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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01 대하순정의 시대, 작품리뷰 « 이전글 | 다음글 »
 
[별빛 속에] 강경옥- 어른이 되는 것이 못내 불안한 성장통 환타지
| 2004년 07월 19일에 난나 쓴 글
 
 

 [별빛속에](완결) / 강경옥
  단행본 : 추성사(1-21) 1986-1990 / 창만사(1-19) 1992 /
  에이스문화(1-4 미완) 1994-1995 / 서울문화사(1-10) 1996-1997

 




이야기는 별빛 가득한 밤 하늘로부터 시작한다. 북두칠성 효자 형제들의 설화에서부터 위협적인 U.F.O의 미스테리까지 전설과 과학을 박진감있게 넘나들어 펼쳐진 저 미지의 세계! "우주에 가보고 싶다"는 소녀의 막연한 동경은 불안과 열정의 아슬아슬한 감정선을 따라 애틋한 모험담을 구성하게 된다. 강경옥의 [별빛속에]는 이렇게 한 소녀가 그리는 우주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사건을 본격화하는 중요한 발상은 여학생다운 호기심에서 비롯된다. 등교길과 하교길에서 규격화되는 일상의 세계. 어른이 되기 전까지 버텨내야 하는 안온하면서도 지겨운 환경에 대한 탈출이나 도약의 일탈을 소녀들은 어떻게 꿈꾸게 될까? '여기'에서는 평범한 학생일 뿐이지만 '저기'에서 특별한 존재라는, 다소 기만적일 수 있는 상상으로 위안을 삼는 것이 가장 쉬울 수 있다. 다른 동네, 다른 국가, 어쩌면 은하계 저쪽 행성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서 도피중인 공주일지도 모르지. 입증할 길이 묘연한 내면의 특수한 가치를 주장하고자 하는 소녀 독자들에게,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신혜가 카피온 행성의 제 1 왕녀 시이라젠느로 변신하는 일련의 과정은 공감을 얻을만 했다.

어느날 요란하게 등장한 외계인들이 말한다. 맞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특별한 사람입니다. 왕녀로서 정당한 능력과 매력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구를 떠나 저 별빛 속으로 떠나야 합니다. 위험하달까 달콤하달까, 깜짝 이벤트로 터져버린 낯선 진실에서 도망갈 재간이 없다. 삶의 근간이 되어왔던 정다운 가족과 이웃, 친구들은 모두 '사실은 별나라 공주'인 신혜와의 관계가 빌미가 되어 비참하게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일상이나 현실로서의 지구를 떠나 새로운 우주에서 운명과 신의 뜻을 좇아 부유해야 한다.

작가는 여기서 신혜가 진정한 시이라젠느로 거듭나기 위해 풀어내야할 몇가지 숙제를 제시한다. 카피온 행성을 안팎으로 둘러싸고 있는 골치 아픈 문제들, 즉 카라디온의 전쟁 위협이나 파국이 예견된 행성의 미래, 성이 다른 동생 아시알르와의 왕좌 싸움. 사실 답안지는 문제와 함께 일찍부터 주어져 있다. 신혜가 스스로를 시이라젠느로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왕녀가 행사할 수 있는 초능력과 권위를 되찾고 이를 카피온의 왕족들에게 증거하는 길이다.

영어 수학 위주로 예습 복습 철저히 하는 것 이상으로 명백한 왕도이건만 신혜 혹은 시이라젠느의 복잡한 감정 상황은 이를 쉽게 따라가지 못한다. 오랜 공백 만큼 그녀는 카피온에서 이방인으로 겉돌기만 한다. 아르만, 에라스톤, 라이스타와 같이 눈길만 마주쳐도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며 만사 제쳐두고 절대적인 애정을 맹세하는 완벽한 조건의 꽃미남들도 그녀의 불안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다. 여기에 지구에서 카피온으로 그녀를 모시고 온 충복 레디온과의 관계에서 극대화되는 날선 혼란은 수습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원하신다면 평생이라도" 곁에 섬기겠다는 레디온이지만 호락호락한 친구도, 마냥 자상한 오빠도 아닌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원망과 미련, 간단한 인사조차 나누기 불편한 어색한 이 감정은 혹시 사랑? 일방적이고 독선적으로 치닫는 시이라젠느와 레디온의 어처구니 없는 관계를 '정말로 사랑'이라고 굳게 믿어버리는 [별빛속에]의 소년 소녀들은 감정의 공개적인 교류에 서툰 사춘기 소녀들의 대리 체험을 수행한다. 순정만화적인 관습에 기인한 기형적인 인간 관계는 시이라젠느의 숙적 기레스가 사실은 그녀의 아버지라는 대목에서 정점에 이르기도 한다.

나이를 이유로 금지되거나 차압된 대상에 대한 미성년자들의 이해력이나 상상력은 자칫 허약하기 마련이다. 문제를 종합적으로 사고하고 해결을 위해 정석대로 접근하기 보다는 즉흥적이며 낭만적인 도피로 튀어 버리기 쉽다. 계급에 대해 주구장창 고민하던 시이라젠느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여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신분제도의 편리함을 이용하려 드는 것도 그녀의 자각과 문제 해결 방식이 아직은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무를 신과 운명에게 전가하기 일쑤다.

감정 문제에 대한 반응이나 행성의 운명에 대한 처신이나 결국은 시이라젠느 앞에 놓인 시험지의 마지막 답란 안에서 맥을 함께 하게 된다. [별빛속에]의 중심 사건들은 여자로서 왕녀로서 시이라젠느가 내리는 결단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종잡을 수 없는 방황과 혼란 끝에 그녀는 "가슴에 응어리져 삭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시도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며 "생각을 느껴가고"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라고 되뇌이며 레디온에 대한 애정이나 왕녀 시이라젠느로서 짊어지게 될 운명을 확인한다.

작가는 평범한 소녀가 다음 단계의 인생을 향해 성장하면서 통과해야 하는 심리적 충격들을 우주선과 외계라는 소재를 빌어 보여주는 것이다. 사회적 자아를 다듬어 내고 애정의 갈구에 솔직해지는 생경한 어른의 삶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이 성장의 첫 걸음이라고 강경옥은 이야기한다. 그러나 여자아이의 성장을 순진하게만 바라본 면이 없지 않다. 분노하거나 두려워하고 또 슬퍼하며 성역의 안개 속으로 숨곤 하던 시이라젠느가 비로소 여왕으로서 자신의 능력과 운명에 직면하는 순간 서둘러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는 식이다. 죽음으로 치달은 비극을 연쇄적으로 부르던 그녀의 성장은 결국은 이렇게 모호하기만한 것을.

[별빛속에]가 오래된 여성 영웅담의 외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순정 활극의 전통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바로 특정한 시기의 욕망 이상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본격적인 사회적 책무의 이행, 연애와 결혼을 두려워하는 여자 아이가 용기를 내다 만 격이다. 결국 시이라젠느의 마지막 귀착지는 인적 없는 블랙홀의 외딴 공간. 그녀의 미래를 열어두지 못한 것은 성장을 향한 여자아이의 모험이 목표지점을 찾지 못했다는 작가의 자기 고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주를 그리는 [별빛속에]의 상상력은 '소년중앙' 식의 오컬트적 SF(주1)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사건이 진전되고 공간이 확장되면서 오히려 별나라 공주님 이야기로 추락하는 감이있다. 어른이 되는 길목에서 길을 잃은 여자아이가 경험하는 고난이 하나의 비극적 우주로 형상화된 일종의 성장통 환자지이다. 시이라젠느가 블랙홀 안에 유폐되어 변변한 애정 표현 없이 떠나 보낸 레디온을 천년만년 그리워해야 하는 비극이 재발되지 않기 위해서 시이라젠느는 좀 더 어른으로 나이를 먹었으면 좋았겠다. 세상에 나만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사랑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 영원하게 지속되는 가치나 감정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떠났으면 좋았을 뻔했다. 적어도 지구에서는 그렇다.



○ 각주/참고사항
* 주1) 필자가 1978년부터 약 10여년간 구독했던 기억으로 [소년중앙]은 현재의 기준으로도 결코 범상치 않은 면모를 지녔던 잡지이다. 아동이나 청소년층을 아우를 만한 컨텐츠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에 월간 [소년중앙]은 만화뿐 아니라 초등학생과 중학생 독자의 흥미를 자극할 만한 신선한 기사를 제공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제도적인 착한 아이로 독자를 훈육하기 위한 만화와 기사의 한켠에는 불온한 상상력을 조장하는 특집 기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반복되기로 '지구의 8대 미스테리' '지구 최후의 날' '세계의 유령' 등의 묵시록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내용이 많았으며 유사과학에 대한 친근감과 함께 현세적인 논리와 질서를 불신하게 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 작품목록
[이카드입니까] 3-완, 시공사, 1986-
[별빛속에] 21-완, 추성사(Prince Comics), 1986-2000
[라비헴 폴리스] 3-완 , 시공사, 1989-
[거울나라의 수수께끼] 2-완, 시공사, 1991
[현재진행형 ing] 4-완, 시공사, 1991-
[17세의 나레이션] 2-완, 시공사, 1991-
[퍼플하트] 2-미완, 시공사, 1992- / 2-미완, 시공사, 2001-2002
[펜탈+샌달] 3-완, 시공사, 1992-
[스타가 되고 싶어?] 2-완, 시공사, 1992
[노말시티] 15-완. 서울문화사, 1993
[두 사람이다] 4-완, 시공사, 1999

* 강경옥 팬사이트 이미지 퍼즐 (http://www.imagepuzzle.net/) : 작품목록 정보의 파악에서 의존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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