 그럼? 그들은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 이것이야말로 리얼한 부분인데, 그들은 선택을 하고 노력을 하느니, 계속 결정의 순간을 유보합니다. "난 글러브 한 번 끼지 않고 프로 야구 선수가 될테야!" 물론 이렇게 해서 무언가 될 턱이 없습니다. "빙신이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나 주변인물들이 스스로 될 턱이 없다는 것을 순순히 시인할 리도 없습니다. "우리형은 빙신이지만 그렇게까지 빙신은 아니야..."

이 인물들을 좌절시키는 사회적 힘은 무엇인가 - 미노루 후루야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거듭될 수록, 일본의 현실이 점점 더 무섭게 반영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흐름일 것입니다. 그의 최근작이 개그의 외피를 벗은 "두더지"라는 사실은 어찌 보면 일관된 맥락을 가지고 있을 터입니다.

프랑스에서 또 하나의 확대된 리얼리즘을 선보이는 사람은 레제르라 하겠습니다. 일정한 서사를 가진 것도 아니며, 짤막짤막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우리 아빠"와 "빨간 귀"는 성공적인 리얼리즘입니다. 아빠는 아빠로 행세하고 싶지만, 룸펜에 가까운 단순히 주정뱅이 프롤레타리아입니다. 빨간 귀의 주인공 꼬마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고 싶지만, 프랑스의 사회가 그것을 금지하는 바람에, 그는 하도 맞아서 언제나 귀가 빨갛습니다. 레제르 역시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그에 대해 소개된 평에도 그것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 "그는 평가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만화에 나오는 흥미진진한 인물들은 현실의 불쾌한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생함이 그의 매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레제르를 적극 추천하는 이우일의 작품 역시 이러한 류의 리얼리즘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 지지합니다. 특히 딴지일보에 연재하다 중단된 "아빠와 나"는 정형화된 형식 속에서 누구나 공감할 만한 사회적 힘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의 질문, 아빠의 답, 나의 빈정거림, 아빠의 구타("씨x새끼")라는 안정적인 틀의 반복. 여기서 오고가는 대화의 내용도 또 하나의 현실 반영일 뿐 아니라, 나의 빈정거림이 건드리는 '아빠'의 콤플렉스들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아빠는 한국사회의 가부장답게,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양 보이고 싶어하지만, 나의 빈정거림이 폭로하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 힘 때문에 좌절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빠는 울컥해서 나를 구타하는 것으로 속을 풉니다. 매 편 이렇게 반복됩니다.

그 중의 한 편, 형식이 다른 것이 있는데, 나의 빈정거림을 들은 아빠가 슬프게 우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 나름대로 심금을 울리는 작품이었습니다.

필자는 이러한 만화들을 리얼리즘이라는 관점에서 지지합니다. 그렇다고해서 현실 반영이 되지 않은 만화를 싫어한다거나, 고전적 의미에서의 리얼리즘 작품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재미도 있고, 현실도 제대로 반영하고, 그리하여 설득력도 있는 작품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나눠보고 싶어서 글을 썼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이 리얼리즘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리얼리즘의 외연을 넓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리얼리즘이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 '전형적 인물'이 아니라 '인물의 전형'이라면, 리얼리즘이 사회적 힘과 인물과의 관계를 묘사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필자의 생각도 크게 어긋난 것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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