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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정의는 불의를 어떻게 기록하는가: <만화 박정희>의 반가움과 아쉬움
이 만화 봤어? 05/06/25 13:00 capcold




만화와 박정희

[도판: 만화 박정희 1권 표지]

이회창 만화, 정주영 만화, 김대중 만화들을 기억한다. 대선이라는 하는 중요 이벤트를 앞두고는 종종 졸속 출판되었던, 조악한 이야기로 오히려 해당 정치인의 이미지를 갉아먹은 괴작들 말이다. 이현세, 허영만 등 지명도 있는 기성작가들이 투입되어 오히려 이름값에 먹칠만 했던 작품들. 그리고 소위 위인전 만화들을 기억한다. 서가에 세트로 꼽혀서 팔리는, 누가 더 재미없고 교훈적으로 만들 수 있을지 치열하게 경쟁하는 그 총서 방식의 만화들 말이다. 이렇듯 어째서인지, 역사적 인물을 사실적 접근에 입각해서 일대기적으로 다루는 만화는 품질 확보도 어려울 뿐더러 인기도 없다. 그러던 중 최근에 큰 화제를 일으킨 만화가 등장한 것이, 바로 <만화 박정희>(백무현, 박순찬 저/ 민족문화연구소, 뉴스툰 기획/ 시대의 창)다. 최근 박정희 시대를 정면으로 다루겠다고 호언했던 영화 <그때 그사람들>이 화제에 비해서 큰 흥행몰이로는 이어지지 못했던 전례와는 달리, <만화 박정희>는 주요 서점 판매순위에서 베스트셀러로 꼽히고 있는 등 순조로운 출발마저 보이고 있다.

박정희 일생의 만화화. “만화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정서에 해악을 끼치고 박정희는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여준다... 적어도 내가 소년 시정에 받았던 교육이나 사회적 분위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라는 그린이 서문에서 볼 수 있듯이, 박정희를 다루는, 아니 아예 일대기를 그려내는 만화를 그리는 일은 확실히 한국에서는 특별한 시도가 될 수 밖에 없다. 정치인을 만화로 그려내는 시사만화가로서의 경력과, 뉴스 카툰 웹진 <뉴스툰>을 통해서 사상적 방향성의 호흡을 같이 가늠해본 팀이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시도였다고도 볼 수 있을 터인데, 이미 나온 무수한 박정희 분석 서적들 가운데 하나를 ‘원작’으로 채용하지 않고 새롭게 시작한 것 역시 오랜 시사만화가 경험에서 나오는 자신감일 것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실제로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이며, 인지도를 얻고 나름의 화제 거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기립박수를 보낼 일이다. 작가들의 의지와 노력이 좋은 출발을 했고, 이것이 더 좋은 여러 결과로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미 차기작으로 <만화 전두환>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까지도 들려온다.

그러나, 책이 나온 것에 박수를 치고 작가들의 노고에 한 시민으로서 감사하지만, 독자로서 느끼는 부족함은 적지 않다. 그것들은 <만화 박정희>의 약점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이런 방식을 통해서 역사 사회적 비판을 하고자 하는 한 부류의 접근방식 자체의 약점일 수도 있다. 이런 시도들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고 믿는 입장이기에, 앞으로의 개선을 위해서라도 몇가지 비판을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정의는 불의를 반드시 기록한다”는 이 책의 표어의 이면에 있는 명제, “그렇다면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문제의식 말이다.

기록하고 전달하는 방법을 고민하기

우선 다소 기술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만화 박정희>의 경우처럼 확실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넘쳐흐르는 작품에서 가장 먼저 독자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좋든 싫든 주장을 하기 위해서 채택하는 자료의 제시 방법 자체다. 그렇기에, 정의는 불의를 기록하더라도 어떻게 기록하는가, 그 기록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하기야 사실은 그 이전에 과연 정의와 불의가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질 수 있을까, 또는 과연 박정희가 불의인가라는 질문도 제기되겠지만(예를 들자면 혈연관계에 있는 모 현역 정치인의 팬클럽에서 분개하듯 말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나 사회발전 등의 합리적인 잣대로 볼 때 충분히 납득 가능한 역사적 평가이니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충분히 불의로서 이미 평가할 수 있는 그 기록들은 남기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라는 문제제기가 더욱 선명해진다. 울분을 터트리기 위한 스트레스 해소용, 또는 피해자 원혼들의 살풀이용인가? 아니다. 아직 남아있는 현실의 문제들을 각성시키고 해결하기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

<만화 박정희>에서 제시하는 기록은 그 근거로 여러 역사서적들을 삼고 있으나, 검증되지 않은 부분들을 너무 직관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우를 범하고 있다. 특히 소재의 특성상 근거자료의 상당부분을 차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공식 기록이 없는 ‘증언’이다. 그런데 그 증언의 신뢰성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법정에서라면 모를까, 증언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사실로서의 증거채택 여부가 애매한 영역인 것이다. 그것이 무조건 거짓말이고 틀렸다는 것은 아니겠지만, 역사를 바탕으로 주장을 하는 서술구조에서는 치명적 약점이 된다. 아직도 조작기사 논란중인 조선일보의 “이승복 어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발언” 문제가 왜 발생했겠는가. 원래부터 누군가는 항상 무언가 증언을 한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김형욱 살해사건이 있다. 증언에 의거하는 역사구성이 얼마나 불확실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인, 시사저널의 양계장 분쇄기 증언 특종을 기억해보자. 결국 그 후에 이루어진 국정원의 공식 발표는 사뭇 달랐다. 그리고 <만화 박정희>에서는 좀 더 오래 동안 통용되었던 폐차장 압사설로 보여준다. 그만큼 증언은 생생하기는 하지만 서로 엇갈릴 우려가 많은 자료다.

[도판: 2권 160p]

물론 증언을 자료로 활용하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멍청한 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제시하는 방법에 있어서 조심스러워 해야 할 지점은 명확하다. 앞서 이야기한 <만화 박정희>의 경우 설명으로는 아직 설이 구구하다는 지문을 달아주고 있지만, 만화 속에서 그 장면을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다른 모든 역사적 사건과 동일한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 책에서 등장하는 역사적 사실과, 증언들에 의거한 아직 검증되지 않은 ‘설’ 들이 좀처럼 구분이 안되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말이다. 한층 극단적인 부분은, 박정희의 친일전력에서 독립군 토벌을 하는 대목이다. 글 지문은 “직접 전투를 벌였다는 확인된 공식문서는 아직 없다... 그러나... 박정희의 총부리는 그들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적혀 있지만, 그림은 총부리만 겨눈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열심히 학살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무미건조한 진실의 전달’을 표방했다는 권두언과는 달리, 검증된 진실과 아직 검증 중인 설들은 너무나 섞여들어 버렸다.

[도판: 1권 101p 하단 칸]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그러한 대목들 때문에 책 내용 전체가 잠재적 허구로 비추어지고 공격 받아도 마땅히 변론할 말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책에 대해서 비난을 하는 박정희 지지세력들은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식의 기록방식을 택한 것일까. 다큐멘타리 영화에서만 하더라도 이미 극중 재연과 증언을 명확하게 분리해놓는 기법들이 일반화된 지 오래인데 말이다. 아니 그 전에, 사실과 주장을 교묘하게 섞어서 덩어리로 내놓는 것은 오랫동안 언론개혁 진영에서 조선일보 등 속칭 보수 언론재벌을 비난해왔던 핵심적인 이유 아니었던가. ‘괴물과 싸우는 자는 어느덧 스스로 괴물이 되어있다’는 격언이 주는 섬찟한 교훈을 누구보다도 뼈 속 깊이 새겨두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이들, 진보적 시각을 고수하는 시사만화가, 언론 종사자들 아닌가.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과욕으로 인하여 오히려 스스로의 성과를 깎아내리는 우를 범하는 셈이다.

하지만 기록의 이유에 대한 전략적 방향성에서 진정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청소년용’이라는 컨셉이다. 사실 그 자체만 놓고 보자면 뉴스툰에서 기획했던 전작 가운데 하나인 <만화 한국현대사>(원작 한홍구) 당시의 전략적 실수에서 한 걸음도 나아진 것이 없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전혀 청소년 독자의 코드를 고려하지도 않았고, 난이도 역시 조절이 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라나는 세대,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주겠다는 의지는 십분 찬성하지만, 그렇다면 오늘날의 그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읽힐 것인지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이 책이 정말로 청소년용으로 의도되었다면 오히려 걱정인 것이, 대화와 생각거리를 던져주기보다는 교조적이고 권위적인 표현법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들과 그것에 연루된 이름들이 일방적으로 줄줄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기에, 그 시대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국사교과서의 주입식 문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리는 것은 박정희라는 아이콘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 히트요인이 크고, 청소년이 아닌 성인 가운데 이미 박정희에 대한 비판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독자층 위주로 어필하고 있는 것이다.

전략적 목표와 방법론의 문제는 결코 경시되어서는 안된다. 이 책의 목표가 과연 무엇이던가. 만약 청소년층에게 박정희 시대의 의미를 되새겨주고자 한다면 그 시대와, 우리 시대의 유산들을 연결시켜서 토론거리를 던져줘야 한다. 박정희의 친일행적 홍보와 단죄에 있다면 사실 1권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하며 차라리 한층 사료를 더 두껍게 편성해서 직접 집어넣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쪽 분야는 결국 근거 자료 싸움이니까 말이다. 청소년층을 빙자하기는 하지만 결국 성인에게 당시 시대에 대한 깨달음을 주고자 했다면? TV시리즈 <제3공화국>이나 라디오 드라마 <격동 50년>의 원동력이었던 선 굵은 드라마와 다큐적 기법의 힘을 좀 더 농밀하게 벤치마킹했어야 했다. 만화라는 매체 자체의 한계라고 보기에는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 또는 보수적 시각으로는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같은 모범사례들이 있다.

당위와 명분은 중요하다. 그것은 항상 최종목표가 되어주는 큰 덩어리니까. 하지만 거기에 모든 것을 다 투입, 속칭 ‘올인’함으로써 세부 목표와 효과적인 방법에 대한 고민이 약해진다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정의를 자처하기 힘들어진다.

개인 박정희와 박정희 정치

[도판: 2권 112p]

커다란 역사의 흐름이나 사건들을 몇몇 주연급 인물들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방식, 즉 드라마화는 한국 언론에서 항상 애용하는 방식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한국 현대사, 특히 정치의 영역은 대단히 역동적으로 움직여왔고 시스템 자체의 안정성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법은 서사 진행에 있어서 대단히 도움이 되며, 특히 풍자만화에서 애용하곤 한다. 그리고 <만화 박정희> 역시 인물 중심의 접근을 표방했고, 그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문제는, 박정희의 실상을 무미건조하게 보여주겠다는 방향성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박정희의 ‘시대’를 보여주는 것에 명확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단지 전태일 분신 장면이나 치마 단속 장면이 단편적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도판: 2권 144 중 하단 가운데 칸. (캡션: 전권을 통틀어 박정희가 주연으로 나오지 않는 유일한 챕터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 아, 전태일>으로, 3페이지에 불과하다)]

사실 박정희라는 개인보다는 박정희를 둘러싼 사람들, 그것도 그의 측근과 경쟁자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네 일반 시민들의 모습이 더욱 현실적이고 흥미롭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박정희를 지금까지도 지지하고 있나? 왜 박정희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매일 고급 술파티나 벌이다가 총 맞아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소탈하고 서민적이고 자기 욕심 없는 어른’으로 각인되어 있는가? 더 거슬러 올라가서, 박정희의 당선은 과연 단지 부정선거 때문이었는가? 비율이야 다르겠지만, 실제로 왜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에게 표를 던졌는가. 즉, 한마디로 말해서 박정희 헤게모니의 힘은 무엇인가. 박정희의 부덕하고 기회주의적인 측면에만 집중하다 보면, 박정희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성찰이 상당부분 등한시될 수 밖에 없다. 더 부덕하고 더 기회주의적이었는데 십수년 독재자의 경지까지는 못올라간 사람들이 많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군화발로 올라선 박정희를 오히려 바라고 외치게 되었던 그 자발적 세뇌의 시대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화 박정희>는 역사적 해석이나 시대적 정신구조보다는 사건 스크랩에 집중한다. 서사구조가 애매해지거나 파편화될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전체의 유기적인 흐름보다는 특정 사건의 진상 위주로 짧은 챕터들을 결합한다. 그리고 그 사건을 연루된 특정 개인들에 다시금 초점을 맞추는데, 그것은 항상 박정희다. 사실상 무리임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눈에 보이는 적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시대의 모든 것을 오로지 박정희라는 개인의 인생역정 하나에 압축시켜 넣고자 한다. 이러한 접근은 만약 독재자의 단죄에 머물고자 한다면 상다이 좋은 방법이겠지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시대의 유산을 극복하는 것에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이미 죽어버린 개인에게 모든 것을 집약시킴으로써 당시 동의를 했던 수많은 일반인들의 허위의식과 그것의 현재진행형에 일종의 면죄부 내지 망각증을 부여한다. 이미 문자서적에서 여러번 이루어진 바를 반복하는 ‘왜곡된 신화를 벗긴다’면, 그것은 박정희의 신화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신화를 벗기는 식의 접근이 더 중요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들춰내는 것에 집중한 전반부의 경우 다양한 일화의 제시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라는 개인이 사실은 영웅이 아니라 기회주의자였다는 것 이상의 성과가 없다. 친일파니까 단죄해야 한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다른 수많은 성공한 친일파가 아닌 바로 박정희로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보다 한 세대가 흐르도록 긴 시간동안 독재를 하면서 이 나라의 역사 문화적 바탕이나 민주주의의 기틀을 완전히 말아먹은 것에 대해서 단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유산을 물려받은 현재의 구태들을 같이 단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정작 민주주의의 기틀을 망가트린 것에 대해서는 수많은 독재권력 강화 사건의 묘사에도 불구하고,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 적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바탕이 되는 일반 민중의 시각과 문제의식보다는 박정희라는 조폭 보스와 측근들의 흥망 자체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치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서 박정희 개인의 친일이나 기회주의적 속성에 파고드는 것은, 적어도 현재에 있어서는 한 걸음도 못나갈 뿐이다. 왜냐하면 박정희 지지자들조차도 친일이니 독재니 하는 것을 이미 인정해야 할 정도로 많은 것이 다행히도 밝혀졌고, 시대가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결국, 그 모든 것 보다도 박정희 정치 하에서 부흥한 경제 성장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 아닌가. 베트남전에서 무고한 희생을 가하고 치루었든, 일본에 역사와 과거와 수많은 노동자와 여성들의 눈물을 팔아먹었든, 노동자들이 죽어나갔든, 민주주의가 짓밟혔든 말이다. 니들이 배고파봤어, 경제성장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들에게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 자체에 대한 지적이다. “왜곡된 역사보다 날조된 신화보다 더 서글픈 것은 세뇌당한 영혼이다”라는 멋진 표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세뇌당한 부분 자체에 대한 정공법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친일행적이나 독재 과정의 일화 정도가 아니라, 경제 실적 자체의 품질에 대한 의문, 나아가 경제실적을 무소불의의 잣대로 삼아버리는 가치관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가 되어야 한다. 과연 그 시대 경제성장의 본질이 무엇인가. 박정희 때문에 성장한 것인가, 박정희에도 불구하고 성장한 것인가. 다른 모든 역사와 사회적 가치들을 모조리 탕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결과인가. 그보다 그 과정에 대한 애초의 합의는 있었는가. 박정희 정부에 대한 수많은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뒤로하고 개인들의 행적 밝히기에만 집중하면 역사적 단죄를 할 수는 있을지언정, 현재를 바꾸지는 못한다.

만화로 시대를 해석한다는 것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박정희라는 개인은 박정희 시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대상이기는 하지만, 결국 여기저기 기회주의적으로 붙어 다니며 성공을 꿈꾸다가, 결국 부하에게 총 맞아 죽어버린 조폭 보스 정도에 불과하다. 결국 그 시대를 만들고 유지한 것은 그 시대의 시스템 자체 아니던가.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집요하게 해야 한다.

만화라는 든든한 매체를 통해서 그러한 위업을 벌이는 방법은 무얼까.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가장 오랫동안 발전시켜온 전공분야는 역시 아이러니와 풍자다. 그런데 <만화 박정희>는 의아하게도 사실상 이 필살기를 처음부터 완전히 포기했다. 박정희라는 소재의 근엄함에 눌린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독재 권력의 상상력이 빚어놓은 화려한 포장과 허상을 벗겨내고 실체를 발굴하고자 하는 무미건조한 진실의 전달”을 표방했다는 서문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왜 극적 구성의 드라마/픽션화를 할 수 밖에 없는 극만화라는 형식을 취했는지, 설명력이 부족하다. 만화를 선택하고도 만화의 장점을 포기하며, 그 것을 매꿀 만한 더 큰 매력을 만들어내지 못한 이 결정이 사뭇 더 아쉬운 것은 이 작품의 그림을 그린 박순찬 작가의 평소 실력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그가 경향신문에서 일간연재중인 4칸 시사만화 <장도리>는 현재 연재중인 모든 시사만화 가운데 시대의 아이러니, 우리 안의 허위의식을 폭로하는데 있어서 톱클래스, 아니 톱 그 자체에 해당된다. 정치인들의 사극을 만들거나 소시민을 가장한 냉소로 일관하는 것이 아닌, 여러 층 여러 사건들이 지니는 유사성과 모순을 절묘한 수직 나열의 비유로 날카롭게 찔러대는 센스의 소유자인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만화 박정희>에서는 오로지 세밀한 그림, 특히 얼굴 초상화에만 집중하고 있다.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에 열중한 나머지, 시대를 보여주는 것을 포기한 셈이다. 자신의 필살기를 숨기고 진검승부를 벌이는 것은 굉장히 아쉬운 일이다.

[도판: 경향신문 4칸시사만화 ‘장도리’ 2005.5.25.일자, 2005.5.24.일자(인터넷판 기준)]

그렇다면 스토리를 집필한 백무현 작가는 또 어떤가. 오랫동안 <뉴스툰>의 실질적 프론트맨 생활을 하면서 올곧은 사회비판의식에 대한 의지를 불태워온 작가이며, 만화 센스가 크게 돋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오버하지 않고 너무 딱딱하지도 않은 정도의 질감을 유지하며 항상 색깔 있는 정치적 발언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만화 박정희>의 스토리에서는 최대한 사실적으로 보여주자, 모든 장면을 직접 묘사해서 보여주자는 경직된 접근으로 일관할 뿐이다. 그렇기에 사건을 나열하고, 모든 것을 현재형으로 직접 보여주며(심지어 아직 검증이 끝나지 않은 사건이라 할지라도) 설명을 붙이는 것에 급급하다. 그렇다고 해서 증언과 설명, 재연을 오가는 현대 다큐멘터리적 접근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극적 서사 일변도로 짷여져 있다. 한마디로, 박정희의 진실된 모습을 밝혀내야 한다는 압박에 눌려서 만화라는 훌륭한 칼을 들고도, 박정희 시대 - 그리고 그 시대를 아직도 상당부분 문자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우리 현재의 시대에 메스를 들이대기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역사교과서는 재미가 없다. 특히 인물사는 더욱 재미가 없다.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와 생활에 직접적으로 연관성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만화는 그보다 훨씬 재미있게 갈 수 있는 힘이 있는데, 그리고 두 작가들은 분명히 그 힘을 쓰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 그 칼을 스스로 거두어버린 셈이다.

또 다른 박정희 만화를 위하여

스릴러 영화 <한니발> 말미에 엽기적인 대목이 나온다. 한 살인마가 수사관을 부분마취와 마약으로 몽롱하게 만든 후, 그 사람의 뇌를 조금씩 절개하여 요리하고 스스로에게 먹게 하는 것이다. 그러자 몽롱한 수사관은, 훌륭한 미식요리에 짜릿해 하면서 요리사를 칭송하고, 더 달라고 부탁한다. 좀 거친 비유지만, 바로 그것이 박정희식 경제 발전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의자에 꽁꽁 묶어놓고는 현재와 과거와 역사와 민주주의 등 건전한 사회를 위한 온갖 중추 가치들을 잘라내버린 후 그것을 일말의 경제성과로 만들어서 먹여주었더니, 사람들이 좋아하더란 말이다. 만화에서라면, 이것보다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거나, 더 강렬한 충격을 주는 비유를 만들어낼 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에 나오는 만화는 <만화 박정희>의 후속 <만화 전두환>이 아니라, <박정희의 시대> 이기를 바란다. 그 유산, 우리에게 이어져오는 끈질긴 고리를 직면시켜주는 아픈 칼날이 되어주어야 한다. 이번에는 단지 실제에 가까운 얼굴을 그려내는 것에 모든 투지를 불태울 것이 아니라, 만화의 표현력을 한껏 활용했으면 한다. 능청스러운 풍자, 시대의 아이러니에서 오는 유머, 기쁨과 아픔의 격렬한 교차지점 등 모든 것을 느슨하고 융통성 있는 시각적 서사로 풀어나가는 그 주옥같은 힘을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만화로 그렸다는 의의가 아니라 만화의 재미 그 자체로 독자들을 움직여서 지금 우리 현실에 뿌리내린 박정희 정치의 유산을 박멸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각각의 눈높이와 취향에 맞춘 성인용, 청소년용, 어린이용으로 나오고 또 나왔으면 한다. 실력 있는 작가들의 더욱 많은 분발이 요구되는 바이며, 그 방향을 위한 응원을 아끼고 싶지 않다.



(월간 인물과 사상 개제 / 2005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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