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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01 대하순정의 시대, 작품리뷰 « 이전글 | 다음글 »
 
[북해의 별] 김혜린- 한국 여성대하서사의 신호탄
| 2004년 06월 09일에 메리메리 쓴 글
 
 
   

 [북해의 별](완결) / 김혜린
 단행본 :
프린스(1-16) 1983-1987 / 창만사(1-19) 1992 / 세주문화(1-11) 1996

 

 

 

 

 

프랑스 혁명사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넓게는 80년대라는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가 없었다면 [북해의 별]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해의 별]은 작가의 데뷔작이자, 작가 스스로도 ‘세주문화’ 판 서문에서 당대 한국 사회와 정권에 대한 분노가 강했으며,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들을 마구 쏟아낸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해의 별]이 데뷔작인 만큼 미숙한 부분이 엿보이고, 감정 조절이 잘 안됐다는 느낌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리뷰작으로 선택한 것은, 오히려 작가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에서 들어온 대하순정물의 양식이 어떻게 한국에서 소화되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북해의 별] 초반은 초인에 가까운 영웅 유리핀 멤피스의 비범함을 드러내기 위해 주력한다. 그는 “역사 속에 낯설지 않은 운명의 덫에 걸린 사나이”이다. 재능을 타고난 그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단숨에 보드니아 해군의 수장 위치를 차지하며, 운명적인 연인 아니타까지 만나는 등 앞날이 창창하다. 하지만 영웅이 있으면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법. 유리핀의 사내다움과 기백을 두려워하고, 질시하는 국왕과 유리핀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막고자 하는 화라 백작의 협공에 의해 그는 모함 당해 왕실에서 축출 당한다. 유리핀은 감옥에서 재기를 꿈꾸며 죄수들을 조직화하는데, 이는 몽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복수극을 예견케 한다. 그러나 초반부터 심상치 않게 복선으로 깔리는 것은, 전쟁을 통해 민중의 고통을 알게 되고, 이를 고민하는 유리핀의 모습이다. 유리핀이 감옥에서 억울하게 갇힌 ‘실제’ 민중을 만나면서 고민은 더욱 심화되어, 고뇌의 수준에 이른다. 그는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죄수들에게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자유와 평등의 비전을 제시한다. 그 결과 귀족들의 세계로 한정되었던 전반부는 후반부로 갈수록 확장되어 유리핀을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사람들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운데 보드니아의 민중 혁명이 완수되는 과정으로 이행한다. 또한 초반에는 어색하게 삽입되었던 코믹한 장면이나 일본 순정물의 그림체를 그대로 따라한 듯한, 작가가 잘 소화하지 못한 스타일이 후반부로 갈수록 안정되며 유리핀이 바다에서 절규하는 장면 등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의 연출력이 점점 좋아지면서 독자들을 흡수하는 힘이 배가된다.

보드니아 혁명사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민중 중심적 해석을 그대로 따른다. 굶주림과 귀족의 횡포에 지친 민중들은 점차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일어나며, 일시적으로 민중과 귀족의 연합 회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귀족-특히 외세와 관계를 맺은 귀족들의 반발로 민중들에게 총을 겨누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자, 혁명은 오히려 급진화되고 민중들의 거대한 저항적 흐름이 일어난다. ‘피의 프라다’와 같은 학살극, 샹큘로트라는 단어의 등장은 확실히 프랑스 혁명을 보드니아에 이식했다는 인상을 준다. 유리핀과 함께 감옥을 탈출한 데니, 잉카릿타 등은 혁명을 이끄는 민중운동가가 되어 민중이 주체가 된 혁명사를 대변한다. 귀족이 지나가는 마차를 막았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총을 들이대는 에피소드는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혁명의 도화선으로 작동한 유명한 이야기이자 귀족 압제의 신화가 되어버린 사건이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보드니아 혁명은, 민중이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역사에 대한 작가의 진실한 믿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신념은 [테르미도르]를 비롯한 이후 만화들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운동권들이 이 만화를 많이 읽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 법한 작품이다.

물론 [북해의 별]은 혁명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결국은 유리핀이 아니냐는 점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한다. 유리핀은 자신의 모순적인 존재상황 - 귀족이라는 출신성분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신념 - 에도 불구하고, 결국 국가체제에 반대하는 혁명가로 변신한다. 그의 결심이 약해질 때 마다(메디아가 제공하는 안락한 세계에서 쉬고 싶을 때) 때마침 나타나는 거친 바다는 그가 사나이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 역사 속으로 뛰어들도록 만드는 대상이다. 바다 앞에서 절규하는 모습이나 혁명이 이루어지도록 자진해서 집회를 열고 감옥에 잡혀가는 그의 모습은, 신과 같은 존재로 유리핀을 승격시키는 효과를 낸다. 유리핀 주변의 모든 인물들은, 혁명을 지지하는가 아닌가와 상관없이 유리핀이 보여주는 열정과 신념에 마술에 걸린 듯 이끌려 그가 원하는 혁명이 완수되기를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바라게 된다. 유리핀을 감옥에서 고문하던 미르키는 그를 숭배하는 마음에 유배지까지 따라간다. 유리핀의 운명적인 연인 아니타의 남편 브리가 대공은, 오히려 유리핀을 통해 사회적인 현실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그에게 고마워하며 죽어간다. 아무리 영웅이라 해도 이쯤 되면 지나친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핀의 설정에 대해, 긍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일차적으로 유리핀이라는 인물 뿐만이 아니라 주변 캐릭터 역시 유리핀 만큼의 입체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단지 주변 인물들은 인간적인 측면이 강하고 유리핀은 초인적 측면이 강할 뿐이다). 그리고 유리핀이라는 번쩍이는 인물을 통해 뒤틀리고 일그러진 인물들의 어두운 심리와 욕망이 드러나게 된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유리핀의 대척점에 서 있는 비요른은 유리핀과 대면할 때마다 비극적인 가족사로 인해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기에, 유리핀을 질시한다. 아버지 화라 백작에 대한 복수와 출세라는 욕망에 충실하지만, 원래 착한 인간이었던 까닭에 유리핀의 열정과 한나, 카니오의 순수함을 보면 괴로워하는 비극적이고 탐미적인 캐릭터 비요른의 모습은, 한나를 매질하는 설정은 다소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주지만(작가 데뷔작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인간적이고 묵직한 고뇌를 담고 있어 쉽사리 신파로 취급할 수 없다. 신파적인 설정, 즉 독자들의 눈물을 자아내는 극단적인 상황은 김혜린의 만화에서 등장하지만 이 상황들은 반동적인 세계와 부딪치는 개인이 세계 속에서 겪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들-고문이나 유배, 학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비요른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듯 작가는 역사 속에서 개인이 당하는 고통, 그리고 그 고통과 상처로 인해 형성된 일그러진 면모들을 애정을 가지고 다룬다. 유리핀이 보여주는 이상적인 면모 이상으로 이 만화에는 개인들의 고뇌와 욕망, 애증 같은 어두운 부분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민중이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역사에 대한 그녀의 신념 역시 표피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처럼 역사의 상처에 대한 치열한 관찰과 개인에 대한 연민은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김혜린만의 면모로서 김혜린이 일본에서 수입된 순정물을 어떻게 차별적으로 소화해냈는가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유리핀에 대한 애정과 의구심에 갈등하는 잉카릿타, 유리핀을 알기 위해 일부러 빈민층이 사는 거리를 걸어다니는 아니타, 한나를 괴롭히면서 자학하는 비요른, 부인이 유리핀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비하와 아델에 대한 애증으로 빠져드는 브리가 대공 등 [북해의 별]은 (무의식적인) 매저키즘적 욕망의 재현과 캐릭터들의 고통에 대한 연민 사이를 줄타기 하면서 독자를 빨아들인다. 이를테면 인물들의 힘겨운 상황 설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견딜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보여주는 듯한데 그 장면들을 섬세하게, 때로는 탐미적으로 그리는 작가의 손에서 욕망과 신실한 관심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이다. 이후 김혜린의 작품에서는 유리핀과 같은 희망을 제시하는 초인적인 캐릭터 대신 인간적인 뒤틀림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동시에 지닌 유제니와 같은 캐릭터가 등장한다. 또한 유리핀과 비요른이 대변하는 현실에 맞서는 남성들과 남성 뒤에서 그들을 위해 몸을 다치거나(아니타) 미쳐가는(한나) 여성의 모습 역시 점차 변한다. “남자가 자신의 사상에 몸을 던질 때 여자는 그 그늘에서 불행해진다”라는 [북해의 별]의 대사는, [불의 검]에서 스스로 칼을 만드는 아라의 모습이 수정한다. 물론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별에서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점이 없지만(이 부분이 김혜린을 80년대 감수성의 작가로 분류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기도 한다), 역사적인 고통을 여성 캐릭터가 체현하게 됐다는 점은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깜악귀 : 미숙함이 진정성을 가리진 않음 ★★★★
난나 : 난해한 고유명사에 독자의 기억력은 수시로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개인을 구속하는 환경적인 조건에 부단하게 맞서는 캐릭터의 뚝심과 끈기는 작가의 이름과 함께 잊혀지지 않는다. ★★★★


○ 작품목록 [북해의 별] 16-완, 프린스, 1983-1987 / 19-완, 창만사, 1992 / 11-완, 세주문화, 1996 [비천무], 13-완, 프린스, 1988-1991 / 6-완, 대원, 1997 [테르미도르], 4-완, 서화, 1991-1992 / 3-완, 대원, 1998 / 3-완, 길찾기, 2003 [불의 검], 8-미완, 육영재단, 1992-1996 / 11-미완, 대원씨아이, 2001- [아라크노아], 2-미완(?), 대원, 1998 [겨울새 깃털 하나], 2-완, 창만사, 1988 / 1-완, 대원, 1998 [광야], 2-미완, 대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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