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의 <바람의 나라>.
가족사가 국사로 도약하는 순간에 피어나는
눈물과 피의 환타지.
가부장제 가정과 전체주의 국가는 왕가(王家)
라는 설정에 의해서 하나의 공간 속에 녹아든다.

변병준의 <프린세스 안나>
단편집을 하나, 우리에게 선보였을 뿐인 변병준은
단편들 중 한 두개에서 리얼리즘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작가임을 독자에게 드러내다가, 배수아의 소
설 <프린세스 안나>의 만화화를 통해 그것을 명확
히 한다. 진지한 작가를 만나는 건, 정말 즐거운 일
이다.


(위) 모치즈키 미네타로 <물장구치는 금붕어>
(아래) 마츠모토 타이요 <핑퐁>
공통적으로 스포츠라는 소재를 통해서 표현하는
일본 소비문화 세대의 건강하고 주체적인 성장?
(이렇게 표현하니 재미없는 만화처럼 생각되어
싫다. 둘 다 구성과 표현, 주제가 뛰어난 걸작이다...
우엑~ 더 재미없는 만화 같잖아?)
* 첫번째 이야기
* 성장하는 아이, 성장하지 않는 아이
× × × × × × ×
성장하고 싶지 않다. 성장하고 싶지 않다. 성장하고 싶지 않다. 성장하고
싶지 않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바람의 나라>에서 무휼은 성장함과
동시에 자신의 아들이며 무휼의 형인 해명태자를 죽인 아버지 유리왕과
닮아간다. 왕권국가로 은유된 가부장제 속에서의 성장이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피로 덧칠된 운명의 고리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휼의 아들인 호동은 청룡을 신수(神獸)로 하고 있는 아버지와 상극의
신수인 봉황을 타고난다. 때문에 무휼은 아들 호동을 죽이게 되는 운명
속에 있다. 그는 아들인 호동을 보면서 자식을 지키기 위해 죽어버린
자신의 사랑 연이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언젠가는 아들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김진의 <바람의 나라>가 비슷하게 가부장제를 왕권국가로 은유하고 있는
유시진의 신명기와 다른 점은 김진이 이러한 가부장제에 대한 끝없는 연민을
자신의 작품에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유시진에게 아버지는 역겨운
독재자이지만 김진에게 아버지는 반복되는 운명 속에 으깨어진 불행한
지배자이다. 그리고 무율은 점점 그 아버지와 같아진다. 그의 왕국 고구려는
그들에게 다른 방식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다. 사랑의 죽음과 함께
그는 성장하고 다시는 사랑을 찾지 않는다.
아버지에 의해 일괄적인 지배가 관철되는 가부장제에서 사랑이란
(적어도 동등한 관계의) 존재하지 않는다. 왕자인 무휼은 자신의 나라(고구려)
를 위해서라도 성장해야만 하였고 외적을 지배하기 위해서 자신의 나라,
자신의 가정도 지배해야만 한다. 그것이 왕권국가의 왕이 된다는 것,
가정의 가부장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이를 위해 처음으로 적 병사의 목을 내리쳤을 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유년기도 잘라버렸을 때, 그의 신수인 청룡이 등장한다. 피와 눈물의
냄새를 맡고서. <바람의 나라>에서 신수는 현실로 발들인 성장의 아픔에서
비롯된, 현실을 넘어서 존재하는 욕망의 환영이다. 세류의 신수인 주작 역시
유아기에서 경험한 사랑이 그녀의 성장과 함께 되돌아온 형태이다.
호동의 신수는 그가 성장하였을 때 무성의 어린아이가 아닌 비로소 온전한
봉황이 될 것이다.
욕망과 현실이 분리되지 않는 유아기에서, 성장을 시작하였을 때 욕망은
현실과 분리된 환타지가 되어 날아오른다. 그리고 당신은 철저한 현실논리로
무장한, 차가운 얼굴을 한 어른이 된다. 뭐? 당신의 부모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당신은 결코 그렇지 않을 거라고?
× × × × × × × ×
성장하지 않는 아이라는 모티브는 여러 예술장르에서 나타났다.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른들의 현실에 대한 거부로 파악될 수 있다. 무휼이 사랑을
잃고 운명의 덫으로 걸어들어간 그 자리에서 어떤 조숙한 아이들은 이를
거부한다.
배수아의 단편소설인 <프린세스 안나>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변병준의 노작
<프린세스 안나>를 보라. 어른들의 세계는 불행할 뿐이다. 배수아는 그녀의
소설에서, 처절하게 살아남아야 하며 순수한 사랑 대신 섹스와 애욕이
넘치는 어른들의 세계로 편입하려 하지 않는 자세를 보여준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유아적 세계는 자폐적이고 여기에는 죽음의 유혹이
따라다닌다. 이러한 세계는 사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삶 그 자체를 건
급진적인 저항이며 비타협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물론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의 문구처럼 "오래지 않아 잊혀질 그런 날들을 살아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보통이다.
변병준은 배수아의 세계를 보다 세밀한 리얼리즘적인 터치와 어두운
이미지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냈다. 배수아가 유아적인 세계에서 안나라는
화자를 선택한 것과 다르게 변병준은 안나를 둘러싼 어른들의 세계를 보다
더 부각시킨다. 전자는 동화적인 세계를 후자는 리얼리즘적인 세계를,
변병준의 만화 <프린세스 안나>는 배수아의 소설 <프린세스 안나>와 등을
맞대고 붙어 있다.
× × × × × ×
만화가 10대의 소년소녀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만큼, 그리고 비슷한 연령의
수요층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대체로의 만화는 성장만화라는 측면을 가진다.
어쨌든 주인공들은 그 전투력이라도 발전해나가야 한다. 현재로서 만화는
그 수요층의 특성상 다른 대중예술장르에 비해 성장의 대리체험이라는
측면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특히 학원물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강경옥과 같은 순정만화의 일파들은 일상 속에서 내밀한 깨달음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성장을 이루어내곤 했다. 이러한 깨달음들은 주인공의
비슷한 연령대의 소녀(소년도 있겠다)에게 동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것이 아무리 별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보편적인 깨달음과 교훈일지라도,
때에 따라서는 우주적 환타지 속에서 성장기를 마치고 다시 지구로 돌아오는
<별빛 속에>와 같은 두근거림일 수 있다. 모든 만화가 이래야 한다는 것이
아니지만, 이런 것들은 작가와 독자 간에 이루어지는 성장체험의 교류로서
소중하게 여겨야 할 일이다.
소년만화가 대부분 현실과 부닥치는 성장의 벽을, 대부분 주먹의 파괴력을
성장시키는 자아도취의 방향으로 비해나가는 데 비해서 서영웅의
<굿모닝 티처>와 같이 '보편적인 이야기지만 식상하지 않은', '계몽적이면서도
주입식이 아닌', 그렇기 때문에 획기적인 성장만화도 있다. 주인공 영민은
정말 평범한 환경 속에서 더디지만 성실한 자신의 생각으로 한발 한발 어른이
되어간다. 그는 성장을 거부하지도 않을 것이지만 결코 어른들의 현실논리를
그냥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이다.
안나처럼 성장을 거부한다 해도 체험이 쌓이면 어떻게든 성장하게 된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좌우되기 보단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방식이어야 하지
않은가.
나는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성장하지
않는 새끼들의 만화 후루야 미노루의 <이나중 탁구부>나 <크레이지 군단>
과 같은, 현실논리 속으로 성장해 들어가기에는 너무나도 열등한,
이런 소년들의 이야기가 사실 가슴을 더 울린다.
모치즈키 미네타로의 <물장구치는 금붕어>와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
에는 얼굴에 가면을 뒤집어쓰고 스스로를 초인이라고 부르짖는, 그러나
실은 현실의 어려움이 닥치면 회피하는 '아직 어린' 캐릭터가 함께 등장한다.
이 두 캐릭터는 서로 다른 만화에 등장하지만 실은 동류이며 한 캐릭터와 같다.
이들은 만화의 후반에서 유아적인 자아도취를 벗어나 현실 속의 초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모범적인 스포츠맨이 되어간다.
그러나 후루야 미노루는 자신의 만화에서 그런 모범적인 낭만을 허용치
않을 정도로 냉정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논리'란 그것이 어떤 방식의 성장의
'논리'이든, 성장논리가 추구하고 맞닥뜨리는 현실'논리'이든, 어느 정도
상대의 우월함이나 대등함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들의 열등함 앞에서는
어떤 논리에 기반한 외부의 평가나 비판도 통용될 수 없다.
그러니 그저 보면서 자지러지듯 웃고 한 편으로 가슴저려 할 뿐이다.
이러한 만화들은 영원히 성장하지 못하는 우리 마음 한 구석의 대리만족을
불러일으킨다. 그 마음 한 구석은 결코 동화적으로 아름답지도 않고
영웅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추하다고 할 만한 열등한 것이다.
아마 고구려 국왕인 무휼이 이런 자식들을 낳았다면 단칼에 쳐 없애버렸을
것이다. 당신의 아버지나 선생님이, 혹은 친구들이, 혹은 당신이 그랬듯이.
그러나 성장기에 겪은 어떠한 피비린내로라도, 추하고 열등하고 유아적인
면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만약 당신이 왕족이라면, 봉황이나 청룡과
같은 신수(神獸)가 되어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거대한 환타지의 날개를
펼칠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이 왕족이 아니라면 그 신수(神獸)는
<이나중 탁구부>의 '마에노'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끔직한 일이지만 오늘도 들키지 않게 팬티를 벗기는 꿈을 꾼다.
살아 있는 움직임을 계속 보며, 항상 정령의 무리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능력을 얻어 보라. 그러면 그대는 바로 시인이 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변화시켜 다른 이의 몸과 마음이 되어
말하려는 충동을 느껴 보기만 하라!
- 프리드리히 니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