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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분석/인터뷰 | 다음글 »
 
유시진 - 위태로운 자기애의 외줄타기
| 2002년 01월 06일에 깜악귀 쓴 글
 
 

유시진은 인기있는 작가다. 한국순정만화의 발흥이라 할 수 있는 전설의 순정잡지 '르네상스'에 92년 [유토피아2030]을 내어 당선되었으나 그 당시에는 작품활동을 하지 않았다. 이후 순정잡지 '댕기'에 3부작 [지난 봄 이야기]를 연재하며 그 당시부터 팬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무리해서 도식화하자면 남자만화의 독자들은 작품에 열광한다. 작가에 열광하는 경우에는 그 작가의 역량에 도취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여자만화의 독자들은 작가와의 정서적 연결고리를 매우 중요시한다. 유시진의 경우도 역시 예외는 아니며, 아니, 유시진의 독자들은 순정만화의 일반적인 작가-독자 관계를 넘어선 매우 강렬한 동족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유시진이 작년에 내놓은 2권짜리 만화 [클로져(the Closer)]는 유시진이 동반하고 있는 팬들에게 최고작으로 꼽히고 있으며 판매부수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위에서 언급한 유시진의 독자들, 어떤 선별된 층의 독자들'은 공통된 성향을 가지고 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존감이 강한' 여고생, 여대생이라는 것이다. (물론 남자도 있다. 나처럼)


1. 자의식으로서의 '개체'

나는 유시진의 만화에서 '개체주의'를 발견한다. 이런 애매한 말을 굳이 써야만 하는 이유는, 일반적인 용법의 개인주의라든가 이기주의라는 말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다.

이기주의라는 용어를 쓰지 않은 이유는 유시진의 만화에서 속세적인 가치나 이익에 대한 거의 경멸에 가까운 무관심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유시진의 만화는 자아와 세계와의 인식론적인 테마에 매달려 있으며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무관심하다.

유시진 만화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개인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한 '개인'이라기보다는 전체와 어떤 종류의 균열을 겪고 있는 누군가이다. 그들은 세계와의 균열과 대립을 통해 자신을 인식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은 개인주의를 옹호하지만 세계가 '개인과 개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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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세계를 보는 눈은 내면의 안에 있다. 그들은 밖으로 말하기 보다 내면에서 독백하기를 좋아한다. 세계는 자아 외벽의 필터를 통과한 이후에야 존재하는 환영이다. 그것이 물리적인 실제를 가지고 직접 자아에 개입해 들어올 경우, 그들은 이를 증오한다. '나'라는 존재는 외부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회피하며, 자아의 성곽 안에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순박한 신비주의와 순종적인 환상에 매몰되지 않는다. 이들은 전체와 강렬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그 전선을 언제나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전체 vs 개체. 오직 개체의 독립성만이 전체와의 대립에 명분을 마련해준다.

개체주의라는 애매한 말을 동반해서 모호한 말을 찌껄였지만 여기에서 언급한 의미에서의 '개체성'이라는 말을 이 글에서는 종종 사용해 먹으려 한다. 잘 만든 용어는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여기에서 시작해보자.

2. into the Outside? into the Inside...

전체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로부터 소외되거나 전체와 융화될 수 없는 '개체'들이 유시진 만화의 캐릭터들이다. 그들은 타인과 교류함으로서 이러한 개체성이 훼손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런데 그들은 모순되게도,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다른 개체를 그리워하며 갇혀진 내면으로부터의 도피를 꿈꾼다. 사랑이란 서로의 개체성을 죽이는 질병이다. 그러나 그 질병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초기작 [마니]의 주인공 마니와 해루는 마지막에 서로 결합한다. 그러나 유시진이 자기 색깔을 강하게 할수록 자아의 개체성은 더욱 우위에 두어진다.

[클로져]에서 잔혹한 유시진은 음침하게도, 혼자로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붉은 날개의 소녀를 죽이도록 사주한다. 주인공 쿤은 스스로 소멸한다.

그들은 일단 유시진 작품의 제목처럼 'Outside'에 있다. 개체로서 존재하려면 당연히 외곽에 있어야 하겠다. 유시진에 의해 선택되어진 이 'Outsider'들만이 유시진의 만화에서 자의식을 가질 권리를 가지는 듯 하다. 그들은 고립됨으로서 선택되었다. (유시진의 독자들은 이런 부분에서 강한 동일시를 느끼는 듯 하다. 강하게 고립된 폐쇄적 자아가 가지는 선민의식) 그들은 서로 간에 동족의식을 느낀다.

초기작에서 유시진의 경향은 일반적인 순정만화와 그렇게 명확히 구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후기작으로 갈수록, 자의식은 계속해서 팽창하여, 마침내 세계 속의 한 인간으로서 존재하기를 그만두고, '세계와 마주하는 유일한 자의식'으로서의 존재감을 더 많이 가진다. (개체성) 이에 동반해서, 유시진의 캐릭터들은 점점 더 인물보다는 인물의 의식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독자들은 인물의 행동에 참여한다기 보다는 인물의 내면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다.

나중에 가면 이러한 개체로서의 자의식은 '개체 vs 세계'의 대립구도를 깨뜨리고 그 자체 하나의 세계로 확장된다. 개체는 그 자체로 완결된 세계가 된다. [클로져]에서 '쿤'의 세계는 곧 '쿤'의 의식과 직결되며 외부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인공 '쿤'의 인식적 결정에 의해 세계는 유지될 수도 있고, 사라져 버릴 수 있다. 환타지의 어떤 종류를 자기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의 내면풍경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유시진의 환타지가 그러하다. [신명기] 역시.

한 개체가 바라보는 자신의 내면풍경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황량한 일이다) 자신 이외의 이질적인 것이 섞여들게 하지 않으려 하는 이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유시진 만화의 인물은 결코 전체와 섞이려고 하지 않고, 자신에게 가해진 사회적 폭력에 대한 스스로의 피해의식을 무기로 하여, 자신의 개체성을 고수한다. 외부에 증오할 것이 있는 한 이 개체성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그리고 유시진 만화의 캐릭터들은 자신이 고수하고 있는 개체성의 근거를 이 사회적 폭력에서 찾는 것 같다.

부친살해의 충동에 시달리는 [신명기]의 타마라의 경우나 [쿨핫]의 김동경의 경우가 그렇다. 타마라의 성격이 그렇게 신경증적이 된 이유는? 아버지인 동천제 때문이다. 김동경의 성격이 역시 그러한 이유는? 그 영화감독 아버지 때문이다.

유시진은 가부장제와 전체주의(사회적 파시즘)와의 연관성에 주목하며, 거기에서 자신들의 자아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해명하려는 듯 하다. 가부장제에 대한 증오를 이만큼이나 날로 드러내는 캐릭터들은 그야말로 만화계에서 독보적이라고 할 만 하다. 이것은 유시진 만화의 일관된 테마 중의 하나다. 여기에서 강렬하고 폐쇄적인 자아는 온 몸을 곧추세움으로서 만들어낸 일종의 무기다. 맞다. 피해입은 자들은 억압된 공격성을 기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말하자면 사회적 폭력에 의한 피해의식과 유시진 만화의 캐릭터들과의 인과관계, "A는 B 때문이다.", 는 과연 성립하는가? 오히려 이 사회에 대한 증오는 자신의 개체성에 대한 정당화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가? 말하자면 그들의 강렬한 자의식은 이미 어떤 사회적 인과관계로 설명될 수 있는 틀을 뛰어넘은 것이 아닐까? 그것은 어쩌면 심미적인 차원에서의 우월한 '스타일'로, 일종의 미학적 가치로 환원되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가부장제에 대한 증오, 부친에 대한 증오는 유시진 만화의 일관된 테마였다. 그러나 이 테마가 등장하지 않는 [클로져]는 온전히 자아 내면에 대한 인식과 충동에 대한 집약이라고 할 만하다. 여기에서 자아는 자기 속에서 질식한다. 주인공 '쿤'은 죽음을 택하고, 세계는 닫혀버린다. 누구도 거기에 개입할 여지가 없으며, 전체와의 균열은 보이지 않는다. 개체성은 자기 내적으로 완결된, 파멸적 미학으로 종결지어진다. 그것 뿐이다.

이쪽이 좀 더 솔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에 유시진 만화의 장점과 한계가 카드의 양면처럼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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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희생자인가 엘리트인가?

[쿨핫]이나 [신명기]에서 표현되는 전체주의적 사회, 가부장제에 대한 증오와 공격성은 확실히 매력적이고 시원한 구석이 있다. 전체적인 규율이나 제도적 가치를 인간 개개인보다 중시하는 풍토가 강한 사회에서 유시진의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개체성에 대한 강조는 분명히 진보적인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여성이란 실제로 주변적 성이어서, Outsider가 되는 것도 이해할 만한 맥락이다.

그러나 이 강력한 자기애라는 부분은 이러한 가치만으로 설명 불가능하다. 이것은 이미 이념적 가치가 통하는 부분이 아니다. 유시진의 만화에서 강력한 자기애는 무의미하리만큼 강력하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유시진 만화의 주인공은 단 한 명인데, 다름 아니라 화자의 의식이다. 각각의 캐릭터들이 존재하지만 그 캐릭터의 의식에 대해서 설명하는 이의 의식은 거의 동일하다. 때문에 캐릭터의 내면독백으로 작품을 끌고가는 후기에 이르면, 캐릭터를 관찰하는 화자의 의식이 실제의 캐릭터를 먹어버리는 경향이 생겨난다.

이러한 강렬한 자기애, 다시 말하며 나르시즘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타인을 자신의 의식세계에서 인정하지 않음은 사실 세계에 대한 폭력이다. 그리고 강철신경을 가진 인간이 아닌 이상, 그것은 반작용을 일으켜 끊임없는 자기혐오와 자학을 동반한다. 자기혐오와 자학 역시 자기애의 일종인 것이다. 주변적 위치로 인해 피해입고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피해입었다고 할 만한 사람들, 이를테면 집이 철거된 철거촌 사람들이라든가, 어릴 때부터 학대당한 사람들의 의식은 보통 이렇지 않다)

이 강렬한 자기애가 가지는 자기혐오는, 그 원인과 시작이 어땠을 지언정, 자신의 내면에 그 순환적 원인과 결과를 낳으며 자기애를 증폭시킨다. 그리고 자기혐오는 타인에 대한 공격성을 발생시킨다. 물론 이러한 공격성은 대단히 분석적인 경우가 많다.

[쿨핫]에서 김동경은, '약한 것들'에 대한 공감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상 '가장 일반적으로 흔하디 흔한 약자들'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김동경은 자기 반의 친구들이 '약자'에 속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개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집단으로 뭉쳐서 개체성을 지닌 약자를 밀어붙이려 드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과잉된 자의식에 의한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강자들들, 전체주의자들인 것이다. 사실 그것이야 말로 일반적인 약자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는다.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김동경의 의식이 곧 작가 유시진의 의식이 되는 것은 아닐지언정, 글쎄, 그 외의 다른 작가의 관점이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는 것 역시 사실인 것이다.

이렇게 유시진 만화에서 '약한 것들'은 사실 세심하게 선별되고, 그것은 일종의 동족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그들은 도망갈 수 없을 만큼 강한 자기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강한 자기애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이다. 물론 이러한 '동족'들은 실상 유시진 내면의 분산된 자아인 경우가 많고 결국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의 반복으로 종결된다. 이것이 유시진 만화에 등장하는 피해의식이다.

이 피해의식은 동시에 우월성이기도 하다. 유시진 만화의 주인공들이 자기 이외의 우월한 것을 그다지 발견하지 못한다. [쿨핫]에서 김동경은 겨우 매우 섬세한 감성을 가진 선배 하나와 스쳐 지나갈 수 있었을 따름이다. 아주 자주 지적되는 것처럼 [쿨핫]의 캐릭터들은 집단으로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

일단 어딘가 빠지는 인물은 아예 감정이입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유시진 만화는 엘리트적이라고 비판받곤 한다. 환타지가 아니라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쿨핫]에서 인물들은 전부 다 먹고 살 걱정은 없는 중산계층 이상의 자녀들이다. ([쿨핫]의 5권에서 중심인물인 재련과 루리가 사귀는 편에서 그들이 바꾸어 메고 나오는 가방은 13개라고 한다.)

[쿨핫]에서 김동경은 상처입은 내면을 가지고 있지만 그 상처는 동경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희생자인 척 하면서 잘난 체 하지 말란 말이야..."라는 일갈이 튀어나온다 해도 그 말에는 타당성이 있다. 마치 그것은 80년대 순정만화에 등장하는 냉미남의 여성적 변용인 것처럼 보이고 자주 나를 헷갈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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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괜찮은 작가 유시진의 한계

어쨌든 작가는 누구나 작가가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인물들을 그릴 수 밖에 없고 자의식을 테마로 하는 작품일 경우 더욱 그렇다. 이 부분, '유시진 만화의 엘리트 중심성'에 대한 비판은 좀 더 섬세할 필요가 있다. 90년대의 대중정서는 이미 중산계층 이상으로 넘어갔으며 (그들의 실제 계층하고는 동떨어지긴 했지만) 단순히 '왜 하층계층에 감정이입하지 못하는가'라는 비판은 지나치게 당위론적이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시진이 계층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과 계급적으로 보수적이라는 것과 꼭 연속선상에 있는 것은 아니다. 유시진은 상위계층에 있는 어떤 인물이 다른 계층에 있는 이들과 어떻게 관계맺는가를 다룬다기 보다는, 오직 자기와 자기가 마주대하는 세계의 문제, 혹은 오직 자기의 문제를 다룬다. 개체성과 다양성의 밑바탕에 계층과 계급 문제가 깔려 있고,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지만, 어쨌거나 일단 개체성과 다양성은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분명히, 이러한 강렬한 실존, 자기애는 계층적 문제가 아니라 그녀의 작품 내적으로 장애가 되기 때문에 문제인 것 같다. 유시진은 사회적 문제의식을 도외시하는 작가가 아니며, 이 점은 그의 만화에 자주 등장한다. 특히 언급했듯이 여성배제적 가부장제에 대한 그의 인식은 전위적인 데가 있다. 그러나 개체성, 너무도 강렬한 자기애는 자아가 인식하는 세계마저도 잠식하며 종국에는 미학만이 부각된다.

유시진 만화의 캐릭터들은 멋있어 보이며 별로 희생자 같아 보이지 않는다. 90년대의 대중들은 희생자 보다는 재능있는 자, 특출난 자에 동일시하는 데 더 익숙하며 유시진 만화는 그러한 대중이 즐기는 데 거의 무리가 없다. 많은 여고생들이 김동경과 자신을 바꿔치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유시진 만화의 인기에 한 몫을 한다.

김동경의 피해의식은 그녀를 희생자로 이해시키기 보다는 그녀를 왕녀로 이해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가 공격대상으로 삼는 가부장제와 전체주의에 대한 증오가 가지는 맥락을 흐트러트리는 경우가 많다. 누가 뭐래도 김동경은 나르시즘에 빠진 영화감독인 부친의 딸이다. 타마라는 역시 나르시즘에 빠진 동천제의 딸, 왕녀이다. 초기작 [마니]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그녀들 역시 어쩔 수 없이 나르시즘을 가진 존재들이다. 단지 그 나르시점이 자기혐오와 자기분석을 동반하고 있으며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는 것.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것이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작품 내적 한계가 아닐까? 부친살해의 충동에 시달리는 캐릭터들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결코 리얼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그들과의 관계는 캐릭터들의 개체성에 가장 중요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지만, 부친에 대한 증오는 '왕이다(가부장이다)', '느끼하다', '모친을 죽였다'라는 몇 가지의 추상적인 감정에 의존하여 반복된다.

유시진은 아직 이러한 반복으로부터 몇 발짝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은 부친살해의 충동에 대해 무의식적 억압이 발생하는 부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아버지를 증오하는 이유는 자신을 증오하는 이유와 함께 하는 것이며, 그 증오의 덩쿨을 뿌리까지 끄집어낼 경우 자신의 존재이유까지 뒤흔들릴 수 있다. 김동경과 타마라의 존재이유는 부친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다. 그 관계가 증오일 뿐이다.

유시진이 환타지를 선택해서 신화적 코드에 몰두하는 것은 덩쿨을 잡아당기기 위해 선택한, 일종의 우회적인 방법인 것처럼 보인다. 현실은 신화적으로 추상화되고 내면은 생생하게 현실화된다. 신화란 상징적 코드이고, 그것은 꿈과 같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꿈은 내면의 위험성분들이 여과되어 내보여지는 상징들의 세계이다. 유시진이 [마니]와 그 연장선상에 이은 [신명기]를 통해 신화에 몰두한 덕분에 우리는 괜찮은 환타지를 몇 얻게 되었지만 그것은 작품의 외형성 성장이며, 내가 보기에 작가적 내면의 성장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신명기]의 연재중단은 내게 상징적으로 다가왔다. [신명기]의 방대한 스케일과 많은 캐릭터들은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작가의 내면에서 빙빙돌고 있는 느낌을 주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모호한 인상을 남긴다. 현실은 추상화되고 내면은 생생하게 현실화된다.

이 캐릭터들의 증오와 자기애, 개체성은 충분히 이해되지 않고,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채로 그 강렬한 자의식의 힘으로 강한 감정이입의 소용돌이, 독자와 작가 간의 폐쇄적 소용돌이를 만든다.

그리하여 희생자로서의 자기애인가, 엘리트로서의 자기애인가의 문제는 그냥 자기애에 의한, 자기애의 문제가 된다. 부친에 대한 증오는 여전히 충분한 근거와 이유가 제시되지 않은 채, 상징적으로만, 상황적으로만 묘사되며, 더이상 파해쳐지지 않는다. 그것은 가부장제애 대한 저항이라는 유시진 만화의 일관된 테마의 진정성을 약화시킨다. 가부장제에 대한 분노는 자기애로 환원되고 작품 자체를 제약하기 시작한다.

5. 문 닫고 나갈 수는 없다고 말해도....

[클로져]에서 보여지는 무한차원에 가까운 세계의 스케일은 결국 내적으로 완결된 개체성을 극으로 밀고 나간 결과였고 문제없이 끝맺을 수 있었다. 이 경향이 강해진다면 결국 미학적 완결성은 점점 더 강해지고 내용을 구성하는 문제의식은 희미해지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유시진의 작품을 보겠지만 그다지 유쾌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솔직히 유시진의 강한 자기애에 감정이입하는 편이다. 유시진의 자기애는 작가주의와 맞물리며 이는 매력적이다. 작가적 자의식이 있다는 것은 한국의 만화판에서는 상당히 희귀한 일이 아닌가? 유시진은 드물고 가치있는 작가다. [클로져], 자아의 '닫힘', 그러면 이후에 나갈 곳은 어디인가? "문 닫고 나가"라는 우스갯 소리가 있었다. 문 닫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문을 열어야만 나갈 수 있다. 그곳은 어디? 또 다른 자기애로 이르는 길?

타마라가 천족의 세계를 벗어나 목격한 바깥 세계란 어디인가? 천족들의 세계가 아닌 인간의 세상. 부친의 영토로부터 벗어나 이르는 곳은 온전한 자기애의 영역인가, 아니면 개체성의 폐쇄적인 세계로부터 벗어나 타인과 내가 함께 교류하며 존재하는 인간의 세계인가.

[신명기]의 재연재가 기다려지고, [쿨핫]의 완결이 기다려진다. [쿨핫]에서 유시진은 인물들을 생활세계에 발딛게 하고 싶어하고, 보다 사람답게 살게 해 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쿨핫]의 캐릭터 '이루다'는 김동경이 이루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동경이며, 유시진 만화에 등장한 균열이기도 하다. 자,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어떻게 열고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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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그림파일들의 출처는 유시진 공식 홈페이지(http://www.sijin.co.kr)에서.

* 2002년 1월 6일에 만화비평웹진 두고보자(www.dugoboza.net)의 작가론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한참 전의 글이고 지금 보면 부족한 점이 많지만 자료의 차원에서 여성만화프로젝트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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