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의 이해 해설편


‘만화의 이해’ 책 속 해설편, ver.2008

만화의 이해의 이해

김낙호(만화연구가)

0. <만화의 이해>를 다시 펼쳐보며

역자가 <만화의 이해>를 처음 접한 것은 95년이었다. 당시는 한창 문화에 관한 연구들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절이었고, 역자 역시 미장센이니, 몽타쥬니 하는 영화이론들을 살펴보겠답시고 돌아다니던 시기였다. ‘왜 만화에는 영화이론 같이 널리 인정받을 수 있는 연구성과나 이론적 틀이 없는 것일까’라고 푸념을 늘어놓고 있을 때 갑자기 등장한 물건 – 대형 서점의 응용 예술/디자인 코너에, 수많은 볼품없어 보이는 컷 도안 모음집과 만화실기 기법서 사이에 무심히 꼽혀있던 그 허름한 갈색 표지의 책이었다. 하지만 책을 뽑아들고 3-4 페이지를 넘겨보고 나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거다!’를 속으로 외치며 책을 들고 계산대로 향하고 있었다.

그 후로 7년이 지난 시점에 책의 재번역 작업을 하며 이 해설편을 썼고, 또다시 6년이 더 흘러 재출간 하면서 다시 손보고 있다. 그 동안 수많은 훌륭한 만화, 허접한 만화들이 전 세계적으로 발표되어 왔지만, 만화를 둘러싼 환경은 미국에서나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점차 위축에 위축을 거듭해왔다. 맥클라우드 자신도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온라인의 가능성들에 한 가닥 희망을 걸며 후속작 <만화의 미래Reinventing Comics>를 발표했고, 나아가 더 넓어진 환경에서 더 많은 창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만화의 창작Making Comics>를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만화의 현재와 나아갈 길은 여전히 이루어낸 것보다는 이루어내야 할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역자가 이 책을 다시 꺼내들게 된 것은, 바로 <만화의 이해>에서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멋진 토론’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만화를 진지한 관심의 대상, 즉 심심풀이 오락거리 이상으로서 취급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고민들과 토론들을 위한 최적의 출발점인 것이다. 이 책에서 번역의 주안점은 원전에서 도입했던 각종 이론적 개념들을 단지 의미만 통하게 하는 의역 방식이 아니라, 실제로 여타 관련분야(특히 커뮤니케이션학, 미학 등)에서 통용될 수 있는 정식화된 용어로 만들어 보고자 시도했다. 또한 몇 가지 추가정보와 토론거리를 던져주고자, 역자후기를 확장한 바로 이 <해설편>으로 화사첨족을 하고자 한다.

1. 만화의 이해: 탄생과 그 이후

<만화의 이해Understanding Comics>, 혹은 ‘만화에 관한 만화’에 대한 구상은 맥클라우드가 첫 번째의 온전한 자기 작품인 <ZOT!>를 연재하던 80년대 내내 계속 품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자칭 ‘세계에서 두 번째로 손이 느린 만화가’인 작가였기에 구상은 점점 더 길어지기만 했으며,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구상 노트 몇 개만이 만들어진 것의 전부였다. 그러다가 88년에 창작자 권리장전(Creator’s Bill of Rights) 작성을 위하여 북미의 여러 작가들이 모임을 가졌을 때 동료 만화가 래리 마더Larry Marder에게 이 노트들을 보여주었고, 그의 조언들을 반영해나가면서 점점 계획은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90년에 <ZOT!>의 연재를 잠정 종료한 후, 본격적인 원고에 착수했다. 이 작업은 케빈 이스트먼Kevin Eastman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가면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 당시 그는 기존 대형 출판사로부터 독립하여 자가출판이라는 모험을 걸었던 <닌자 거북이Teenage Mutant Ninja Turtles>의 상업적인 성공으로 인하여 권리장전 선언의 상징적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다시 몇 년간의 원고 작성 기간이 끝난 93년도에 마침내, 긴 준비기간과 ‘상업적 메리트’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내용 등 일반적인 주류 상업 출판계통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작품 한편이 서가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만화의 이해>는 미국의 주류 만화 출판 형태인 comic book (24-40페이지 짜리 소책자 방식)이나 다른 어떠한 ‘연재물’의 형식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217페이지짜리 책으로 나왔다. 물론 출판사 역시 Kitchen Sink Press1)라는 비주류 성향의 만화출판사였다. KSP에서 만화유통망에 이 책을 유통시킨 1년 후, 94년에 Harper Collins 출판사에서 ‘일반’ 서적망 유통 부분을 맡아서 보다 폭넓은 독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2). 그리고 99년도에 KSP가 도산한 후, 만화유통망 유통을 DC Comics 산하의 Paradox Press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맥클라우드가 처음 만화계에 입문하여 후반 처리 담당으로 입사를 했던 곳이자, 만화계의 현실과 창작자의 권리에 눈뜬 곳이 바로 DC였던 점을 생각해보면, 꽤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이후 <만화의 이해>는 한국어를 포함, 14개 국어 이상으로 번역되어 세계 각지에 소개되었으며, 책이 나온 이듬해인 94년, Harvey상 Best writer, Best graphic album, Best journalistic presentation 등 3개부문, Eisner상 Best comics-related book 등 주요 관련 상들을 일방적으로 휩쓸었을 정도로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수많은 미디어, 예술, 문화 등 관련 대학 강좌에서 만화를 커리큘럼 속에서 다루고자 할 때 필수 참조교재로 사용된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작가가 책에서 주장했던 ‘멋진 토론’이 없는 거의 일방적인 찬사 일색이었고, 그것은 만화계가 단지 대중문화론이나 만화 산업론이 아닌, 만화 자체에 대한 지적 연구성과에 대한 기근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책의 빛나는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제기된 여러 안건들은 문제제기이지 결코 ‘해답’이 아니라는 사실이 종종 간과되어 온 것이다; 특히 학술적 관점에서의 이론적 기반의 취약성( 및 그것으로 인한 위험성)은 항상 재평가와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로도 수년동안 <만화의 이해>는 논란이나 반론의 대상이 되지를 못한 채 ‘숭배를 넘어선 박제’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비록 <Filibusting Comics>(Dylan Sisson作) 같은 조롱을 목적으로 하는 패러디물은 간간히 나왔으나, 진지한 의미에서의 토론은 5년 정도 지난 후, 만화가 산업적으로 본격적인 위기론에 직면하고 나서야 비로소 일부 학술 행사와 인터넷 뉴스그룹의 토론방에서 어느 정도 불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는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안건들이 제기되어 마땅한 시기였고, 결국 맥클라우드는 2000년도에 보다 명백하게 논쟁적인 후속작 <만화의 미래Reinventing Comics>를 출간한다. 그리고 2006년에는 두 책에서 제기된 여러 아이디어를 실제 창작 과정의 노하우 전반으로 소화하는 역작, <만화의 창작Making Comics>으로 다시금 발전시켰다.

한국에서 이 책이 받아들여진 경위는 95년도에 <만화의 이해>(아름드리 출판사, 고재경/이무열 공역)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된 것인데, 오랜 기간동안 토론보다는 실질적으로 일방적인 찬사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바 있다. 그것은 아무래도 국내의 만화에 대한 관심이 진지한 미학적 매체분석이나 역사문화적 측면보다는 산업적 측면이나 대중오락의 하위장르라는 한정된 범주 내에서만 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들은 단순히 만화의 지위를 향상시켜주는 트로피에 머물면 안 되고, 활용하고 반박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발상들이 만들어진 맥락, 그리고 그 이후의 모습들을 두루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발명품들

하지만 너무 이야기가 무거워지기 전에 잠시 쉬어가는(?) 의미에서, 먼저 덜 골치 아픈 부분부터 짚고 넘어가 보도록 하자. <만화의 이해>의 성공과 자신의 온라인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 힘입어, 맥클라우드는 자신이 만화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여러 발상들을 담고 있는 ‘발명품’들을 본격적으로 공개하기 시작했다. 어떤 것들은 보다 현실적이고 어떤 것들은 다소 장난스럽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만화라는 본질에 대한 강력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몇 가지 발명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3).

24시간-만화

‘24시간-만화’는, 연속된 24시간 이내에 24 페이지짜리 만화 한편(온라인 만화의 경우는 24페이지 대신 100개의 칸)을 완성시키는 하나의 ‘이벤트’다. 사전에 스케치를 하거나 디자인 작업을 한다든지, 스토리 구상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규칙위반이며, 후반작업까지도 포함한 모든 작업이 연속된 24시간 이내에 무조건 끝나야만 한다. 그림도구나 참조자료, 음식, 작업중에 들을 음반 등 간접적인 준비 정도만이 사전에 허용된다. 24시간은 연속된 것이어서, 중간에 잠을 자든, 친구를 만나든 계속 시간은 흐른다. 하지만 이외에는 아무런 다른 제한조건이 없어서, 만화의 형식, 제작방식, 주제, 소재 및 기타 요소들은 완전히 작가 개인의 자유다. 그리고 작품이 완성되면, 맥클라우드에게 한부를 보내야 한다(이것도 규칙이다!). 이후 그 작품은 작가의 홈페이지에 다른 24시간-만화 들과 함께 올라가게 된다.

24시간 이내에 끝마치지 못했을 경우, 즉 ‘실패’를 추스리는 방법으로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24시간이 지나면 그 위치에서 중단을 하는 것(‘Neil Gaiman 버전’), 다른 하나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계속 한 후 시간을 기록하는 것(‘Kevin Eastman 버전’) 등이다.

원래 이 기획은 1990년, 원고 작업 속도가 (심지어 맥클라우드보다도) 느리기로 소문난 동료 만화가인 Steve Bissette의 팬 사인회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두 페이지꼴로 원고작업을 할 정도로 극심한 슬럼프 시기였음에도, 정작 사인회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손이 거의 ‘날라다녔다’고 한다; 즉, 뭔가 원고에 임하는 자세에 문제가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원고 작업에 대한 어떤 다른 인식을 찾아보기 위해서 둘이서 각각 24시간-만화를 그려내기로 약속을 하고 시작을 했는데, 여기에 점점 더 많은 동료 만화가들이 진지하게 참가하게 된 것이다. 이 ‘이벤트’는 꽤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어, 심지어는 24시간-만화의 변종으로 ‘24시간-연극’도 탄생했다. 극본, 오디션, 리허설, 공연까지 24시간 안에 해낸다는 규칙으로, 뉴욕의 실험적 성향의 극단들에서 처음 시도한 후 이내 널리 전파되었다. 현재는 세계 각지에서 24시간-만화를 그리는 ‘24시간-만화의 날’이 이벤트화 되어 있으며, 작품들을 단행본으로 묶어낸 책들도 발간중이다.

24시간-만화의 매력은 여러 방향에서 찾을 수 있다. 일종의 미니멀리즘 운동으로서 가장 원초적인 만화그리기의 방식을 되찾는 연습일 수도 있으며, 쉽게는 단지 원고 속도를 빠르게 하는 연습일 수도 있다(물론 24시간-만화가 호응을 얻은 것은 전자의 요소가 컸을 터이다). 24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는, 말 그대로 ‘떠오르는 대로 바로 원고로 그려내는’ 즉흥성과 직관성을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기술적인 기교보다는 원석 그대로의 발상을 바로 드러낼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것은 완전히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것인 만큼, 자기 통제력 향상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물론 미국이나 서구의 만화가들이라고 해서 사회적으로 대단히 부유하고 생계유지가 제대로 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양’에 대한 압력이 상대적으로 덜 한 것이 사실인 만큼, 재충전을 위하여 이런 이벤트를 벌이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생계유지를 위해서 이미 한정된 시간 이내에 과도하게 많은 원고를 쏟아내야만 하는 한국의 여러 ‘주류’ 작가들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매력적인 이벤트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지 않을 듯 하다. 이미 지금도 그들은 어떤 작가적인 재충전(만화, 게임, 애완동물만이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의 기회도 없이, 매일 나름대로의 24시간-만화를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5-Card Nancy

1985년도 무렵 고안된 5-Card Nancy는 신문 연재 코믹 스트립인 ‘Nancy’ 시리즈를 응용한 일종의 카드게임이다. 이 것은 일종의 집단적인 ‘이야기 전개시켜 나가기’ 게임으로서, 만화에서 칸과 칸의 연결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이야기 양식에 대한 통찰을 오락으로 승화시키는 기구로서 작용하고 있다.


우선 규칙은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Nancy’ 만화를 복사해서 만화 한 칸이 카드 한 장이 되도록 잘 자른다. 2) 카드들을 잘 섞어서 각 플레이어에게 5장씩을 나눠준다. 나머지는 가운데에 쌓아 놓는다. 3) 가운데 카드뭉치 가운데 맨 윗장을 펼쳐 놓는다. 이것이 바로 ’첫번째 칸‘이 된다. 4) 차례가 돌아온 플레이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카드 중 하나를 골라서 다음 ’칸‘으로 놓는다. 5) 이때,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그 ’칸‘이 훌륭한 선택이었는지를 다수결로 판단한다. 즉, 칸과 칸이 이어져서 말이 되는 (혹은 기발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고 인정되면 그 선택은 통과된다. 만약 다수결에 의해서 거부당했을 경우, 플레이어는 그 카드를 다시 가져가야 한다. 통과든 거부든, 플레이어의 차례는 종료된다. 6) 만약 합당한 카드가 없다고 생각할 경우, 자신의 카드 가운데 한 장을 중앙의 카드뭉치 맨 밑에 넣고, 위에서 한 장을 뽑아와서 교환을 할 수 있다. 7) 이런 방식으로 한 칸씩 만화를 계속 전개시켜나가면서, 가장 먼저 자신의 모든 카드를 없애면 승리한다!

이 게임에 사용하는 Nancy 만화는, 1946년 이래로 Ernie Bushmiller가 맡아서 그린 것을 사용해야 한다. 이 만화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 만화가 대단히 단순화된 양식을 통해서 최소한의 시각요소들만으로도 최대한의 표현을 해내는 시각언어를 구사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선구적인 작품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즉, 상상력에 따른 상황의 재해석의 폭이나 이야기 구성의 가능성들이 대단히 넓게 열려있다는 것이다. 맥클라우드의 표현에 따르자면, 각 칸이라는 ‘원자’를 사용, 여러 플레이어들의 상상력을 통해서 그것을 유의미한 ‘분자’로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이 게임의 가장 큰 매력은, 주어진 만화적 요소들을 가지고 실시하는 집단적인 창작 과정에 있다. 칸 사이에서 생겨나는 의미과정을 상상력을 통해서 최대화시키는 이 작업은, 만화 창작 즐거움의 가장 근본적인 한 부분을 훌륭하게 응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 게임을 도입한다면, Nancy 만화 대신 말이 적고 그림요소들이 간략하면서도 풍부한, 동시에 장기 연재되어 자료가 많이 쌓여있는 다른 한국 만화를 사용할 수 있다(‘맹꽁이 서당’이나 ‘꺼벙이’ 등 7-80년대의 만화체 명랑만화들이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만화를 컴퓨터 게임으로 이식을 하는 식의 경우가 아니라, 만화 창작 자체도 훌륭한 오락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발명이다.

칼은 살아있다!

본서의 작중화자인 작가 자신을 제외하자면, 유일하게 완결성 있는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칼’이다(그것도 두 번이나!). 술마시고 운전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충고가 들어있는 첫 칸에서 ‘고이 잠들다’의 마지막 칸까지 칼의 이야기는 두 가지로 펼쳐지는데, 첫 번째는 만화에서 사건의 생략과 첨가에 관한 예제이며, 두 번째는 만화의 일방향성을 뛰어넘는, 다방향 만화의 가능성을 제시한 예제다. 전자의 경우는 책에서 들어준 사례를 더욱 완전한 형태로 제시해 주는 것에 주력하고 있는데, 필요 이상으로 자잘한 것까지 다 넣은 길이의 52칸짜리부터 시작해서, 한 칸씩 감소시켜나간 버전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더욱 재미있는 것은 역시 후자의 경우다. Choose Your Own Carl(CYOC: 스스로 칼을 선택해 보세요)이라고 명명된 이 코너는, 다방향 만화에 대한 실험일뿐만 아니라 독자참여에 의한 집단창작이기도 하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빈칸들로 이루어진 회로도를 제시한다. 회로도는 여러 개의 첫 칸과 여러 개의 마지막 칸을 지니고 있으며, 중간에 종종 교차한다. 그리고 모든 첫 칸은 본서에도 있는, ‘술마시고 운정하지 말아라’ 칸이고, 모든 마지막 칸은 ‘고이 잠들다, 칼’이다. 그리고 온라인 공개 게시판을 운영해서, 일주일에 한 칸씩 독자의견 가운데 하나를 다수결로 선출해서 다음 칸을 그린다. 이런 방식으로 총 6회에 걸친 회로를 만들어, 이들을 다시 하나로 묶어내서 완성된 것이 현재 작가의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는 버전이다4). 실험이 진행되면서 나중에는 AniGIF를 이용한 동영상 효과라든지, 칸 바깥을 사용하는 기법이라든지, 컬러의 제한적인 사용이라든지 하는 다양한 방식까지도 도입하는 등 대단히 재미있는 결과물이 탄생했다.

단순히 책에서 예로 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독자들도 참여하는 적극적인 프로젝트로 확대시켜 나갔다는 점이 CYOC의 미덕이다. 만화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실험하는 것이 단지 일부 전위 예술가들의 난해한 작업 속에서 뿐만이 아니라, 일반 독자들과 같이 호흡하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한 모범사례로 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스토리 기계

만화작가들 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창작자 일반은 창작을 할 때 자신들의 사고 습관과 그 바탕에 있는 생활 습관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리고 생활습관이 일차원적으로 고정되어 버릴 때(예를 들어서, 원고작성, 전자오락, 애완동물 돌보기 등으로 24시간을 채워버릴 때) 새로운 아이디어는 점차 고갈되어, 이미 있던 것의 재인용, 혹은 자신이 이미 했던 것의 재탕이 반복되는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바로 이런 점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보조도구로서 고안된 것이 바로 이 ‘스토리 기계’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양한 도상기호들을 잔뜩 복잡하게 나열하여 서로 연결해놓은 회로도로 만들어져 있으며, 일종의 ‘아이디어의 난수표’라고 할 수 있다. 도구를 활용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회로 위에 말을 놓은 후, 4면 주사위(정사면체)를 굴려서, 상하좌우로 말을 움직여 나간다. 그리고 그 일련의 도상기호들의 흐름을 메모하거나, 기억해두며 ‘영감’을 얻는 것이다.


<맥클라우드式 스토리기계 중 일부>

‘스토리기계’는 (유감스럽게도) 스토리를 만들어주는 기계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스토리를 짜는 발상을 완전히 임의화시키는 것이다.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흐름 속에서 펼쳐지는 일련의 도상의 조합을 힌트 삼아서 영감을 얻어내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다시 다듬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몫이다. 하지만 가끔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서 완전히 ‘새로운’ 출발점에서부터 생각을 얻고 싶을 때, 이런 식의 난수표를 사용하는 것이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스스로 자신만의 ‘스토리 기계’를 한번 만들어 보는 것도 물론 추천할 만한 일이며, 그 과정에서도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창작자 권리장전5)

사실, 이것은 발명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운동 방향성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창작자 권리장전은 1988년 11월, 메사츄세츠주 노스햄턴시에서 열린 북미 만화가 대회에서 작성되었다. 이 모임은 그 해 7월에 토론토에서 열린 모임의 후속모임이었는데, 이 회의들의 주요 안건은 창작자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였다. 첫 모임을 주최한 것은, 대형출판사를 외면하고 창작자의 권리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는 자가출판을 통해서 대성공을 거둔 ‘Cerebus’ 시리즈의 Dave Sim이었으며, 후속모임의 주최는 비슷한 방식으로 성공을 거둔 ’닌자 거북이‘ 시리즈의 Peter Laird와 Kevin Eastman이었다. 맥클라우드는 첫 모임때 나온 안건들을 보다 명료화하고 이것저것을 보충하여 ’만화 창작자 권리장전‘이라는 것의 초안을 만들어서 이 회의에서 제안했고, 곧바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후 회의는 주로 이 선언문의 세부수정에 관한 것이 되었다.

이 선언문으로 인하여 북미의 주류 만화산업이 큰 영향을 받았다든지 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창작에 대한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나 변화에 대한 열망을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된 것은 틀림없다. 이 선언의 중심에 담겨 있는 것은 자가 출판 장려, 산업구조 재편, 작가의 작품에 대한 태도 등에 대한 성찰과 변혁의지였다. 이런 자세는 세계 어느 곳의 만화 창작가들이라도 한번쯤은 참조해볼만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여기에 그 항목들을 옮겨 적어놓는다(주석 제외, 굵은 글씨 강조는 역자; ‘우리’는 창작자를 말함).

1. 우리의 완전한 창작물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

2. 우리가 완전한 소유권을 가진 작품의 창조 과정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

3. 우리 창작 재산의 복제 및 생산형태에 대한 동의권

4. 우리 창작 재산의 유통 방식에 대한 동의권

5. 우리 자신 및 창작 재산의 소속출판사를 이전할 수 있는 권리

6. 모든 거래에 있어서 변호사를 고용할 권리

7. 한번에 한 곳 이상의 출판사에 출판 제안을 할 수 있는 권리

8. 우리의 창작물에서 연유한 모든 이익에 대해서 즉각적이며, 공정하고 정당한 몫을 가질 권리

9. 우리 작품에 연관된 모든 수입과 지출에 관한 완전하고도 정확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권리

10. 우리 작품원고를 즉각적이고도 완전하게 원상태로 돌려받을 수 있는 권리

11. 우리 창작 재산의 라이센싱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

12. 우리 자신 및 창작재산의 홍보에 대한 동의권 및 직접 홍보할 수 있는 권리

물론, 위의 권리들은 대부분 저절로 주어지는 어떤 것들이 아니라, 창작자와 출판사가 작품에 대한 계약 단계에서 계약서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명시함으로써 해결해야할 성격의 것들이다. 즉, 위의 권리들을 어느 정도 선까지 어떤 방식으로 보장받을 것이며, 또한 위반시에 어떠한 방식으로 보상을 할 것인지 등의 사항들은 개별적인 협상과 조율의 대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창작자가 적어도 위의 원칙들 정도는 충분히 자각하고 협상에 임할 때, 보다 건설적이고 바람직한 협상결과를 조율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맥클라우드식 온라인 만화

<만화의 이해> 이후, 맥클라우드가 컴퓨터와 온라인의 가능성에 심취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 대로다. 후속작 <만화의 미래Reinventing Comics> 발간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만화와 관련된 활동만큼이나 멀티미디어와 대중문화에 관련된 토픽으로 하는 강의 등의 활동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항상 그의 관심사의 핵심은 만화라는 본질인데, 그러한 의식의 가장 구체적인 발현이 바로 그의 온라인 만화들이다.

맥클라우드가 표방하는 온라인 만화는, 단지 인쇄를 전제하고 만든 ‘출판만화’를 스캔해서 네트워크상에 올려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만화라는 표현방식의 본질적인 측면들을 온라인이라는 공간에서 어떤 식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발현할 것인가에 대한 부던한 실험의 연속이다. 현재 그가 온라인 만화의 서술 방식으로서 고안해낸 것은 바로 ‘무한 캔버스’ 개념이다. ‘한 페이지짜리’ 만화를 그린 후, 그것을 독자는 화면이라는 창 속에서 스크롤을 통해서 훑어가며 볼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서 얼마든지 커질 수 있는 가상의 페이지 위에 칸들을 의도한 바에 따라서 배치한 후, 이것들을 순서에 따라서 ‘경로’(trail)이라고 명명한 연결선으로 묶어낸다. 페이지가 종이라는 한정된 지면공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만큼, 보다 자유로운 칸의 배치, 진행방향/방식, 여백에 관한 서사적 실험들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칸과 경로의 모양을 가지고도 여러 시도들을 하고 있다. 몇 개의 습작들을 생략하자면, 그러한 만화방식의 대표적인 창작물으로 <Zot! Online>(총 16회, Comic Book Resources 연재)과 <생각이 멈추지 않아요I Can’t Stop Thinking>(‘만화규장각’ 사이트에서 한국어판을 연재한 바 있다) 등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후자는 본작의 직접적인 계보도에 있는 ‘만화에 관한 학습만화’로서의 성격이 짙은 반면, 보다 서사적 이야기매체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전자라고 할 수 있다. <Zot! Online>은 맥클라우드의 출세작인 비주류 슈퍼히어로물인 <Zot!>의 후속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로 분류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온라인의 특성을 이용한 동시 다중 스토리 전개, 칸을 분절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서사 진행, 칸 모양을 통한 시점전환 등 다양한 시도들을 마음껏 하고 있다. 물론 모든 실험들이 성공적인 결과를 내는 것은 아니지만(심지어 무한캔버스 라는 기본 개념 자체도 아직은 완전히 검증된 도구가 아니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온라인 만화의 형식 실험을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 온라인 만화가 포털 사이트 중심으로 보편화되면서 많은 작품들이 단순한 형식의 세로 스크롤 칸 만화로 고착되어, 새로운 칸 간 연출의 묘미를 만들어내는 것을 등한시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다시 한 번 되돌아봐야할 자세이기도 하다. 게다가 아직까지도 온라인 만화에는 포털 사이트를 통한 고료 지급을 제외하면 수익성의 문제에서 성공적인 모델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계속 출판만화의 한계에만 얽매이는 것으로 끝나서는, 온라인의 진정한 가능성들을 실현시키지 못한다. 맥클라우드의 온라인 만화 역시 여러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더 기발하고 훌륭한 발상들이 탄생하기를 희망하고자 하는 것이 필자의 작은 욕심이다.

3. 한계점들

<만화의 이해>가 받아온 일방적인 찬사들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결코 완벽한 책이라는 의미가 될 수는 없다. 실제로 이 책이 놓치고 있는 부분들, 혹은 지나치게 순진하고 낙관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부분들, 혹은 잘못 알고 있는 부분들에 대한 냉정한 재평가야말로 ‘멋진 토론’을 향한 필수과정이자 첫걸음이다. 따라서 그러한 약점들 가운데 몇 가지를 본 지면에서 제시해보고자 한다. 필자의 좁은 식견보다 훨씬 다양한 접근방식에서 훨씬 다양한 논점들을 만들어내서, 보다 강력한 방식으로 만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만화를 진지하게 생각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권리이자 의무일 것이다.

만화의 존재의의라는 문제

<만화의 이해>의 미덕은 만화의 의미생성 방식을 탐구하는 과제에 있어서 기존의 창작 기술적이거나 역사적인 접근의 한계를 뛰어넘어, 기호학적 기반과 커뮤니케이션학 이론의 시각을 만화 자체를 통해서 적용해 내는 것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여러모로 대학이나 기타 고등 교육기관에서 한 학기 짜리 강좌의 교재로 사용하기에 알맞은 형식을 갖추었다; 특히 커뮤니케이션이나 미디어 관련 강좌에서 만화 및 대중문화에 관한 파트를 다루고자 할 때 적합한 주제들을 적절하게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단독으로 중심교재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부담이 가는 것이, 고전적인 단순 전달 모델 등 이미 구식이 된 이론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 책이 기존 이론들과 연구성과에 대한 비판적 평가나 소개 없이 사실상 일방향으로 주장을 펼쳐나가기 때문에, 이것은 특히 큰 약점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만화를 논하는 것 자체의 의미에 대한 규정의 취약함이다. 이것을 다루고 있는 9장에서 맥클라우드는 현대사회의 의사소통 문제를 들며, 만화의 중요성을 고전적인 ‘전달 모델’을 통해서 논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즉 의사소통의 과정을 발화자-미디어-수용자라는 일방향적인 흐름의 패턴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매체는 발화자가 의도하는 원래 의미를 최대한 반영해 내는 것이 최대의 미덕이며, 발화자의 의도가 수용자에게 100% 온전하게 전달이 되면 의사소통 역시 완전해진다는 가정을 암암리에 깔고 있다. 하지만 이미 이러한 의사소통 모델은 현대 미디어 연구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가장 가시적인 차원에서조차 같은 미디어와 같은 메시지라도 수용환경, 수용자 등 여러 변인들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다양한 수용반응이 일어났으며, 메시지는 복합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이 현재는 강조되고 있다(이 점은 뒤에서 이미지의 의미와 연관지어 더 자세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이러한 시각에서라면 만화의 미덕은 작가의 세상을 보는 시각을 영화나 연극 등의 다른 매체보다 ‘덜 방해받고’, 비교적 개인적인 차원에서 효과적인 제작이 편하기 때문일 따름이다. 따라서 만약 발화자의 의도를 더욱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으면서도 더 간단하게 혼자서 만들 수 있는 방법들이 개발되면 만화의 중요성 역시 사라져버릴 수 밖에 없다. 디지털 도구의 보급으로 인하여 개인이 영화 등의 동영상 매체를 제작하는 것이 점점 쉬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카툰화법’이라는 만화의 주요 무기만 하더라도, 플래시 등으로 대표되는 점차 제작이 용이해지고 있는 1인 제작 애니메이션 방식들과 불리한 경쟁을 하고 있다. 나아가, 만화가 지녔던 것 보다 더욱 더 강한 자아동일시와 정체성 구축을 무기로 하고 있는 ‘컴퓨터 게임’이라는 매체에 대해서는 완전히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게다가 게임 역시도 ‘카툰화법’을 그대로 흡수해서 사용할 수 있다!). 즉, 이러한 이론적 접근에는 미디어 기술의 발달과 함께 만화는 소멸할 수 밖에 없다는 위험한 가정이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맥클라우드 자신도 다음 책인 <만화의 미래Reinventing Comics>에서는 이러한 위험들을 인식한 듯, 다소 변화된 입장을 보인다. 미디어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며, 최대한 다양한 창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봐야 세상의 가장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미디어 다양성의 차원에서 만화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이는 보다 신중해진 입장이기는 하지만, 역으로 만화를 소극적인 ‘보호’의 대상으로 축소시킬 위험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만화의 이해>에서는 카툰화법, 시간틀, 칸 사이의 관계 등을 ‘만화 특유의’6) 특성으로서 제시해보고자 했으나, 보다 적극적으로 그러한 요소들이 타매체에서는 이룰 수 없는 고유한 미학적 가치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까지는 다루고 있지 못하다; 즉, 특성의 묘사에 그치고 있을 뿐, 그것을 통해서 “왜 만화가 중요한가”라는 의미 부여 부분에서는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바로 후속 연구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주어진 과제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만화의 범주

이 책을 보면서 처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중요한 키워드는 ‘연속예술'(Sequential Art)이다. 만화의 본질을 공간상에 연속적으로 배열된 이미지에서 찾고자 하는 맥클라우드의 정의는, 아이스너의 주장을 바탕으로 하되 확실히 한 단계 더 발전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정의 속에서 한칸 만화가 자연스럽게 모두 제외가 되어버린 것은 큰 약점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애초에 원제가 <Understanding Comics>인 만큼, 일반적으로 cartoon이라고 부르는 단칸만화들은 다루지 않고 다만 보다 긴 형식인 comics만을 다룬다고 말할 수도 있다. 분명히, 한국어에서는 이 두 분야, 그리고 여러 가지 더 많은 분야(심지어 영화의 하위범주인 애니메이션까지!)마저도 두루뭉술하게 포괄해버리는 ‘만화’라는 용어 자체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쓰여서, 모든 종류의 진지한 논의를 방해하는 작용을 하고 있다7).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comics와 cartoon을 두부 자르듯 나눌 수 있다거나, comics를 이야기하면서 cartoon을 배제시킬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본문 속에서 작가는 그런 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두 개의 설명을 들어준다. 첫 번째는 ‘글과 그림이 병렬되었으니’ 병렬이라는 정의에 부합할 수 있다고 하며, 만화의 시각어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만화 예술’으로 분류할 수 는 있다는 것이다(28p). 그리고 두 번째는 ‘한 칸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칸의 구실을 하고 있다’는 설명으로 단칸만화를 정의에서 배제시켜버린 것에 대한 보상을 하려고 시도한다(105p).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실생활 속에서 직관적으로 만화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이며, 단순한 시각적 표현요소를 넘어서 만화적인 연출 및 이야기 전달의 흐름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맥클라우드가 내린 정의 자체에서 이것들을 포괄할 수 있는 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단순히 ‘연속된 이미지’가 아니라, 비록 칸과 칸의 나눔이라는 가시적인 연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연속적인 속성을 이용한 메시지 전달이라는 특성을 지닌 이미지 및 이미지군(群)’ 전체를 포괄하는 정의로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실제 발표되는 새로운 작품들을 염두에 두면서 항상 더욱 새로운 시각, 더 섬세한 보완이 이루어져야 한다.

만화생산의 조건에 대한 과소평가

작가가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만화를 통해서 표현한다는 발상은 대단히 직관적이며, 따라서 매력적이다. 하지만 실제로 작가가 만화로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과정 속에서 개입되는 ‘방해요소’들은 대단히 많은 영향을 발휘하며, 만화가 독자에게 가는 과정에서도 그 이상의 변인들이 개입한다. 나아가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그 자체에도 만화라는 매체와 그것을 둘러싼 현실적인 환경이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때로는 작가의 시각이 너무나도 부차적인 것으로 떨어지는 경지까지 이를 수도 있는 것이 바로 ‘현실’속의 만화와 만화환경이다. 만화생산의 물리적 조건에 대한 과소평가는 <만화의 이해> 전반에 흐르는 이상주의적 색채를 결정하고 있다.

내용물이나 그 내용물의 수용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산업적, 사회적 측면은 비단 만화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만화는 역사적으로, ‘대중’이라는 영역에 걸쳐있는 지분이 큰 매체에 속한 만큼, 이러한 요소들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작가의 주관이 들어간 작품의 제작이 그나마 영화나 연극의 경우보다는 더 용이하다는 주장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모든 산업적인 ‘주류’의 기준이나 사회적인 시선과는 독립적으로 자가 출판을 하겠다는 가장 전위적인 작가들마저도 시스템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심지어 시스템으로부터의 자유나 독립을 목표하는 것 자체도 시스템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본문에서 일본만화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서 들었던, ‘연재 방식’의 예를 인용해보자(p.88). 여기서 맥클라우드는 칸 연결의 연출방식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일본만화가 두꺼운 잡지의 한 부분으로 실리기 때문에 한 회에서 ‘보여줘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덜하기 때문에 ‘양상간 이동’을 포함, 여러 연출방식들을 고루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두꺼운 잡지’라는 형식은 단지 연출방식의 차이 같은 기술적인 부분 이상으로, 만화의 소재, 주제, 등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한 잡지에 여러 작품들의 한 회 씩이 연재되는 이러한 방식은, 일반적으로는 단독 타이틀로 월 단위 이상의 간격을 두고 나오는 미국식의 코믹북 개념보다도 더욱 치열한 경쟁의 원리가 적용된다. 연재작들 간의 인기순위가, 심지어 ‘주간’이라는 살인적인 스케쥴까지도 도달하고 있는 발간 단위 속에서 항상 비교되고 있다; 인기가 떨어질 경우 강제로 중도하차되는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맥클라우드의 설명과는 달리, 미국의 코믹북 개념보다 오히려 더욱 한 회에 ‘보여줘야 할 것이’ 많다. 소위 “적어도 한 회에 필살기 한번, 개그 한번, 갈등과 오해 한번, 그리고 주인공의 위기에서 이번 회를 끝내기”라는 식의 공식이 암암리에 강력 권장되는 것이 일본식 개념의 주류 잡지 연재다. 게다가 주간지라는 상상할 수도 없이 빡빡한 스케쥴 속에 처한 여러 작가들의 경우는 ‘세상을 바라볼’ 여유조차 없다; 따라서 출판사 측의 담당 기자가 실질적으로 작가와 공동 창작작업을 하다시피 할 정도로 작품의 소재, 주제의 방향, 연출의 밀고 당기기, 심지어는 화풍에 까지 깊숙히 관여하고 있다. 일본 주류 만화의 ‘색’은 이렇듯 철저하게 시스템의 영향을 받아가며 만들어진 것이다(한국에서도 ‘대형’ 만화출판사들이 이러한 시스템을 거의 그대로 수용해 들여왔기 때문에 그리 낮선 풍경이 아닐 것이다). 만화 제작의 물리적인 환경조건 자체에 대한 몰이해는, 맥클라우드로 하여금 아시아권 만화에 대한 시각에 과도한 환상을 품게 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환경, 문화적 맥락이라는 지점은 더욱 미묘한 부분이다. 비록 다른 문화권에서는 서로 다른 상징 기호군이 발달할 수 있다고 본문에도 간략하게 언급을 하고는 있지만(p.139), 전반적인 기조는 아이콘화된 카툰의 세계는 정식 교육 없이도 직관적으로 의미가 수용되며, 범세계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글과의 대비를 위해서 간략화시킨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지의 의미가 글 만큼, 아니 글 이상으로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구축되며 그것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유/무형의 사회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은 기호학 연구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전제 가운데 하나다. 가벼운 예를 하나 들자면, 스피글먼의 만화 ‘쥐’에서 프랑스인이 개구리로 묘사되는 것은 영미권에서 프랑스를 조롱하고자 할 때 (프랑스어의 어감이 개구리 울음소리같이 들린다는 의미에서) 개구리라고 놀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무의미한 설정이나 혹은 전혀 다른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의미로 읽히게 된다. 또 다른 예로, 한국의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있어서 89년도 ‘드래곤볼’의 도입 이전에는 ‘남자 캐릭터가 코피를 쏟는다’는 표현이 ‘정욕’이라는 의미로 읽히지 않았으며, 일본의 만화 관습에 충분히 익숙하지 않은 세계의 많은 독자들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그렇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미지의 정치학이다. 이미지와 그것에 부여되는 의미가 본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축되는 것이라는 점을 망각하거나 경시할 경우, 위험한 스테레오타입들을 정당화시키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굳이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특히 만화라는 형식에서 그러한 스테레오 타입의 형상화가 대단히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더욱 신중해야 할 사안이다. 즉, 의미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서 일방적으로 주어지고 원래의 의도가 그 미디어 자체의 영향을 얼마나 받는다는 단선적인 공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외부환경 전체 및 독자 사이의 활발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의미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은 기호학이나 커뮤니케이션학에서 이미 널리 통용되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진지 오래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후속 연구로서 제안할 수 있는 것은 만화 작품들의 미학적 의미 생성을 사회적인 맥락과 수용자의 측면 등에서 접근해 나아가는 방식이다. 특히 비교적 단절이 심한 여러 주요 만화문화권(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한꺼번에 ‘서구’로 묶고 있지만, 미국과 유럽권의 만화문화도 큰 차이를 보인다) 간의 만화 읽기에 대한 비교연구 등을 통해서 만화의 미학에 대한 많은 흥미로운 단서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시적으로는 상징기호의 독해나 시선처리의 방향에서부터, 거시적으로는 내러티브나 이미지 스타일의 사회적 의미화 과정까지 폭넓은 연구대상들이 아직도 전인미답의 경지로 남아있다.

탈바가지 효과의 한계

앞에서 언급한 점들이 ‘근간’에 관한 것이라면, 보다 구체적인 부분에서 이 책의 의의와 한계를 인식하고 또한 넘어서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 중 한가지 예로서 본 해설편에서는 탈바가지 효과(masking effect)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원래 masking effect라는 것은 심리학에서 ‘차폐효과’라고 부르며, 어떤 특정한 부분을 가려놓는다는 의미의 ‘masking’으로 사용되어 온 개념이다. 하지만 본서에서는 그와는 사뭇 다르게, 하나의 가면을 스스로 쓴 후 가면의 안쪽과 바깥을 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으로 카툰화(化)의 정체성 이입효과를 설명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 보다 현실화된 이미지는 감정이입을 방해하며 카툰화된 이미지가 감정이입을 촉진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또한 두 차원이 한 화면 안에 같이 존재할 때 그 효과가 강력해지며, 그것을 탈바가지 효과로 보았다. 또한 실제로 그러한 지점들을 의식하고 이용하고자 하는 만화작가들도 분명히 여럿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없을까? 즉, 카툰화된 그림이 오히려 정체성 이입을 방해하고, 카툰화가 덜 된 그림이 오히려 이입의 대상이 되는 경우 말이다. 일본만화로 대표되는 주류 아시아권의 여러 만화에서 ‘클로즈업’을 사용할 때, 주인공의 얼굴 표정을 세밀하게 그리고 그 반대로 배경을 간략화시키거나 아예 생략해버리는 기법을 자주 사용한다. 이것은 맥클라우드가 이야기하는 방식의 탈바가지 효과와는 정반대의 방식을 통해서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일본의 개그만화 <멋지다 마사루>(우스타 쿄스케作)에서는 일정한 수준의 카툰화법을 유지하다가 특정한 상황에서 갑자기 거의 어린아이 낙서에 가깝도록 과감하게 카툰화(化)된 칸을 배치함으로써, 장면을 극도로 타자화하여 ‘당혹스러운 상황’을 표현, 웃음을 자아낸다.

위의 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카툰化=이입 / 사실化=타자’라는 공식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림의 카툰/사실화 정도나 ‘밀도’(필자는 이것을 ‘한 칸이나 한 페이지, 양면 단위 등 하나의 이미지 단위가 얼마나 많은 정보량을 담고있는가’라는 의미로 정의하고자 한다)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는, 극에서 비교적 항상적으로 유지되어온 카툰/사실화 정도, 혹은 ‘밀도’ 등이 순간적으로 변화할 때 타자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며, 기법에 따라서는 그 변화를 오히려 역이용해서 이입의 방향으로 돌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 본 역자의 주장이다(당연히 이 것 또한 완전하지 않은 가설이며, 더 많은 건설적인 논의들이 수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본서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와 마찬가지로, 탈바가지 효과에 대해서도 맥클라우드는 작가의 의도를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즉, 하나의 표현수단으로서 탈바가지 효과가 적극적으로 (특히 일본에서) 사용되어왔다는 것인데, 물리적 조건이라는 측면이 여기에서도 지나치게 경시되어 있다. 일본의(혹은 그 시스템을 고스란히 가져오다시피 한 한국의) 주류 만화 산업 체제 내에서는 주어진 시간적/물리적 조건 내에서 모든 화면에서 모든 요소들에 대해서 균등하게 높은 카툰/사실화 정도나 밀도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세밀한 그림’(특히 배경묘사)에 대한 수요는 점점 커지고, 이러한 만화 제작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연필 데생-(캐릭터) 펜선 – 배경 담당 의 축으로 분업화되어있는 ‘스튜디오’ 체제다. 표현법으로서의 탈바가지 효과에 대한 의도와는 종종 관계없이, 분업화된 공정의 결과로서 배경과 캐릭터의 밀도 분리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캐릭터에 있어서도 탈바가지 효과보다는 ‘미형’에 대한 추구가 보다 카툰/사실화된 캐릭터의 묘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선화를 중심으로 하는 만화 묘사법에 있어서는 잔선이나 굴곡 등이 보다 적어야 ‘매끈한’ 미형 캐릭터에 가까워지며, 반대로 이것을 사용할 경우 주름이나 과장된 골격 등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물리적 조건만으로 그러한 기법들을 설명할 수 있다거나, 혹은 탈바가지 효과라는 설명을 통해서 묘사하고자 했던 일련의 작용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의 현상의 이면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의 영향관계가 있기 마련이고, 그 중에서 만화 생산의 현실적 조건이라는 지점이 이 책에서는 일관되게 경시되어 왔다는 측면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를 고려하면서 더 설득력 있는 설명과 이론들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따름이다(이 책에서 던져주는 이 화두 및 모든 기타 화두들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4. 만화의 이해: 시사점

만화가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의 몫을 인정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다른 미디어로는 재현 불가능한, 만화만으로 표현할 수 있고 만화만으로 느낄 수 있는 미학적 요소들과 감수성의 재발굴인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의식이라는 지점에 있어서 <만화의 이해>는 훌륭한 텍스트가 될 수 있다.

만화의 이해가 만화로 되어있다는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자 축복인 동시에, 그 한계를 긋는 것이기도 하다. 미덕이라는 측면은 굳이 이 지면에서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널리 인정받는 바다. 하지만 한계라는 것은, 그만큼 이 만화에 들어가는 설명의 정보량이 같은 지면 분량의 학술서적보다 적을 수 밖에 없고, 여러 논의들이 풍부한 사례 제시나 반론에 대한 소개 및 논리화 과정 없이 대단히 축약되어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즉 가장 적합한 사례 위주로 직관적인 설명의 구조를 띄고 있게 되었다는 말인데, 특히 이 만화가 작가를 작중화자로 등장시켜서 독자를 학생으로 하는 강의의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유감스럽게도 맥클라우드는 충분히 ‘부지런하지’ 못해서, 여기에 대한 충분한 보론들을 발표해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금, 만화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다른 여러 사람들의 몫으로 돌아가고, 그 것이 바로 ‘멋진 토론’의 핵심이다.

<만화의 이해>가 던져주는 화두 가운데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바로 만화에 관한 본격적인 거시 이론을 정립해야할 필요성이다. 영화가 몽타쥬, 미장센 등의 거시이론을 통해서 영화의 독창적인 미학적 가치를 설파하여 인정을 받았듯이, 만화 역시 자체적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고유의 미학적 장치들을 이론화하고 또한 널리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만화가 우리 사회에서 합당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산업적인 성공 이상으로, 진지한 표현수단이 될 수 있다는 확고한 사회적인 인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거시이론들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지는 거시 이론들의 세분화와 지역화다. 즉 만화 일반에 대한 이론을 바탕으로, 한국의 90년대 순정만화라든지 하는 특정한 범주에 적용할 수 있는 세분화, 지역화된 구체적인 각론들을 만들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일반화가 되어서 만화가 ‘진지한 연구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만화는 지금의 편견과 고정관념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서에서 역자의 견해를 너무 많이 넣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적지 않은 실례를 범하는 행위다. 이미 지나치게 많이 주절대기는 했지만, 이후의 더 많은 이야기들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멋진 토론’ 속에서 풀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작가의 후속작 <만화의 미래>에서 한 구절 인용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어떠한 예술양식도 지난 100년간 만화처럼 작은 상자에서 살아온 적이 없습니다. 이제 그 뚜껑을 날려버립시다!!”

해설편 초판 2002.3.
해설편 개정판 2008.6.



1) 로버트 크럼의 만화들을 출간해준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2) 미국은 소위 ‘Direct Market’라고 불리는 만화 유통망과 일반적인 非만화 서적 유통망이 엄격하게 분리되어있다.

 보다 세부적인 설명이나 직접 참여는 작가의 홈페이지인 http://www.scottmccloud.com에서 할 수 있다.

4) 약 2년간의 과정 끝에, 2001년 2월 완성; 참여인원은 무려 1000명 이상!

5) 이것에 관해서는 작가의 근작 ‘만화의 미래Reinventing Comics’의 창작자 권리를 다루고 있는 장에서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

6) 사실, 카툰화법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만화 외적인 곳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7) 사실, 영어의 cartoon이라는 말도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사용되기는 마찬가지다. 카툰화 기법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넘어서, 카툰화 기법으로 되어있는 모든 그림 및 그림 속의 캐릭터들, 단칸만화, 나아가는 만화 전반 및 애니메이션까지도 포괄하는 두루뭉술함을 자랑한다. 단, comics나 graphic novel 같은 ‘출판’ 만화의 종류 개념으로서 사용될 때에는 단칸( 및 그에 준하는) 만화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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