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처럼 와서 양처럼 가리라 – 『3월의 라이온』[기획회의 255호]

!@#… 주류 여성향 순정만화 장르에 뚜렷하게 특화된 유명 작가의 주류 남성향 잡지 연재작은 종종 매우 매력적인 결과물을 탄생시킨다. 그 반대의 경우는…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다. OTL

 

사자처럼 와서 양처럼 가리라 – 『3월의 라이온』

김낙호(만화연구가)

성장이라는 테마에 대한 가장 뻔한 토픽 가운데 하나라면 역시 ‘청춘’이다. 그리고 청춘이라는 토픽을 묘사하는 가장 뻔한 접근이 바로 ‘질풍노도’다. 하나의 인생관에서 다음 것으로 나아갈 것을 강요받는 전환기에, 세파에 적응하며 살기 위한 이성도 꽤 성장했으나 내면의 감정들을 완전히 통제할 만큼 그렇게 대단한 성숙함은 아직 장착하지 못한 애매한 타이밍에서 오가는 정서적 요동 말이다.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필요 이상의 허세 표명으로 나타나고 다른 이들에게는 천방지축의 반항으로 나타나지만, 결국 많은 이들에게는 그저 혼자 내면적으로 천천히 삭히며 주변인들에게도 조금씩 더 기대게 되는 점진적인 사회화 과정이다. 성장을 강요받는 계기가 격할수록 시작은 험난하기 짝이 없으나, 성공적으로 성장을 해나간다면 그 결말은 거의 항상 평온하다. 겨울이 끝나고 봄의 시작을 알리는 3월의 날씨를 일컫는 서양의 속담처럼 “사자처럼 와서 양처럼 가리라.”

그 속담에서 앞의 부분만 잘라낸 제목을 지닌 『3월의 라이온』(우미노 치카 / 학산문화사 / 2권 발매중)은 바로 그런 이야기다. 혼자 살고 있는 고교생 일본장기 프로 기사 레이는 어렸을 때 사고로 가족을 잃고, 아버지의 지인의 집에서 키워졌다. 지인은 일본장기 프로기사인데, 그의 눈에 들기 위해 시작한 장기에 재능을 발휘하며 성장했다. 그에 따라 받은 사랑의 반대급부로, 장기실력 그리고 그 결과 애정의 선호도에서도 밀려난 원래 그 집의 아이들의 시기 또한 뒤따랐다. 덕분에 자신이 일종의 뻐꾸기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며, 패배자를 탈락시키는 프로장기의 세계에 뛰어들며 더욱 재능에 대한 내면적 갈등이 있다. 줄거리는 레이와 그 주변인들, 즉 부모님을 잃었으나 맑은 심성으로 살아가며 가족적 친절을 나눠주는 아카리-히나-모모 세 자매, 여러 프로 기사들, 장기 애호가들 사이의 관계맺음을 보여주면서 아주 조금씩 그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아니 자신이 세상에 이미 받아들여졌고 세상도 그를 받아들였음을 깨우쳐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3월의 라이온』은 일본에서 한 시대의 청춘찬가로 자리매김했고 한국에서도 만화 독자들에게 상당한 히트를 기록한 『허니와 클로버』의 작가가 그려내는 신작이다. 이 작품은 청춘의 여러 불안감과 성장이라는 전작의 테마나 인간에 대한 긍정적 시선과 유머감각을 고스란히 간직하되 그 접근 방식은 살짝 반대방향이다. 적당히 평온한 일상에서 점차 여러 가지를 겪으면서 흔들리며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꽤 커다란 시련을 주고 시작한 후 그것을 서서히 극복하는 식의 성장을 이야기한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그것을 하나의 분야에 집중할 줄 알기에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불안해하는 천재를 외부에서 바라보며 촉매로 활용하던 시선은, 재능을 지니고 노력을 하지만 정말로 그것이 자신의 길인지 아직 혼란스러운 천재 자신의 내면적 시선으로 바뀌었다. 전체적 따뜻함 속에서 사이사이에 어두운 갈등을 살짝 양념치던 방식에서, 기본적으로 어두운 설정 위에 따뜻한 상황들을 넣는다. 작풍에 지대한 차이를 만들어낼 정도는 아니지만, 심지어 작품의 원래 연재지면 역시 여성향 순정만화지에서 성인 남성향으로 바뀌었다.

모든 성장물들이 그렇듯, 작품을 즐길 수 있는가 없는가의 핵심은 성장 과정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고민에 이입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사실 세속적 기준으로 따지고 보면 레이는 어릴적 불행이야 어쨌든 간에 현재는 뭐 하나 부족할 것이 없다. 일찍 데뷔한 촉망받는 프로 기사로서 인생 진로도 꽤 확실하고, 주변에 가족처럼 맞이해주는 이웃도 있고, 같은 분야에서 라이벌이자 친구 역할을 열정적으로 자임하는 또래 지인도 있다. 한마디로, 어떤 갈등을 하든 배부른 투정으로 볼 여지가 넘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의 입장에 이입해서 한꺼풀만 더 파보면, 약간 다른 관점이 생긴다. 시작부터 큰 불행을 겪고, 그 뒤 하필이면 자신의 재능과 맞아 떨어지는 환경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인정받는 만큼 타인의 고통이 되고 그것이 고스란히 자신에 대한 미움으로 돌아온다고 어릴 적에 경험으로 학습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밀어내며 행복해지는 것은 괜찮은가, 라는 고민이 기본적으로 자리잡고 있고 그 결과 가능한 한 자신만의 벽을 만들어 살기로 방향을 정한 상태다. 그런데 세상이 또 그렇지가 않아서, 정말로 가족적 친절을 배푸는 이들을 만나고 라이벌이자 친구를 자처하는 이도 만난다. 객관적으로 보면 훌륭한 현실이지만, 아직 자신이 어릴적 나름대로 확고하게 구축한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 성장기의 소년에게 있어서는 혼란스러움을 준다. 특히 이미 프로활동을 하고 있는 세계는 어떤 기구하고 인간적인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라 할지라도 재능과 노력이 뒤섞인 실력에서 밀려 패배하면 탈락시키는 곳이다. 자신이 탈락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승급하기 위해 타인을 영영 밀어내는 일이 다반사다. 그런 두 측면 사이에서, 어떤 식으로 적응해야 할 것인가. 꽤 어릴적부터 필요 이상으로 격심한 경쟁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한국의 남녀 젊은이들이라면 오히려 큰 무리 없이 이입할 만한 정서가 아닐까.

『3월의 라이온』의 만화적 표현은 뚜렷한 장단점들이 있다. 우선 그림체 측면에서 해맑은 표정을 그려내거나 기형적 깡마른 글래머가 아닌 자연스러운 매력의 여체를 그리는 솜씨가 뛰어나다. 그리고 심심하지 않게 이야기와 시각연출의 완급을 조절하는 능력도 좋다. 반면 때로는 대사에 대한 의존이 지나친 감이 있는데, 한국 90년대 말의 고연령층 순정만화들을 연상시키는 내면 독백 나레이션 폭포수가 종종 등장한다. 또한 칸 전개 역시 특히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묘사하는 순간일수록 페이지 속에 필요 이상으로 세부 요소들을 가득 채워서 시선처리가 혼란스러운 경우가 종종 있다. 작가가 주인공에게 지나치게 이입하여 발생하는 과유불급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다소 불편한 정도일 뿐, 순정만화 장르의 독법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난독증에 걸릴 정도의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사실 그보다 독자들이 이미 불편해하는 것은 기존 만화책들과 비슷한 판형과 제작형태이면서도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가격 책정이다).

여러 가지 어두운 구석으로 빠질 여지가 많은 작품이지만, 다행히도 작가는 관대하다. 그 갈등의 끝은 사람들 사이의 따뜻함을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되리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제시한다. 물론 모든 것이 모든 이들이 희망한 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심지어 탈락하는 프로기사들도 그저 불쌍한 패배자가 아니라 각자 적당히 치사한 모습과 함께 나름의 삶의 동력을 가지고 계속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목에서 생략된 격언의 나머지 절반처럼, 결국 인생의 3월은 양처럼 가고 본격적 봄이 올 것을 예고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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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3월의 라이온 1
우미노 치카 지음/시리얼(학산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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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thoughts on “사자처럼 와서 양처럼 가리라 – 『3월의 라이온』[기획회의 255호]

Comments


  1. 좋은 책인데, 양심적으로 책값이 너무 비싸다능… 번역판하고 비슷한 가격대인데, 책이 너무 얇죠. 보통 4천원~5천원대 단행본 한 권 정도의 내용이니까.

  2. !@#… 여울바람님/ 은근히 이 연재코너가, “이런 걸 읽으면 당신도 좀 난 사람” 같은 이미지를 주입해주죠(핫핫)

    Carrot님/ 옙, 도대체 왜 갑자기 그런 가격대를 책정했는지 이해불능.

  3. 사실 그보다 독자들이 이미 불편해하는 것은 기존 만화책들과 비슷한 판형과 제작형태이면서도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가격 책정이다

    orz

  4. 첨엔 몰랐는데 시리얼 이라는 일반 단행본과 차별화된 브랜드로 첫출시(…이것도 참..) 된 만화죠.
    해외시장… 특히 일본의 요즘 사정은 어떠한지 모르지만 그런 고품격화 시킨 만화책..은 가격이 비싸다는 의미… 들의 시장이 애x북스라는 출판사(그 이전에도 다른 출판사가 있었지만)가 여러 이슈가 되는 만화책들을 선보이면서 만화출판시장의 양극단화..까지는 안되어도 그것을 지향해가는 형태가 되어가는듯 하네요. 뭐.. 그에대해서는 다른 분들이 더 자세히 분석해주시겠고….
    제가 불만인건 전작은 일반단행본으로 나와 큰 인기를 끈 작가의 주목받는 신작이 … 그런 고품격화 된 시장에 (그것도 신규브랜드런칭을 알리는듯한 개시상품으로..) 나오게된 이유..야 너무 뻔하니…… 불만이네요. 알기로는 일본에서는 가격이 전작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하던데..

  5. 원작에 비해 판형이 커지고 종이질이(쓸데없을 정도로) 좋아지면서 전체적으로 훤해진건 좋은데… 근본적으로 인쇄 질도 그만큼 좋아진건 아닌데다 13배 환율 찜쪄먹는 저놈의 가격이…-_-

  6. !@#… t님, Rivian님/ ‘고품격’ 시장을 만드는 것이야 개인적으로 찬성하지만, 그쪽 분류에 적합한 작품선정과 제작퀄리티, 팬층 구성 같은 뻔한 경영과제를 등한시하면 곤란하겠죠. 대원의 미우 브랜드가 그랬듯, 이 분들 역시 ‘고급화’에 대한 이해가 뭔가 좀 피상적이라는 느낌이 왔습니다.