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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습지생태보고서'/최규석 - 여하튼 먹고 사는 생활
이 만화 봤어? 05/10/18 10:57 capcold
습지생태보고서/최규석
거북이 북스


판도라의 상자라는 그리스 신화가 있다. 신들이 인간 세상의 여러 근심걱정들을 상자에 봉인해놨는데, 어떤 호기심 많은 처자가 그것을 칠칠치 못하게 열어버린 덕분에 그것들이 인간세상으로 모두 뻗어져 나왔더라, 라는 이야기다. 그 후 수 천년 동안, 갖가지 인간들이 그것을 가지고 여러 가지 교훈들을 나름대로 주장하곤 한다. 어떤 이들은 그래 역시 호기심이 문제의 근원이야, 라고 이야기하며 무지의 행복을 설파하곤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왜 자꾸 그리스 신화고 기독교 창세기고 간에 여자들이 호기심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것으로 묘사하고 난리인가, 라고 XY염색체 소유자들의 역사 깊은 남존여비의 반증으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가장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교훈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과 관련되어 있다: 걱정이니 질투니 노환이니 하는 오만가지 인간사의 부정적 문제들이 우루루 다 쏟아져 나온 뒤, 상자 맨 아래에 몰래 있던 마지막 하나. 바로 ‘희망’이라는 녀석이 남아있었기에 결국 아무리 험난한 세상이라도 희망을 가지면 대략 살만하다는 나름대로 낙천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모 영화에서 열심히 설파한 “카르페 디엠!(오늘을 불잡아라)” 하는 교훈을 훨씬 더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좀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지만, 오랜 인류역사 속에서 여러 사람들을 감동시킨 듯 하니 나름대로 인정해 주기는 해야 하겠다.

최근 출간된 <습지생태보고서>(최규석 / 거북이북스)에는 이런 희망에 대한 약간 다른 접근, 좀 더 현실적인 접근이 담겨있다. 따지고 보면 굳이 희망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고난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낙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보람찬 것이다. 현실의 무게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공상으로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무게 그대로를 여하튼 짊어지고 가야할 대상이다. 익숙해지면 좌절 같은 것은 굳이 할 이유가 없다. 갑자기 해탈의 경지를 논하고 있는 것이냐고? 해탈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당장 우리들의 일상이고 생활이다. 그것을 만화적 재미라는 양념을 쳐서 살짝 직면시켜주는 작품인 것이다. 이미 전작인 단편집 <공룡둘리>를 통해서 남루한 현실의 무게와 만화적 표현력의 재미를 효과적으로 실험해온 작가다운 행보다.

<습지생태보고서>는 <경향신문>의 만화 전문 주간 섹션에서 연재되었으며, 디씨갤러리를 통해서 인기를 모으는 등 이미 연재 당시부터 팬층을 결집시켰던 작품이다. 내용은 한 방에서 자취생활을 하는 네 명의 그다지 풍요롭게 생활하지 못하는 대학생들과, 이런 방 일수록 하나쯤 생겨나기 마련인 빈대 식구 한명(한 마리?)의 생활 속 에피소드들이다. 아하, 대학생들의 청춘의 고뇌와 우정이 다루어지겠구나, 어쩌면 연애 문제, 취직 걱정 등이 소재로 들어가겠구나, 라고 대충 머리 속에 그려질지도 모르겠다. 사실, 실제로 이 모든 것들이 이 작품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 모든 것들 위에 서있는 중요한 대 전제가 이 작품에서는 무척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로 “먹고 사는 것”이다. 방세도, 학비도, 식비도 모두 먹고사는 문제로서 해결을 해야 할 대상이다. 자취생활의 여러 습관들은 여타 작품에서처럼 단순히 하나의 ‘취향문화’ 처럼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겨울 난방을 하면 등은 타고 코는 얼어 붙는 옥탑방을 무슨 ‘펜트하우스’ 처럼 묘사한 <옥탑방 고양이> 같은 드라마가 좋은 예다), 진짜로 먹고 살기 쓸 돈 빼면 따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만들어진, 생활의 때가 묻어있는 패턴들이다. 단순한 포장이 아니라 살아가는 필연적인 방식인 ‘생태’이며, 그 곳은 폼나는 양지도, 위악적인 어둠과 비참함의 음지도 아닌, 적당히 구질구질한 ‘습지’다.

시각적 묘사에 있어서도 이 작품은 탁월하다. 남루함이 과장되지 않게 묻어나는 ‘습지스러운’ 생활 공간과 사람들을 제대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극화체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지나친 기교나 딱딱함을 배제한 화풍, 그리고 원색의 화려함이나 파스텔톤의 감상주의를 모두 비껴난 탁한 질감의 컬러링 등에서 드러나는 필력 역시 이야기의 내용과 좋은 조화를 이루어주고 있다. 페이지 연출에 있어서 아직 4페이지 단위라는 짧은 호흡에 익숙하지 않은 듯 마무리 임팩트 타이밍이 슬쩍 어긋나는 에피소드도 초반에 더러 있지만, 작가의 첫 고정 연재작이라고 도저히 보기 힘들 정도로 이내 능숙한 페이스를 찾아나간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생활만화다. 하지만 생활 속 감상을 적당히 감상주의적으로 포장한 소위 ‘에세이툰’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이 작품은 4페이지짜리 짧은 호흡으로 에피소드를 구성하며 (나름대로) 개그 만화다. 그런데 <츄리닝>이나 <트라우마> 같은 다른 히트 ‘넌센스반전패러디개그만화’들과는 뭔가 방향이 많이 다르다. 남루한 현실이 들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얼리즘과 비극으로 점철된 작품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래도 생활 속 위트와 히트급 개그와 현실적 공감대로 가득하다. 그 이상한 원동력은 바로 솔직함이다. 풍족하지 못한 자취생활이지만, 솔직하게 그렇게 궁하게 그냥 산다. 하지만 폼나는 것들을 한번 걸쳐볼 기회가 생긴다면, 비굴해질 필요도, 마다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낙관적으로 실실거리는 따듯한 낭만이 살아 숨쉬어야할 대목이 올 듯 하다가도, 당장 이번달 생활비를 계산해봐야 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처음에는 주인공 최군의 복잡한 머리 속과 다른 3명의 괴짜 룸메이트들의 티격태격 거림 속에서 주로 표현되다가, 나중에는 숫제 현실의 비열함과 욕망을 응축시킨 전용 캐릭터의 등장으로 더욱 고조된다. 자취방의 제 5의 주민, 작품 자체의 흥망과는 별개라도 대형 히트를 기록함이 마땅한 걸작 의인화 사슴 캐릭터 ‘녹용’이 바로 그 존재다. 가장 비현실적이고 나름대로 희망찬(?) 외모를 지닌 녹용이, 나름대로 낭만과 감성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현실의 무게를 줄이며 희망을 이야기해보려는 주인공들에게 차가운 현실을 깨우쳐주곤 한다. 최소한의 비굴함도 미안함도 없이, 생활의 사사로운 욕망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또 룸메이트들에게 그 교리를 설파하는 명언 제조기인 셈이다. 단지 현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뜬금없을 만큼 솔직하게 던져준다는 것, 그것이 유머의 원천이고 공감대의 핵심이다.

판도라의 상자가 주는 진짜 교훈은, 불확실한 미래형인 ‘희망’이라는 것 정도만으로도 그 많은 삶의 고난들을 마음 속에서 억지로 상쇄시켜버릴 정도로 인간의 사고회로가 멍청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삶이 아름다운 것은 찬란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여하튼 살아갈 만 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습지’는 반지하 단칸 자취방이 아닌,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바로 이곳 이 공간이다.



(출판전문 저널, 격주간 <기획회의> 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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