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의 미래’ 책 속 해설편, ver. 2008
만화의 미래, 그리고 한국만화
0. 문제제기의 시작
아마도 독자 여러분들이 본편을 다 독파한 후 해설편에 도달한 지금, 상당히 머리가 복잡하시리라 믿는다. 전작 <만화의 이해Understanding Comics>도 담긴 이야기는 많았지만 훨씬 읽기 쉬웠던 것에 비해서, 이 책은 그리 만만하고 쉽게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전작이 만화라는 표현양식의 내부 구조에 대한 탐구였다면, 이번 책은 만화를 둘러싼 주변 환경, 그리고 만화가 나아가야할 미래의 방향들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만화가 우리 사회 속에서 처해있는 현실에 관한 더욱 깊은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고 있다. 즉 전작이었던 ’만화의 이해‘를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만화를 여러 권 본 경험 정도만 있으면 됐지만, 이번 책은 만화라는 양식자체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고민해 본 경험을 필요로 한다. 본서의 원제목인 ‘Reinventing Comics’는 직역하면 ‘만화의 재발명’이다. 사실 이 제목 자체에서부터 두 가지 함의를 얻을 수 있다: 1. 현재의 만화는 하나의 벽에 부딪혔다; 2. 그래서 만화의 모든 것을 다시 발명해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본서의 구성방식이기도 하다).
전작 ‘만화의 이해’는 만화일반의 내적 구조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세계 어디에서라도 마찬가지로 읽을 수 있었지만, 이번 책은 그렇지 못하다. 맥클라우드는 자신이 처한 만화현실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것은 (한국독자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미국만화의 현실이다. 본편의 사례들은 거의 모두 미국의 만화시장, 만화제작 방식, 사회적 위치 등을 다루고 있다. 만화의 사회적 위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한국에 비하면) ‘배부른 소리’처럼 들리는 지점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만 환산해서 받아들이면 많은 함의를 던져주는 귀중한 사례이기도 하다. 유통독점과 과도한 중간 마진 등 현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대중문화산업 일반에서 겪는 모든 문제들이 조금도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오락의 영역에서 게임, 영화 등 다른 매체양식들에 밀려나서 점차 시장이 축소되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급’ 예술의 영역에 스스로를 봉인하고 박제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도 좋을 것이 없다.
본 해설편의 목적은, 본서에서 제기한 ‘미국만화’에 대한 문제의식들을 ‘만화’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나아가 ‘한국만화’의 현실에 대해서 적용할 수 있도록 보충설명을 삽입하는 것이다. 결국 질문을 던지는 책의 해설로 약간의 견해와 더욱 많은 질문을 던지는 식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1. 미국만화의 현실
미국만화의 형성과 그 형식
미국은 유럽과 달리, ‘귀족적’ 고급문화와 ‘하급’ 대중문화 간의 갈등과 대립이 거의 없이 20세기를 맞이했다. 기술개발에 힘입은 생산력 증가는 더욱 대량생산과 대중문화의 융성을 촉진했고, 그런 세례를 받으면서 미국은 영국에서 비롯된 19세기 유머전문 저널들을 시초로, 만화를 하나의 대중오락으로서 받아들였다. 그 속에서 한 칸짜리 시사만화와 여러 칸짜리 ‘코믹 스트립Comic Strip'(’만화 띠‘; 만화 칸들이 여러 개 가로로 길게 늘어져 있는 모습에서 유래)이 신문에 연재되어 초창기 미국 만화의 전통을 확립했다. 코믹 스트립은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며 점점 1회당 연재량이 늘어나서, 짧게는 4칸 길게는 신문지 한 면 짜리(단행본 출판을 염두에 두고 짠 페이지를 4-6면씩 묶어서 한면에 개제하는 현재 한국의 스포츠신문 형식과는 다른, 신문지 면을 하나의 페이지로 다루어 사용하는 방식이다)까지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현재도 코믹 스트립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로 신문연재용 4칸 만화를 의미하며, 여전히 미국만화의 중요한 형식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다.
인기와 편수가 늘어남에 따라서, 만화는 신문 별지로 발간이 되는 경지에 이른다(일부 신문들은 현재도 일요일판에 만화 모음 별지를 첨가하는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 1934년 ’Famous Funnies’를 필두로, 아예 만화는 신문과 완전히 독립, 자체적인 발간의 길을 간다. 이때부터 코믹 스트립과는 대비되는 것으로 ‘코믹북comic book‘이라는 개념이 탄생한다. 코믹북은 보통 2-30페이지짜리 얇은 중앙 철침 방식으로 제본된 책자였으며, 컬러로 인쇄되었다(비록 여전히 기술적 한계, 비용문제 등으로 인해서 채도가 낮지만 원색위주의 ’신문 컬러‘를 사용했지만). 그리고 가격 또한 10센트라는 낮은 가격을 책정, 만화를 가장 대중적인 오락형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그 당시 만화를 광고하는 중심 표어가 바로 ’All in Color, for a Dime’ – 십센트면 올컬러로! – 이었을 정도다). 코믹북은 현재까지도 미국만화의 가장 주류적인 발간형태이며, 흔히 ‘이슈issue'(호)라는 단위로 표현하기도 한다. 한 호 안에 끝나도록 만화 스토리의 호흡을 짧게 끊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만화의 작품성과 스토리성을 위하여 점차 장편을 회수 단위로 분절하여 연재하는 방식들도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짧은 지면상, 코믹북 한권에는 하나의 만화만이 실리는 것이 보통이다. 일본만화에서 세운 ’만화잡지‘ 개념 – 즉, 한 잡지 내에 여러 만화작품들이 계속 호수 단위로 연재가 되는 것 – 은 주류 만화계에서는 일반적이지 않다(물론 출판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독립만화, 혹은 기타 비주류 진영에서는 이런 형식을 취할 때가 더러 있다 – RAW 등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다).
본서에 언급되었듯이 이후에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이라는 명칭을 업고 등장한 장편 단행본까지 합하면, 미국 만화의 발간 형태는 크게 3가지가 된다. 코믹북의 가격은 보통 한 호당 3달러 내외이며, 단행본 형식의 두꺼운 책들은 두께에 따라서 10-20달러 사이를 호가하고, 30달러 이상 하는 책들도 여럿 출시된다(100-150페이지짜리 컬러책이면 보통 20달러 가량 한다).
일반 판매시장에서는 코믹북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가장 크다. 주류 슈퍼히어로 장르들이 코믹북 형태의 연재물로 나오고 있고, 가격부담이 덜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음반시장에서 싱글 음반 문화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결국 단행본 개념은 확실한 소장목적을 위해서 우수한 인쇄 품질과 지질, 저자의 말과 보충설정 등을 구비하고, 그에 걸맞게 소장용 ‘일반’ 서적들과 마찬가지의 높은 가격을 책정해서 판매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만 이러한 경향에 새로운 요소로 등장한 것이 망가계열 단행본들인데, 일본만화로 대표되는 아시아권 만화가 2000년대 들어서 급속하게 출간 종수가 늘어나면서 보다 저가에 많은 연재 물량을 쏟아낼 수 있게 되어 빠르게 시장지분을 확장시켜나가고 있다.
미국만화와 슈퍼히어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국만화의 탄생은 짤막한 신문 연재 개그만화에서 시작했지만, 산업적 부흥은 슈퍼히어로물과 함께 이루어졌다. 특히 30년대 슈퍼맨의 탄생으로 인하여 슈퍼영웅물은 만화에서의 주류가 되었고, DC Comics社와 Marvel Comics社 라는 양대 메이져의 슈퍼히어로물 경쟁의 역사가 겹치면서 이것은 미국 주류만화와 거의 동의어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만화가 당시에 차지하고 있던 위치, 즉 현실 도피성이 강한 대중적 오락물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슈퍼히어로물의 도입은 엄청난 궁합을 보였다. 그 외에 주류 장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신문에서 주로 연재되고 있는 코믹 스트립류이고, 이들은 신문이라는 공간에서 안정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미국만화의 슈퍼히어로물은 슈퍼맨에서 그 탄생을 맞이하고, 스탠 리의 놀라운 스토리 능력과 잭 커비(‘판타스틱 포’ 등)의 그림 속에서 하나의 새로운 전기를 이룬다. 스탠 리는 한층 더 몰입하고 싶어지는 독특한 능력의 히어로들을 고안해냈으며, 커비는 과장된 각도와 탄탄한 근육질 몸매(이전에 나왔던 판본의 슈퍼맨을 위시한 영웅들은 그렇게 엄청난 근육질들이 아니었다!)로 슈퍼히어로물의 만화 표현 양식을 한층 발전시켰다. 하지만 상업성에 고무되어 제작사 단위로 수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이야기 구조나 독특한 발상 자체는 수십년 사이에 빠르게 고갈이 되어갔다. 따라서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제작사들은 자사 소속의 슈퍼영웅들을 서로 한 작품에서 같이 출연시키고, 오래된 캐릭터들의 설정을 끊임없이 재창조함으로써 생명력을 늘리려는 노력을 했다. 이런 시도들이 ‘Avengers’, ‘Justice League’ 같은 집단 영웅 체제를 낳았다.
슈퍼히어로물은 시대에 따라서 여러 가지 변형을 거치기는 했지만, 현재까지도 미국만화=슈퍼영웅물이라는 등식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미국만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슈퍼히어로물은 그 탄생 때부터 전적으로 만화의 오락으로서의 측면을 강조해왔기 때문에(물론 그런 틀을 깨는 작품들도 후에 일부 등장했지만) 만화라는 양식 자체에 대한 인식 또한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간 부정적 효과도 가지고 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미국에서 만화의 쇠퇴라는 것은, 슈퍼영웅물의 쇠퇴와 동의어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만화의 제작방식과 유통구조
물론 만화 산업이 형성되어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주류시스템과 인디/언더그라운드가 분리되어있고, 또한 결합하고 있다. 보통 인디/언더그라운드는 항상 산업적/상업적인 이해관계보다는 개별 작가의 표현욕구와 작가주의적 완성도 위주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세계 공통이지만, 주류 시스템은 각 만화권역마다 독특한 양상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이 중 미국의 주류 만화 시스템은 가장 대형기업화, 자본주의적 마케팅화가 되어있는 영역이다.
미국의 주류만화계는 DC Comics(‘슈퍼맨’과 ‘배트맨’이 아직도 주력상품인), Marvel Comics(스파이더 맨, X-멘 등) 같은 몇몇 대형출판사가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개별 작가의 창조적 자유도보다는, 개별 상품 – 캐릭터를 중심에 놓고, 작가들을 기술자로서 고용하는 방식을 취한다. 즉, 만화를 그리는 작가보다 만화 작품 자체가 ‘슈퍼맨’인지 ‘배트맨’인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물론 팬들 사이에서는 그림체나 스토리의 개성이 입에 오르내리기는 하지만, 대부분 주어진 캐릭터, 주어진 설정 내에서 이야기를 내어야 한다. 보다 자신의 창조성을 발휘하고 싶다면, 새로운 ‘상품 라인’으로서의 출판 승인이라는 험난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거나, 아니면 좀 더 출판이 쉽지만 유통과 마케팅이 약한 중소 내지 독립 출판사에서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
이렇듯 만화를 하나의 ‘기획 문화상품’으로서 다루는 체제이다 보니, 만화 생산 역시 ‘효율적인’ 분업화를 이루고 있다. 주류 미국 만화에서는 한 작가가 스토리와 그림까지 전부 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보통 스토리(script), 데생(penciling), 선화(inking), 채색(coloring) 등의 역할들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런 ‘직인’ 개념으로 운영이 되는 만큼, 각자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명성을 쌓을 경우 최고의 ‘장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의 만화 관련 시상을 할 때는 식자(lettering), 출판 디자인(book design) 등의 분야까지 세분화해서 상을 수여하는 모습이 보통이다. 2000여 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작품인, 닐 게이먼의 ‘샌드맨’ 연작의 경우 스토리는 닐 게이먼 한명이지만 거의 매 issue 마다 그림을 위시한 나머지 스텝들이 계속 바뀐다.
요약하자면, 미국의 주류만화는 완전히 기업화된 대형 출판사들이 주도하고 있으며, 이들이 만화를 제작하는 방식은 먼저 자사의 (오래된, 혹은 새로이 기획된) 히트 상품들을 중심에 놓고, 거기에 맞추어 분업화된 전문 직인으로서의 작가들을 배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물론 최고수준의 히트상품을 만들어내는 창작자들이 엄청난 성공과 화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예술가로서 보다는 하나의 고용된 전문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하고 자유로운 표현, 자신의 창조성을 발현하고자 하는 작가들은 중소 출판사, 혹은 독립만화와 자가출판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예를 들어서 스폰Spawn의 작가 맥펄레인McFarlane의 경우, Marvel 사에서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그리다가 독립하여 자신의 작품인 ‘스폰’을 주력 상품으로 하는 새 출판사인 Image Comics를 만들고, 결국 천문학적인 성공을 거둔 사례로 유명하다(그 이미지 코믹스조차, 나중에는 작가의 권한을 충분히 존중해주지 않는다는 불만을 사게 되었다).
미국의 만화 유통방식은, 오랫동안 한국과 마찬가지로 만화 유통과 일반 문자서적의 유통이 상당히 분리되어 왔다. 일반 서점이나 편의점에서 볼 수 있는 만화책 가운데 코믹북은 없거나 극히 소수 품종만 전용 스탠드에 진열되어 있다. 서가에 들어가는 것은 오로지 그래픽 노블 등 단행본이다. 2000년대 들어 서점을 통한 단행본 유통이 망가 계통 단행본에 힘입어 크게 증가하여 단행본 판매의 거의 절반 가량이 일반 서점에서 이루어질 정도로 성장했지만, 역시 아직 코믹북을 위시한 모든 종류의 만화를 구할 수 있는 곳은 만화전문점이다. 이러한 분리된 유통구조 때문에 본서의 원판인
물론 만화시장 자체의 규모나 역사가 뒷받침해주는 만큼, 작가주의 성향의 작품들, 인디 계열 작품들이 그 속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서점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의 작품들은 대부분 주류에서와 같은 철저한 분업화보다는 작가 개인이 만화 전체를 일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규모가 크지 않다.
시장의 형태
미국의 만화시장은 한 때 가장 대중적인 오락시장이었다가, 90년대를 거치며 가장 매니악한 것으로 바뀌었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야 망가 계열 작품의 대중성에 힘입어 조금씩 청소년들 위주로 다시 기반을 천천히 넓혀가는 중이다. 만화 자체의 시장성 감소라는 몫도 물론 크지만, 원래 미국 주류만화의 철저한 마케팅 전략과 널리 보편화된 ‘수집가’ 문화 덕분에 미국만화는 작품 외적인 시장이 발달해있다. 만화의 캐릭터들을 담고 있는 트레이딩 카드, 만화 주인공들(주로 슈퍼히어로들)을 장난감으로 만들어 놓은 액션피겨, 티셔츠 등은 가장 기본적인 상품화 아이템에 속하며 이외에도 각종 ‘팬시’ 용품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종류로 존재하고 있다. 또한 만화책 자체를 하나의 수집가 아이템화시키는 경우도 많은데, 애초부터 코믹북 형식은 재판을 잘 찍지 않거나 찍어도 다른 표지 그림을 바꾸는 등 수집 가치를 높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슈퍼맨이 처음 등장하는 액션 코믹스 1호 같이 수집가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특전’이 있을 경우 각종 프리미엄이 붙어서, 2차 시장에서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작품 외 시장은 미국 주류 만화계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
이외에도 최근 몇 년간 미국에서도 온라인 만화의 사업모델이 조금씩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개별 작가들의 웹만화 연재나 독립사이트의 소액결재 거래 시도 등은 이미 웹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되었지만, 최근에서야 DC나 Marvel 등 대형 출판사들이 본격적으로 사업적인 마인드로 진출하고 있는 것이다. 신인 작가 모집 공간에 가까운 DC의 웹진의 Zuda 나 Marvel의 온라인 도서관 프로젝트 등이 그런 사례이며, 아직 한국식의 포털 사이트식 만화 연재는 대중적인 호응을 받으며 확장되지 않고 있다.
2. 미국만화와 한국만화
시장상황
미국의 만화 유통구조는, 만약 한국에 대여시장이 없고, 대형출판사들이 주먹구구식 운영이 아닌 공격적 마케팅 관리를 실시하고 있었더라면(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다) 될 수 있었던 몇 가지 가능성 들 중 하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미국 만화판의 상황들은, 여러 측면에서 한국 만화판에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우선 첫 번째는 시장 감소에 대처하는 방식이라는 측면이다. 미국시장도 한국시장과 마찬가지로 오락이라는 영역에서 특히 게임을 위시한 타 매체 양식에 계속 밀려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만화유통은, 여러 측면에서 한국이 현재 겪고 있는 일들을 한 번씩 거쳐 갔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한번 번성한 후 만화전문점 체제 하에서 사라졌으나, 아직도 한국 만화시장의 전근대성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배포와 반품’이라는 체제(원래 신문 등에서 사용하는 방식)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다. 뉴스 가판대 등을 위주로 만화가 판매되었던 당시에는 총판에서 각 소매점으로 중앙 공급을 했고, 결국 다양한 판형과 형식의 만화보다는, 안정적 공급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만화가 제작되었다. 만화의 표현적, 예술적 측면보다는 상업적 성공에 민감한 대형 출판사들은 이러한 상황들을 극복하기 보다는 적응하는 방식을 택했고(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들로서는 당연한 판단이다), 만화는 점점 ‘오락’ 양식으로서만 더욱 편협하게 고정되어 갔고, 편협하게 고정되어 가는 와중에서 점차 다양한 독자층을 잃고 시장이 좁아지는 위기를 맞이했다. 그런 상황에 대한 타개책으로 나온 것이 바로 ‘만화전문점’ 체제 하에서의 직접 판매 시스템(자세한 내용은 본문 참조)인데, 이 방식의 도입으로 인하여 더욱 다양한 판형과 형식들의 만화가 유통될 수 있었고, 덤으로 관련 상품들을 같이 취급함으로써 수익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었다. 물론 본문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체제도 1) 만화 양식 자체가 오락이라는 영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의 감소와, 2) 과도하게 대형화된 출판사가 자기반복의 늪에 빠지면서 점차 한계를 드러냈던 바 있다.
미국이 과도하게 적은 만화 장르와 작품군으로 지나치게 많은 마케팅을 실시해서 독자들을 식상하게 만들어서 위기를 자초했다면, 한국의 경우는 만화 출판을 주도하는 몇몇 대형출판사가 과도하게 많은 종수를 찍어내고 있고, 그 결과 각각의 작품들에 대한 품질관리, 홍보등을 포함한 마케팅이 거의 전혀 실시되지 못하는 약점을 노출한 바 있다. 양쪽 극단 모두 결과는 동일하게도, 각각의 작품들이 작품 자체로서 독자에게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점차 줄어들며 새로운 시도들이 재대로 도입되고 효과적으로 부각될 수 있는 방법들이 원천봉쇄되곤 했다. 그 결과 만화의 질적 발전의 원동력이 차단되고, 그 결과로서 만화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시들해진다. 유감스럽게도 만화는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문화/오락 영역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하는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시시각각 다른 매체들에게 지분을 빼앗기고 있는 상황인데, 양쪽의 주류 만화산업이 동시에 이러한 위기상황에 빠져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 판매시장의 취약점들이 누적되어 생겨난 ‘대여시장’이 만화 향유의 하나의 역사적인 축을 이루는 상황까지 와버렸고, 판매시장을 더욱 적극적으로 구조 개선해야할 중요한 이유로서 작용하고 있다. 가까운 예로, 대본소 시스템의 원조격인 일본의 경우, 6-70년대 동안 꾸준히 판매시장을 개척, 개선해나감으로서 만화산업의 정상적인 유통 및 수익구조를 만들어내고, 8-90년대 동안 만화의 문화적/산업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물론 일본도 현재는 자기반복과 타매체와의 경쟁 등 근본적으로 비슷한 위기상황에 빠져있지만 말이다). 한국의 경우 2000년대 초중반에부터 점차 온라인 만화의 시도가 당당한 주류로 올라서고 있지만, 아직 포털사이트의 고료 지급이나 종이 단행본 발간 이외의 그럴싸한 수익모델을 적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사회적 지위
사회적 지위라는 측면에서, 한국만화와 미국만화는 양자 모두 역사적으로 철저하게 대중 오락으로서 그 첫발을 내딛었다. 예술, 문화, 오락, 실용성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표현양식’이라는 폭넓은 범주에서 사회에 데뷔를 한 것이 아니라, 그중 극히 한정된 용도에 불과한 오락이라는 단일 영역에서만 먼저 부각이 된 것이다.
물론 초창기부터 만화의 특징들에 주목하고, 그것의 표현적 가능성을 확장하고, 만화의 ‘문화’로서의 고급한 가치를 높이려는 시도들을 항상 있어왔다. ‘Little Nemo in Slumberland’의 공간 구획 방식은 거의 한세기 가까이 지난 현재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여전히 혁신적이며, 50년대 한국에서 발간되었던 판매용 만화 단행본들은 현재의 여러 출판물들보다도 상대적인 품질이 훨씬 더 뛰어나다. 하지만 만화가 하나의 산업으로서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만화를 유통시키는 자들은 문화나 예술로서의 다양한 단초들보다는 오락으로서의 효용성 하나에만 집중을 했고, 본격적으로 만화는 ’오락‘이라는 좁은 틀에 갖히게 되었다. 더욱이 오락이라는 속성으로 가득 차게 된 주류만화와, 이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려는 비주류 만화들이 전체 만화산업에서 차지하는 양적/질적 비중 사이의 불균형은 그 어떠한 다른 매체양식보다도 컸다. 미국만화의 경우는 40년대에 들어서면서 거의 오락물로서의 슈퍼히어로물이 ’천하통일‘을 이루어내다시피 했지만, 한국의 경우는 그 상황이 더욱 열약했다. ’오락‘에 대한 금전적 투자를 할 여유가 미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적었던 한국에서 질 높은 양장과 작품 수준으로 문화/예술적 가치의 가능성들을 발전시킬 수고 있었던 판매용 단행본 시장은 죽어버리고, 저렴한 오락물로서의 대본소 시스템만이 유일하게 만화 시장 속에서 생존하는 구조를 탄생시켰다. 만화산업 발전 방향의 공통점은 ’오락으로서의 만화‘이고, 차이는 무엇보다 미국과 한국의 물질적 조건의 차이었던 것이다(이것은 만화의 오락적 가치를 분명히 주로 삼고 있었으나, 그에 못지않게 표현적, 문화적 가치를 체계적으로 강조해온 유럽 만화가 걸어온 길과 대비해 볼 때 더욱 극명하다).
만화를 오락으로 치부하고 있는 미국과 한국의 경우, 당연히도 만화의 경쟁자 또한 오락의 영역에서 나온다. 문제는, 현대에는 바로 ‘컴퓨터/비디오 게임’이라는, 만화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오락적인 기능을 강화한(아니, 아예 오락적 기능 그 자체인) 미디어 양식이 폭발적으로 자신의 지분을 늘려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만화를 전적으로 오락의 영역에 쑤셔 넣다 보니, 만화의 오락이라는 영역에서의 패배는 자연스럽게 만화라는 양식 자체의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주소다. 대부분의 다른 매체 양식들이 자신의 분야를 예술, 실용, 문화 일반 등으로 폭넓게 넓힌 반면, 만화는 오락의 영역에 거의 모든 지분을, 그리고 실용 학습서 분야에 약간의 지분을 투자했고, 점점 쇠퇴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오락으로서의 기능만이 강조되고 문화/예술로서의 기능들과 가능성들이 거의 전적으로 배척을 당하다 보니, 제도권의 검열이라는 외부의 적을 만났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박정희 정권 하에서 실시한 만화에 대한 검열 규정은, 그 모델을 50년대 만들어진 미국의 검열 지침에서 찾을 수 있다. Comics Code라고 부른 이 검열 지침은, 만화가 문화로서 보기보다는 어린이 및 청소년용 오락거리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심각한 표현의 제약을 시도했다. 사실 과도한 ‘윤리적’ 기준에 의한 개별 작품의 검열은 비단 만화뿐만 아니라 모든 표형양식에 있어서 존재해왔다.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소설, 회화 등 수많은 영역에서 구체적인 사례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경우는 개별 작품에 대한 ‘도덕적 심판’일 뿐, 표현 양식 자체에 대한 성문화된 규제지침으로 만들어진 적은 없다. 하지만 만화의 경우는 실제로 그러한 규제지침을 내렸고, 그것에 실질적인 효력을 부과했다(미국의 경우 비록 ‘자율 심의기준’의 허울을 쓰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사전검열이었으며, 만화 자체의 발전보다는 원활한 유통을 통한 상업적 이해를 추구하는 주류 출판사들은 이에 절대적으로 순응했다).
한국의 경우도 물론 만화에 대한 심의와 검열, 그리고 사회의 백안시에 관해서라면 결코 세계 최고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가장 최근의 제도적인 탄압으로서는 한국에서는 97년도 ‘일진회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대대적인 만화에 대한 마녀사냥과, 그 와중에서 생겨난 ‘청소년 보호법’ 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에서는 이러한 탄압에 대한 투쟁의 승리로서가 아니라, 청소년 보호법 제정에 따른 제도적 정비의 차원에서 사전심의가 폐지되고 실질적인 출판사 자율 심의의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물론 만화를 둘러싼 환경은 여전히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그나마 미국의 경우는 검열의 역사 와중에서도 결국 대형 주류 출판사들이 자신들의 시장을 지켜냈지만, 한국에서는 청보법 사태 이후 만화책 구비 규정이 복잡해지면서 소형 서점들로부터 만화가 사라졌고(절차가 복잡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법을 어길 위험이 크며,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데다가, 덤으로 수익성도 낮다고 생각해보라!), 그와 함께 판매시장의 기형적 축소화가 한층 더 진행되었다. 이러한 반 문화산업적인 전개의 기반 논리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여전히 “만화는 어린이/청소년들이 보는 오락”이라는 인식이다. 이후 대형서점의 만화코너나 온라인 서점 등이 다시 만화 유통을 키워나가고 있지만, 아직도 설익은 연령 제한의 부작용은 현재진행형이다.
지금 여기
단 몇 개의 메이져 출판사에서 모든 주류 출판경로를 독점하다시피하고 작가들에 대한 전권을 휘두르는 모습은 미국에서 이미 닮은 꼴이 있었다. 비록 현재도 그 문제는 완전히 극복되지 못했지만, 80년대 이래 작가 자신들이 주축이 된 자가 출판, 중소규모 출판사의 활동 등을 통해서 대안적 출판 경로들을 계속 찾아나서고 있는 것이 미국 만화의 현재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형 출판사의 조직적 규모, 그리고 그들이 만화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이러한 대안적 시도들은 말 그대로 ‘시도’ 단계에 머물러 있다.
미국의 경우, 성공한 작가들이 자신의 개인적 성공과 사회적 인지도를 바탕으로 자신들을 구속했던 출판사, 유통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고 독립을 시도했다. 그것은 자가출판일수도, 신규 출판사 설립일수도, 언더그라운드화일수도, 혹은 온라인화일수도 있다. 또한 만화의 시장정의와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 CBLDF 등의 단체를 만들어서, 대형 출판사, 정부 등 대한 조직적인 활동들을 벌이고 있다. 물론 작가들이 출판과 유통의 부조리에 맞서서 자신들의 출판사를 세우고 스스로 만화의 길을 새로 열어보고자 하는 시도는 한국에서도 한때 있었고 또한 독점적 유통질서를 개혁하는데에 큰 공을 세웠으나 다른 외부 변인들 앞에서는 일시적인 승리에 불과했으며, 현재의 젊은 작가들에게 이어지는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에 실패했다.
기존 창작과 유통방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안 중 하나로 맥클라우드가 들고 있는 것은 바로 컴퓨터와 온라인이다. 실제로 미국과 한국 양쪽에서 많은 젊은 작가들이 온라인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만화에 적극적으로 도입시키기 위한 시도들을 하고 있다. 그 와중에서 한국의 경우 포털사이트가 새로운 주류 대형 출판사의 역할이 되어 준 독점적 지위로 올라서는 반복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말이다. 출판/유통혁신이라는 측면과 표현적인 측면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놓고 볼 때, 양쪽 나라의 작가들 모두에게 우선적인 관심사는 출판/유통의 측면이다. 시장이 점차 축소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만화를 출판해서 유통시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을뿐더러, ‘히트’를 하더라도 큰 성공을 거두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라인을 통해서 새로운 만화 유통 방식을 개척하고자 하지만, 온라인 만화의 수익창출 구조 등 현실적인 문제들을 아직 해결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의 여러 온라인 만화작가들은 아직도 ‘주류만화계’로부터 독립해서, 온라인을 만화를 수용할 새로운 공간으로 인식하고 그 곳에서 새로운 표현법, 유통체계 등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부류이다. 아니면 단지 직접 출판할 비용이 없어서 온라인에서 독자들과 만난다든지 말이다. 한국의 경우, 처음에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이내 포털 사이트의 연재 형식에 알맞은 세로 스크롤 방식의 칸 나열식 만화문법이 절대적인 주류가 되었다. 이것은 주류 만화계에서 작가의 출판사에 대한 의존도가 실제로는 미국보다도 한국이 오히려 더 심하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물론 다른 쪽으로는 대본소 만화들과 주류 종이 잡지 연재용 형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인쇄 만화에서 가장 주류적인 형태와 제작방식들을 그대로 온라인 상으로 옮겨놓은 방식의 ‘온라인 만화방’도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결제 시장이라는 측면에서 온라인 만화방의 성인만화 서비스는 절대 가볍게 볼 수 없다).
3. 12가지 혁신과 한국만화
본서에서 맥클라우드는 앞으로 만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크게 12가지 축으로 나누어서 제시하고 있다. 12가지 축은 다시금 큰 덩어리 몇 가지로 묶일 수 있는데, 1부에서는 현재 만화계의 문제점들을 제시하면서, 그리고 2부에서는 그에 대한 대안 가운데 하나로서 온라인을 들어주면서 만화를 혁신하자고 역설한다. 작가의 비전이 한국만화 현실에서는 어떤 식으로 적용시켜볼 수 있을지 필자가 몇 가지 개인적 견해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작가주의
문학으로서의, 예술로서의 만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단순히 오락상품으로서 시장의 조건에 맞춘 기성품들보다, 진정한 표현양식으로서의 만화를 창조해내야 한다는 주장이고, 곧바로 ‘작가주의’라는 말로 연결될 수 있다. 물론 한국에서도 만화를 통해서 세상을 더욱 심오하게 해석해거나, 만화의 표현적 한계들을 끊임없이 넘어서려 하는 작가주의의 맥은 끊이지 않고 내려오고 있다. 물론 주류 산업 현장에서는 ‘예우 차원’에서의 대접 이상은 거의 받지 못하고 있지만, 만화가 멸종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들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해내야만 하는 상황이 이미 다가와 있다. 이제는, 만화를 성공의 수단으로, 혹은 오락의 수단으로 창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닌, ‘표현’의 한 방식으로서 다루는 작가주의적 시도들을 더욱 부각시키고, 발굴해낼 수 있는지에 만화의 미래가 달려있다.
한국이라는 현실에서는 개별 작가주의 성향의 작가들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과 함께, 50년대의 고급 판매용 작품들에 대한 재조명, 엄청난 물량의 대본소 시절 만화들 가운데 걸작들에 대한 발굴, 작가주의적 시도로서의 인디만화에 대한 관심, 자가출판과 작가주의 등의 산실인 순정만화 부각 등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과제다.
시장조건
창작자의 권리, 그리고 산업 혁신은 만화 제작 및 유통이라는 현실적인 시장조건들에 관한 것이다. 한국 만화계가 나아가야 할 길은, 우선 만화가 정상적으로 만들어지고 유통이 되는 기본적인 시장구조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출판 종수와 출판 품질 등을 위시한 만화 생산 체계 자체를 정상적인 마케팅 활동과 소비자 구매활동이 가능할 정도까지 합리화를 시켜나가야 하며, 총판에 일방적으로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다양한 유통방식이 개방되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양한 수준의 마케팅과 유통방식들의 장단점들을 충분히 역사적으로 증명해보인 미국 만화산업의 경우들을 최대한 참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작가와 제작사, 유통주체 간의 정당한 권익 분배와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그러한 것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필요할 때는 변호사를 통해서 법적인 해결을 하고, 자가 출판이라는 모험을 하고, 대형 출판사의 이점을 버리고 독립 출판사, 혹은 아예 만화출판사가 아닌 다른 사업체들과 작업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작가들이 스스로 그 일을 다 해내는 것이 힘들다면 다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나서야 하고, 필요시 창작자 길드를 결성해서 연대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2007년 미국 극본작가 길드의 성공적 집단행동도 하나의 참조사례가 될 수 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맨 처음 작품을 만들기 위한 파트너십의 계약을 체결할 때 가장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합의를 미리 못박아놓음으로써 가장 바람직한 관계를 만들어놓고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의지의 관철이 아닌 상호간 이해의 합의에 의한 것이어야 하며, 그 과정 또한, 필요하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사회적 인식
‘오락으로서의 만화’로 남아서 소멸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표현양식으로서의 만화’로 혁신을 이루어서 오락의 영역이 다른 매체에 의해서 침범을 당하더라도 색다른 즐거움으로서, 예술로서, 감동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두 가지 축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실제로 그런 우수한 작품들이 탄생하는 것이고, 그 반대편이 있는 축은 그러한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도록, 혹은 탄생했으면 그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사회적 인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창작 바깥의 영역에서도 몇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하나, 만화 자체의 문화적 우수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평론과 연구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져야 한다. 만화의 단순한 산업적인 전망들에 대한 분석, 캐릭터 팬시 상품으로서의 시장성 등의 이야기 등은, 만화를 ‘오락’의 범주에서 한 발짝도 꺼내놓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치명적인 약점인 까닭은, 오락이라는 측면에서는 만화보다 더욱 효과적인 다른 것들이 언제든지 들어와서 만화보다 더 확실한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화가 ‘오락’의 하부단위가 아닌,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면 더 이상 그런 식의 생존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화에 대한 미학적 차원, 다시 말해서 만화만의 독특한 표현양식들을 통한 접근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또한 단순한 ‘역대 만화 관련사건 스크랩북’이 아닌, 만화가 역사적 차원에서 사회와 맺고 오던 관계, 그리고 만화계 내부, 외부에 있는 수많은 형성, 흐름과 단층들의 의의를 통한 입체적인 문화연구들을 통해서 만화가 이 사회에 과연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주장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일반인들이 만화를 좋아하고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교양차원에서의 교육도 실시되어야 한다. 사회적 인식을 혁신하기 위해서는, 만화교육이 만화가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에 집중되는 것이 아닌, 만화를 어떻게 감상할 것인가에 대한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음악 감상법’, ‘미술 감상법’ 등을 통해서 다른 표현양식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있는 명작들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을 설파, 고유한 영역을 더욱 공고히 한 것처럼, 만화도 더 이상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철지난 수식어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다양성의 문제
미국 주류 만화에서 다양성의 문제가 성, 인종 등의 평등, 장르 획일화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면, 한국 주류만화에서 다양성의 문제의 핵심에는 (대부분 일본만화에서 나온) ‘히트공식’에 대한 추종이 있다. 독자들의 취향을 맞추어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공식을 응용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해도, 그것이 거의 하나의 ‘유행’이자 ‘법칙’이 되어있으면 곤란하다. 엄청난 히트작이 하나 나온 경우, 그것이 하나의 유행을 낳아서 이후 수많은 작품들이 그 선례를 따라가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 이외의 다른 방식들이 없을 경우 독자들은 개개의 작품에 대해서 실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만화라는 양식 자체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자신이 사회를 살아가며, 만화를 보면서 만들어낸 문제의식보다, 성공을 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경우 특히나 ‘히트 공식’에 의존할 위험이 커진다. 물론 이것은 말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어서, 거의 모든 창작자들은 멀게는 히트를 위해서, 가깝게는 지면 유지와 생계를 위해서 크거나 작거나 타협을 해야 하는 기로에 놓인다. 이런 경우, 자신의 자유로운 표현이 관철시키기 위해서 ‘안정적 수입’을 포기하는 극소수의 작가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결국 요청받은 대로 ‘히트공식’을 도입하고 만다. 그 결과, 많은 주류 만화 작품들이 서로 엇비슷한 공식들을 사용하고 있거나, 아니면 히트한 일본 만화의 공식들을 거의 고스란히 가져오는 폐단들이 나타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에서 새로운 방식의 히트만화가 새로운 ’히트공식‘을 세우면 그것을 곧바로 수입해서 들여오는 바로 그 폐단 덕분에, 한국 주류 만화는 오히려 만화의 소재나 주제, 장르의 다변화라는 측면에서는 상당히 나아가있는 편이다 (물론 그래도 그런 구조는 극복해야 할 문제점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디지털과 온라인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현재 한국에서 온라인 만화는 두 갈래다. 포털사이트 연재에 최적화된 스크롤 방식과 기존 지면은 온라인으로 옮긴 온라인 만화방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나마의 수익구조가 대형 지면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이런 의미에서, 맥클라우드의 제안들은 아직도 시작점에 있다. 더 작은 규모로, 그리고 작가와 독자가 직접 나서서 소통하면서도 수익을 내는 방식에 대한 고민은 아직도 성공사례가 드물다(여러 실패 사례들이 축적되어 있기는 하다). 온라인이라는 방식을 만화의 혁신에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오래된 방식’의 대형 웹진보다는, ‘새로운 방식’의 자가 출판 영역 역시 실험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새로운 만화미학의 창조는 중요한 토픽이다. 만화만이 할 수 있는 표현양식들을 개발하여, 그 속에 가장 강력한 이야기들과 감수성을 실어 나를 수 있어야 만화가 만화만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것은 독자와의 협력이자 경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너무 새로운 만화언어를 도입하면 독자들의 외면을 받고, 너무 안주하면 지겨워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재 한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온라인만화의 문법인 칸을 균일하게 세로로 늘어놓는 스크롤 방식은 독자들에게 충분히 익숙하게 다가가지만, 반대로 절묘한 칸 간 연출의 묘미가 종이만화보다 확실하게 떨어진다. 그럴 수록 무한캔버스 같은 가장 기본적인 개념으로 다시 돌아가서, 자유로운 발상으로 여러 실험을 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더욱 온라인의 본질을 꿰뚫고 그것들을 만화에 응용하는 새로운 시도들이 이어진다면, ‘정당한 대접’을 받겠다는 만화의 오랜 염원은 결국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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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위에서 제시한 의견들은 필자의 좁은 소견들일 뿐이다. 이 책을 독파하신 여러분들의 머리 속에서는 이제 이보다 더욱 많은 문제의식들, 대안들, 발전방향들이 담겨져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서문에서 맥클라우드가 밝혔듯이, “읽고 난 후 5분이면” 그에 대한 토론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발상과, 곧바로 현실세계에 적용해보는 시도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하는 것, 그 것이 바로 이 책의 목표다. 그 목표가 얼마나 멀리 있을지는, 이제 이 책을 읽은 우리 모두에게 전적으로 달려있다.
김낙호(만화연구가)
해설편 초판 2001.4.
해설편 개정판 200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