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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02 90년대 여성만화의 어떤경향, 작품리뷰 « 이전글 | 다음글 »
 
[폐쇄자] 유시진- 닫힌 단위로서의 개인
| 2004년 06월 03일에 메리메리 쓴 글
 
 

 

 

 [폐쇄자](완결) / 유시진
 연재 : 나인(월간) 1999-2000  
 단행본 : 서울문화사(1-2) 2000

 

 

 

 

 


개인을 비추는 유시진의 렌즈는, 상처로 비롯된 개인의 자의식을 집요하고 건조하게 비춘다. 유시진 만화에서 돋보이는, 뭔가 잘나 보이는 이 캐릭터들은 그냥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다름’에 대한 자의식이 강하다. 이들은 자기만의 생각, 느낌, 감정을 추구하며, 자신의 ‘다름’을 억압하는 세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반응하는 자기 자신을 냉정한 눈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개인의 강한 자의식은 괜히 생겨나지 않는다. <폐쇄자>에서 빛/어둠, 키퍼/클로저 로 반복되는 이분법적 논리로 설명하자면, 개인을 삼키려드는 세계의 힘이 강할수록 그에 대한 반동이자 방어벽으로서 자의식이 강하게 생겨나는 것이다. 유시진의 인물들은 세계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발전시킬 가능성을 차단당한 트라우마적인 고통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 기억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줄 모르는 무책임한 인간이나 획일적인 ‘다수’에 휩쓸려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인간에 대한 경멸을 수반한다. 남들과는 ‘다른’ 본성을 인정받지 못한 기억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불신하고 어떤 진정한 관계를 추구한다. 그래서 이들은 고집스런 자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약하고 여린 부분을 마음 한 구석에 지닌 채 그대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 같은 캐릭터의 대표가 [쿨핫]의 동경이다. 동경은 친구가 되겠다고 열심히 손을 뻗치는 루다의 면전에 대고 “인간관계라는 건 대게가 지랄 같은 거야. 적을수록 좋지.”라고 재수 없게 쏘아붙이는 소녀다. 자의식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하찮은 인간이라고 판단된 사람의 반응은 애초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여리고 어설프기 짝이 없어 정작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사람에게는 손조차 내밀지 못한다. 명석하고 자기 통제를 잘한다는 점에서 그녀는 조숙하지만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면에서는 아직 어리다. 동경은, 자신의 자의식 속에 틀어박혀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탈출을, 어떤 구원을 원한다. 자의식이 강한 동경의 세계에는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쿨핫] 1권에서 동경과 루다는 같은 사건을 다르게 인식한다. 피아노를 치다가 유리병을 깨버리는 동경을 보고 루다는 깜짝 놀라지만, 정작 당사자인 동경은 자신의 자의식 속에 빠져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잘 모른다. 자의식에 틀어박힌, 닫힌 그녀는 세상에 무감각하고, 무심한 반면 자신의 자의식을 건드리는 것이라면 그 어떤 사소한 것에도 아파한다.

[폐쇄자]는 자의식 속에 고립된 동경의 상황을 판타지적 설정을 통해 극한의 상황까지 냉정하게 몰고 간 인상을 주는 만화다. 이를테면, 자의식의 폐쇄적인 상태가 어디까지 가게 되는지 끝까지 탐구해보겠다는 단단함 같은 게 느껴지는데, 그 단단함이 상당히 매혹적이다. [폐쇄자]의 쿤은 적어도 출발선상에서는 동경과 비슷하다. 동경이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닫고 피아노를 치면서 지독하게 내면으로 파고들며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키울 때, 쿤은 키퍼로서의 자신을 인정받는 세계 속에서 키퍼가 아닌 쿤이라는 존재 자체를 지우면서 살아간다.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채로, 아직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한 채로. 딱딱하게 나는 굳어 있었다.”(쿤) 동경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반면 자신에게 생생한, 살아있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한 사람의 뒤를 쫓는다. 그 사람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쿤은 주황색의, 타는 듯한 생생함을 지닌 여자 샨카의 존재로 흔들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열에 들뜬 상태였다.”(쿤) 동경과 쿤은 모두 본성을 발현할 가능성을 무시당한 채 타인의 기대 혹은 의무감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일수록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생생한 그 어떤 것을 원한다.

그러나 새로운 존재와의 관계는 실패로 끝나기 쉽다. 동경의 경우 사람을 잡는다는 것 자체가 낯설었기 때문에 실패하고, 그 기억은 날카로운 상처로 남았다. 그렇다면, 그 실패는 세계와 불화한 채 고립된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폐쇄자]는 여기서 [쿨핫]과 갈라진다. [쿨핫]이 동경에게 마음의 문을 열도록 성장의 시간을 남겨두는 반면, [폐쇄자]는 소통 불가의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로 돌린다. 애초에 세계와 관계 맺는 법을 모르는 미숙한 자아가 처음부터 성공할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은 것이다. [폐쇄자]의 판타지적 세계는 일상을 배경으로 하는 [쿨핫]보다 훨씬 더 암울하고 절망적인 매혹을 내뿜는데, 개인에게 그 실패의 원인을 돌리고, 실패의 결과로서 세계 자체를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폐쇄자]에서 자의식은 개인이 틀어박힌 어두운 세계에서 더 나아가, 한 세계의 지탱과 소멸을 결정할 수 있는 강력하고 거대한 것으로 설정됐다. 그래서 약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자기 자신의 윤리를 어긴 채 세계를 닫아버렸다는 자책에 시달리는 쿤의 트라우마는, 현실을 도피하는 쿤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결국 쿤으로 하여금 세계를 닫고, 자신을 파괴하도록 몰아간다.

현실을,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도피하는 쿤에게 히이사는 새로운 기억을 불어넣어준다. 불완전하지만, 아무튼 잠시 동안 살 만한, 나른하고 불확실하지만 은근히 편안한 세계다. 쿤은 세계를 닫아버렸고, 그런 쿤에게 히이사는 가짜 세계를 만들어주는 설정에서 볼 수 있듯, [폐쇄자]에는 쿤과 히이사의 자의식 말고는 그 어떤 다른 세계도 없다. 자의식 속에 고립된 인간에게, 세계의 소멸을 결정할 만큼의 힘을 주었을 때, 그 결과는 파국이다. 왜냐하면 자의식 밖에 없기 때문에, 구원이 자동적으로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당신은 결코 당신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세계에 대해 쿤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쿤의 불행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더 절망적인 의미로 변모한다. 즉 개인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그 개인이 세계의 전부인 것이다. 쿤과 히이사는 죽음 앞에서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이 같은 절망은, 히이사가 쿤에게 다른 모든 기억은 모두 줄 수 있어도 그 상황 속에 맞는 감정만은 줄 수 없다는 설정에서도 드러난다. 결국 쿤은 자신의 자의식 속으로, 상처가득한 자신의 기억 속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몸이 기억하기 때문에. ‘클로저’라는 단어에, 쿤은 “마치 칼로 베이는 것 같이 쓰린” “감각이, 치를 떨며,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다.” 아마, 샨카의 죽음 역시 표면적으로는 히이사가 저지른 짓이지만, 쿤 역시 자신이 히이사와 전적으로 다른 인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기 세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숙명을 지닌 운명의 인간.

히이사는 만화 전반으로 볼 때 쿤만큼 그 캐릭터가 분명하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아마도 ‘약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윤리적인 진정성을 갈구하는 마음마저 쿤이 버렸을 때 쿤이 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결국 자신이 지킬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한계가 뚜렷하다 - 쿤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히이사의 모습을 보라. 결국 [폐쇄자]는 자의식에 고립된 존재들이 구원의 가능성을 부정한 채 사라지는 쓸쓸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유시진의 렌즈가 개인의 한 부분만을 집요하게 들여다보기 때문에 다른 부분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그래서 다른 부분들이 등장할 때면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 [쿨핫]에서 작가는 동경을 그렇게 세밀하게 다루는 반면 동경을 ‘공주’라고 욕하는 아이들을 스테레오타이프로 그려낸다. [폐쇄자]의 경우, 그런 배경을 모두 잘라내고 쿤과 히이사, 이 두명의 자의식과 상처, 기억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시에, 개인의 상처와 자의식의 극단이 파국이라는 결론을 내렸기에, 이제 개인을 비추는 개인주의의 세밀한 렌즈가 다른 곳을 비추어야 함을 가리키는 지표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깜악귀 : 이것은 유시진에게 있어서의 어떤 소실점. 담아내는 이야기와 스타일의 무결한 일치감이 돋보이며, 두 권으로 끝냈기 때문에 추가점수 ★★★★
난나 : 한국순정만화에서 유시진이 차지하고 있는 독보적인 입지를 설득력있게 지지해줄 수 있는 만화. 작가주의적인 전환을 본격적으로 탐색하고 있다. ★★★★


○ 작품목록
[베이지톤 삼색체크], 1-완, 서울문화사, 1994
[OUTSIDE] 2-완, 서울문화사, 1994
[마니] 4-완, 서울문화사, 1995 / 2-완, 시공사, 2002
[쿨핫] 1-5, 서울문화사, 1998-발간중
[신명기] 2-미완, 서울문화사, 1998
[폐쇄자] 2-완, 서울문화사, 2000
[바보이반] 1-완, 시공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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