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돌아온, 만화의 전성기 [KTX 매거진 / 1701]

!@#… 게재본은 여기로 클릭. 웹툰을 더 중점적으로 다룰 생각이긴 했는데(KTX 타고 폰 들고 보는게 무엇이겠는가), 종이 만화를 강조해달라는 의뢰를 반영.

 

또 다시 돌아온, 만화의 전성기

김낙호(만화연구가)

“감독님의 전성기는 언제입니까? 국가대표가 됐을 때? 난… 지금입니다.”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가 남긴 명대사처럼, 한국에서 만화의 전성기가 과연 언제였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역시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원작 산업이 어떻다든지, 경제 규모가 번창하고 있다든지, 창작 지망생이 몇 명이라든지 하는 양적 측면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얼마나 만화를 열심히 즐길 여건이 되어있는지, 그것이 관건이다.

한국사회에서 만화가 첫 붐을 이룬 것은 한국전쟁 시기까지 올라간다. 가난했던 시대상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출판물 증가 속에서, [만화세계] 같은 잡지, [눈물의 수평선] 같은 양장본, 도작이었던 [밀림의 왕자] 같은 좌판 만화 등 여러 방식으로 만화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붐은 지속되지 못하고, 품질보다는 다작을 유도한 독점 대본소 유통망의 대두, 극심한 검열 등의 문제로 6-70년대에 암흑기를 보냈다.

상황을 바꾼 것은, 80년대의 대중문화 부흥이었다. 다시금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진지한 성인극화, [맹꽁이서당] 같은 2세대 명랑만화, [북해의 별] 같은 장대하고 섬세한 순정만화들이 만화방과 다양한 만화잡지를 통해 선보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90년대에는 일본문화 개방 물결의 여파로 한쪽으로는 [드래곤볼] 같은 일본의 대작이 직접 들어오고, 다른 한쪽으로는 일본만화의 영향을 받으며 한층 장르적 오락성을 성장시킨 한국 작가들이 잔뜩 탄생했다. 단행본 출판도 대폭 활성화되어, 백만 부를 팔아낸 시리즈들이 여럿 등장했다.

그 모든 순간마다 사람들은 만화의 전성기를 자축했겠지만, 오늘에 비할 바가 아니다. 불과 십 수년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작품의 폭도 접촉 경로도 한정되어 있었는지를 쉽게 잊곤 하는데, 평범한 이들에게는 도서 대여점의 장편 히트작, 스포츠신문의 연재작 정도가 만화와 만나는 접촉면의 전부였다. 만화를 좀 더 본격적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점점 수그러들고 취급처도 줄어가는 만화잡지를 애도하며, 단행본을 사기 위해 만화 도매 전문점을 찾아 한창 이동하고 다녀야 했다. [아기공룡 둘리]를 들며 캐릭터 산업의 미래가 얼마나 밝은지 강조하고 다닌다고 한들, 정작 만화 자체는 도서시장 전반의 축소와 맞물리며 나름의 위기를 겪고 있었던 시기다.

하지만 한때의 불황을 극복하고 만화의 경로는 갈수록 넓어져서, 대형서점은 물론이고 아예 책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 여러 온라인 상점에서도 흔하게 취급하게 되었다. 알라딘 같은 온라인서점에서 주기적으로 만화 세트 구매 특별전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만큼, 텐바이텐 같은 디자인상품 몰에서 캐릭터성이 강한 [피너츠](찰스 슐츠 / 세미콜론) 전집을 판매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절판되어 있지만 않다면 어떤 만화책이라도 크게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유통 환경이 짜여 있고, 절판된 만화를 중고로 구하는 것도 온라인 거래의 활성화 덕분에 더 이상 폐업 예고 만화대여점을 뒤질 필요가 줄어들었다.

만화를 쌓아놓고 하루를 보내는 만화방 문화 역시, 완연히 종합 문화공간으로 진화했다. 한 잔의 룰루랄라, 망원만방 같은 곳에 가면 만화책을 빌려서 읽는 것과 함께 본격적인 카페 메뉴, 작가 사인회와 만화 토크쇼 같은 행사도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 연재 만화의 주류 경로로 완전히 정착한 웹툰 플랫폼이 있다. 네이버나 다음웹툰 같은 포털사이트부터 레진코믹스나 코미코 같은 만화 전용 서비스까지, 재기 넘치는 요즘 작가들의 신작 연재는 물론이고 고전 작품의 재발굴까지도 책상이나 손 안의 모니터로 손쉽게 즐기게 되었다. 나아가 전자책 시장의 활성화 속에서, 책으로 출간되는 만화책의 상당수를 고스란히 태블릿이나 전자종이 기기로 감상할 수 있다.

유통경로의 개선은 자연스럽게 더 다양한 종류의 출판사들이 만화 출판에 뛰어들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고, 기존 주류 만화잡지와 대형 단행본 히트작의 감소와 함께 종이만화 자체가 쇠락하리라는 섣부른 전망을 깼다. 아니 오히려, 다양성과 품질 측면에서 종이만화의 또 다른 전성기로 이끌고 있다고 해도 좋다. 애니북스 출판사가 웹툰 인기 연재작들을 좋은 종이책으로 재구성해내고, 세미콜론, 북스토리 등 여러 출판사들이 장르적 재미보다 만화예술 특유의 무게감을 지닌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인다. 밀리터리 매니아들을 겨냥하는 이미지프레임 같은 곳도 있다.

오늘날 만화가 웹에서도 책으로서도 더 많이 사랑받게 된 이유는, 나아진 여건 덕분에 실제로 더 다양한 좋은 만화가 나와 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연령대라도 각자가 재미있어할 만한 만화를 찾을 수 있다. 만화가 어린이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시대, 성인만화는 성과 폭력으로 각인되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고 없다. 오늘날 어린이들에게는 그저 공부시키는 것에 바쁜 학습만화가 아니라 [마법천자문]에서 [살아남기 시리즈]까지, 재미있는 모험만화가 유용한 공부거리도 담아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90년대에 나름대로 주류 만화의 핵심 소비층으로 떠올랐던 청소년들은, 지금은 중년의 문까지도 두드리며 자신들의 현재 인생 단계에 맞추어 만화의 취향을 고르고 있다. 와인에 대한 관심이 [신의 물방울]을 공전의 히트로 만들어주고, 자신들이 보고 자라났던 명작을 재발굴하다보니 [불의 검] 양장본 세트가 널리 팔렸다. 나아가 노년층에게도, 노년층이기에 좀 더 절절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이 충분히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 같은 작품을 보면 노년의 눈높이에서 노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느낄 수 있다.

장르 취향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만화 분야에서 늘 주류였던 판타지, 스포츠, 순정로맨스 말고도 다양한 작품들이 넘친다. 예전의 전문 만화출판사 너머 훨씬 다양한 배경의 출판사와 소규모 출판 프로젝트가 활약하는 덕분이다. 순문학을 애써 찾아 읽던 문학 소년소녀의 피가 남아있다면, [환절기] 같은 작품을 끼고 다닐 것을 권장한다. 인류 문명에 대한 거대한 통찰을 온갖 지식 조각으로 풀어내는 풍요로운 상상력을 동경하는 이들에게는, [샌드맨] 연작 같은 종합선물세트가 있다. 만화는 자고로 시각 예술이니 그림으로 감동시키기를 바라는 분들은, [그래픽노블 파리코뮌: 민중의 함성]에 담긴 장대한 공간감도 좋겠다. 자고로 좋은 작품은 동시대 사회에 대한 참여의식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도 [섬과 섬을 잇다] 같은 작품이 출판되어 나오는 오늘날보다 좋은 환경이 또 없다. 그저 동시대적 애환과 위로가 필요하다면, 올해 하반기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인 [혼자를 기르는 법]이 선보이는 독특한 자조적 유머가 제격이다. 이렇듯 관심이 있는 소재, 선호가 있는 장르가 있다면 반드시 그에 부합하는 좋은 만화 작품이 존재할 정도로 오늘날 한국의 만화 환경은 풍부하다.

이전 어느 때보다도 만화를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모두의 성향을 각자 채워주는 다양한 과거와 현재, 국내와 세계의 작품을 구할 수 있다. 그런 여건 속에서 온갖 만화를 마음껏 열심히 즐길 수 있는 바로 지금이 만화의 전성기다. 그렇기에 이 전성기를 더욱 오래 유지하는 방법 또한, 그 다양한 경로로 폭넓은 종류의 만화를 그만큼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방법 밖에 없다. 열심히 읽고 또 읽자.

번외 페이지_여전히 사랑 받는 완결 만화, 연재 중인 장수 만화

– 마음의 소리 (조석 / 위즈덤하우스): 네이버웹툰에서 십년 넘게 매주 두 편씩 연재중인, 초장기 연재 개그만화. 오랜 인기의 비결은 유머코드의 끊임없는 재발명으로, 일상툰에서 시작했던 초기의 모습과 달리 그간 온갖 다양한 말장난과 드라마, 형식 실험이 누적되었다.

– 유리가면 (스즈에 미우치 / 대원CI): 1976년에 시작했는데 아직도 연재중인 전설의 장기연재작이자 명실상부 “일본 만화 최강의 마약.” 최고의 연극이라는 ‘홍천녀’의 주연 자리를 둘러싼 배우들의 온갖 노력과 갈등이 박진감 넘치게 계속된다.

– 시사만화 장도리 (박순찬 / 비아북스): 경향신문의 장도리는 날카로운 권력비판 시각은 물론이고 특유의 경쾌한 시각적 리듬, 비유능력으로 인해 인터넷 등지에서 인기가 높다. 덕분에 정국 테마에 맞추어 [나는 99%다], [516공화국], [세월의 기억] 등 주기적으로 단행본이 나온다.

– 슬램덩크 (다케히코 이노우에 / 대원CI): 90년대 초중반 농구 붐을 불러왔다는 지난날의 성과만으로 평가할 작품이 아니다. 이 작품, 아무리 다시 읽어도 뜨겁다. 개인의 개성과 팀워크의 조화, 다양한 성장의 경로, 뛰어난 경기 진행 연출.

– 드래곤볼 (도리야마 아키라 / 서울문화사): 판타지 격투물의 기본틀을 만들어냈고 가장 잘 구현해낸, 만화적 재미를 완벽에 가깝게 구현해낸 만화. 시원시원한 전개력과 낙천적 인간관은 뒤를 이은 수많은 작품들도 도저히 흉내내지 못했다.

– 아기공룡 둘리 (김수정 / 키딕키딕): 어릴적 읽었을 때의 기억이 둘리와 도우너와 또치와 희동이의 구박덩어리 생활과 즐거운 모험이었다면, 다시 펼쳐보기를 제안한다. 부처와 같은 마음의 가장, 고길동의 득도 과정이 새로운 재미를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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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은 매우 마이너한 관계로, 여러분이 추천을 뿌리지 않으시면 딱 여러분만 읽고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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