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DNS
논쟁은 1995년 처음 촉발되어, 그 과정에서 인터넷 기술자 커뮤니티의
주도세력과 네트워크 솔루션社(NSI) 간의 분쟁이 일어났다. 당시의 주요
논제는 인터넷 도메인 네임 시스템(즉, DNS)의 행정적 개혁이었다.
NSI의
개입은 "협동 협약"(Cooperative Agreement)이라고
불리우는, 미국 국가 과학 재단(NSF)과 채결한 1993년 계약에서 유래되었다.
이 협약의 기본 조항에 따르면, .com, .net 및 .org의 이차 도메인(SLD,
flywheel.com 에서의 flywheel에 해당)은 요청에 따라서 무료로 선주문
선취득 원리에 따라서 배분되기로 되어있었다.
1995년
한해 동안, NSI는 여러 사안에서 점점 더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느린 서비스 속도와, 편협하고 모호한 분쟁해결정책이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었다. 1995년 9월 13일 "협동 협약"에 대한
수정이 가해진 후, 비판론은 더욱 거세어졌다. 이 협약은 NSI가 신규
도메인 이름 등록을 할 때 요금을 부여할 수 있도록 했다(2년에 100달러;
그중 30달러는 NSF에 반납). 이것은 결정적인 사건이었으며, 거센 조직적인
온라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존 포스텔 Jon Postel (1943-1988), 스콧
브래드너 Scott Bradner를 위시한 저명한 인터넷 기술자 베테랑들이
NSI가 최상위 도메인 (TLD) .com, .net, .org 에 대해서 행사하는 더욱
강력해진 일방적 독점을 종결시키기 위한 운동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온라인 토론에는 야심찬 기업가들, 그리고 상품권 사안을 전문으로 하는
여러 변호사 및 로비스트들이 추가적으로 참가했다. NSI를 거부하는
진영이 내부에서 TLD 배정의 재구조화를 위한 최상의 접근법에 대하여
토론하면서 논쟁은 더욱 깊어졌다.
1996년
후반, 인터넷 기술자 커뮤니티는 국제 임시 위원회(International ad
hoc Committee, IAHC)를 형성했다. 10여명으로 이루어진 위원회는 최종적으로
1) 7개의 신규 최상위 도메인(TLD) - .arts, .firm, .info, .nom, .re,
.shop, .web -을 만들고, 2) .com, .net, .org를 비영리적인 행정기구를
통한 전세계적인 공공 공유 자산으로 만들자는 계획을 수립했다. 1997년
봄, IAHC 및 기타지지 세력들은 일반 최상위도메인 이해각서(Generic
Top Level Domains Memorandum of Understanding; gTLD-MoU)를 인준하였으며,
국제 통신 조합(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s Union; ITU)와 함께
두어 규약으로서 취급하였다. '각서운동 (MoUvement)'이라는 용어는
여기에서 파생되었다.
MoU운동
진영은 다음을 포함했다: 1) 신규 최상위 도메인 형성에 있어서 점진적인
접근을 원했던 상표권 관련 이해관계자들; 2) 자기 조직의 새롭고 적극적인
세계적 책임권한을 주창하는 ITU 및 세계 지적 재산권 협회(WIPO) 관계자들;
3) 최상위도메인 배정을 "전세계적 공공 협의체"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인터넷 기술자 커뮤니티 성원들 등이다. gTLD-MoU는 최상위 도메인
배정과 도메인 네임 등록 기능의 근본적인 재구성을 적용시켜서, NSI의
독점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었다. 그 대신, 기존 및 (IAHC에서 추천한)
신규 일반 최상위도메인(gTLD) 내부의 이차 도메인(SLD)을 되팔수 있는
권한은 전지구적 등록자(registrar) 네트워크 사이에서 배분되었을 수도
있었다. 이 경우, 이러한 등록자들은 제네바 협정에 기반한, 등록자
협의회(Council of Registrars; CORE)라는 비영리 기관에 의하여 운영되는
공유 등록 시스템(SRS)을 사용하도록 요구되었을 것이었다.
NSI의
직원들 및 지지자들은 NSI의 독점에 대한 도전을 막기 위하여 강력한
로비를 펼쳤다. 초창기의 논쟁에 참여했던 대다수의 산업체 관련자들은
마침내 NSI의 편을 들었고, 개인의 최상위도메인 소유를 보호하는, 열린,
경쟁적인 자유시장 방식을 지원할 것을 선언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신규 최상위도메인에 대한 자신들의 독점적 통제를 의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논쟁은 소유개념의 최상위 도메인 대 비소유개념의 최상위도메인 간의
문제로 집중되었다. 'MoU운동'의 "개방성" 여부, 미국 자국의
이익에 대한 방해, 그리고 지원자들의 배후에 있는 기타 의도들에 대한
중요한 논쟁 또한 일어났다. 개인적 혐오감들이 녹아들어가서 논쟁은
점차 강한 적대적인 색채를 띄게 되었고, 논쟁을 심하게 양극화시켰다.
.us, .tv, .de 등의 국가 코드 최상위 도메인 배정 등, 현 시스템에
대한 표현들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개인적
반발감으로 인하여 전체 논쟁은 적대적인 분위기가 강했고, 양극화가
일어났다. .us, .tv, .de 같은 국가코드 TLD의 처리 등, 현재 시스템의
표현법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ARPANET(인터넷의
전신)의 창립자 중 하나이며, 초창기부터 인터넷의 표준을 만드는 데에
핵심적으로 관여한 Postel 주변에도 논란이 일었다. 인터넷 할당번호
위원회(IANA)의 의장이자, 기타 DNS에 핵심적인 여러 가지 기술의 설립자로서
Postel은 기술자 커뮤니티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지위를 위의 논쟁들을 풀어나가기 위해 사용하지 못했다. Postel은
또한 1992년에 기술자 커뮤니티에 법적, 그리고 여타 서비스를 하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단체인 인터넷 사회(ISOC)의 창립회원이자 이사다.
Postel은 1995년 9월, 논쟁이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거기에 연루되었으며,
1996년 전반기에 신규 최상위도메인(DNS)을 만들기 위한 여러 제안을
했으나, 넓은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에 실패했다.
1996년
6월, 논쟁이 고착상태에 도달하자, Postel은 정식으로 ISOC의 도움을
요청했다. 10월, ISOC 의장인 Don Heath는 마침내 11명으로 이루어진
"푸른 리본" 위원회의 "IAHC" 구성을 선언했다.
IAHC가
발간한 gTLD-MoU는 NSI의 기존 상업 DNS에 대한 독점지배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으며, 이후 신규 최상위 도메인이 공공적인 인터넷상에서 개인
독점 산하에 들어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러한
자세는 더욱더 커뮤니티를 양극화시켜서, 상호적대감을 더욱 배가시켰다.
gTLD-MoU와 Postel의 추천을 반대하는 개인들은, 그의 권력과 실천력이
소수의 인터넷 기술자들에 대한 개인적 영향력에 부당하게 의존하고
있다고 불평을 터트렸다. 이러한 비판 중 상당수는 gTLD-MoU를 무효화하자고
주장했고, 모든 새로운 DNS 개혁은 법적 권위의 보증인으로서 미국정부의
명확한 감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현존하는
미국정부의 개입은 여러 형태를 띄었다. NSI와 마찬가지로, IANA도 존립기반의
상당부분을 정부와의 접촉에 의존하고 있었다. NSI는 1993년, NSF 계약자로서
독점권을 부여받았고, Postel의 IANA 또한 1980년대 중반부터 국방 고등
연구 프로젝트 기관(DARPA)에 일차적으로 의존해왔다. 미정부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ARPANET와 인터넷의 초기개발에 상당부분을 투자했다. 1970년대 이래로,
대부분의 미정부 지원금은 NSF와 DARPA 기관들을 통해서 흘러들어왔으나,
1990년대들어서 상업화 촉진으로 인하여, 미 정부의 역할 축소와 심지어
시스템의 완전한 민영화 주장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NS 논쟁이 확대되면서 미정부의 저명한 정치인사들이 싸움에 참여했다.
1997년을 시작으로, 여러 의회보고에서 이 주제가 논의되었고, 행정부는
재경부와 백악관의 인원들을 포함하며, 각 부서를 총괄한 워킹그룹을
만들었다. 후자는 Ira Magaziner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그는 (실패로
끝난) 미 의료보험 산업 개혁 당시 중심역할을 맡고 있었다.
1998년
1월, Magaziner 집단을 DNS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스스로의 제안을 만들어냈고,
MoU운동의 계획을 즉각적으로 적용시키지 못하도록 막고자 했다. 이
제안은 (아직 '덜익었다'는 의미에서) 'Green Paper'라고 칭해졌다.
이 제안은 이미 소유권이 있는 TLD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5개의 신규
TLD를 생성하도록 했다. 동시에, NSI의 .com, .net, .org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했다. 일반의 의견을 물어보고, 상당한 양의 국제적 비난을 받은
후, Magaziner 집단은 방향선회를 해서 1998년 6월, 다소 완화된 최종
의견인 'White Paper'를 내놓았다. 여기에서, 인터넷 상에서의 이름
부여, 번호할당, 프로토콜 지정 등을 조망할 새로운 비영리기관을 설립할
것은 주장했다. 이 기관은 사유 TLD 문제를 해결할 권력을 가지게 될
것으로 설정되었다. White Paper는 효율적으로 IANA의 미 정부에 대한
예산의존으로부터 DNS 논쟁의 해결 부분을 분리시켰다. White Paper의
적용에 관한 최초 논의들은 White Paper에 관한 국제 회의 (IFWP)라는
비교적 느슨하고 열린 구조의 조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IFWP의
넓은 토론범위는 1998년 여름동안 많은 이목을 끌었으나, NSI, IANA,
그리고 몇몇 기타 이익당국 간의 내부합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이면합의에 의해서, "할당 이름 및 번호를 위한 인터넷 기구"
(ICANN)이 형성되었다. ICANN의 임시 운영금은 IBM과 MCI 등, 사기업
스폰서에 의해서 '지구 인터넷 프로젝트'(GIP)라고 알려진 공공 이익단체를
통해서 제공되었다.
ICANN의
형성으로 이어진 IFWP 회의는, ICANN 구성원은 누가 될지, 임원들에게
실무자를 추천하는 방법, 또한 어떠한 법적인 형태가 이 새로운 회사의
조직구성을 보장해 줄지 등 기본적인 문제들을 포함한 일련의 새로운
이슈들을 촉발시켰다. MoU 운동의 논쟁으로부터 발생했던 다른 이슈들은
상표권 소유자의 권리 설립, 정식 분쟁해결 기구, 도메인 이름에서의
표현의 자유, 국가 정부의 역할, 신규 조직을 위한 안정적인 자금기반
확보 등이었다. ICANN에 대한 맹렬한 반대는 도메인 이름 관리 연합(DNRC),
열린 루트서버 연합(Open-RSC), 보스톤 워킹그룹 등의 소그룹에서 나왔다.
Open-RSC는 MoU 운동에 대한 활발한 비판론자들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다.
BWG은 대체적으로 Open-RSC와 비슷하게 베테랑급 MoU 운동 반대론자들로
이루어졌으나, 창립 멤버 Karl Auerbach(CORE 지지자이기도 했다) 등의
예외도 있다.
Postel은
1998년 10월 16일, 심장수술로 인한 수술후유증으로 작고했는데, 그것은
하원의원 Tom Biley (버지니아 주)이 ICANN 창립의 행정적 절차에 대한
감사를 할 것을 선언한 바로 다음날이다. Postel의 변호사인 Joe Sims(원래
법률회사에서 텔레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주요 관심사를 다루는), 그리고
Roger Cochetti (GIP에 깊게 관여된 IBM측의 로비스트)는 ICANN의 임시
임원들의 선출을 최종화했다. 저명한 컴퓨터 산업 전문가인 Esther Dyson은,
ICANN 임시임원진의 의장직을 맡을 것을 수락했고, ISOC, EDUCAUSE 및
기타 비영리 컴퓨터 산업 기구의 베테랑인 Mike Roberts가 임시 최고경영자
역할을 맡기로 했다.
ICANN은
하버드 대학에 있는 버크만 인터넷 및 사회 센터(BCIS)에서 상당한 인원
및 기타 지원을 받았다. BCIS의 개입은 일반적으로 온라인상의 전지구적
민주화에 대한 초기 실험으로 여겨지는, ICANN의 'at large'(일반 선출)
회원의 선출 방식 개발을 포함했다.
NSI,
ICANN, 그리고 미 재경부 사이의 중재안이 1999년 11월 채결되었다.
이 협약의 결과로, NSI는 ICANN에 수백만 불의 재정 지원을 제공하고,
반대급부로 4년(혹은, 협약의 특정한 조건을 특정 기한내에 이룰 것인지
여부에 따라서 8년으로 연장) 동안 레지스트리(도메인 등록관리) 기능에
대한 독점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되었다.
"at
large" 회원에 덧붙여서, ICANN 회의는 (한때 Postel이 관리했던)
3가지 인터넷 자원에 관련된 기관의 대표들을 포함한다. 그 3가지는
도메인명, 번호형 인터넷 프로토콜 주소 (IP 주소), 그리고 기술 프로토콜이다.
도메인명
지원기관 (DNSO)을 만들어내기 위한 싸움은 gTLD-MoU 논쟁의 정점에
서있던 여러 논객들과 이슈들을 끌어왔다. 따라서 DNSO는 가장 많은
격렬한 유권자 선정 및 정책입안 논쟁의 장이 되었다.
주소
지원 기구(ASO)와 연관된 논쟁은, 그것이 매우 귀중하고 또한 잠재적으로
희귀하게 될 자원임이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인터넷
등록자(Registries) 간에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에서 실시되었다. IP
번호의 배당을 통제할 수 있는 기관은 중대한 전지구적 권력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지만, 이름에 관련된 논쟁이 더욱 즉각적으로 다가오고 쉽게
이해되었으며, 따라서 더욱 많은 관심을 끌었다.
3번째
자원은 인터넷에 연결을 제공하는 기기들 사이에 호환성을 제공하기
위해 적절한 다양한 번호와 알고리즘을 포괄한다. 프로토콜 지원 기구(PSO)의
구축에 대한 가장 널리 알려진 논쟁은 인터넷 기술자 태스크 포스(IETF;
대부분의 인터넷 표준안이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내부에서 제기되었다.
IETF 표준은 IANA에서 편집, 출간하며, 저작권은 ISOC이 가지게 된다.
PSO와 ICANN의 설립은 따라서 IETF의 향후 성격에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ETSI와 ITU 역시 ICANN의 PSO 회의 멤버 선출에 참가했다.
인터넷의
상업적 '붐' 이전, 그리고 이 논쟁이 불붙기 전에, 위의 모든 의문들은
IETF 내부에서 신속하게 해결되었을 수도 있다. IETF는 자치 조직이며,
현대 기술 표준 설립기구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도 열려있는 곳이라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수년동안, IETF는 Postel에게 IANA 기능
- 즉, 인터넷 관리에 필수적인 다양한 이름, 번호 및 프로토콜의 배정
또는 위임을 하도록 맡겨왔다. 한 개인이 작은 기술자 집단을 위해서
실시한 일들이 전지구 경제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주제가 되어버렸다.
ICANN 창설을 둘러싼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gTLD-MoU, IAHC,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IETF의 조직적 역학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끈들을 조망해보아야
한다. 인터넷 기술자 커뮤니티의 지도층은 모든 단계에 있어서 깊숙한
개입을 하고 있어왔다.
분석적
접근
필자는
이 과정의 중립적 관찰자임을 주장하지 않는다. 필자는 공공 자원 모델과
공유화된 TLD를 지지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해왔다. 그러나, 국제
관계를 배우는 입장에서 필자의 주된 관심은, DNS 개혁 과정이 자원
관리의 전지구적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일에 어느 정도까지 관여하는가
하는 것이다.
DNS논쟁은
사회적 구조화의 놀라운 사례다. 기술적 표준의 작성자들이 자신들이
가장 거대한 종류의 사회구조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집단적으로
자각한 경우다. 어떠한 기술도 문화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으며, 인터넷을
만든 자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으며,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인터넷
관련 기술의 창조와 적용은 19세기 말의 산업혁명 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고, 어쩌면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매체 발명으로 인한 문화적 변혁만큼이나 중요할 수도 있다.
인터넷이
전지구적 사회의 중대한 변신을 가져올 것이라는 널리 알려진 인식을
전제로 할 때, 이러한 설계사들이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그것의 사용 방식에 대한 의도성을
가진다. 물리적 세계는 식별가능한 사회적 규준을 지원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구축되어 있다. 이 경우, 시장화와, 이익을 향한 경쟁이 인터넷의 모든
수준에서 스며들 것이다. 혹은 어떠한 중앙 관리 기능이 시장의 압박으로부터
독립되어, 집단적으로 구성된 정치 조직체에 의하여 정식으로 운영될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터넷의 이름 및 번호 할당 방식 개발이 비인간적인 시장의
힘에 의하여 움직이느냐, 아니면 정식 공공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느냐의
문제다.
이
논쟁의 참여자들은 문제에 대한 높은 자각력을 보여주었다: 텔레커뮤니케이션의
특정한 메카니즘 내에서 적용된 설계방안은 지속적인 사회적 영향을
지닌다. 이러한 매카니즘은 설계자들이 선호하는 삶의 방식을 투영한다.
DNS
논쟁은 인터넷의 설계자들을 반목하는 진영들로 갈라놓았고, 공공의
이익을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사회의 형태에 관한 자신들의 개념설정의
기반이 되는 공통된 의견과 반대의견들에 대한 통찰을 주었다. 이 논쟁의
거의 모든 참여자들은 한번 이상 "혁신"에 대한 강한 주장을
펼쳤고, 많은 이들은 현재의 정치적, 법적 구조가 인터넷 사용으로 인하여
제기될 새로운 종류의 분쟁을 다루기에는 부족할 것이라는 견해를 나타냈다.
또한 그들은 인터넷을 현재의 세계질서에 대한 실효적인 대안(특히 정보와
개인 물품 전송에 있어서)으로서 건설해 나가기 위한 논의에도 참여했다.
필자의
글은 이러한 기술 엘리트 집단 간의 논의의 넓이와 깊이가 민족국가의
고유권한에 대한 확실한 도전이 될 것이라고 강변하고자 한다. 이러한
도전은 인터넷의 DNS 논쟁에서 명백하게 표현되었다.
번 역
: 김낙호 (CIGS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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