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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달려라 봉구야'/변병준 : 교차로에 세워진 작은 푯말
이 만화 봤어? 03/04/10 03:51 깜악귀



1. [프린세스 안나]와 변병준

변병준의 첫 단편집 [첫사랑]에 대해 비평가 이재현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전략) 굳이 분류하자면 변병준씨는 리얼리즘 만화의 계보에 속한다. 백성민, 이희재, 오세영씨의 뒤를 잇는 신세대 작가인 셈.(중략) 상당수 독자들은 리얼리즘 만화가 재미없다고 불평한다. 대개, 지난 과거만을 다룸으로써 동시대의 일상을 놓치고 있다는 것. 변병준씨는 리얼리즘 만화에 일상성과 개그를 도입함으로써 이 곤경을 헤쳐나가고자 한다. (중략) 그의 장편이 기대된다. [이재현의만화읽기 - 변병준 [첫사랑] / 한겨레신문 / 1999.1.15]

그러나 이재현의 '기대'는 변병준의 신작 [프린세스 안나] (원작소설 배수아)가 잡지 [영챔프]에 연재되기 시작하자, 예측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보상받았다. '일상성과 건강한 개그의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단편집의 일부 작품에서 보여지는 우울한 경향이 비약적인 완성도와 함께 전면적으로 연출된 것이다.

배수아의 원작단편 [프린세스 안나]는 도시의 우울함과 절망에 감염된 소녀의 환상을 그리고 있다. 변병준이 단편집의 일부에서 보여준 도시의 비극에 대한 어두운 이미지는 원작의 여성적인 우울함과 감탄할 만한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화학작용은, 단순히 ‘좋은 원작에 좋은 만화’라는 식은 아니었다. 만화 [프린세스 안나]에서 원작의 인물과 사건 배치는 변병준만의 리듬으로 새롭게 그려진다.

굴절된 렌즈로 본 도시 일상의 그로테스크한 풍경과 그 속을 유령처럼 살아가는 인물들은 그 묘사의 디테일에서는 현실성을, 표현방식에서는 주관적 심상을 드러냈다. 주인공 안나의 동공이 흐릿한(시선이 모호한) 커다란 눈동자는 독자를 쏘아보며 강렬한 자극을 선사한다. 이 만화를 본 독자라면, 작품의 힘과 함께 작가의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프린세스 안나] 이전에 씌어진 이재현의 글과 대비되는 함성호의 글을 인용해보자.

.... 변병준의 미덕은 오히려 리얼리즘 바깥에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프린세스 안나]는 표현주의적이라고 말해져야 한다. (중략)그의 먹은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다기 보다는 드러내고자 하는 감정표출에 전면적으로 쓰인다.... (풍경에 대한 매혹과 변형 - 변병준의 [프린세스 안나], [만화당인생]) - [만화당 인생] 서지정보 확실히 할 것.

평자들로 하여금 뭔가를 논하게 만들고 싶어지는 작가는 흔치 않다. 그것이 서로 상반되는 경향을 띄는 것도 흔치 않다. 그러니 변병준이 내놓는 또 다음 차기작이 기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터다. 작가가 일본으로 만화유학(!)을 떠났다는 말을 들은 이후 그 궁굼증은 더욱 강해지고 말았다.


2. 차기작 [달려라 봉구야]를 만나다

이제 우리는 [달려라 봉구야]를 만나게 되었고 이로써 그의 단행본은 세 권째가 되었다. [달려라, 봉구야]의 초반부터 시종일관 전면에 보여지는 것은 서울 일상풍경의 우울함이다.
다리 잃은 비둘기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도시. 돈을 벌러 서울로 올라간 아버지를 노숙자로 전전하게 만드는 도시. 전작 [프린세스 안나]에서 주시되던 바로 그 어두운 도시와 닮아 있다.

그러나 도시는 [프린세스 안나]에서와 같이 강렬한 비극의 콘트라스트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칼라로 연출된 탓인지 전보다는 밝아졌다고 할까. 대신, 도시의 풍경은 보다 드라이한 시선으로 주시되고 있다. 담채색의 묵묵한 농담을 머금은 풍경은 몸 속에 누적되는 중금속처럼 어떻게든 죽을 때까지 감내하는, 그러나 고통스러운 답답함을 드러낸다.

그 속에서 그려지는 인묻들의 비극이라는 테마 역시 [프린세스 안나]와 같은 면이 있다. 그러나 인물들은 보다 해학적이고, 순진무구하며, - 안나는 세상의 비극을 직시하고 그것을 증오하는 눈을 가졌다 - 희망이 섞인 인간애를 간직하고 있다.

돈을 번다고 서울로 올라가 소식이 없어진 남편을 찾아 아이(봉구)를 데리고 상경한 시골 아낙네 동심이, 지하철에서 구걸하며 손녀를 키우는 노숙자 할아버지와 봉구네의 만남, 그리고 결국 노숙자가 되어 있는 남편과의 만남, 드디어 낯설고 외로운 서울을 떠나 모두 함께 봉구네 고향으로 내려간다.

[달려라 봉구야]는 도시의 일상적 우울함 속에서 연출되는 미담 혹은 동화라는 점에서 이재현이 단편집을 보고 기대했을 법한 바로 그런 만화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함성호가 주목한 ‘풍경에 대한 매혹과 변형’이라는 경향성도 (완화되긴 했지만) 간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그의 작품성향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독특한 면모를 가진다.


3. 교차로에 세워진 작은 푯말

맞닿는 곳에 도달한 작가는 이정표를 세운다. ‘교차로에 세워진 작은 푯말’ - 달려라,봉구야]를 그렇게 은유할 수 있지 않을까. 단편집 [첫사랑]으로부터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스토리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간략한 분류가 가능하다.

■ 해학이 두드러진 작품 - <고맙다, 변비요정>, <어느 여름날의 코미디>, <겨울여행>, <요리사의 사랑>, <스트리킹>
■ 농촌 공동체의 따뜻함을 그린 작품 - <재남리의 첫사랑>, <어느 섬마을 이야기>
■ 도시의 암울함을 그린 작품 - <서피스타>, <싸나이가 울다>, <프린세스 안나>

이중 해학적인 것(코믹만화)은 약간 예외적인 케이스로, 초기에 그의 데뷔를 돕는 역할을 한 이후 (주로 소년만화잡지를 무대로 하고 있으니) 후기로 가면서 작품의 긴장을 이완시키거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해학적인 모습정도로 활용되면서 줄어든다.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두 경향을 보면 변병준이 도시와 농촌을 이분법적인 구도로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예외 없이 따뜻함을 그리고 있고, 해학적인 요소도 긴장없이 도입된다. 반대로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서는 그 속을 사는 인간들의 비극적인 소외감이 숨막히게 그려진다. 도시의 비극, 농촌의 미담이다.

[달려라 봉구야]는 분리되어 있는 이 두 가지 경향이 대면하는 교차로 팻말같은 소품이다. 비극적인 콘트라스트가 아닌 완화된 답답함으로 표현되는 도시의 우울, 그 안에는 시골에서 엄마와 함께 아빠를 찾아 상경한 봉구 등이 연출하는 해학과 따뜻함이 있다. 주인공들이 마지막에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설정은 탈출구가 없는 도시라는 기존의 비극적인 심상으로부터의 변화다. 푸른색의 온수와 붉은색의 냉수가 하나의 수족관 안에 있을 때 그것은 분리된다. 그러나 온도차가 줄어들면 섞이기 시작한다.

작가 변명준은 지금까지 다루었던 소재와 이미지, 인물을 돌아보며 정리하는 작품을 그리고자 했던 것일까. 그것들은 이 작품에서 서로를 대면하고 인정하고 있다. 어쩼든 이것은 변병준의 마돈나(!)인 '안나', - 도시를 저주하는 무표정한 소녀였던 바로 그 안나 - 가 아이의 손을 잡고 남편을 찾아 상경하는 시골 아낙네 '동심이'로 출연하는 작품인 것이다!


4. 또 다른 교차로 - 사진과 문학, 그리고 만화

변병준이 가진 교차로는 도시와 농촌의 이미지 뿐은 아니다. 이재현이 파악하는 변병준과 함성호의 변병준 사이의 균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변병준이 도시를 표현하는 방식은 풍경사진을 연상시킨다. 만화에서 사진같이 과장을 배제하고 사실적인 도시의 풍경을 묘사한다면 그것은 리얼리즘적 욕구로 파악될 것이다 더구나 변병준이 가진 도시와 농촌에 대한 이야기는 80년대 리얼리즘 만화(리얼리즘 문학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를 연상시키는 면이 충분하다. 그는 어느 정도 과거의 경향을 계승하고 있다. 이재현의 리얼리즘의 계승이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옳다. 특히 단편집 [첫사랑]에서.

그러나 변병준의 '사진같은 연출'은 그런 대상의 세밀하고 리얼한 재현이라는 의미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진 자체는 언제나 대상을 가장 리얼하게 재현하므로 (다시 말해 그림이 아니라 '실사'이므로) 얼마나 철저히 재현하느냐가 아니라 아떻게 재현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즉, 사진찍는 이의 심상을 표현하기 위한 색채와 구도,노출과 콘트라스트의 조작이 중요하게 된다. 또한 사진은 그 한 장으로 완성되어 보는 이에게 압축적인 정서와 사물이 간직한 깊이를 전달해야 한다.

변병준의 '사진같은 연출'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다른 작가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변영준의 묘사가 사진의 특성에 근거한 바 있다고 볼 때, 사실적인 묘사는 리얼리즘적인 욕구보다는 주관적인 심상표현에 대한 욕구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는 실사의 풍경을 환상적인 방식으로 전달한다.

변병준의 이러한 특성은 리얼리즘 문학과는 별 관계가 없는 원작을 두고 있는 [프린세스 안나]에서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며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이것이 함성호가 지적한 ‘풍경에 대한 매혹과 변형’이라는 부분이다.

두 사람이 지적한 부분, [첫사랑]에서 강하게 보여지는 부분과 [프린세스 안나]에서 강하게 보여지는 부분을 염두에 두면, [달려라 봉구야]는, 그래서 또 하나의 ‘교차로 푯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 안에는 이 두 경향이 모두 고루 보이고 있으며, 양자가 어떻게 서로 조화할 수 있을 것인지가 조용히 탐색되고 있다.

변병준은 멈추어설 부분에서는 사진과 같은 압축적인 심상을 정적으로 전달하고, 흘러야 할 부분에서는 만화고유의 칸과 칸사이의 마법을 활용한다. 내용적인 부분에서는 그는 과거의 선배들을 계승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진과 문학, 그리고 만화가 그의 ‘만화’ 안에서 어떻게 조화되고 갈등하며 힘을 발휘하는지 지켜보는 것은 독자로서의 재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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