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capcold

 

 

 

 

1. 6-70년대

  '합법'이라는 테두리, 개인 창작에 의한 지적 재산권이라는 개념이 있는 사회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그 반대급부인 표절과 불법, 지하유통은 존재한다는 것이 자명한 이치다. 하지만 50년대 이전, 대부분의 만화가 단칸 풍자 만평 위주였던 시기에 대해서 한국의 해적판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다지 영양가있는 작업이 되기는 힘들다. 해방 직후에 주로 들어온 외국만화는 (당연히도) 미국만화였으나, 미군부대 주변을 통해서 유입된 미국식 슈퍼영웅물들은 문화 격차와 정서적 차이가 커서 한국어로 번역/도작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곧바로 터진 한국전쟁의 아수라장은 만화의 성장 자체를 잠시 유예시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미국만화의 그림체와 연출기법은 이 당시 여러 만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김종래 화백등의 극화체는 물론, 산호 화백의 라이파이 등은 '망가'의 영향보다는 미국의 만화연출법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하지만 50년대 중반의 일본에서는 데즈카 오사무가 서서히 망가의 문법을 확립해나가던 시기고, 그 영향은 조만간 한국에도 도달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으로 '히트'를 친 해적판이 탄생한다. 서봉재의 '밀림의 왕자'라는 이 작품은, 일본망가 '정글소년 케니아'를 도용한 해적판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의 만화'책' 포맷은 8-16쪽의 단행본이었다(이러한 포맷은 역시 미국만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양적으로 독자를 압도할 수 있는 100페이지 내외의 혁신적인 포맷으로 등장한 '밀림의 왕자'는 강력한 붐을 일으켰다. 또한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본격적인 소년모험물이자 (데즈카 오사무식의) 영화적 장치들을 부분적으로 도입해서 정서적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당시의 주요 해적판 기법은, 바로 '배껴그리기' 기법이었다. 이는 원작을 그대로 한국에서 만화직능인이 다시 그려서 원고를 작성하는 기법으로, 이후 오랜 기간동안 해적판의 대표적인 기법이 되었다. 배껴그리기 기법의 효용은 두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저작권 침해에 대한 은폐다. 여하튼 해적작가가 '직접 그림 작품'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심의의 문제다. 단순히 폭력과 성의 수위를 조절하여 자정작용을 한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80년대까지 심의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전체가 사전심의로 이루어졌으며, 그중 70년대까지는 아예 만화 원고를 직접 심의기관에 제출, 검열을 받아야만 했다(만화원고에 직접 빨간펜으로 수정사항을 지시하는  등, 검열기관의 몰이해와 횡포는 상상을 초월했다). 즉, 해적판이라도 '원고'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그것은 배껴그리기 기법으로밖에 해결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밀림의 왕자' 히트 이후, 업자들은 만화의 시장성을 인식하고 공장제 제작 시스템을 도입, '여하튼 많이 찍어내고 보자'는 식의 양적 압도를 꾀한다. 이런 와중에서 '작가적 창작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해적판리 각광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6-70년대에 들어오면서 일본에서는 데스카 오사무를 위시하여 치바 데츠야(스포츠물에 있어서 치바데츠야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당시의 작가를 찾기가 힘들 정도다)와 요코야마 미츠테루 등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그들의 만화는 간결한 그림체, 몰입도 높은 스토리, 완성도 있는 장편 연출 등 국내 해적판 업자를 위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미국만화의 영향을 받은 이전의 극화체 원로 작가들과는 단절된, 새로운 만화제작 시스템과 일본망가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작가군이 등장했고,  절대적 권력을 가진 출판업자들은 이들에게 노골적으로 많은 해적판 생산을 강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산된 해적판은 상당한 인기를 구가했다. 특히 위의 3대 일본작가들의 해적판의 인기는 절대적이어서, 심지어 데즈카 오사무의 '꼬리인간'이라는 작품의 해적판이 두 개의 출판사에서 서로 다른 두 작가의 이름으로 동시에 출간된 경우도 있었다. 이후 80년대말에 다시 나타나게 될, '일본 본토보다도 단행본이 먼저 나오는' (즉, 잡지 연재분을 그대로 입수, 먼저 단행본으로 한국에서 출간하는) 형산들도 이때 이미 시작되었다.
  모방은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는 창작을 낳는 경우도 생긴다. 배껴그리기 기법은 필연적으로 그림체와 연출에 있어서 작품 전체에 걸친 다소의 변화를 동반하며, 일부 만화들은 한국의 해적판에서 전혀 다른 그림체와 연출로 탈바꿈하는 경우도 가끔 생겨났다. L작가가(위에서 언급?다시피, 이 당시 대부분의 작가들은 공장제 시스템과 해적판에 대한 강요를 경험하면서 만화를 그렸고, 현재의 중견 및 원로 작가들은 거의 모두 이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는 싫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공장제로 그려낸 '허리케인 죠'(원작 치바데츠야의 '내일의 죠')의 경우는, 둥글둥글하고 땅딸한 캐릭터들으로 된 원작을 오히려 길고 거친 선의 캐릭터로 변모시켰다. 우연히도, 원작이 애니메이션화되었을 때의 그림체는 한국 해적판의 그것에 가까웠다(원작 만화 자체도 후반으로 가면서 이러한 그림체로 가게 된다). 심지어 몇몇 일본 순정만화의 걸작 중에는, 한국의 해적판 그림체를 참고해서 오히려 원작에 다시 반영했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다(해적판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물증을 확보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작가 스스로 인정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하지만 '밀림의 왕자; 등으로 촉발된 6-70년대의 해적판 붐의 진정한 파급력은, 만화유통시장의 변화다. 하나의 '히트'는, 충분한 충격을 줄 수 있으면 하나의 '경향'으로 탈바꿈한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시대에서 100페이지 내외의 두꺼운 단행본의 발간은 필연적으로 제작비의 증가요인이었으며, 수요는 늘되 그 수요는 구매력이 없는 수요였다. 따라서 적은 구매력으로도 충분한 시장성을 가지고 있는 만화인구를 충족시키는 방안으로서 이때 탄생한 것이 바로 '대본소'라는 공간이다.
  대본소는 양에 대한 집착과 공장제 시스템이 만들어낸, 이후 한국만화계의 가장 주도적인 유통방식으로 자리잡게 되는 체계다. 당시, 언론사에 자리를 잡은 일부 시사만화가를 제외하고는 만화가들이 대부분 대본소 단행본이 유일한 독자와의 소통창구였다. 하지만 대본소라는 유통망은 중앙집중식 경영과 독점이 가능했기 때문에, 만화가는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나 유통업자/출판업자의 절대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5-60년대에 싹을 피우려고 했던 문학과 서구만화등에 토대를 둔 작가주의적 작품군은 이러한 대본소 체제 속에서 이내 사그러든다(물론 검열당국과 만화에 대한 일반의 몰이해도 큰 몫을 했다). 거대 출판사의 '끼워팔기'가 발생했음은 물론이다(합동 출판사의 '신촌대통령'은 이 당시를 회고하는 모든 관계자들에게 악몽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는 물론 검증된 히트작과 장르만을 재생산하도록 하여 작품의 내용적 폭을 축소시키며, 만화의 유통체계가 '판매'가 아닌 '대여'로 향후 수십년간 굳어버려서 만화 시장의 확대를 비정상적으로 구속하는 폐단을 낳았다. 한국에서 해적판은 그 본연의 모습인 언더그라운드 지하시장이 아닌, 주류시장에서 화려한 데뷔를 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저작권법, 지적 재산권 등의 작가의 권리, 창작에 대한 자존심과 모방에 대한 수치 등 최소한의 윤리적 요소들, 그리고 무엇보다 만화를 하나의 예술로서, 미디어로서 볼 수 있는 정당한 인식의 여지를 가로막음으로서 한국만화의 체계적인 발전에 한계점을 그어놓았다.

 

 

<만화좌판>

 

 

 

 

 

 <'서봉재의' 밀림의 왕자>

 

 

 

 

 

 

 

 

 

 

 

 

 

 

 

 

 <철완아톰, 우주소년 삐삐>

2. 클로버 문고

  이후 대본소는 상당부분 해적판으로 계속해서 물들어있었음은 물론이다. 일본의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 등 여러 원로작가들의 영향아래 혁혁한 발전을 거듭하는 동안, 한국에서는 공장제 시스템에서 일본망가를 도작하도록 강요당하는 중견 작가들이 미국만화의 영향을 받은 원로작가들과 세대적 단절을 이루고, 왜곡된 유통구조 속에서 살인적인 노동량 속에서 작가적 역량을 고갈당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새롭고 창조적인 활로는 일본에서 건너왔고, '일본 것'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박정희 치하에서 극대화되었던 그 시절 역설적으로 해적 만화는 필수적이었다. 이미 해적판은 만화가 독재치하에서 현실참여를 거세당한 상황속에서 한국만화의 장르적 흐름과 경향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어 있었고, 에스퍼물을 이끈 '바벨 2세'라든지, 로봇물을 끌고 온 '마징가Z'라든지, 순정 붐을 만들어낸 '캔디 캔디' 등이 80년대가 도래하기 이전에 열심히 '베껴그리기' 기법으로 다소의 '번안'을 거쳐서 국내 대본소에 소개되고, 이내 국내에서 하나의 '장르'를 창조해냈다.
  즉, 이미 만화문화 일반에 해적판에 대한 의존은 스며들어있었고, 그것은 대본소라는 하나의 체제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당시 직접 구매의 활로를 뚫고, 구매용 단행본의 길을 개척해낸 전설적인 만화 단행본 포맷인 '새소년 클로버 문고'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70년대 후반에 들어서 새소년, 소년중앙 등 만화를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는 잡지들이 등장하면서, 대본소의 만화에 대한 독점적인 영향력은 다소나마 감소되고 있었다(물론 여전히 생계를 위해서는 대본소를 놓칠 수 없는 것이 만화가들의 사정이었다). 작가들은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통로가 새로이 생겨났고(이후 80년대 들어서 성인층을 포괄하는 일반만화를 연재하는 '만화광장' 등의 전문 잡지들이 생겨날 때 까지는 유감스럽게도 어린이층에 한정되어 있었다), 단행본 시리즈 클로버 문고를 통해서 다양한 장르들이 고루 발표되었다. 클로버 문고에는 현재의 경향과는 달리, 문학작품의 만화화, 위인전기 등의 학습만화와, '요철발명왕', '철인 캉타우' 등의 보통 만화가 복합되어 있었다. 소년소녀 잡지들의 등장과, 클로버 문고에서 발간된 300권 이상의 만화는 대본소라는 독점적 유통체제 속에서 신음하던 만화가들에게는 새로운 활로였음이 분명한 것은 만화 자체의 질적 수준에서도 쉽게 나타난다.
  하지만 클로버 문고는 학습만화와 보통만화만이 자연스럽게 섞여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창작물과 해적판도 자연스럽게 섞여있었다. 오상환 作으로 되어있는 '우주여객선' 시리즈가 마츠모토 레이지의 '은하철도 999'이고, '은하함대 지구호'가 '우주전함 야마토'임은 숨기려고 한다고 해서 숨겨질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학습만화를 제외하면, 3분의 1 가량은 해적판으로 추정된다. 즉, 아직 해적판과 창작물이 제작과 유통의 차원에서 분리되어있지 않던 시절, 클로버 문고 등 단행본 시장을 개척한 선구자들은 그와 동시에 해적판을 대본소가 아닌 가정으로까지 보급시킨 '원죄'도 공유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런 와중에서 일본식 만화문법은 자연스럽게 한국만화의 교과서가 되었고, 독자들도 이에 익숙해지도록 길들여졌다. 이것들이 의식적인 차원이 아닌, '해적판'이라는 불법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에 대한 작가와 독자 양측의 면역력이 약해진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과오들의 결과는 이후 90년대 초, 일본만화가 단계적으로 직접 라이센싱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그 처절한 결과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은하철도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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