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7. 23. 만화탄압규탄대회.                                                                                 by capcold

 

 

   근 조  한 국 만 화. 표현의 자유를 위한 검은 리본. 관 속의 만화책들. 젠장할, 한국만화는 무슨 좀비인가보다. 지난 50년간 살해당하고, 그리고도 계속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다시 살아나서 연명하다가 다시 더욱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특히 97년의 '일진회' 광풍 이후로는 계속 무덤에서 다시 일어날 겨를도 없이 계속 장례식만 치루고 있다.

   거의 3년여에 달하는 심사기간 끝에, 결국 이현세 作 '천국의 신화' 청소년판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만화에 대한 광적이고도 전적인 사회폭력 전가, 마녀사냥식 음란/폭력성 시비에 뒤이은 검찰 소환, 수정삭제된 청소년판 출간, 청소년 보호법 발동, 청소년판에 대한 기소 등 지난한 과정의 종착은 결국 벌금 300만원, 무엇보다 '유.죄.'라는 무거운 족쇄였다.

   2000년 7월 23일 일요일. 한국 만화가협회가 주축이 된 비상대책위원회는, 종로 탑골공원에서 결집, 종로 '젊음의 거리'에서 만화탄압규탄대회를 가졌다.

   만화 '천국의 신화'에 대한 작품적 평가는 별개다. 사실, 필자는 그 작품을 여러 가지 이유에서 상당히 싫어하기까지 한다(하지만, 그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다른 지면에서 하기로 한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가 지극히 임의적으로, 공권력의 권력 논리에 따라서 탄압당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여기에는 끝까지 싸워야 할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이기는 싸움'이 되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이기는 싸움'이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강력한 수단과 방법들을 이용, 내부적으로 더 많은 연대와 단결을, 외부적으로 더 많은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내야만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집회는 시의적절하게 이루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전략적 한계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정도로 많은 만화인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우선 대단히 긍정적인 일이지만 당일날 현장은  교통경찰마저 눈길을 주지 않은, '우리들만의' 시위를 벗어나지 못한 감이 있다(행진 거리가 400여 미터도 안되는 상황에서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또한 그간 사건 경과를 담은 자료집 내지 팜플렛도 배포되지 않았으며, 지나가는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전전도 거의 전무했다. '우리끼리 모여서 우리끼리 구호 외치고, 우리끼리 침묵하다가 해산하는'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시위라는 형식이 물질적, 사회권력적 이유로 언론이라는 통로를 통하지 못하는 집단이, 일반인들에게 사건의 경과와 자신들의 입장을 홍보하는 것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사실을 놓고 보았을 때 이번 시위는 이 부분에서 분명히 낙제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물론 프리랜서에 가까운 만화가라는 집단을 놓고 보자면 만화가들간의 의견 단합을 이끌어내는 것 자체부터가 먼저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미 당연히 이루어져 있다는 전제는 하고 이런 시위를 준비하는 것이 옳다. 한마디로, 이 정도의 전략적 판단으로는, 시위를 위한 시위 이상으로 나가지 못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만화가의 특성과 유명세를 일반인 관심 모으기에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들, '항의 사인회', '게릴라 낙서전' 등의 방안들이 나오지 않았던 것은 큰 유감이다. 시위가 관심을 끌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밖에 없다. 직접적으로 대민피해를 주거나, 아니면 많은 사람이 참여자로, 구경꾼으로 운집해서 모두들 궁금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후자쪽이 더 추구되어야 할 방향이지만) 어느쪽으로도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동아일보에는 조그마한 흑백사진 한 장과 두 줄짜리 설명, "만화동호회 회원들이 시위를 가졌다"라는 것이 보도의 전부였다.

   첫술에 배부르기는 힘들다. 아직 가야할 길은 멀다. 항소, 최종심도 남아있으며, 그 와중에 또 다른 '일진회 사건'이 터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의 자료화, 폭넓고도 실질적인 홍보, 만화인의 입지 강화 등이다. 각 수용자 동호회들과 조직적으로 (단순히 '여러분의 참여를 바랍니다' 차원을 넘어서서) 연대, 홍보활동을 벌이는 것은 기본이며, 구체적인 사건 경과와 관련 자료들을 누구나 쉽게 구해볼 수 있도록 정리하고 홍보하는 것 (만화화도 좋은 방법이다)도 필요하다. 홍콩 만화 축제에서 국제적으로 사태를 홍보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국내에서 관심있어 하는 사람들도 자세한 정황을 알기 어렵다는 것을 반드시 직시해야 한다.

   사실, 이번 판결은 3년여전의 검찰 출두, 검열, 심의의 광풍보다도 훨씬 중요한 사건이다. 당시의 것이 마녀사냥식 몰아가기였다면, 이번 판결은 그러한 마녀사냥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으며, 앞으로 더욱 많은 마녀사냥을 예고하는 더욱 무서운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의 관심이 3년여전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 이러다가는 '유야무야 넘어갈 수도 있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날카롭게 인식하기를 바란다.

P.S. ...여담이지만, 시위 현장에는 작가들과 독자들만 있었을 뿐, 만화계를 이루는 또하나의 큰 기둥인 출판사 관계자들은 거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만화계의 현주소다.

<정리집회에서 팬들에게 사인해주는 만화가들. 이것이야말로 만화가가 군중을 동원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 중 하나다>

 

 

만화탄압 관련 만화가 협회 성명서

이후 투쟁 지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