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T&G 상상마당의 문화잡지 BRUT 3호에 들어간 한국만화 100주년 관련 글. ‘달지 않은’이라는 잡지 제목이 마음에 들어, 글 내용도 올해 여기저기 넘치는 여타 100주년 기념글들과 달리 좀 달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 이런 쪽이 아무래도 적성에 훨씬 잘 맞는다. 물론 여기 있는 것은 투고버전이고, 분량이나 지면흐름상 인트로가 선명하되 홀쭉해진(…) 최종게재본은 여기로(클릭).
한국만화 역사 100주년,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
김낙호(만화연구가)
100주년
어떤 분야의 역사에 있어서, 100주년이라는 딱 떨어지는 숫자가 주는 매력은 크다. 대대적으로 뽐내고 이벤트를 벌일 수 있을 만큼 크다. 각종 민화나 서책에 사용된 만화 문법의 시조들은 대충 선사시대로 몰아넣은 후, 현대적 신문 매체에서 선보인 첫 작품인 이도영의 풍자카툰을 한국만화의 시초로 기준을 잡는다고 할 때 한국만화의 역사는 2009년으로 100주년을 맞이했다. 덕분에 국내 만화 행사 사상 가장 규모와 완성도가 좋은 편인 한국만화 역사전이 과천 소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고, 여러 시사 잡지들이 한국만화 특집 기획기사 묶음에 지면을 할애해주었다. 만화지면을 지니고 있는 포털사이트 미디어다음에서는 만화에 관한 만화가들의 만화가 연초에 릴레이로 연재되었다. 100주년이 지니는 주의집중효과를 최대한 활용해서 출판사들과 연계된 좀 더 대대적인 프로모션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시각에서는 미진해 보이는 구석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반대로 업계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오늘의 한국 만화‘계’가 얼마나 총체적 구도나 구심력 없이 지지부진함을 반복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정도까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할 수 있다.
사실 한국만화 100주년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대단히 역사적 의의를 둘만한 것이 아니어서, 마치 대한민국 반만년 역사 운운하는 것과 비슷하다. 굳이 고조선의 역사와 신화의 경계가 흐린 시대까지 포함해서 수천 년이라고 규정하며 자존심을 세우고 있을 뿐, 현대의 한국사회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회요소들은 짧게는 수십년, 길어봤자 조선 후기 정도다. 특히 온갖 일상화된 사회적/문화적 전통들을 박정희 정권 시절에 인습으로 취급하며 적극적으로 뿌리 뽑아 단절시켜 놓고는, 껍데기 간판으로 박제하여 유구한 역사를 칭송하는 키치정신을 발휘하는 엽기적 행태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지 않던가. 만화의 경우 역시 그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주류 산업 형식은 물론 그것과 연계된 주요 작가진들이나 장르 역시 주기적으로 큰 단절을 겪으며 오늘까지 도달했다. 즉 하나의 흐름이자 전통의 축적이 곰삭은 뚝배기 같은 100년이라는 듯 포장할 것이 아니라, 내부 동력도 동력이지만 특히 사회적 압박이나 외부 영향에 의해서 여러 흐름들이 빠르게 만들어졌다가 뒤집히고 경향들이 단절되고 다시 시작하는 튀김통 같은 역동적 100년이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아마도, 바로 그런 속성이야말로 오늘날 한국만화가 지니고 있는 가장 독특한 속성이자 앞으로 진화를 위한 동력일 것이다.
튀김통 같은 한국 현대만화사
100주년이다보니 간만에 도처에서 한국만화 100년사를 요약하는 글들이 쏟아지고 있는 만큼, 연표를 그대로 반복할 이유는 없을 듯 하다(긴 버전도 괜찮다면 ‘한국예술사대계’ 연작의 만화사 글들을 추천하고, 중간 버전을 원한다면 한국만화 100주년 전시회 해설글, 짧은 것을 원한다면 문화 저널들의 한국만화 특집글들을 검색해보실 것을 추천한다. 대체로 출판사 혹은 필자들이 온라인에 공개하고 있다). 다만 (약간 긴) 한 문단 분량으로 간략하게 압축하자면 이런 식이다.
우선 한국 현대만화는 개화기 및 일제점령기 당시에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인 서구 저널리즘의 풍자만화 기법들을 따르며 탄생했다(이도영, 안석주 외). 해방정국에서 한국어 출판물 붐과 함께 만화도 짧은 황금기를 맞이했는데, 고급양장본 시장과 좌판의 저가 펄프장르 ‘떼기만화’ 시장, 시사만화잡지 시장이 같이 부흥했다. 하지만 전반적 경제사정 속에 판매시장은 위축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틈새에 58년 대본소가 태어나 다시금 장르만화의 붐을 일으킨다(땡이 시리즈, 라이파이, 도전자, 엄희자 순정만화들 등). 그러나 60년대와 함께 대본소는 독점화되고 정치적 억압은 강해져서 창작 품질 하락과 세대 단절이 일어난다. 70년대에는 스포츠신문과 어린이잡지가 성인만화와 아동 모험/명랑만화의 돌파구를 열어주었다(고우영 만화들, 꺼벙이 등). 80년대에는 대본소 독점체제의 쇠퇴와 상대적으로 느슨해진 대중문화 정책 속에서 만화는 남성적 성인극화(공포의 외인구단, 신의 아들 등), 순정만화(잡지 르네상스), 전문잡지를 통한 아동/청소년 만화(잡지 보물섬, 잡지 아이큐 점프 등), 시사만화(보통 고릴라, 한겨레 그림판, 반쪽이 시리즈 등)를 포함한 다양한 영역이 급격한 진화를 이루었다. 90년대는 그런 기반 위에 일본만화 개방과 함께 일본식 만화제작 시스템을 전면 도입하여 다시금 판이 크게 바뀌었는데, 여기에 군사독재 종료 이후의 시장 중심적 분위기가 더해지며 만화가 산업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소위 ‘단행본 100만부 클럽’이 등장했다(어쩐지…저녁, 진짜사나이, 마이러브 외). 하지만 이런 제작방식이 충분히 한국화되기 전에 찾아온 경기후퇴, 대여점에 의존한 양적 무한성장의 부작용, 이중적 검열정책, 오락매체의 격심한 경쟁구도 등이 뒤섞이면서 2000년대는 불안한 대혼란 속에 시작했다. 그리고 인터넷을 활용한 새로운 시장 개척 시도가 이어졌는데, 수년간의 부침 속에 온라인 만화방 방식보다는 결국 그냥 개인 연재물(스노우캣, 마린블루스 등) 아니면 포털사이트가 주도하는 웹 연재만화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강풀 만화 등). 그 와중에 학습만화 계통에서는 수백만부를 판매한 작품들이 나오고 (홍은영의 그리스로마 신화, 마법천자문 외),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인기를 잘 엮어서 큰 성공을 거둔 경우가 등장했다(파페포포 시리즈 외). 그 동안 다른 출판물들과 마찬가지로 만화도 종이잡지들이 갈수록 사정이 어려워져서, 그런 매체에 의존하던 장르만화가 상당부분 위축되기도 했다. 반면 대중문화 전반의 이야기성 붐 속에, 만화가 원작으로 주목받아 여러 성공사례를 남기고 산업적 가능성을 다시금 인정받고 있다. 여하튼 이런 정도의 상황 속에서, 2000년대의 첫 십년이 현재 진행형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양상이다.
큰 흐름으로 볼 때, 50년대 이래로 거의 10년 단위로 한번씩 꽤 크게 작가/작품군의 세대교체가 있어온 셈이고, 그중에는 거의 단절에 가까운 경우도 있다. 50년대의 여러 스타들은 60년대의 공장형 대본소만화 체제에서 밀려났고, 70년대에 내공을 축적하고 80년대에 만개한 여러 장르들은 일본만화의 수혈을 직접적으로 받은 90년대의 취향 앞에서 가차 없이 떨궈졌다. 심지어 90년대 종이잡지의 수많은 작가들이 00년대의 웹 중심 호흡에 새로 적응하기보다 전업을 택하기도 했다. 올드팬들이 구매력을 바탕으로 자기들이 꾸준히 좋아하는 작품성향을 지지하여 가꾸어 나가는 향유자 중심적인 다양성보다는, 당대의 산업 조건이나 주요 트렌드에 좌우되는 다분히 제작자 중심적인 격한 역동과 단절의 흐름인 셈이다. 이에 비하면 어차피 세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탄압과 폄하의 역사 따위는 그다지 돋보이는 요소도 아니다. 이런 역사의 장점이라면 항상 당대의 사회상황을 매체양식 자체에까지 충실하게 반영한 진정한 현재형 대중문화, 그것도 가장 기층적인 오락성을 나누는 것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단점은 한국만화라는 분야가 짧지 않은 만화 역사 속에서 체계적으로 기억과 유산을 축적하여 작품 내용이든 제작시스템이든 탄탄한 진화를 이루기보다, 종종 “바퀴를 재발명”하는 낭비를 벌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런 역사의 결과 한국만화는 사회의 좁은 문화적 포용력에 어울리지 않게 다양한 장르들이 상당한 완성도를 지니고 만발할 수 있었으며, 매번 새 판이 짜여 반쯤은 거품으로 붐이 일어나면서 상당한 규모의 출판 사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비슷한 경제수준의 싱가폴, 대만 등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은 물론 서유럽의 여러 국가들보다도 훨씬 자국만화의 주류화가 잘 이루어진 편이다. 반면 추억가치가 아닌 문화예술적 중요성으로 사회적 인식을 가다듬는다든지, 전반적 작가 처우나 작품 기획력 등 역사적으로 축적된 노하우가 필요한 부분은 여전히 매번 새롭게 출발지점이다. 장점도 단점도, 뚝배기 역사가 아니라 튀김통 역사를 만들어온 것에 대한 인과응보다.
지금의 한국만화, 그리고 앞으로 100년
덕분에 지금도 다양한 판이 각각 지지고 볶는 현재 한국만화의 상황을 크게 5가지 정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만화 잡지와 장르만화들이 열악한 조건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출판물 전반의 위축, 장르만화에서의 작품 기획 노하우와 마케팅 능력 미진 속에서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고자 불철주야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학습만화가 아동시장과 인문교양만화 양쪽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 소위 ‘기획만화’라고 하는 것을 아동용 학습만화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적잖게 생길 정도로 그 분야의 기획력이 특정 작품들의 성공담과 함께 크게 발전했으며, ‘십자군 이야기’에서 ‘백도씨’까지 성인들의 교양지식을 위한 만화들 역시 완성도가 좋아졌다. 셋째, 시사만화의 위축이 있다. 주요 일간지들이 전속 만평 작가가 퇴임하면 후임을 뽑지 않는 식으로 전통적 지면은 줄고 있는데, 그에 비해서 전속 이외의 다른 상업적 돌파구가 거의 부재하다시피한 상황이다보니 시사만화의 저변도 품질도 영향을 받고 있다. 넷째, 원작산업의 강조와 비체계적 마케팅 사이의 괴리다. 한국만화가 원작산업으로 각광받지만, 그렇게 받아낸 주목을 다시금 만화 자체의 히트로 피드백하는 마케팅 능력이 미진하여 현재의 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다섯째, 그리고 가장 확연한 것이 바로 웹만화의 융성이다. 작품을 다수의 독자에게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만 보자면 데뷔 경로가 한없이 낮아진 덕분에, 많은 신인 작가들과 기성 작가들이 웹에 자신들의 둥지를 틀고 있다. 물론 여기에도 명암이 있어서 그만큼 시각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완성도가 함량미달인 작품들이 범람하기도 하는데, 일부는 여차저차 인기까지 끌고 수많은 모방자들을 낳아 안타까운 흐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게다가 웹 만화에 뛰어드는 창작자들의 규모에 비해 시장의 성장은 무척 느리다는 점도 갈수록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가능성이 크다.
올해 맞이한 100주년 덕에 쏟아지는 관심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서, 한국만화의 다음 100주년이 큰 영향을 받게 될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당장 한국만화계에 내려진 숙제는 꽤 명확한 편이다. 첫째, 다시금 만화 감상의 일상화를 이뤄서 만화의 문화적 중심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는 잡지 혹은 잡지에 준하는 종합매체의 확산을 필요로 한다. 실로 문화적으로 열악한 조건에서 역발상으로 만화잡지들을 창간했던 70년대 잡지들의 케이스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둘째, 큰 히트를 만드는 것이 가능한 통합적 정보 집약 구축이 필요하다. 즉 종이와 웹을 아우르며 확실하게 인기가 있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어디서나 주목을 끄는(어느 포털이든 영화 섹션에 ‘트랜스포머’가 넘쳐나는 영화분야를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정보 및 프로모션 쌍방향 공간들 말이다. 이것은 인터넷 같은 것이 없었어도 얼마든지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사회적 반향이 큰 대형 히트를 모아낼 수 있었던 80년대 초의 상황 같은 것을 참조하면 도움이 되리라. 셋째, 콘텐츠 감상의 시장성 창출과 창작자에 대한 금전적 인센티브 확대를 추가하는 것. 이것은 한국만화의 지난 역사 전부를 다 분석해볼 필요가 넘친다. 역시, 역사는 기억하고 볼 일이다.
이런 과제들은 바로 한국만화를 만들고 향유하는 판을 종합적으로 가꾸어내는 기본이다. 만들고 향유하는 판을 가꾸면, 매체의 전환점이나 기타 사회적 환경변화의 타이밍에 여러 시행착오와 단층은 이루어질 수 있지만 결국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활력이 진화하고 성장한다. 회화가 그랬고 음악이 그랬고 문학이 그랬듯 말이다. 한국이라는 국가와 그에 기반한 문화권이 존재하는 동안 앞으로 100년이든 그 이상이든.
PS. 그냥 스트레이트하게 한국만화사가 궁금하신 분들용 몇가지 링크…
– 한국예술사대계 / 만화 분야 60, 70, 80, 90년대
– 이런저런 지면 클릭, 클릭, 클릭
– 만화세계정복 (취향 장르별 고찰)
– 한국만화 100년 전시회의 도록원고
— Copyleft 2009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갑자기 생각 난 것이 캡콜드님은 공대생이었어도 좋아하셨을 것 같아요. 주관적인 감정보다 정확한 면을 보려고 하는 점이 많이 눈에 띄니까요.
아무튼 이 글은 잘 읽었습니다.
추가: 오랜만에 댓글 쓰니까 굉장히 딱딱하고 거시키하군요-_-a
한국만화의 역사를 대충이라도 훑어보면 정말 ‘단절’이 핵심 키워드 같습니다.
물론 그런 단절을 통해 만들어진 현재의 만화들을 좋아하고 있지만, 옛 작품들의 전통이 살아남아 현대에 까지 이르렀으면 어떤 형식의 작품이 나왔을지 궁금하곤 해요.
!@#… 네이탐님/ “알고보니 공학도 맞더라” 음모론 (핫핫)
언럭키즈님/ 만화판에서 ‘장기하와 얼굴들’ 식 포지션의 팀이 나와주면 확실히 재밌겠다 싶습니다. 최근 부천-네이버에서 하는 리메이크 프로젝트들과는 달리, 어떤 스타일과 감성에 대한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